|
역사란 관점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할 수 있어서 종종 위험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어제 일어난 일도 보도자료나 기록을 보면 전달자나 전달 매체에 따라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이는 읽는 자나 듣는 자들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불분명해지며 옆사람에게 전해주는 혹은 전해듣는 일에도 차이를 만들어내는게 현실이다. 집안에서 일어난 일도 앞뒤 정황과 상황추적을 하다보면 사실이 차츰 밝혀지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한 왕조의 역사가 쉼없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오류를 범하는 것을 보면 이는 사실에 입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로 만들고 싶지 않은 기득권 지배세력의 가면을 뒤집어 쓴 허위와 날조, 사실이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라는 변명과 핑계를 일삼는 순한 양의 얼굴과 악어의 눈물을 수시로 흘리며 입장을 바꿔가는 세력의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 안에는 왜곡과 은폐가 가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그의 말년에 쓴 <한중록>은 궁중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름다운 문체와 궁중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 내용을 학창시절때 분명하게 배웠다. 국어시간과 국사시간에 걸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정신병을 앓아 미쳐 날뛰는 자아를 다스리지 못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애사를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눈물로 일관하며 쓴 가슴 아픈 기록이라는 것을...그런데 말이다. 이게 다 속이 다른 이야기라는 걸 차츰 알게 되었다. 학생들이 국사라는 과목을 어찌 대해야 할 지 무척 걱정이 된다. 사실이란 있었던 일이고 진실이란 그 사실속에 함축된 확실한 이유와 동기이다. 얼마 전 방송 퀴즈 프로그램을 시청했는데 고등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맞춘 학생은 다음 퀴즈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들의 이름을 쓰라는 질문이었는데 각각의 답안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나의 학창시절을 뒤돌아보면 그 때만 해도 혼동할 수 있는 전쟁이어서 장군들의 이름을 외우느라 힘겨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지금의 학생들도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이 부분에서 누구의 이름을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한 시대 일어난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전쟁의 도화선이 될 만한 상황이 있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상황도 있다. 그래서 역사의 한 사건을 말할 때 이름만 외워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다. 그 이름도 혼동하고 심지어는 말도 안되는 인물의 이름까지 언급되는 걸 보면 주입식이란 철저히 사실과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 잘못된 교육이라는 한계를 또 한번 깨달게 한다.
바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도 그렇게 외워서 전체를 가리고 감성적인 부분만을 자극하여 이름과 제목만 외워서 시험에만 충실한 암기학습을 했다. 피눈물나는 여인의 한맺힌 눈물만 겉핥기로 배운 셈인데 진실은 피비린내 나는 전후 정치상황과 얽히고 설킨 궁중의 비화속에 덮혀 있고 그 중심에 홍씨 가문의 지킴이 혜경궁이 있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장수를 누렸다. 한가로운 날의 기록이라는 이 책의 진실을 이 덕일 님의 역사서로 만나보기를 바란다. 비슷한 문체와 비슷한 예문들이 이전의 그의 저서에도 많이 등장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학습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통 역사물을 찾아보고 관련 필름을 즐겨보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책으로 만지지 못하는 부분들을 관련자료로나마 만져보고 싶어서이다. 역사교육은 어느 순간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고 단계적인 과정을 밟아 하나하나 쌓아가는 학습이다. 의자에 앉아 책으로 공부하는 것도 일부분 중요하지만 숲은 안보이고 나무 한그루 기르는데만 신경을 쓰게 하는 교육은 다소 의지를 보이며 고쳐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한다. 박물관견학이나 역사속의 장소들을 방문하는 일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단계가 높아가면서 원서에 입각한 제대로 평가된 학습서들을 읽고 토론하고 글로 정리해보면 좋겠다. 듣자하니 국사과목이 필수가 아니라고 한다. 과학적인 우리의 글자인 한글의 날이 평일과 다를바 없음에 한탄을 금치 못하는 일인으로 국사까지 선택이라니 좌절감만 앞선다. 이를 어쩌면 좋을꼬...
