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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Metropolis,1927,프리츠 랑)'_독일 표현주의 거장의 묵시록적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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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표현주의 거장의 묵시록적 비전 -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 프리츠 랑(Friedrich Christian Anton "Fritz" Lang) 감독에 대하여 프리츠 랑 (1890~1976)브레히트의 친구였으며, 루카치가 증오하는 예술가였고, 벤야민이 찬미했으며, 아도르노가 비난했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 그는 건축학과 미술을 공부한, 괴테와 말러의 찬미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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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표현주의 거장의 묵시록적 비전 -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 (1927)



프리츠 랑(Friedrich Christian Anton "Fritz" Lang) 감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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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랑 (1890~1976)

브레히트의 친구였으며, 루카치가 증오하는 예술가였고, 벤야민이 찬미했으며, 아도르노가 비난했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 그는 건축학과 미술을 공부한, 괴테와 말러의 찬미론자였다.

189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건축과 미술을 공부하며 젊은 시절을 보내다 독일영화사에 취직해 시나리오를 썼고 군생활을 마친 후 영화판에 뛰어든다. <혼혈>(1919, 미상영)로 데뷔한 그는 독일 낭만주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 <운명>(1921)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키게 된다. <마부제 박사>(1924)를 만들면서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와 함께 독일 무성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 그는 <메트로폴리스>(1927), <엠>(1931) 등을 통해 당시 독일사회 공기의 불안과 공포를 알레고리적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했다. 이는 ‘영화는 시대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던 랑의 영화적 신념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가 1933년에 만든 <마부제박사의 유언>이 독일 나치에 의해 상영 금지되자 그는 괴벨스에게 호출되어 가지만 뜻밖에도 나치영화를 제작해 달라는 히틀러의 부탁을 전달받고는 자신의 유태계 신분이 들통날까봐 그날 밤 프랑스 파리로 야간도주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랑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우파(UFA)영화사 스튜디오에서 마음껏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입지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나치에 대한 공포와 저항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러한 그의 심리는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음을 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나치스 당원이었던 아내를 두고 몰래 미국으로 망명한 랑은 독일 시절처럼 대작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할리우드 시절 그가 만든 영화는 다소 굴곡이 있으나 모두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는 어떤 압도적인 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스며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1935년 미국 시민이 된 후 첫 영화인 걸작 느와르 <빅 히트>를 시작으로 하여 <타당한 의혹>(1956)을 마지막으로 할리우드 영화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 그의 마지막 영화인 <마부제 박사의 천개의 눈>(1960)을 완성한다.  LA 비벌리 힐스에서 1976년 86세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프리츠 랑은 오늘날 할리우드 장르영화에 유럽의 모더니즘적 예술 장르를 접목시킨 감독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 표현주의와 <메트로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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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오리지널 포스터

 1920년대의 베를린은 연극이나 오페라, 그리고 영화 분야에서 세계의 중심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인적 자원과 숙련된 기술, 전문 지식을 배경으로 독일은 세계 영화 산업을 이끌었다.1)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놓여 있었던 상황 때문에 독일에서는 패전의 굴욕감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정치적 패닉 상태에서 야기되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극단적이고 초현실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회화와 영화의 양식이 발달했으며 이것은 이후 이탈리아의 리얼리즘과는 반대의 축을 이루게 된다.

독일 영화는 규모적 측면에서 점점 늘어갔으며 스튜디오 내부를 거대한 우주로 만드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프리츠 랑은 뒤늦게 합류하였는데 19세기적 교양을 가진 프리츠 랑에게 영화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표현주의 회화와 소리 없는 오페라2)였다. 또한 영화에서 ‘프레임 안에 온 우주가 존재해야 한다’라고 믿은 시네아스트였던 프리츠 랑이 1927년에 만든 영화 <메트로폴리스>는 촬영감독 카를 프로인트와 귄터 리타우, 미술감독 오토 훈테와 에리히 케텔후트, 카를 볼프레히트 같은 표현주의 영화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독일 최대의 촬영소인 우파 스튜디오에서 310일에 이르는 촬영기간이 소요된 대작으로, 이후 수없이 쏟아진 할리우드 느와르와 SF영화의 원형이 되었다. 또 다른 표현주의 감독인 무르나우가 회화적인 표현주의를 추구했다면, 랑은 이 영화를 통해 건축적인 표현주의 양식을 완성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메트로폴리스>의 배경


