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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첫눈이었다. 포근한 날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우리가 기대하는 첫눈의 낭만이나 환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날씨는 추웠다. 그리고 지난해 있었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인지 눈송이마저 푸슬푸슬 가늘게 쪼개지는 듯했고, 옹송그린 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눈이 내리는 허공을 향하지 않고 시종일관 땅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행인들의 우울한 시선을 뒤로한 채 서둘러 차를 몰았다. 연말의 바쁜 일정 틈틈이 읽기 시작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도 이제 몇 쪽 남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떤 소설이건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손에 땀이 나고 호흡은 거칠어지게 마련, 그 순간에 다른 일로 어쩔 수 없이 책을 손에서 놓아야 했던 독자는 마치 책이 펼쳐 놓은 그물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듯 어서 빨리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허둥대게 된다.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애의 끝은 언제나 특별하다. 나는 그 특별한 그리움과 집착, 뒤틀린 내 몸 안에 도사리고 있던 특별한 사나움을 기억한다. 실제보다 더 길어 보이는 욕실 거울처럼 이별의 순간을 몹시 길고 캄캄한 세월로 반사하는 내 기억의 틀 속에서......" (p.202)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소설의 주인공인 미옥이 이사를 앞둔 7일 동안 자신의 자취방에서 서른 살에 이르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었던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녀의 인생은 대학 시절을 거쳐 삼십 대인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회고의 중심은 민주화 운동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의 대학가를 배경으로 미옥이 운동권 여대생으로 정착되었던 시점을 부각하고 있다. 1960년대에 태어나 대학 입학 정원 확대와 중산층의 성장에 기대어 대학에 진학했고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광장에 섰던 혹은 억지로 그곳에 서야만 했던 시대 상황과 여성성을 억압한 채 남성 중심의 운동 문화 속에서 중성적 여인으로 성장해야 했던 불합리한 현실이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 (p.154~p.155) 어린 시절 미옥은 원양어선을 탔던 아버지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없었지만,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이 미옥의 집에 얹혀살았다. 둘째 이모는 남편의 바람기로 자식과 함께 미옥의 집으로 들어왔고, 사업으로 가산을 탕진한 외삼촌으로 인해 외숙모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미옥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실직자가 되었을 때 둘째 이모부는 사업에 성공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외숙모와 외할머니 역시 미옥의 집을 떠났다. 운동권의 현실에 실망했던 미옥이 휴학계를 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옥과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집 안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미옥이 다니던 대학에 복학하면서 여성성을 회복하고 한영과의 연애가 시작되는데...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p.280) 곤두박질쳤던 기온은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다. 어떤 작가든 그의 초기작을 읽을 때면 언제나 약간의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느낌과 함께 작가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곤 한다.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세계관이 작품 속에 진솔하게 묻어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유정 작가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쓴 소설의 권수가 더해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작가 본연의 색채는 옅어지지만, 어색했던 문장은 더욱 매끄러워진다. 그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따금 작가의 데뷔작이 몹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는지도 모른다. 첫눈을 그리워하듯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데뷔작을 나는 오늘도 그리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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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은 일주일 후면 이사를 한다. 반지하의 축축하게 젖은 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옥은 이 방에서 자기가 살아온 삶을 영사기를 돌리듯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본다. 