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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생 때 아마 대학생 필수권장도서(?) 혹은 대학생이 꼭 읽어야 할 책(?)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위의 제목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뭐 이런 리스트를 보다가 우연히 관심이 가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책으로 사고,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도 읽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대화는 무엇일까?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느끼고, 잘못을 깨닫고. 그렇기에 결국 역사는 답이 없다. 또한 그렇기에 더 신중하게 봐야 하며 한쪽만 봐서는 안된다. 누군가 나를 말할 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반대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나'다. 소심해서 잘 선택을 못해서 답답할 수 있지만 또 소심하기에 신중할 수도 있다. 용감해서 무리를 잘 이끌고 선택을 시원시원하게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무모한 도전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양쪽을 다 고려하며 역사를 봐야한다.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운 책이지만 읽으면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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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에서 특정 분야의 역사를 다룬 책은 몇 차례 소개한 적은 있습니다만, 정통 역사서를 다룬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딱딱한 내용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작하려면 일단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사서를 읽기 전에 역사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싶어 고른 책입니다. 조금 딱딱하다 싶은 책은 집중이 잘되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 좋습니다. 얼마 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리트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습니다.
분명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A. L.로즈박사에 이어서 1961년에 맡았던 여섯 차례의 강연에서 발표하기 위하여 준비한 내용으로 보이며, 역사가와 그가 다루는 사실과의 관계, 사회와 개인과의 차이점, 역사와 과학 그리고 도덕 사이의 관계,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의 진보의 본질적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측 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볼테르가 만든 역사철학의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역사란 사실들의 집합체로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역사철학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옥스퍼드의 철학자이며 역사가인 콜링우드가 정리한 역사 철학에 대한 견해 - “역사철학은 ‘과거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거나 ‘과거 그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유(思惟)’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되는 그 두 가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를 발전시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라는 함축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흔히 간과하기 쉬운 역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리를 통찰한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 다는 점이다. 둘째,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책을 읽을 때는 항상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음치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역사가가 말을 못하는 멍청이일 것이다.(40쪽)’라고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역사는 누가 만들어내는가? 혹자는 개인이 남긴 기록도 개인의 역사가 될 수 있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간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인이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이었을 것입니다. 사회 역시 그 구성원들에 의하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한 사람의 개인이고,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완전하게 삼자적(三者的) 위치에서 사실을 들여다보는 일이 수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87쪽)”라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 역시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라고 하였고, 역사가는 오늘의 사회와 과거의 사회가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와 과학이라는 분야에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요? 다음백과사전에서는 역사과학을 “과거에 있었던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사실과 사상(事象)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빈델반트는 학문 방법상 자연 과학에 대립시켜 “인간에 관한 사물과 현상을 반복이 불가능하고 일회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 보고 연구, 기술하는 과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1)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리고 (5)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라는 이유로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선 역사가는 언어사용에서부터 과학자들처럼 일반화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들에 간여하는 요소들을 단위로 분해하여 그들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방법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자, 역사가, 그리고 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다만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사회과학자와 그의 자료 사이의,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속적이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며, 