총 81개 씬으로 구성된 <메트로폴리스>는 자본주의의 기계문명시대를 배경으로 한 최초의 ‘대도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대도시 속의 인간의 모습은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묘사되며 대도시는 기계문명에 대한 불안으로 얼룩진 디스토피아를 상징하고 있으며 도입부의 고층빌딩, 거리장면, 공중의 다리들은 극단적인 조명과 세팅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또한 풍요로운 지상세계와 비참한 지하세계가 극명하게 대조시킴과 더불어 마리아를 복제한 로봇 설정은 인류문명이 ‘성장의 한계’에 다다랐음을 웅변한다. <메트로폴리스>는 전체적인 스토리, 배우들의 연기, 압도적인 세트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있어 놀라운 완성도와 혁명적인 시도들이 돋보이는 영화로 평가받는 반면 당시 혼란한 독일을 재건하는 방법으로 나치즘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많은 비판 역시 받아 왔다.3)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메트로폴리스>의 표현양식은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SF장르, 그중에서도 디스토피안 비전의  원형이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모더니티와 <메트로폴리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도시의 이미지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마천루로 대표된다. 건축과 미술을 공부한 감독의 성향답게 그 당시 상상력으로는 획기적이었을, 현대적이고 입체적인 구조의 건축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부르주아들의 지상도시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조명과 그것을 반사하는 유리건물4)로 현란하고 화려한 미래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프리츠 랑이 창조한 미래의 대도시에는 그 안을 바삐 오가는 자동차들과 열차, 소형 비행기들이 떠다닐 뿐 인간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대도시의 풍경은 독일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이 제시한 대도시적 풍경과 상당부분 겹쳐지는데 짐멜은 1903년 자신의 에세이 <대도시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tal Life)>에서 도시가 개인들의 ‘내적 생활’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도시의 개인이 서 있는 심리학적 기초는 외적 내적 자극의 지속적이고 신속한 이동에 의한 정서적 삶의 강화이다...(중략) 도시 거주자는 변화하는 이미지들의 빠른 움직임, 단 한번의 눈길로 파악할 수 있는 것 내부의 차이들과 예견하지 못했던 폭력적 자극을 처리할 수 없다.”5) 그리고 그 도시를 직접 세운 노동자들의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지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우울한 시대적 풍경의 이중성은 대도시와 대조되는 노동자들의 지하 세계의 묘사에서 더욱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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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의 지상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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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의 지하세계


 스토리


미래 도시 메트로폴리스는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행복하고 안락한 부르주아들의 지상낙원이고, 또 하나는 온통 기계로 둘러싸인 노동자들의 지하세계다. 지상의 가진 자들은 지하의 빼앗긴 자들의 노동의 대가로 천국을 향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상세계를 움직이는 자본가의 아들 프레더가 ‘영원의 정원’에 들어온 마리아를 우연히 만나고 그녀에게 반하게 된다. 그녀는 노동자들에게 성녀와도 같은 존재다. 그녀를 좇아 비밀의 문을 통해 끔찍한 지하세계로 내려가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프레더는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한편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된다. 그러나 프레더의 아버지, 메트로폴리스의 설계자인 프레더슨은 과학자 로트왕을 시켜 마리아와 똑같은 로봇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도시를 교란시키도록 하는 음모를 꾸민다. 로트왕은 마리아를 납치한 뒤 로봇 마리아를 만들고 그녀를 지하세계로 내려 보낸다. 로봇 마리아는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을 향해 전진한다.

랑이 만들어내는, 이 어둡고 음침하면서도 무섭도록 열광적이고 흥분을 자아내는 계급투쟁의 우화는 공상과학영화라는 형식 속에서 무성영화 특유의 압도적인 시각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는 독일 영화의 새로운 전통을 위해 당대 러시아 영화의 몽타주나 프랑스 영화의 아방가르드 전통을 모두 무시했다. 그 대신 영화 전체를 거대한 건축적인 유기체처럼 설계하고, 그 속에서 집단적 움직임과 기하학적 구도,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와 그 사이로 늘어선 기형적인 세트, 기계적인 카메라의 이동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시각적 요소