그녀의 회상은 탄생의 신화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우정, 대학시절, 부모에 대한 추억, 그리고 외가식구들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기억으로까지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가 씨와 날로 교차되는데, 미옥은 현재 속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찾아내며, 과거 속에서 현재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 미옥의 위에는 언니가 있었다. 미옥은 두 번째 딸이라는 꼭지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렇지만 미옥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가 마당에서 파랑새를 보게 되었다. 이 일로 미옥의 출생은 극적으로 역전된다. 파랑새라는 매개체가 미옥이 태어날 즈음 절묘하게 나타나서 미옥의 출생이 단번에 새로운 신화로 변신하게 된다. 이런 우연성은 어쩌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내내 일어나는 필연성일지도 모른다. 삶은 항상 의문과 비의(秘意)로 가득 차있으므로. 이야기 전개 중에 암소를 팔러나갔다가 말하는 냄비와 바꾼 한 남자의 이야기와 <아라비안 나이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이야기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자주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비유의 절묘함에 내심 탄성을 질렀다. 작가의 입담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입담이 단순히 재기발랄한 것만이 아니라, 그 저변에 흐르는 깊이 있는 철학의 사유까지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한시 바삐 어른이 되고 싶었던 미옥은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치용어사전’과 ‘성용어사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절의 젊은이의 욕망을 이렇게 단순한 보통명사로 만들어버리는 재치는, 책을 잡고 있는 내내 읽는 재미를 제공해주었다. 어쨌든 미옥은 자신의 이런 믿음에 충실하려는 듯, 학내 지하서클에 들어가서 운동을 하며, 농활을 하고,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리고 남자들에 대한 호기심도 열어두고 남자들과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또 다른 남자, 한영과는 연인관계로까지 발전하는 경험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미옥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정치와 운동은 벅찼다. 또 그녀는 남자를 유혹할 만한 미모와 끼도 없었다. 미옥은 기를 쓰고 그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실체는 잡히지 않았고, 절망과 비애만이 그녀를 감쌌다. 미옥은 사랑하던 한영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그런 이별의 통보는 오히려 한영의 단단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충동이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통보는 예상과는 달리 너무 쉽게 받아들여졌다. 미옥은 나중에 한영이 새로 사귀는 여자와 결혼까지 할지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망연자실해하지만, 결코 믿지 않으려고 한다. 착잡해진 미옥은 한영이 자신을 붙잡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한영을 만난다. 그렇지만 한영은 미옥에게 몹시 미안해하면서 자신들의 과거관계에 철저히 선을 그었다. 한영을 만나러가며 피임약까지 챙겼던 미옥은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살았음을 뼈아프게 느낀다. 그즈음 막내딸인 미옥을 끔찍이 사랑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다. 미옥의 아버지는 배를 타다 실직하고 오랜 세월 백수로 있다가 청소부로 재취업을 했다. 그러면서 미옥의 용돈은 꼭꼭 챙겨주었던 아버지였다. 이때까지 미옥을 보호해주고 사랑하던 남자들은 모두 떠나가 버렸고, 미옥은 혼자 남았다. 미옥의 청춘은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야한다. 미옥은 이사를 결심하고 젖은 방에서 나오기로 한다. 신경숙의 ‘외딴방’이 고립이라면, 권여선의 ‘젖은 방’은 절망, 우울, 눈물, 고통, 번민 등 모든 어두운 빛깔의 정서를 뜻하는 것 같다. 젖은 방에서 나온다는 것은 밝은 햇살로 나아간다는 것이며, 절망의 공간에서 희망의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이다. 미옥은 이사를 하루 앞 둔 날, 치킨 수프를 끓인다. 그녀는 축축하게 젖어있던 삶의 간이역에서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북극으로 달아난 냄비처럼, 그녀의 미래는 닫히지 않은 시간이며, 닫히지 않은 믿음이며, 닫히지 않은 이야기이다. 젖은 방에서 그녀는 이제 푸르른 틈새를 보았다. 치킨수프를 맛본 미옥의 혀는 말한다. “아버지, 정말 천하일품이에요!”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의 전언이다. 성장에는 반드시 아픔이 따른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기에 햇살이 더욱 눈부시다. <푸르른 틈새>는 암울한 젊은 날의 추억이며 기록이다. 청년에서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피로 쓴 추억의 기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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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수프가 다 되었다. 