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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의 추억’에는 ‘게이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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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의 쇼윈도우에 전시된 미제 일본 인형 같은 영화 정부의 스크린 쿼터 축소방침에 반발해 영화인들의 릴레이시위가 이어지고 여기저기에서 문화주권이 말해지는 시점에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오늘은 “문화를 어떻게 밥그릇과 비교할 수 있나요?”하는 영화배우 전도연의 항변을 기사로 접하기도 하였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의 축소방침 하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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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의 쇼윈도우에 전시된 미제 일본 인형 같은 영화


정부의 스크린 쿼터 축소방침에 반발해 영화인들의 릴레이시위가 이어지고 여기저기에서 문화주권이 말해지는 시점에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오늘은 “문화를 어떻게 밥그릇과 비교할 수 있나요?”하는 영화배우 전도연의 항변을 기사로 접하기도 하였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의 축소방침 하나에 온 나라가 ‘문화’라는 아이템으로 떠들썩하니, 도대체 ‘문화’라는 것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인들이 혹은 스크린쿼터 축소방침에 핏대를 세우며 항변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문화란 아마도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오랜 시간 중첩되어 그 사회 구성원들이 습득하여 가지고 있는 고유한 습관이나 능력의 총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유․무형을 불문한다.


영화인들은 영화가 한국사회 대중문화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고 보면, 스크린쿼터의 축소는 곧 거대자본과 앞선 메카니즘으로 무장한 헐리우드영화에 우리문화의 안방을 내어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곧 심각한 문화종속 또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의 훼손과 잠식을 가져오는 재앙이라는 것이다.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 보듯이 그 위기의식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사회의 스크린쿼터 문제에는 그런 문화와는 별개로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 때문에 축소방침을 정한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는 것이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수출로 국부(國富)를 달성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 문화를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다. 우리 고유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영화라는 말이다.


빙과처럼 녹아내리듯, 벚꽃처럼 흩날리듯 사랑은 덧없어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게이샤의 추억’은 한 게이샤(藝者)의 회고담이다. 신비로운 눈동자를 가진 가난한 어촌의 소녀 치요(오고 스즈카 분)는 가난 때문에 쿄토의 기온(게이샤의 거주지)으로 팔려간다. 함께 팔려간 언니와도 생이별을 하게 되고 고된 허드렛일과 엄격한 감시 속에서 매일매일 도주를 꿈꾸지만 어린 치요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대 최고의 게이샤인 하츠모모(공리 분)의 학대와 시기를 견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어린 치요를 게이샤의 길로 끌어들인다. 길거리에서 만난 회장(와타나베 겐 분)은 어린 치요에게 빙과를 사주며 웃음을 잃지 말라고 격려한다. 그 친절을 잊을 수 없는 치요는 그에게 다가가는 길이란 오직 최고의 게이샤가 되는 것이라 깨닫는다. 결국 치요는 하츠모모를 견제하려는 마메하(양자경 분-그녀 또한 당대의 게이샤다)의 수제자로 발탁 되어 최고의 게이샤가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는다.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게이샤가 되는 치요에게는 사유리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게이샤로써 점점 명성을 얻으며 회장에게 다가가는 사유리, 그러나 운명은 회장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업자인 노부(야쿠쇼 코지 분)가 먼저 사유리와 맺어지도록 정해져 있다. 사유리는 슬픔을 감춘 눈으로 회장을 훔쳐볼 수 있을 뿐이다. 가슴 속에 간직한 사랑은 속으로만 속에서만 허락된 것이다.


게이샤의 예기(藝技)가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듯 전시란 시대상황과 그로 인한 노부와 회장의 사업적 몰락은 또 한 번 사유리의 운명을 조롱한다. 사유리는 결국 누군가 타인을 향해 예기를 팔아야 하는 게이샤일 뿐이다. 마메하 문하의 치요이거나 당대 최고의 게이샤 사유리이거나 모든 것이 그녀를 사랑한 회장의 배려였음을 알게 된 후에도 게이샤 사유리의 회장을 향한 사모는 그가 사준 빙과처럼 녹아 흐르는 것이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정원의 벚꽃처럼 흩어져 날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리로 분한 장쯔이의 연기는 그 장악력이 부족하다. 영화 ‘연인’의 소매처럼 어딘지 허술한 구석으로 아쉬움을 남긴다. 롭 마샬(Rob Marshall)의 연출은 전작 ‘시카고’처럼 여성들의 대립각을 그려내려 하지만 호소력 면에서 전작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카메라는 게이샤의 삶을 따라가지만 은밀한 애환이 묻어나야할 게이샤의 삶은 가볍게 기온의 담장 밖으로 날아간다.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만들어낸 기모노처럼 스크린은 전통과 역사의 재현보다는 화려한 시각적 전시를 통해 게이샤를 환상으로 치환해낸다. 오직 공리(하츠모모 역)의 퇴폐적 분위기만이 역설적으로 빛이 난다.


‘게이샤의 추억’에는 ‘게이샤’가 없다


서두에서 ‘게이샤의 추억’은 문화라는 것에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소재는 분명 일본 고유의 문화적 아이템인 게이샤인 것이다. 게이샤란 우리의 (황진이처럼 시․서․화․악․무 등의 기예에 능했던 예인으로서의) 기생과 마찬가지로 기예를 긍지삼아 살아가던 여인들이다. 비록 정조를 팔고 웃음을 팔았을지언정 그들은 당대의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던 일본사회 고유의 무리들이다.