 이 영화는 무성영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자막 형식을 벗어나 다채로운 텍스트의 배열과 폰트의 변형을 비롯하여 필름에 더해진 애니메이션 효과들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의 초반부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지하세계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아들의 정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자막은 피라미드와 같은 삼각형을 형성하며 아래로부터 위로 솟아오른다. 또한 마리아가 ‘요시와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셉과 함께 요시와라를 찾아간 프레더는 춤을 추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공장에서 보았던 환영을 떠올리며 ‘몰록!’하고 절망스럽게 외친다. 그 때의 자막은 실제로 들을 수 없는 육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는 듯한 날카롭고 극단적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이 때 바탕에 흐르는 배경음악이 함께 고조되며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영상에 직접 효과를 입힌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프레더가 아버지인 프레더슨과 마리아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는 장면에서처럼 피사체를 분열키는 듯한 화면 효과나 로트왕이 로봇 마리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실험 장면들, 또한 춤추는 로봇 마리아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음흉한 시선을 처리하는 장면들에서 구현되는 각종 효과들은 직접 연관되는 사운드의 삽입이 없이도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시각성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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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효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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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영화의 특징으로 꼽히는 조명의 역할 역시 이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극단적인 조명이 영화 속 내러티브와 잘 결합이 된 부분은 카타콤에서 로트왕이 마리아를 납치하려고 하는 장면이다. 그는 마리아를 공포에 몰아넣기 위해 지하 납골당의 이곳저곳을 손전등으로 비추고 마리아는 점점 겁에 질려 빛을 피해 도망 다닌다. 이러한 효과 역시 오늘날의 공포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으로 등장한다. 또한 바벨탑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 프레더슨의 얼굴에 도시의 네온과 각종 불빛들이 비치는 장면 또한 영화의 조명 효과가 두드러지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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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을 향한 인간의 꿈


영화 속 로봇 마리아의 등장은 인간의 비주얼을 흉내낸 로봇의 영화 속 최초의 등장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이것이 상당히 획기적인 비주얼로 비쳤을 것이다. 사람들이 ‘로봇’이란 존재에 대해 떠올리는 (사람과 유사한 외양의) 시각적 이미지는 19세기 후반 그 초기 모델이 나타났는데 이 상상력의 시초는 1883년 이탈리아의 작가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가 창조한 ‘피노키오’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6) 하지만 20세기에 들어 서구인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현대 문명을 온통 강철의 이미지로 도배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유사’인간에 대한 상상력은 나무 인형의 이미지에서 훨씬 ‘모던’한 금속기계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1920년 카렐 차펙의 희곡을 통해 로봇은 신기한 금속인형에서 벗어나 산업경제에 철저히 귀속된 기계노동자, 그것도 세상을 뒤엎으려는 불만에 찬 위험한 존재로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1924년 사회주의 소련에서 제작한 최초의 SF영화 <로봇의 반란>에는 금속 옷을 입은 외계병사(로봇?)가 등장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점을 꼬집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한 로봇 마리아도 그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봇 마리아는 당시 서구인들의 로봇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의 양면성을 드러내며 극히 세련된 여성 로봇의 메카닉 디자인은 요즘 관객들이 봐도 그 매혹적인 힘에 탄성을 자아내게 할 정도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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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마리아가 만들어지는 과정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인 마리아의 모습을 꼭 닮은 로봇을 만들게 한 것은 도시의 설계자 프레더슨이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로봇 마리아를 만드는 사람은 과학자 로트왕이다. 로봇 마리아가 프레더슨에게는 노동자를 교란시킬 정치적 목적의 도구였으며 로트왕에게 있어서는 사랑하는 여인 헬의 재현이자 프레더슨의 도시를 무너뜨릴 무기와도 같은 존재로 이용되었다. 여성의 신체적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구현이 남성적 주체에 의해 행해진다는 측면에서 이 부분은 페미니즘적 관점으로도 비판적 해석이 가능하며 또한 그동안의 파괴적 기술과학 문명이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발달해 왔고 그러한 욕망이 결국 과학문명의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온다는 점 또한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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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을 통해 헬을 부활시키려는 로트왕

또한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프레더를 낳다가 죽은) 헬을 잊지 못하고 있는 로트왕은 그의 한 쪽 손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희생되었음을 암시하며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로봇을 만들었노라고 프레더슨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리아를 보고 ‘헬’이라고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간다. 이 장면들에서 로트왕이 보여주는 로봇을 향한 애정은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대체할 사이보그를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불온한 꿈을 드러내지만 이것은 엄연히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로트왕이 로봇을 통해 재현하고자 했던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 ‘헬(Hel)’은 ‘Hell(지옥)’을 연상시키며 결국 로트왕을 죽음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려진 계급사회


프레더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메트로폴리스의 설계자인 요한 프레더슨에게 묻는다. “이 도시를 만든 자들은 어디에 있나요?” 그 말에 프레더슨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에게 알맞은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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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몰록. 프레더의 환영이다.