냄비 뚜껑을 열자 노르스름한 죽 위로 맛을 돋워줄 닭뼈가 살포시 솟아 있다. 가스레인지에서 냄비를 들어내며 나는 불현듯 말하는 냄비가 어디쯤 가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부잣집을 드나들며 값진 물건을 담아다 가난한 부부를 도와주던 냄비는 결국 부잣집 주인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오냐, 우리집에서 푸딩이며 밀이며 금화를 훔쳐간 놈이 바로 네놈이지?" 거짓말을 못 해 아니라곤 말 못 하는 냄비는 이렇게 읍소했다. "제발 저를 놔주셔요." "그건 절대 안 되지." 냄비는 울면서 소리쳤다. "저를 놔주셔요. 그러지 않으면 북극까지 갈 거예요." "오냐, 그래! 북극까지 가봐라, 어디!" "정말 저는 북극까지 뛰어갈 테예요." "그래! 어디까지라도 따라갈 테다." 냄비는 부잣집 주인의 손에 붙잡힌 채 울면서 뛰어간다. 가난한 부부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언덕을 넘어, 강을 건너, 지금도 냄비는 북극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일견 황당하고 허무한 결론이지만 나는 이렇게 뒤가 훤히 트인 진행형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냄비가 북극성인지 북두칠성인지가 되었다는 건 사족일 따름이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천하루 만에 끝났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듯이.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 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들어오는 듯하다. 치킨수프를 한술 뜨면서 나는 가난한 부부처럼 냄비를 믿기로 한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 밖의 다른 것들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설령 모든 것이 한층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믿고, 기억을 믿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북극을 넘어 경계를 넘어 스스로 공간을 열며 뛰어가는 냄비처럼, 상처로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 젖은 방을 떠나기 전에 꼭 이 말을 해보고 싶었다. 치킨수프를 맛본 내 혀가 말한다. "아버지, 정말 천하일품이에요!" (279~281쪽)
권여선의 등단작인 장편소설『푸르른 틈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치킨수프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인다. "닭뼈다구 몇 개는 한데 옇고 낋이야 진짜 치킨습이 되는 기라." 젊었을 때 선원이었기에 요리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는 소설속 화자의 아버지가 평소 일러준 대로 살을 발라낸 닭뼈 몇 조각과 마늘 한 줌과 불린 찹쌀을 냄비에 함께 넣고 푹 끓여낸 치킨수프다. 끈적끈적한 침이 한술 뜨기도 전에 내 입속에 잔뜩 고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뜻 숟가락이 나가지 않는다. 그 치킨수프에는 많이 사랑했으나 아무런 준비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죽은 아버지, 떠나간 애인, 자살한 친구)의 추억들이, 그 아픈 유년과 어설픈 청춘의 기억들이 함께 담겨있기 때문이다. 10대의 대부분이 70년대와, 그리고 20대의 대부분이 80년대와 겹치는 세대가 간직할 수밖에 없는 쓸쓸하고 어두운 기억들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 권여선 및 소설속 주인공과 그 상처와 그 시절과 그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나는 잠시 망설인다. 스스로 싸질러놓은 물찌똥이라도 되는 양 치킨수프를 바라보다가 나는 드디어 한술 떠서 입속에 넣은 채 그 맛과 질감을 견디어 본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손미옥)'가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어 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죽음과 이별과 어두운 기억들이 바로 내 스스로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뼈아픈 자책이다. 그래서 '나'는 실패한 인생을 자인하며 그 지나간 세월의 의미없음과 막막함을 이사를 앞둔 젖은 방에 함부로 부려둔 채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실패는 단호한 죽음의 결행에서도 되풀이된다. 1970년대~90년대 한국의 서울로 그 무대를 옮긴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드는 '나'를 구원한다. 구원받은, 아니 어쩌면 스스로 구원한 '나'는 술 취한 아버지가 늘 소리친 것처럼 세상을 향해 신나게 외친다. "이년들아! 나, 손미옥이, 아직 안 죽었다!"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에 '나'가 차려낸 치킨수프는 부활의 저녁을 축하하기 위한 재탄생의 만찬인 셈이다. '나'는 그 밥상에 죽은 아버지와 떠나간 애인과 자살한 친구를 모두 불러 앉혀놓고 치킨수프 한 숟가락씩 떠먹여준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속내 이야기들을 한 숟가락씩 떠먹여준다. 이미 지나간 시절의 사소한 이야기들이라 너무 담백한 듯하고(서사가 좀 밋밋하다) 닭의 노린내를 죽이기에는 마늘이 좀 부족한 듯도 싶다(기교가 좀 미숙하다). 그렇지만 살을 발라낸 닭뼈 몇 조각에서 우러나온 깊고 그윽한 맛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고(깊은 사유가 빛나는 개성있는 문체다) 적당히 되직한 질감은 혀에 딱 달라붙는 듯 자연스럽게 흘러서(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해 그려내고 있다) 완벽한 맛을 추구하는 미식가의 입에는 별로일 수 있겠지만 내게는 정말 맛이 있다.