|
|
조선의 왕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왕이 광해군이다. 서인들이 일으킨 명분없는 정권찬탈을 위한 반정이 조선중기이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에 가정을하고 머릿속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면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가 생각난다. 두세자 모두 서인들과, 그들의 택군으로 임금이된 아버지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위해 죽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주인인 세상에서 신하들이 택군을하고, 자신들의 정권유지를위해 세자라도 제거하는 그들의 당파적 이기심이 역사의 가정을 생각나게 한다. 더군다나 세자의 자리에서 왕이 되지못한 까닭일까? 그들은 너무나도 영민했고, 또 역대 어느왕보다도 조선중기를 부흥시킬 자질을 가지고있었기에 더욱그렇다. 저자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빈약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영조실록과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의 내용이 너무 달라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파헤쳐보기 위해서 많은 사료를 조사하였다고 한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왜곡이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가 삭제되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나경언의 고변서까지 불살라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구심을 가졌던것 같다. 저자가 쓴 이 책 [사도세자의 고백]이 역사적 진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관점에서도 역사를 바라볼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다시 한번 조선중기의 당쟁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또한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은 [흡혈록]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 어린 기록이라는 뜻에서다. 그러나 [한중록]을 쓸 때의 홍씨는 남편이 죽을 당시인 20대 청상과부가 아니라, 영조, 정조, 순종 세 임금의 치세 6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고 한다. 처음 제목을 한중록(閑中錄)이라 했는데, 이는 바로‘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철저하게 자신의 집안의 뜻에 따랐던 홍씨이었기에,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 이었기에, 그만큼 홍씨의 [한중록]에 나와있는 내용은 신빙성이 떨어질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어떠했길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수 밖에 없었을까? 영조는 두가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에 관한 것 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종 독살설이다. 경종 당시 집권하고 있던 남인에 의해 견제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연잉궁은 정권을 재탈환하려는 노론의 이해와 맞아떨어져 경종의 사후 왕위에 올랐고, 이는 영조가 탕평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성적으로 노론가의 당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반해 총명한 사도세자는 자신의 세계관을 갖게 되면서 당파에 대한 시각을 명확히 하자, 노론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영조는 그러한 세자가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자신의 과거를 건드린다고 보기 시작했다. 또 세자는 문무를 겸비하였던 것도 영조와의 갈등요인이 되었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영조와 당시의 사대부들은 문을 숭상하고 무는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무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세자가 두려울수 밖에 없었다. 나라야 어떻게 되던지, 자신들의 일족, 아니 노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할 수 있는 짓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왕권사회에서 일어날수 없는 택군(澤君)이라 할지라도.. 세자가 죽기 2년전인 영조36년, 세자는 몸에난 종기치료차, 온천욕을 하기위하여 온양에있는 온궁으로간다. 그곳에서 보여준 세자의 총명함과 애민(愛民)은 사대부는 물론 일반백성의 칭송을 받기에이르자, 영조는 세자를 정적으로 보기에 이른다. 마치 자신이 세자시절 경종의 죽음을 기다렸듯이 말이다. 노론의 세자에 대한 모함이 본격화 되면서, 사도세자는 위기감을 느끼고 관서행을 결행하고, 때를 기다리던 노론은 나경언의 고변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있던 8일 동안,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만이 아비를 살려달라고 영조에게 빌었을 뿐,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도, 장인인 홍봉한도, 그리고 노론일색인 조정의 그 어는 누구도 세자의 안위를 위해 말을 하지 않는다. 권력이란 무엇일까? 부자지간에도, 부부지간에도 결코 나누어 가질수 없는 그것을 보면서 현대의 정치가들이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를 알 것도 같다. 그리고 인조반정이라는 하나의 잘못된 사변이, 조선중기 이후 조선사회를 끝없는 당쟁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것을 보면서 정통성이라는 것을 왜 그토록 중요시하는지를 알 것도 같다. 책의 내용을 전부 다 공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그 속에서 교훈을 찾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
|
이 책은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한 이유를 밝히려는 시도에서 쓰여진 책이다. 조선왕조 5백년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혜경궁홍씨가 <한중록>에서 밝혔듯이 이상 성격자인 영조와 정신병을 앓은 세자와의 충돌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이 책은 승자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약자인 사도세자가 억울함을 고백하는 그런 입장에서 쓰여졌다.
1.영조는 어떤 사람이였나? 영조는 눈물과 인정이 많은 감성적 임금이였다. 재위중 수차례의 선위와 대리청정 파동을 통해 세자와 신하들의 충성심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리드하였다. 그에겐 두 가지 컴플렉스가 있었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과 왕위계승에 있어서의 정통성 논란 문제이다. 이복형이였던 경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그에 대해 세상은 싸늘한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서부터 노론세력과 결탁해 임금을 바꾼 '택군(擇君)'의 주인공이였다는 주장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이 두가지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영조의 역린(逆鱗)이였다. 재위시 현재의 권력으로 컴플렉스 과거를 바꾸려는 영조의 무리수가 곳곳에서 보인다.