그런 그들이 영화에서는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말한다. 문화를 한 사회 고유의 정체성이라 할 때 언어란 가장 중요한 문화적 요소이며 특징이다. 같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무리는 그래서 같은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타문화권과 구별된다. 아서 골든(Arthur Golden)의 원작 자체가 영어이니, 즉 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게이샤의 일생이다 보니 그 태생적 한계는 분명해진다. 이 영화의 오리엔탈리즘 혐의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구의 많은 관객들에게 게이샤의 베일에 가린 신비스러움을 알리고 싶었던 제작자(스티븐 스필버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일본만의 것인 게이샤의 삶을 올바로 추억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로 말하는 게이샤이어야 함이 옳았다. 우리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언어가 표준어인 서울 말씨였다면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어리둥절함을 넘어 영화는 이미 영화로써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언어권에서조차 토속적인 사투리가 가지는 그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하물며 영어로 연기하는 게이샤에게서 어떻게 일본만의 특유한 게이샤를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혐의는 게이샤를 연기한 배우들의 출신국이다. 영화의 주요 게이샤 모두가 일본 출신의 연기자가 아닌 중국배우들이다. 굳이 공리, 장쯔이, 양자경에게 중요 역할을 맡긴 캐스팅의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게이샤를 제대로 연기할 일본배우가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상업적 계산이 밑바탕에 깔린 의도적인 캐스팅으로 짐작된다.


이들 배우들은 중화권과 아시아권, 나아가서는 서구사회에도 이미 잘 알려진 동양의 배우들이다. 국제적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배우들이다. 즉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무명의 일본배우 혹은 그 지명도가 낮은 일본배우보다는 전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그들을 캐스팅함으로써 배급망의 확대와 금전적 수익의 극대화를 꾀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많은 관객들에게 기존의 무협액션으로 각인된 그녀들의 (기모노를 입음으로 해서 그렇게 걷게 되는) 종종걸음은 어딘지 낯설고 어색하다.


게이샤의 수업과정이나 사유리의 데뷔무대 등에서 보이는 게이샤는 분명 예술가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못하는 하츠모모의 절망에서조차 만인의 연인이자 예인으로서의 게이샤는 강조된다. 치요의 사랑을 간직한 사유리의 연모는 절절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영화는 순식간에 사유리를 사업이권을 따내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미군대령에게 이불속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유리는 이제 일개 성노리개, 접대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서양인의 눈에 비친 게이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서구남자들의 끈적끈적한 욕망의 시선이 화면 곳곳에 담겨져 있다. 진한 화장과 화려한 벚꽃의 정원에서 일본의 향기가 느껴지기보다는 남작의 겁간처럼 포르노그래피적 성욕이 꿈틀댄다.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을 채 살피지 못한 한 서구인이 시대의 한 지점에서 외피만을 살핀 게이샤의 추억에는 진정한 게이샤의 삶이란 있을 턱이 없다. 하물며 그것을 지구촌 곳곳에 팔기 위한 요량으로 찍어낸 필름에서 어찌 일본이 있고 일본의 게이샤가 있을 것인가?


‘시카고’ 어느 상점의 쇼윈도우에서 전시된 조잡한 미제 일본인형을 본 것 같은 느낌은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란 오랜 역사와 전통의 숨결 속에서 그 사회 구성원들만이 가진 고유의 호흡과 손길로 만들어진다. 그런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 없는 이의 구미에 따라 한 문화가 제멋대로 왜곡되고 훼손될 때, 그 문화수용자의 아픔과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사수해야할 것은 의무상영일수가 아니라 우리의 것, 가장 한국적인 것에 대한 깊고 넓은 애정과 관심일 것이다.                      

e******1 2008.05.12.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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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의 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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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으로 언니와 함께 게이샤의 집에 팔려간 치요(장쯔이) 늘 구박받으며 살던 치요에게 나타나 친절을 베푼 회장님 이제 그녀는 회장님에게 다가가려고 게이샤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우리의 기생과 비슷한 존재인 게이샤 요즘 '황진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어 기생들의 삶과 애환을 그리고 있는데 이 영화도 게이샤의 순정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고 있다. 게이샤의 집에 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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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으로 언니와 함께 게이샤의 집에 팔려간 치요(장쯔이)

늘 구박받으며 살던 치요에게 나타나 친절을 베푼 회장님

이제 그녀는 회장님에게 다가가려고 게이샤가 되기로 결심하는데..

 

우리의 기생과 비슷한 존재인 게이샤

요즘 '황진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어

기생들의 삶과 애환을 그리고 있는데

이 영화도 게이샤의 순정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고 있다.

게이샤의 집에 팔려온 후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치요에게

빙수를 사주며 친절을 베풀어준 회장님(와타나베 켄)

그는 어린 소녀의 가슴 속을 온통 차지하게 되는데...

그녀는 이제 회장님에게 다가가기 위해 게이샤가 되기로 결심한다.

게이샤가 되기 위한 어려운 수련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게이샤로 데뷔하여 사유리가 된 치요

그렇게 그리워하던 회장님과 재회하지만

그녀에겐 가혹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운명이 시켜 게이샤가 된 게 아니라

피할 수 없어 게이샤가 되는 거란 말처럼

사유리에게 피할 수 없는 일들만 계속 생기는데...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영상미일 것이다.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고 공연(?)하는 게이샤들의 모습이 인상적임

무엇보다 치요 역의 오고 스즈카란 소녀가 정말 인상적이다.

그 어린 소녀의 눈망울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사유리 역의 장쯔이

그녀는 언제봐도 보는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졌다.

 

사랑조차 맘대로 할 수 없는 게이샤의 가슴아픈 순정을 

아름다운 영상에 잘 그려낸 영화  

s******p 2008.12.0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