드디어 치킨수프를 맛본 나는 말한다. "정말 천하일품이에요!" 나의 이 평가는 작가나 소설속 화자가 통과해 온 바로 그 시대를 나 역시도 통과해왔다는 동세대인으로서의 공감이 많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단지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모두 청춘이라는 빛나는, 그러나 그 눈부심으로 인해서 그늘과 그림자도 짙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시절을 힘겹게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쓰러지고 또 누구는 포기하고 또 몇몇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은 그 힘겨운 이십대를 무사히 지나 서른이 되고 마흔으로, 또 쉰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는 그때의 상처와 열망과 꿈과 방황과 고뇌가 어찌 쉽게 잊히겠는가. 권여선은 민담 속의 가난한 부부가 암소와 맞바꾼 말하는 냄비에다가 바로 그 시절 청춘의 이야기를 이렇게 한 그릇 맛깔스런 치킨수프로 만들어서 담아 내놓았다. 따뜻하고 고소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도 하면서 또 때로는 그때처럼 가슴이 아련해지기도 하면서 어느 결에 치킨수프 한 그릇을 다 먹어치웠다. 또 먹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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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옮겨 놓는 것은 나이지만 읊는 것은 성우이다. 라디오에서 방송에서 늘 보던 그이가 목젓을 흔들며 고조를 찾아 갈때, 같이 그 높이를 타고 오르던 아아, 기억들은 말할것도 없이 환상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술에 취한 겨울밤이면 기분 좋은 취기를 뭍혀 들어와서 "송희야,시를 받아 적으련" 하고 읊어내리셨는데, 언제나 , 감당 못할 크로키처럼 빠르게 치닫는 그 조용하고 나직한 읊조림을 ,그 의미를 모르기에 태반이 미완이고는 해서 "에잇, 오늘도 틀렀구나..." 하곤 했던 쓸쓸한 기억이 잘 옮겨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언제나 안타까운 마음 였다고 ,사무치는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은 겨울 밤은 길었다.
어린 새 같은 마음이 되서 술에 취한 아버지가 뒤척이며 먼저 잠이드는 밤 멀리에서 언 강이 쩡쩡 숨을 트곤 했다. 새벽빛이 밝기도 전에 탄불의 구멍을 맞춰 놓고 비스듬한 문짝을 열고 투명한 겨울 내어 밟으면 뒷 동산 밤나무의 그늘이 이내 차분해지고 선명한 산그늘을 찾아내서 그 위의 별들에 선긋기를 하곤 하얗게 입김을 내뱉던 날들이 떠올라서 못내 가봐도 이젠 흔적도 없는 집터를 그린다.
그녀가 불러놓는 푸르는 틈새로 끼어드는 나의 유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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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상처와 고통을 동반하고 태어나는지 모른다. 삶은 꿈꾸고 소망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성장소설이 주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잘 쓰여진 성장소설을 만나고 나면 주인공에게 진한 동지애같은 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는 변화무쌍한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미옥과 그녀의 가족,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옥의 이야기가 중심을 잡고 있지만, 결코 미옥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옥의 어린시절, 대학시절, 그리고 현재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주변인들의 일상도 함께 소개된다. 어린시절, 돈벌이가 좋았던 아버지로 인해 나름 귀여움과 사랑을 받았던 미옥. 11살 무렵 외가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미옥은 점점 그 사랑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학교 생활에 있어서도 뚜렷한 주관없는 주변인과 같다. 외할머니, 이모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사촌들에게도 적잖은 미움이 있었을 것이다. 부족한 사랑에 대한 결핍은 도벽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 외가 식구들의 일상의 표현은 맛난 밥상을 마주한 듯 즐겁다. 대학시절, 미옥은 좀 더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한다. 주관적인 사람, 강한 사람. 그러나 역부족이다.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그녀는 나약한 모습이며, 결국 휴학에 이른다. 각기 다른 사고를 지닌 젊음들, 그들을 통해 나의 스무살로 시작되는 내 인생의 청춘을 떠올린다. 나는 그들 중 누구고 같았을까. 미옥과 함께 휴식기에 접어든 사람은 바로 아버지. 퇴역한 늙은 장군처럼 술만 마시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외가와 전세가 뒤바뀐 집안 형편으로 아버지의 존재는 점점 작아진다. 현재의 미옥, 지금껏 살아온 과거를 잊고 비상을 꿈꾼다. 