2.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관계는 어떠했는가? 대부분 기간동안 부자간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세자의 영민함에 영조는 만족했으며 자주 신하들 앞에서 이를 자랑하곤 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나오는 내용과는 많이 다른 부분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영조는 감정기복이 크고 자주 사랑과 충성을 확인받아야 하는 사람이였던 반면, 세자는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였다고 한다. 서로 오해가 발생할 경우 이를 풀어가는 데에는 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느껴진다.
3.부자간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언제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세자가 습창(종기)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온천으로 행궁을 다녀온 이후라고 되어 있다. 그 이후 영조는 세자와의 상봉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세자의 '비행'이 시작된다. 세자는 이때 왕손의 어미를 죽이고 여승을 궁에 들였으며, 몰래 관서유람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자간 관계변화의 진짜 이유는 온양행궁시 세자에게 쏠린 백성들의 찬사 때문이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영조는 자신이 왕세제 시절 경종으로부터 왕권을 빼앗으려고 했던 그 마음으로 세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세자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욕심없음과 복종의 마음을 보이기 위해 의도적인 비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4.영조와 사도세자간 정치적 차이는 존재했는가? 숙종조의 환국정치는 영조의 치세하에 탕평책으로 바뀐다. 그러나 각 당파를 골고루 기용하고자 한 영조의 의욕도 나주벽서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꺾이게 된다. 동 사건은 소론세력들이 영조의 왕위계승 정당성과 재위기간중 업적을 전면부인한 '반역'이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조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그 이후 조정은 노론세력 일색으로 변하고 소론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계속된다. 반면 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같은 특별한 역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노론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영조와 달리 세자는 진정한 탕평책을 펼 수 있는 여건에 있었으며 오히려 소론의 입장을 옹호했다. 이것이 영조와 노론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시발점이 된다.
5.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인가? 부자간의 관계가 사실상의 부당(父黨)과 자당(子黨)간의 정치적 양상을 띠면서 인간적 관계는 끝이 나게 된다. 노론과 영조의 소론탄압이 진행되면서 세자주위의 인물들도 하나둘씩 사라직 된다.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할 시절에는 세손(정조)를 제외하고 세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어진다. 자기를 낳아준 영빈이씨, 아내인 혜경국홍씨, 장인인 홍봉한 모두 노론의 일원으로 세자를 버렸다.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정치적 이해관계 대립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자신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하는 자식을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 생존이 걸린 당파의 이해가 결탁한다. 그 당시로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또한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정말 이것이 진짜 모습이였을까 하는 의구심도 동시에 일어난다. 정치적 판단만이였다면 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권력을 이양했을까? 어떻게 생모와 아내, 장인 등 모든 주변사람들이 세자를 배척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혹은 많이 생기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다는 측면에 의의를 두고 싶다. |
|
‘자식의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절로 배가 부르다.’ 는 말이 있다. 즉, 자식 하나 잘되기를 소원하며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한국의 부모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인 영조와 친 어머니, 그리고 부인을 비롯한 외척들이다. 자식에게도 물려주지 못하는 그 권력욕 때문이다. 대체 그놈의 권력이 뭐 길래........ 사도세자가 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죽어갈 때 누구도 도와주는 이 없고 고립무원으로 죽어가는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본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겪고 죽어간 사도세자, 또 그렇게 죽어가는 아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열 살의 세손(정조)... 안타까운 그들의 이야기가 소설도 아닌 이 나라의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 슬프다. 그것도 어떻게 뒤주에 가둘 생각을 다 했단 말인가? 이 책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책인 한중록에서의 피눈물의 기록을 부정하고, 영조실록과의 비교를 통해 혜경궁 자신의 문중에 대한 변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역시도 작가의 추측이 어느 정도는 가미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한중록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은 분명하여 보인다. 이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변명이 될 수도 있겠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그를 비추어 현재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가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럴진대 당쟁으로 인한 과거의 비극이 현재의 거울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다. |
|
「너희 마저 나가 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TV라는 매체는 그것이 가진 힘으로 수 많은 것들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심지어 자의든 타의든 역사왜곡까지 서슴치 않는다. 다섯 번이나 리메이크됐었던 '장희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장희빈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숙종을 인현왕후와 간악한 희빈 장씨 사이에서 휘둘리는 색남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니면 여자 때문에 당을 갈아치우고 수 많은 신하들을 사지로 내몰은 정치에 무관심한 비합리적인 인물이거나 그냥 역대 왕 중의 한 명이였던 무색무취의 군왕쯤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숙종은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막강한 힘을 가진 제왕이였다. 숙종의 치세동안 오랑캐에게 빼앗겼던 이북의 많은 땅을 수복했고 농업, 상업이 고루 발전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일은 여자에 대한 단순한 변덕때문이 아니라 이 두 여인들을 빌미로 수 차례 환국을 일으켜 남인과 서인간의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였다.