역사와 사회과학의 남다른 특징으로 생각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역시 과학자들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 문제를 제기하고 역사에서의 인과관계를 추구해감으로서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사실의 원인들을 서로 연결하는 인과관계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한 것인가에 관한 논란에 대하여 저자는 ‘역사에서의 결정론; 혹은 헤겔의 간계(奸計)’라는 주제와 ‘역사에서의 우연;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플라톤으로부터 헤겔,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결정론을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 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그 사건은 다른 식으로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신념”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사실 역사적 사건 역시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인도 없이 행동하며, 그 행동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고찰하는 관점에 따라 자유롭기도 하고 동시에 결정되어 있기도 하다(145쪽)’라는 한발 물러선 모호한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는 반복된다’면서 역사가 보여준 인과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고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정리한 일반화과정을 적용한 산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연론은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계속이라는, 즉 우연의 일치에 의하여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우연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이론입니다. 기원전 3체기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연론은 특히 영국의 역사가 베리와 피셔 등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연적 원인은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역사에서의 원인은 합리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역사에서의 해석은 가치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현재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하여 부단하게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진보하려고’, 즉 어떤 역사적 ‘법칙’이나 진보라는 ‘가설’을 실현시키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위에 진보라는 가설을 적용하여 해석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라는 것입니다.
‘지평선의 확대’라는 마지막 강의에서 저자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저자의 강연이 있을 무렵,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의 충격으로부터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세계는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위험스럽기까지 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어려움들로부터는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쟁 끝에 도래하리라고 예견되었던 세계경제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9쪽)” 그리하여 저자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를 표명하였던 것인데, 2판의 서문을 보면, 이후 찾아든 동서냉전구도는 저자가 품었던 희망과 만족감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입니다. 핵멸망의 위협은 배가되었고, 뒤늦게 시작된 경제위기는 서구사회 역에 걸쳐 산업국가들을 황폐화시키고 실업을 확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든 1판의 결론에서 저자는 세계의 파국을 예언하는 목소리들이 퍼지고 있어도 영국이 나아가 세계가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것이며 또한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했고, 현재 세계는 저자의 예언대로 여전히 진보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990년 소련의 해체를 저자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축이 서유럽을 떠나 북미대륙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의문을 달아놓았습니다. 저자는 러시아혁명의 본질을 이성의 확대로 보았습니다. 유럽이 이성의 확대를 외면하는 사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혁명이 확산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즉 인민대중이 사회인식과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고, 각자의 집단들을 과거와 미래가 있는 역사적 실재로 깨닫게 되었다는데 의미를 둔 것입니다. 저자는 1955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친 풀리블랭크교수가 “중국이 인류 역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223쪽).”라는 확신을 밝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점을 우려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제 중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낙관주의자임을 표명하는 저자가 영국이, 나아가 영어사용권 국가들이 전반적인 역사의 진보에서 뒤처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무기력하게 또한 체념한 채로 어떤 향수 어린 침체상태에 빠져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던 것인데, 그의 불안감은 오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1982년 타계하는 바람에 2판의 서문만 완성되었을 뿐이어서 1판에 더해질 저자의 새로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여전히 역사철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역사서를 읽을 때 좋은 지침이 될 것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편집자가 저자의 자료철에서 뽑은 ‘제2판을 위한 노트’가 덧붙여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1판의 내용을 상당부분 보완한 새로운 생각들을 담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아쉬움이 큰 것 같습니다. 