뜨거웠던 사랑은 차디찬 이별로 남고, 어린시절 단짝 친구의 자살 소식을 듣고, 비루한 노년을 살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즉사한다. 삶을 끝내고 싶은 욕망, 살아 있어 꿈틀대는 삶에 대한 욕망 중 미옥은 후자를 선택한다. 결국 소설은 절망적이고 처절한 청춘의 방황끝에 새로운 날들에 대한 소망을 말한다. 권여선은 처음 써 본 소설이라고 말했다. 사실, 읽는 내내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진희를 떠올렸다. 그러나 미옥은 진희보다 훨씬 사실적이기에 더 설득력있다. 하나의 장편은 아름다운 문장들의 연속이다. 우선, 그녀가 구사한 아름다운 문장에 빠지고 만다. <매일 밤, 둥지 속에 든 두 개의 알처럼, 책 읽는 나와 잠자는 내가 한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본문중에서> 실로 매력적인 문장이다. 사물과 공간 하나 하나의 탁월한 묘사는 이미지가 되어 머리속에 박힌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밖의 것들도 할 수 있을지 몰라’ 나는 말을 믿고, 기억을 믿고, 그밖의 것득을 믿기로 한다. 닫히지 않는 이야기, 닫히지 않는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완의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상처로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는 틈새를 비출 때 비로서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 본문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미완의 그것이다.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 있음에 남은 삶을 향해 비상해야 할 뿐이다. 그 과정에 우리는 상처를 남기기도 할 것이다. 설사 상처로 가득한 삶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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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책이 발간되던 해인 96년에 이 책을 샀고 지금까지 아끼고 아끼면서 보고 있습니다. 어느 페이지를 넘겨도 정말 한구절 한구절 마음에 와 닿았고, 참으로 독특하고 마음속에 착착 감기는 뛰어난 문체를 지닌 작가인 것 같습니다.
새 책이 발간되었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다시 구입하였는데 종이질이 영 맘에 안 들어요 ㅠ 요새 매끄러운 종이도 많은데...투박한 종이질 그리고 편집도 좀..... 두껍기만 하고...너무 별로네요.
다시 이쁘게 꾸며져서 새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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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방의 곰팡내를 맡으며
책장에서 습관적으로 책을 빼서
나의 안식처 침대로 파고 들어 책을 펼쳐든다.
이따름 아니, 자주 아니,
매일 술을 마시고 반지하 방의 틈사이로
들어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느낌. ![]() 10대, 20대의 푸르렀던 틈새를 뒤로하고
30대, 40대의 푸르른 틈새를 발견하다.
감상적이지 않은 작가의 '젖은' 감상이
주르륵 비오는 오늘, 새삼스럽게 책장을 다시 넘기게 한다.
** 30즈음에 썼다던 책을 40대에 다시보는 작가의 감상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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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처음 출간된 소설을 10년이나 지나 이제야 읽었다. 얼마 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를 했던 것인데. 수상작이 마음에 들어 그녀의 첫 작품은 어떤 것이었을까, 또다른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니 내가 왜 미처 몰랐을까 하면서 읽었는데 솔직히 내가 가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우선 주인공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무조건 주인공으로 소설의 만족도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가 컸다 하겠다.
여기에는 아무래도 내가 소설 속 주인공 나이 때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작가와 내가 같은 나이이고, 소설 속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살았던 시대가 같았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나라면.. 하는 마음이 저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나와는 생각이나 행동이 아주 많이 다른 주인공이었으니.
어떤 소설의 경우, 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 속 주인공에 대해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뜻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삶을 보는 내 시선이 삐딱하니 소설 전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소설의 구성이나 문체와 같은 요소들은 그 다음 생각해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