숙종시대엔 탕평이란 것이 없었다. 남인이 권력을 잡으면 야당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정계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서인이 집권하면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즉 숙종은 당파간에 권력을 배분시키지 않고 하나의 집권당만을 지원했으며 그들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따르지 않거나 지나치게 권력이 비대해져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환국을 일으켜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왔다. 당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왕이 뜻대로 집권당을 갈아치우고 신하들을 떡 주무르듯이 했다는 것은 숙종이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숙종 말에 신하들이 감히 택군을 했었고 조선후기 보다 당파싸움이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숙종 말고도 흔히들 잘못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한중록의 불쌍한 여인 혜경궁 홍씨와 그녀의 미치광이 남편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대한 내용들은 사실과 다른 거짓이라 반박하면서 이 책은 시작한다. 이 책을 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도세자는 한중록에 나온 것과는 달리 정신병자가 아니였고 혜경궁 홍씨는 그녀 자신이 한중록을 통해 강변하는 것 처럼 피해자가 아니였다. 한중록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도되었다. 사실 당쟁의 최대 피해자이자 조선왕조 500년사 최대 비극의 주인공은 사도세자이고 혜경궁을 비롯한 풍산 홍씨 가문은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가해자였다. 이덕일씨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리정연하게 상기한 주장들을 증명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으며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에 죽은 후 어렵사리 다시 얻은 후사이기에 영조를 비롯한 법적인 어머니 정성왕후 서씨로부터도 사랑을 독차지했다. 문에도 능했지만 무인기질 역시 뛰어나 신하들은 그를 효종과 비교하며 장차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라 칭송하기 바빴다. 그러던 것이 세자가 나주 벽서 사건 이후로 소론에 대한 지지입장을 대외적으로 표명하면서 노론과 갈등이 생기고 노론의 적으로 간주되어 자당파가 아닌 세자를 끌어내리려는 노론의 집요한 공격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세자는 관서행으로 발생한 위기를 무사히 넘겼나 싶더니 노론 벽파가 계획한 나경언의 고변 사건을 기화로 결국 임오화변이 일어나고야 만다. 사도세자 비극의 싹은 숙종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직접적인 원인제공은 온갖 간계로 노령인 영조의 판단력을 흐린 노론 벽파와 홍가를 비롯한 척신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종 결정권자인 영조에게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느꼈지만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같다. 경종 독살설과 무수리 출신 어머니라는 컴플렉스를 죽을 때까지 안고 살지만 그걸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항상 주위 사람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영조는 조선시대 역대 어느 왕들 보다 눈물이 많고 속 마음의 변화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적인 사람이였는데 선조나 인조처럼 의심병도 있었던 거 같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 신권을 잡으려 하기 보다는 툭하면 벌이는 양위소동과 대성통곡으로 뜻하는 바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다소 군주답지 못한 면모도 많았다.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머물렀었고 탕평책을 실시하는 등 훌륭한 치적을 많이 보여줬지만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친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죽인 비인도적인 짓을 저지름으로써 그의 치세에 크나 큰 상처를 남겼다.