저자가1판에서 무게를 두었던 러시아 혁명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실패한 혁명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힘과 운동이 도처에서 싹트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고, 그러한 움직임을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내용을 정의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 역시 정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볼세비키 혁명이] 그 첫 번째 단계였던 세계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몰락을 완성시킬 세계혁명은 제국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식민지 인민들의 저항이 되리라는 가설을 진지하게 고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269쪽)”라고 노트의 말미에 적은 카의 믿음은 개인적으로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움직이고 진보한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놓치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는 빠르게 진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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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960년 4‧19혁명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에 단 한 가지 원인만을 말 할 수도 있다. 요즘같이 역사의 문외한 시대에서 전혀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이 문제에 대해『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카는 세 명의 수험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앞서 말했듯 한 가지로 답하는 수험생은 C 학점을 받을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 가지 원인들을 차례로 나열하는 수험생은 B 학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원인들을 정리하고 질서를 수립하고 해석하는 수험생은 A 학점을 받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A 학점을 받은 수험생답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는 완전한 역사 대신 경험주의적 역사를 주장한다. 이것이 역사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을 구분하게 된다. 가령 4‧19혁명이 1960년에 일어난 것은 역사의 사실이지만 1961년에 일어난다면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역사의 사실은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이 아니라 역사가의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명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 있다.
이밖에도 그는 역사의 일반화를 지적하고 있다. 보통 역사는 특수한 사건을 다룬다고 한다. 물론 틀리지 않다. 가령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제 2차 세계대전은 모두 특수하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가의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안에 일반화시키는 데 있다. 즉 이 두 가지 사건을 전쟁이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일반화가 중요한 것은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역사를 진보적인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가 미래를 밝혀주고 미래가 과거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곧 역사의 정당화이다. 이로 인해 그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다시 한 번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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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카를 대표하게되는 <역사란 무엇인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관심이 되고 있는 책이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꼭 읽어보아야 할 첫번째 책으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도 참 많다. 그만큼 잘 쓰여져 있는 책이다. 예전에 읽어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할 정도면 내용이 제법 괜찮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좀 더 자신의 것으로 오랫동안 만들어보고픈 독자라면 여러번 읽는 것이 정답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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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먼가.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다. 라고 대답하면 꼭 나오는 소리가 있다. 그럼 너가 쓴 과거의 기록도 역사니? 늘 이렇게 되묻는다. 지겨워 죽겠다. 위선자들은 늘 이런식이다. 내가 단언한다. 내가 쓴 일기같은 과거의 기록도 역사다. 나만의 역사라는 말이다. 위선자들의 공격을 당당히 뿌리치고 말한다. 그네들처럼 일부러 멋있게 복잡하려고 하지 말자. 역사란 과거의 기록이다. 우리가 미래의 예상을 역사라 하지 않는다. 내가 쓴 과거의 메모도 나만의 역사다. 그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역사는 뭘까. 그것은 역사가들의 몫이다. 역사가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만한, 또 수긍할만한 과거의 사건들을 고른다. 그리고 그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해두기 위해 책을 내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나 다른 역사가들은 그 사건에 대한 비판과 사실을 따지고 논의한다. 그러면서 찬성과 반대로 나뉘고 결국에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때문에 역사는 상당히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사건을 내가 고르기 때문이다. 벌써 여기서부터 주관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여러사람의 각기 다른 의견이 피어난다. 여기서 그 의견에 대한 공통 경향성이 발동한다. 그리고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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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고 상호작용이다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고 해서 훌륭한 건축가라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 본질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현재 문제에 대한 열쇠로 과거의 문제를 푼다 어떤사람도 완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조각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다. 어떤 개인이 1930년 대공항을 일으키려 했다든가 원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왜?라고 묻는 동사에 어디로?라고 묻는다. 