프레더슨이 말한 “그들에게 ‘알맞은’ 곳은 저 웅대한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이지 않는 지하 세계를 말한다. 그 곳에서 하루에 10시간씩 시계 부품들을 조이고 풀고 당기고 밀면서 쉬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기계의 일부로 그려진다. 메트로폴리스를 유지하기 위한. 그들은 기계들의 작동에 맞추어 움직이고 조종된다. 그들이 공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는지에 대한 개연성은 드러나지 않지만 기계에 맞춰, 혹은 영화의 배경음악에 맞춰 로봇처럼 움직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동작은 오히려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의도적으로 연출된 듯한 율동으로 보임으로써 더욱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낸다.8) 그들의 노동은 그들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도시를 위한, 그 대도시에 살아가는 부르주아들을 살찌우기 위한 것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도시의 부품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숙명을 드러내는 시퀀스인 것이다. 일을 마치고 힘겹게 지하 도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부르주아의 아들들은 ‘아들의 클럽(The Club of Sons)’이 등장한다. 이 곳은 아테네 경기장과 같은 느낌을 주는 화사하고 예술적인 조형물들이 돋보이는 공간으로 이 곳에서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부르주아의 자식들은 이 대도시를 만든 노동자들의 존재를 모른 채 그저 대도시의 모던함, 세련된 문명만을 향유하는 집단이다. 그들에게 노동의 고통이나 삶의 고민 따위는 없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힘겹게 일터를 기계적으로 오가는 모습과 지상에서 자유롭게 경주하는 (부르주아의) ‘아들들’의 모습은 명확히 대비된다.

프레더가 마리아를 처음 만나는 ‘영원의 정원’의 시퀀스에서 역시 계급의 대조는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왠지 인공적이고 기하학적인 느낌이 들지만 영화 속에서 유일한 자연환경을 갖춘 공간으로 묘사되는 ‘영혼의 정원’은 어둡고 음습한 지하세계와 가장 잘 대비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화려하고 현대적인 옷차림의 여인들과 어울려 방탕하게 놀고 있던 프레더 의 눈앞에 우연히 남루한 옷차림의 마리아가 노동자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난다. 마리아는 프레더와 여인들, 하인들을 바라보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봐라, 저들이 너희의 형제들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기품과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를 바스트샷으로 오랫동안 비추고 충격을 받은 듯한 프레더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중재자’와 ‘성녀’가 만나는 순간은 이처럼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마리아를 만나기 위해 프레더는 지하의 거대한 공장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육중한 기계들과 무기력해 보이는 노동자들로 가득 찬 어두침침한 공장 안에서 프레더의 흰 옷은 유난히 빛이 난다. 우연히 공장의 사고를 목격하게 된 프레더는 그 곳에서 첫 번째 환영을 보게 된다. 그것은 공장의 거대한 기계가 몰록9)으로 변해 노동자들을 집어 삼키는 장면이다. 바로 이런 끔찍한 지하세계가 바로 프레더슨이 말한 ‘노동자들에게 알맞은 곳’인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현실 속에서 각각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프레더는 공장으로 다시 찾아갔다가 한 노동자와 옷을 바꿔 입고 직접 노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울부짖는다. “아버지, 10시간이 이렇게 괴로운 시간인 줄 몰랐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


이 영화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독교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우선 주인공들의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주인공의 이름은 (동정녀 혹은 막달라) ‘마리아’이며 프레더를 돕는 조력자의 이름은 성경에서 ‘예수의 그림자’로 묘사되는 ‘요셉’10)이다. 프레더의 아버지이며 도시의 설계자의 이름인 요한 프레더슨에서 ‘요한’은 성경에서 계시록을 기록한 인물이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의 머리(도시의 설계자)와 손(도시의 노동자)을 중재할 임무를 가진 ‘중재자’ 프레더는 바로 ‘예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공장에서 노동자와 옷을 바꿔 입고 노동에 동참하는 프레더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 예수의 행적을 암시한다. 또한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는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은유이며 설계자인 요한 프레더슨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이름도 ‘바벨’이다. 지하 납골당 카타콤에서 마리아는 노동자들에게 바벨탑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벨탑이 무너지게 된 것은 ‘머리’(바벨의 설계자)와 ‘손’(바벨의 노동자)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둘을 중재해 줄 존재 ‘심장’이 나타날 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마리아는 프레더를 보는 순간 그가 중재자임을 한 눈에 알아본다. 이는 대중이 인간을 구원하러 세상에 내려올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마리아는 일종의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프레더는 몇 가지 환영을 목격하게 되는데 첫 번째 환영이 바로 노동자를 집어삼키는 성경 속 고대의 신 ‘몰록’에 대한 환영이며 두 번째는 성당의 신들이 창을 휘두르며 세상에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장면, 또 프레더슨의 부하 슬림이 꿈 속에서 목사로 변해 세상에 내려온 악마가 묘사된 성경 속 구절을 읽어주는 등의 장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프레더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번뇌하고 괴로워 하지만 그가 소유한 꿈이나 환영을 통해서 현실을 통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그의 존재를 신격화하는 기능을 한다. 이렇게 이 영화 전체에 드리운 거대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당시 독일이 처해 있던 패전 이후의 정신적 패닉 상태와 모더니티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 자본주의로 인한 계급 간 갈등과 함께 유태인으로서의 프리츠 랑의 정체성이 작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메트로폴리스>의 SF적 요소