권력은 형제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경종의 죽음으로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영조는 결국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이유로 친아들을 북망산으로 보냈다. 노론 벽파와 척신들의 이간질 그리고 영조의 의심병 때문에 발생한 이 비극은 사도세자를 사후에 정신병자 혹은 궐내에 무기를 모아 아버지의 왕권을 찬탈하려 한 반역자로 만들었다. 억울하게 죽은 것도 한 맺힐 일이건만 광인 내지 역모의 누명까지 뒤집어 쓴 사도세자.. 그의 아들인 정조가 평생 울화병에 시달려 화기를 다스리는 탕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얼핏 보면 역사소설로 보이겠지만 소설책이 아니라 엄연히 인문 역사서다. 간혹 대사재연 부분에서 어떤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인지 불명확 할 때가 있긴 하지만 크게 진위여부가 문제되는 부분은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 서평이 너무 좋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마련인데 사도세자의 고백은 95% 정도 만족스러웠다. 경종 시절부터 정조 사후까지 광범위하게 다뤄 사도세자 전후의 역사흐름까지 쉽게 파악이 됐고 무엇보다 책의 서술이 너무도 친절해서 전공자가 아니여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5% 아쉬웠던 점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당시 세손이였던 정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십여년을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이 사도세자를 타이틀로 내걸고 있는 만큼 굳이 꼭 필요한 부분은 아니긴 하나 정조대왕을 좋아하는 나로썬 좀 아쉬웠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정신병자가 아닌 성군의 자질이 엿보이던 영민한 세자로 바라보는 시각은 기존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난 이덕일씨의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약간 비스듬한 시선이 좋다. 역사의 승자편에 서 있는 교과서적인 내용의 답습보다는 역사의 패자 편에 서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새롭게 역사를 재조명 하는 것이야 말로 진실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
|
대상 도서 : 이덕일,『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7년. (새로운 판)
역사는 사람을, 사람은 역사를 만든다.
역사는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은 역사를 만든다. 사람과 그 사람이 만드는 역사. 역사는 사람이 있어야 빛을 발하며, 그 빛 속에서 사람은 그 빛의 따스함을 맛본다. 우리가 역사를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둘을 균형과 조화라는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아니 이 둘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비단 역사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새가 한 날개로만 날 수 없는 것은 틀림없지만, 새는 날개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몸통과 머리, 다리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정확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흔히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서 의외로 상식에서 벗어나 바라볼 때가 적지 않다. 이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매우 큰 장애가 된다.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그 역사의 물줄기가 쉽게 바뀐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의 저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그렇게 허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식민주의사관에 사로잡혀, 그리고 해방 이후 위정자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해왔다.
우리는 흔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사대주의와 당쟁 때문에 망하고 일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조선이 중국에 끊임없이 굽신거렸다는 것은 또 다른 이름의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당쟁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었으며, 다른 나라나 왕조의 사례를 볼 때 오히려 조선은 그 강도가 약했다. 오히려 의견이 다른데 토론하고 다투는 것이 없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지 않을까.
영조와 정조가 실시한 탕평 정책이라는 것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고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탕평 정책이라는 것이 여러 당파의 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국정 운영의 균형을 꾀하고 왕권과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정책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붕당 정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탕평 정책이라는 것은 결국 붕당 정치를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붕당 정치의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다만 영조와 정조는 그 과정에서 왕을 요순과 같은 성인의 위치로 끌어올려 왕권을 강화, 안정시키고 국정 운영의 중심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외척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그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왕이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면 몰라도, 왕이 허약하면 외척에 의한 권력 장악이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조의 죽은지 5년 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고 노론 벽파가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의해 정계에서 쫓겨난 이후에 나타났다. 정조는 순조의 사위였던 김조순에게 순조를 부탁하면서 그 자신 스스로 세도정치의 단초를 열어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정조의 죽음이라든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시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기록의 철저한 분석과 엄격한 사료 비판은 두말할 나위 없는 기본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우리는 이덕일씨를 넘어서서 냉정하게 우리의 조선 후기를 바라봐야 한다.