옛날에 대학교수는 식모를 부렸지만 지금은 자기가 설것이 한다. 온 세상이 어지러운 격동은 도대체 무엇일까? 판단기준은 보편타당성아 아니라 가장 유용한 것이여야 한다. 사실은 신성하나 의견은 자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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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 자체가 막연했다. 사관에 따라 편향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 그리고 통사야 그게 그것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어떤 부분은 술술 읽히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게 하는 책이다. 다만 내 자신, 역사에 대한 인식이 막연했다는 점을 명백하게 느끼게 한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내 자신의 역사관이란 "역사란 객관적인 사실만 잘 정리해서 모으면 그 자체가 알아서 말을 해줄 것이다"였다. 그런데 많은 사실 중에 역사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가가 그걸 선택해 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역사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천페이지 만페이지의 기록이 있다고 할 때, 어떤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 선택할 것인가는 쉽지 않은 일이며 여기서부터 역사가의 편향이 나올 수 있다. 역사책에 써 있던 내용들을 아무 생각없이 읽고 받아드렸었는데 생각해 보니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의 문제 제기부터 시작해서 사회와 개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일까의 닭과 달걀같은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하며, 1)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룬다; 2)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3)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4)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 5)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중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 라는 어려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역사에서의 인과 관계에 대한 문제, 우연에 대한 문제, 그리고 역사는 계속 진보하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부터가 철학적일 수 밖에 없다. 책 내용 중에 역사가로 유명한 기번, 토인비, 버트란트 러셀, 에릭홉스봄에 대한 이야기도 회자된다. 각 저자들의 책을 일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번 이책을 통해서 어떤 비판 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할지에 관해 약간이나마나 눈을 뜨게 된 듯도 싶다. 책 주제 자체가 상당히 무겁고 어렵기에 분량이 적은 책이지만 소화가 쉽지 않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옳고 저렇게 보면 저것이 옳다는 식의 접근으로는 사실 죽도 밥도 아닌 혼란만 가중시킬 듯도 하다. 늘상 반박이나 이견을 유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관인 듯도 하다. 이런 어려운 주제안에서 나름 자신의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능력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1/1/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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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국제정치학자이다.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하고, 1916년∼36년까지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36∼47년까지 웨일스대학 국제정치학 교수로 있으면서 '타임스'지 논설위원을 겸했고 48년 유엔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장을, 그 뒤 옥스퍼드대학 교수, 55년 이후 트리니티칼리지의 고급연구원을 지냈다. 2. 감상
책을 읽으며 진척이 없었다. 주위에서 ‘수준에 맞는 책을 읽어.’ 라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들으며 꾸역꾸역 반 정도를 읽은 후 이 책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좌절감을 줄 수 있는 문구 “역사책 치고 양도 적고, 대학교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어서 중고등학생들도 비교적 무난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라는 한 지식인의 답변. 내가 지금 몇 살인고 정확하게는,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진행된 조지 맥콜리 트리벨리언 강의 내용을 엮었으며 사실 역사학 입문서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학 강좌를 책으로 만든 레오 바스카글리아의 책,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느꼈던 푸근한 강의실은 기대하기 힘들다. 책의 중간에서 언급하지만 - 나는 이 강연에서 역사란 고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목이고, 어떤 과학 못지않게 정말로 딱딱한 과목이라는 인상을 전달하고 싶다. (p.131) - 매우 딱딱하다. 만약 개론 강의 시간의 널널함을 기대하고 이 강좌를 신청한 학생이라면 어설픔은 버리고 역사학의 수준을 높이는 어렵고 딱딱한 공부를 맞이하라는 강좌 소개가 있다면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까? 그만큼 카의 역사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느껴진다. 기운차고 당당한 그의 어조는 대형 강의실을 가득 채울만한 카리스마 있는 숨가쁜 상황이 상상된다.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브레인스토밍을 해보자.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딱딱한 국사 시간? 정복과 패배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사? 그리고 괜히 멋들어진 대답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미래를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도 표현하지 않을까? 카는 역사를 연구해야 하는 ‘학문’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인상은 ‘역사’에 대함보다는 ‘역사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역사가는……’ ‘역사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는 식의 문장들이 자주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가 역사가도 아닌데 왜 이런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해주는 걸까 ’ 하며 건성으로 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카가 잡아주는 역사가의 방향을 따라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고,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됨을 점점 알게 되었다. 