역사적 진실을 도외시한 꿈같은 이야기
이덕일씨는 최근 대중 역사서 바람의 중심에 있다. 특히 드라마「이산」의 방영으로 그의 저술이 또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출판된지 어느덧 10년 된『사도세자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읽혀져 이 시대를 새롭게 바라보는 데, 또한 우리 역사를 대중화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유의할 것이 있다. 그가 한 역할은 분명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일지 모르나 그것은 역할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견해라는 것이 타당하고 의미있는 것이 있는 반면, 역사적 진실을 완전히 도외시한 꿈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사도세자 및 정조의 죽음을 연구하면서 여러 충격적인 해석을 내렸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혜경궁 홍씨에 대한 견해, 정조 독살설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속에서의 혜경궁 홍씨, 영조, 홍봉한 등 주변 인물들 및 그 시대의 정치, 역사적 상황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사료를 엄정하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점은 물론이고 역사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구수한 입담까지 갖춰 사도세자의 죽음을 치밀하게 추적해 들어갔으며, 그 결과 이 책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그 강한 흡입력은 수많은 독자를 끌어들였고 나 또한 그 박진감 넘치는 문체에 밤새 흥미를 가지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든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에서 지극히 이중적인(다중적인)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드라마「이산」의 경우 극적 재미에 대한 칭찬을 던지는 한편으로 역사 왜곡이라는 시각에서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드라마라고 혹평했었다. 물론 그 이후「이산」은 보지 않지만. 그런데 그런 이중적인 나를 이덕일씨의 책에서도 똑같이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의 박진감과 흥미, 명쾌한 논리에 감탄하면서도 “이렇게 역사적 진실을 마구 왜곡하고 상상으로 가득찬 의견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함과 분노 말이다. 나는 그 때문에 2년 전 서평을 쓰면서 혹평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시 든 이 순간은 오히려 그런 답답함과 분노가 증폭되었다. 공부가 조금씩 늘면서 그 오류가 더 크게, 더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본도 모르는 사료 읽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게 사료를 엄정하고 날카롭게 바라보는 사람이 사료 읽기의 ‘가, 나, 다’, ‘A, B, C’도 모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혜경궁 홍씨가 쓴『한중록』과『영조실록』의 다른 점에 꽤 충격을 받았고,『한중록』을 주로 거짓의 기록으로,『영조실록』을 주로 진실의 기록으로 바라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설령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이덕일씨에 대한 비판을 날릴 수밖에 없다. 이런 양면적인 시각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영조실록』과『한중록』은 모두 큰 장점과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영조실록』은 관찬이라는 장점과 함께 2차 사료이며,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한계가 있다.『한중록』은 생생한 증언이지만 개인의 기록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 점이 이 책에서는 충분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세자의 죽음은 이 두 자료에 의존해서는 곤란하다.『승정원일기』,『일성록』,『의궤』,『비변사등록』,『왕세자일기』및 이들이 남긴 어필, 어제 등 모든 자료를 충실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는 이런 자료들이 무수하게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역사는 이미 이런 연구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덕일씨의 견해는 오히려 지금의 역사 연구 흐름에서 퇴보했다고 보일 정도이다.
무수한 의문, 그러나 명쾌함이 없는 풀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노회한 정객이라는 혜경궁 홍씨, 그의 아버지인 홍봉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영조가 처했던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사도세자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춰 바라본다는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죄인의 아내’가 되었다. 당연히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되었다. 영조는 당시 나이가 만 70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사도세자를 대신할 만한 왕세자는 없었다. 나경언의 고변사건에서 모종의 결심을 했다고 하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나경언이 동궁을 모함하고 해괴한 흉언을 일삼았다고 신하들이 주청하여 영조가 처형해놓고 그것을 빌미삼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정조는 (이덕일씨의 견해대로라면 정조의 최대 정적이었을지도 모를) 혜경궁 홍씨에 대해 극진한 효도를 다했음은 물론 1795년에는 천 년 만의 경사라 일컬어지는 회갑연을 위해 화성 행차까지 감행하였다. 왜 그랬을까?
혜경궁 홍씨는 화성 행차 이후『한중록』을 쓰기 시작하였지만, 그 이후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고 벽파에 의해 정권을 잡은 5년 후, 곧 죽기 10년 전에서야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상 폭로 성격의 한맺힌 글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은 이 말고도 이 시대의 상황에 대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을 단 하나도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고 있다. 그저 사도세자의 죽음에 모든 초점을 맞출 뿐이다.
물론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신병으로만 몰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견해임은 이미 공론이다. 그러나 그가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희생이 되었다 해도 그 때문에 다른 인물들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너무 뻔뻔한 처사가 아닌가?
이덕일을 넘어서
이덕일씨는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공감갈 수 있는 견해도 물론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의 큰 가치는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큰 획을 그은 것만으로도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닌 것을 아니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30만이, 300만이 이덕일씨의 견해를 지지한다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유홍준씨는『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써서 우리 인문서의 한, 중요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획일 뿐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곤란하다. 이덕일씨의 견해는 하나의 견해로서, 이 시대의 역사 이해에 대한 하나의 자극으로서는 큰 역할을 했을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잘못된 견해에 매몰되지 말고 진지하고 냉철하게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 * *
[참 고 문 헌]
다시 서평을 쓰면서 꼼꼼하게 읽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덕일씨의 견해의 잘못된 점을 제시하는 사료나 논문, 저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역사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이 많은 것들은 바로잡아줄 것이다. 수도 없이 드러나는 그의 잘못된 견해를 서평이라는, 짧으면서도 형식에 어긋난다 할 수 있는 이 글에 모두 풀어 일일이 반박하느니 학자들의 치밀하고 엄정한 견해들을 전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만 그 가운데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일부만, 이 책을 대하면서 반드시 같이 접해야 할 몇 개의 문헌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유봉학,『한국문화와 역사의식』, 신구문화사, 2005. 2. 유봉학,『정조대왕의 꿈』, 신구문화사, 2001.
정조 독살설과 혜경궁 홍씨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고 타당한 견해가 이 속에 담겨 있다. 연암 일파의 북학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특히 화성 연구와 정조대왕 연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두 책은 이덕일씨의 견해가 얼마나 빈약한 논리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꼬집어줄 것이다.
3. 정옥자,『조선 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3.
정옥자 선생은 우리나라 정조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중화주의가 담고 있는 뜻, 조선 후기 중인문화 연구에도 큰 획을 그었다. 조선 후기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또 정조대왕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큰 방향타 역할을 할 것이다.
4.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3. 5. 한영우,「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민족문화』제23집, 민족문화추진회, 2000.
한영우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시대 연구의 권위자이다. 영, 정조의 정책이라든지 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가 담고 있는 뜻을 정확히 이해하는 속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6. 오주석,『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솔, 2003. 7. 한국생활사박물관편찬위원회,『한국생활사박물관』2, 사계절, 2004.
조선 후기 문화가 지닌 역동성, 다양성을 그림이라는 소재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푼 책이다. 학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대중서인, 전형적인 책이다. 조선 후기 문화의 올바른 이해가 없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올바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8. 이성무,「조선왕조실록」,『한국의 고전을 찾아서』4, 휴머니스트, 2006. 9. 신병주,『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랜덤하우스 중앙, 2003. 10. 신병주·노대환,『고전소설 속 역사읽기』(개정판), 돌베개, 2005.
이덕일씨의 견해가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실록과『한중록』의 사료로서의 가치와 한계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기본이다. 이 책과 글들은 그 길잡이가 되어준다.
11. 이이화,『한국사이야기』15 (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2002. 12. 박현모,『세종의 수성 리더십』, 삼성경제연구소, 2005.
정조 독살설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맞물려 피해갈 수 없는 키워드이다. 앞서 유봉학 선생의 책과 더불어 이 두 책 또한 정조 독살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13. 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영, 정조 시대 정치와 역사, 그 속의 사람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박광용 선생의 명저이다. 저자는 탕평 박사로도 정평이 나 있다.
14.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이덕일씨의 견해는 사료를 찾아보면 금세 그 허점이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이제는 그 누구도 다 접근해볼 수 있다.
(도서 이미지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index.laf)
|
|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은 정조가 왕위를 계승받던 날, 모든 신하를 보고 한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도세자를 죽이게 했던 노론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이 어찌나 애절하고 통쾌하게 들리던지 역사책을 읽으면서도 가슴이 아려오는게, 지어낸 소설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사도세자'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알고 있는 지식이라곤, 그가 매우 망나니였다는 것과, 영조의 뜻에 전혀 부합되지 못한 자식이었다는 점, 또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그 기록을 남겼다는 것 뿐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자기 자식이 밉다고 자기 자식을 죽이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자신의 왕위를 이어야할 자식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뒤주속에 가둬 죽였다는 건 그만큼 사도세자가 망나니였기 때문이라고, 들어왔었고 당연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난 그 동안, 그것이 어쩌면 조금은 왜곡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했었을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처럼 사도세자의 죽음을 명확히 표현하는 말은 없다. 그 승자는 누구일까? 바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자고 한 홍봉한이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사도세자의 장인이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그 승자의 기록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혜경궁 홍씨'이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사도세자 부인이 사도세자가 죽어서 평생 빈으로 생을 끝내는데 어떻게 승자이냐고?
한.중.록
그 뜻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다. 자기 남편의 죽음을 기록한 이 책의 제목이 한중록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 책의 수상함을 보여준다. 그녀가 이 책을 쓴 시기는 사도세자가 바로 죽고 나서가 아니다. 죽고 한참후에 정조가 왕이 되고 나서, 사도세자의 복수를 꿈꾸던 정조가 자신의 홍씨 집안에 칼날을 들이대던 그 시기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한을 미처 다 풀지 못한것은, 거대한 노론의 조직도 한몫했지만, 어머니 헤경궁 홍씨도 큰 몫을 했다. 더구나 이렇게 글까지 남겨가며 자신의 집안을 옹호하고 남편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는데, 그 절박함은 아마도 정조까지도 죽였을 수 있으리라 감히 생각해 본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노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영조는, 평생 어머니가 무수리라는 컴플렉스와, 경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단순히 업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실은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안타까운 현실이 된다.