가장 따끈한 예로, 카가 주장하는 역사가의 역할에서 ‘도덕성 판단 여부’를 들 수 있다. 또한 역사가는 모든 상황을 배제하고 하나의 가정만을 가지고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경제학자와는 대립된다. (단지 연구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모든 원인을 파악한다. 마치 무슨 종합 선물세트 같다. 역사가는 한 시대의 사건에 대해 하나의 원인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역사가는 주 원인을 부각시키는 능력은 필요하다. 즉, 하나의 그럴싸한 선물 세트를 만드는 일이 역사가의 일이면서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역사가의 진정한 가치는 그 종합 선물 세트 안에서 주축이 될만한 아이템을, 현재의 유행을 캐치하여 중심에 배치할 때 평가된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카가 무섭다. ‘소련사’를 집대성하기 위해 30여년을 들인 그의 끔찍한 노력이 이 작은 책에서도 느껴질 것만 같다. 이 책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다. 왜냐하면 카가 본인의 주장만을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 방송 작가가 써준 대본을 가지고 토크쇼에 나온 연애인들 같다. ‘대개의 역사가들’의 의견을 표명한다. 때론 동의하고 때론 반론을 편다. 본인이 반론을 할 적에도 그럴싸한 상대의 주장을 먼저 언급을 하고 ‘난 반대한다.’ 라고 마지막에 토를 단다. 그래서 나는 이미 읽으면서 그 반대 주장에 동의를 하다가 뒤통수를 맞는다. 만약 카가 자신의 의견만을 펼쳤으면 끄덕거리고 말았을 텐데, 그는 주장을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해 모든 반론과 동의를 먼저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러한 서술 방식 때문에 이 책이 어렵다고 평을 들을 수도 있겠다. 나는 솔직하게 휴가 기간 동안 다시 읽어보고 싶다. 끝을 내고도 알지 못할 찝찝함이 남는다. 3. 초서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일 평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36) 니체, ‘어떤 의견이 오류이므로 우리가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 문제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생을 고취하고, 생을 유지하며, 종을 보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을 창조하는가에 있다.’ (46) 2. 사회와 개인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그 행렬 속에서 그가 있는 그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58) 역사가는 개인이면서 또한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바로 이 두 가지의 관점에서 역사가를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71) 익명성과 비인격성이 혼동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이기를, 또는 개인이 개인이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79) 역사에서 수는 중요하다. (80) ‘사적인 악행은 곧 공적인 이익’이라는 만데빌의 말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역사에 남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서는 무의식적인 도구가 된다.’ ‘역사적 사건 속에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역사의 경로를 틀어버리는 어떤 성질이 존재한다.’ (81) 또한 개인의 의도와 그의 행동의 결과 사이의 불일치를 진단하는 일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역사가에게 항상 맡겨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사실이란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 그리고 개인의 행동에서 본인들이 의도했던 것과 자주 모순되거나 가끔 상반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사회적 힘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 (82-3)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리면,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 (87) 3. 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것 이 용어의 문제는 영어에만 특이한 것이다. 다른 모든 유럽어에서는 ‘과학(science)’의 동의어에 어김없이 역사가 포함된다. (89) 과학에서의 진화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확증했고 보완했다. (90) 게다가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들이 조사하는 것은 사실(facts)이 아니라 사건(events)이라고 말하고 있다. (91) 자신들의 연구가 과학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서 과학에서 쓰는 것과 똑 같은 용어를 사용했고, 자기들도 과학에서와 똑 같은 연구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다. (92) 과학적 방법에 관해서 두 명의 미국인 철학자들이 쓴 표준적인 교과서는 과학의 방법이란 ‘본질적으로 순환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경험자료, 즉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의 도움을 빌려서 원리들을 위한 증거를 획득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원리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자료를 선택하고, 분석하고, 해석한다. (93) 마르크스는 이것을 법칙이라고 주장했을지 모르겠으나, 근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법칙이 아니라 연구를 진전시키거나 새로운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유효한 가설인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사유의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다. (95)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의 수집가와 구별해주는 것은 ‘일반화’이다; 그러나 일반화가 특수한 사건들이 반드시 끼워 맞추어지는 어떤 거대한 체계를 세울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01) 역사의 교훈.