단순히 망나니 정신병자 사도세자를 지극히 이성적인 아버지가 죽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책에는 우리가 꼭 한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할 안타까운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이렇다.
'240년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혹자는 편협하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써 내려갔다고도 하나,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감히 판단해 본다면 기록되지 못한 패자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
|
언제인지 잘 기억인 안나지만 MBC 에서 조선왕조500년 사극을 시리즈로 한 기억이 납니다. . 예를 들면 세종시대 뿌리깊은나무.. 선조.. 임진왜란.. 그리고 이책과 관련있는 한중록 등등.. 그때 드라마에 나오는 사도세자는 그저 미치광이 일뿐이고, 그 미치광이를 왕위에 올려서는 안되는 영조는 결단을 내려 뒤주속에 넣어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래서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란 말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역사학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중략)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날 윤숙이 홍봉한 등 대신들에게 '왜 사도세자를 구하지 않는냐?'고 울부짖었다는 이유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좌의정 홍봉한이 한중록의 저자인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라는 점에서 세자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승자의 기록이 되었다.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조시대에 감히 택군 을 하는 노론들이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도세자를 미친이의 모습으로 그리고, 부인인 혜경궁 홍씨 또한 자신의 친정이 사도세자와 아무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인 홍봉한은 사위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라는 변명만 늘어 놓습니다. . 그리고 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사후 즉시 쓴 책이 아니라 순조시대에 쓴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고,자신의 손자 순자에게 자신의 친정에 대해 명예회복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이라는 영조실록[정도시대에도 권력의 핵심은 노론이고, 이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정조는 기용한다.]에도 사도세자의 영민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왕조경영 철학은 분명합니다. 이런말도 했습니다. '무릇 임금이 배라면 신민은 물이다.' 백성은 왕을 도울수도 해칠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거죠. 이런 사람을 미치광이로 몰고 이에 동조하는 영조를 보면 권력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하게끔 합니다.
새가 하늘을 날때 두 날개가 필요하듯 나라의 발전을 위해 어느정도 당파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조하나, 일당독재가 되면서 왕조국가의 핵심인 왕을 택군하는 당파는 정말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존재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되며, 현재 우리사외는 어떤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
|
권력은 도덕의 잣대를 넘어선다. 도덕적으로 보면 숙종-경종-영조의 시기는 도덕불감증의 시대요, 인간성 상실의 시대요, 패륜의 시대였다. 재주가 같으면 서로 질시하는 법. 노론과 소론이 서로를 주살하고, 아우가 형을 독살하고, 신하가 임금을 우습게 여기고, 아비가 자식을 굶겨죽이고, 아내가 지아비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우는 패륜아들이 설쳐댄 광기의 시대였다.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 정조가 오죽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은 억울하게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는 신원의 일환이다. 사도세자가 왜 죽었는가? 사실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커져만 가는 영조의 컴플렉스와 죽고 죽이는 냉혹한 당파 싸움이 이유였다. 사도세자는 냉혹한 권력관계가 빚어낸 비운의 희생양이었다.
"나는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가장 많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이 사건의 두 주역인 사도세자와 영조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홍인한 형제, 김상로, 홍계희 등 집권 노론 인사들은 모두 세자의 반대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반면 이종성, 조현명, 조재호 같은 소론 인사들은 세자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사실상 이 비극적인 사건은 이 양편이 완충 지대 없이 좁은 뒤주에서 맞부딪친 결과 발생한 것이다."
영조는 지우고 싶은 두 가지 과거사가 있다. 바로 천민인 숙빈 최씨의 소생이라는 점과 집권 노론과 역모하여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른바 '경종 독살설'이 그러하다. 영조의 노론 편애와 경종 독살설은 목호룡 고변 사건, 이인좌의 난,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 등을 불러 일으켰다. 탕평책은 허울일 뿐 사실상의 실세는 노론의 일방적인 독주였다. 따라서 저자가 [조선왕을 말하다]에서 영조를 절반만 성공한 군주라 평한 것은 올바르다고 본다.
왕실의 사람은 24시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총명하다고 살아남는 게 아니고, 덕행이 뛰어나다고 살아남는 게 아니었다. 조선 시대만을 놓고 본다면 총명하고 덕행이 뛰어났지만 비운의 삶을 마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단종과 안평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모두 가시밭과도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고 용모와 성향까지 효종을 쏙 빼닮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