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 즉 어떤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하고자 한다는 것에 있다: 경험만큼 일반적인 것은 없다. (104) 역사에서의 예언의 역할 우리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이른바 과학의 법칙이란 실제로는 경향에 대한 설명,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에 또는 실험실의 상태 속에 있을 경우에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이다. (106) 개인적인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도덕의 역사는 역사의 정통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가는 자신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의 사생활에 대하여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옆길로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사가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116) ‘역사가는 재판관이 아니며, 더구나 교수형을 내리기 좋아하는 재판관은 아니다’ (118)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때문에 노동자나 채무자들이 빠져들고 있는 주인 없는 노예제’를 말하면서, 역사가는 그 제도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지 제도를 만들어낸 개인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지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121) 일단 그 제도가 확립된 이후에는 인도주의적인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점차 성장했음을 자못 감동적으로 강조할 것이다. (123) 중국 혁명이 어떤 영광이나 이익을 가져다 주었든지 간에,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서양인이 소유한 개항장의 공장에서 또는 남아프리카의 광산에서 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에서 일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경우란 거의 없다. (124) 역사적 행위를 판단케 해줄 수 있는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127) 내가 제안하려는 하나의 해결책은 우리 역사학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 역사학을 – 감히 말하건대 – 더욱 과학적으로 만드는 것,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요구사항을 더 엄격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 대학교에서도 학문적인 과목이어야 할 역사학이 고전은 너무 어렵고 과학은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을 위한 잡학 비슷한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나는 이 강연에서 역사란 고전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목이고, 어떤 과학 못지않게 정말로 딱딱한 과목이라는 인상을 전달하고 싶다. 틈새를 메우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목표가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환경에 관한, 다시 말하여 환경에 대한 인간의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연구의 목표도 동일하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131) 4.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134) 요컨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개인적 원인 및 장기적 원인과 단기적 원인을 마구 주워 모을 것이다.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신이 수집한 원인들의 목록을 앞에다 놓고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든가, 그들간의 상호관계를 고정시키게 될 원인들의 일정한 위계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나 어떤 범주의 원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또는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말투를 따르면) ‘최종적인 분석에 따라서’ 궁극적인 원인, 즉 모든 원인들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강박감을 느낄 것이다. (137) 모든 역사적 논의는 어떤 원인이 우선하는가 하는 문제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다양성과 복잡성을 향해서’ 그리고 동시에 ‘통일성과 단순성을 향해서’ (138) 그 비난의 주요한 출처는 굳이 이름을 붙여 보자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might-have-been)’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 보다 정확하게는 그런 식의 감정을 가진 – 학파가 아닐까 생각된다. (147) 우연을 인과적 결정의 부재와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151) 나는 역사에서의 우연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 속에서 추구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156)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선택체계(selective system)’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이다. 역사가는, 끝없는 사실의 바다에서 자신의 목적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인과적 전후관계 중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오직 그런 것만을 추출해낸다; 그리고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전후관계를 자신의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의 모형에 짜맞추는 역사가의 능력이다. (160) 5. 진보로서의 역사 ‘과거에 대한 무엇인가 건설적인 견해’ (166) 우리는 진보에 일정한 출발점이나 종점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 문명은 결코 어떤 발명품이 아니라 아마도 때때로 발생했을 극적인 비약이 수반된 무한히 점진적인 발전의 과정이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한 것은 진보에 일정한 종점이 있다는 가설이었다. (172-3)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역사의 밖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179) 우리의 방향 감각, 즉 과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우리가 전진함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고 발전할 수밖에 없다. (183) ‘과거는 상상하고 미래는 기억한다’ 고 말하고 있다. 오직 미래만이 과거의 해석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는 역사에서의 궁극적인 객관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과거가 미래를 밝혀주고 미래가 과거를 밝혀주는 것,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정당화인 동시에 역사의 설명이다. (185) 또한 역사는 신학 – 즉 인간의 성취에 관한 연구가 아닌 신의 목적에 관한 연구 – 으로, 아니면 문학 – 즉 목적도 중요성도 없는 꾸며낸 이야기와 전설을 들려주는 것 – 으로 전락할 수 있다. (187) 6. 지평선의 확대 ‘당’은 계급의 전위로 구성되며 그 전위에게 계급의식이라는 필수적인 요소를 주입한다. (206) 그러나 자유방임경제에서 관리경제(그것이 자본주의적 관리 경제이건 아니면 사회주의적 관리경제이건, 그 관리가 대자본가에 의해서,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사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수행되건 아니면 국가에 의해서 수행되건)로의 이행과 함께 이 환상은 사라졌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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