디스토피안 SF의 효시라고 불러도 될 만한 이 영화에는 이후 할리우드를 비롯한 숱한 영화의 전형인 클리셰로 쓰이게 된 시도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을 시각적 요소와 내러티브적 요소로 분류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SF 영화의 전형적 요소

<메트로폴리스>

영향을 받은 후대 영화

시각적

요소

마천루의 풍경

메트로폴리스를 가득 메운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축물들

<블레이드 러너>(1982),

<공각기동대>(1995),

<제 5원소>(1997),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과학자의 실험실 풍경

로트방이 로봇 마리아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각종 실험도구들

<프랑켄슈타인>(1931),

수많은 애니메이션에서 변주

사람을 닮은 로봇

마리아의 외모를 닮은 로봇 마리아

<블레이드 러너>(1982),

<바이센테니얼맨>(2000), <A.I.>(2001),

<터미네이터>(1984)

내러티브적

요소

디스토피아 혹은 부조리한 사회 체제

지상, 지하로 나뉜 메트로폴리스의 이중적 구조

<THX-1138>(1970),

<브라질>(1980),

<아일랜드>(2005),

<브이 포 벤데타>(2006), <이퀼리브리엄>(2003)

변화하는 주인공

초기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프레더가 마리아를 만나고 지하도시의 참상을 알게 된 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THX-1138>(1970),

<아일랜드>(2005)

체제의 희생물 혹은 주인공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주인공의 연인의 역할

마리아는 프레더에게 그의 ‘중재자’로서의 임무를 일깨우지만 로트왕에게 납치되어 로봇 마리아가 만들어지는 데 이용된다.

<THX-1138>(1970)

‘미친 과학자’의 등장

프레더슨의 친구이자 과학자인 로트왕

<프랑켄슈타인>(1931)


표 1. <메트로폴리스>의 SF적 요소 분류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 마리아


 독일 출생의 여배우 브리짓 헴(Brigitte Eva Gisela Schittenhelm)이 1인 2역(마리아와 가짜 마리아)을 연기한 여주인공 마리아는 이 영화에서 표현주의를 포함한 그 당시의 어떤 영화보다도 급진적이면서 영화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인물로 그려진다. 동정녀 마리아와 (창녀로 알려진)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여주인공 마리아는 처음 ‘영원의 정원’에서 프레더와 마주쳤을 때부터 ‘성녀’의 아우라를 풍긴다.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바벨탑 이야기를 전하는 그녀는 지하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내할 것을 요구하고 믿음을 가지라고 설득하는 등 노동자들을 계몽하는 유일한 지식인으로 묘사되며 프레더에게 그가 지닌 ‘중재자’로서의 임무를 일깨우는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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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8,19,20 마리아의 ‘성녀’ 이미지

 반면 과학자 로트왕에 의해 마리아와 똑같은 외모로 만들어진 로봇 마리아는 프레더슨과 로트왕으로부터 각각 임무를 부여받아 노동자들의 도시로 가서 그들의 믿음을 교란시키고 환락가 ‘요시와라’에서는 부르주아 청년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역할을 한다. 로봇 마리아일 때 그녀의 교태스러운 몸짓과 음란한 눈빛, 선동적인 언행은 도시의 모든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며 특히 그녀가 ‘요시와라’에서 춤을 출 때 입고 있는 선정적인 의상이나 춤의 동작, 원시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와 함께 그녀를 바라보는 수많은 남자들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창녀’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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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1,22,23 로봇 마리아의 ‘창녀’ 이미지


 성녀·창녀 콤플렉스의 모티프는 이 영화에서 좀더 정치적으로 변주되는데 로봇 마리아가 사회를 교란시키기 위한 전략으로써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각기 다른 방식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삶에 지치고 변화를 꿈꾸는 노동자들의 피해의식을 부채질하고 부르주아를 향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아무 근심 없고 환락에 빠져 있는 부르주아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을 성적인 이미지로 유혹하여 서로를 질투하고 증오하게 만든다. 그러한 측면에서 로봇 마리아는 인간의 부도덕한 심리를 이용하여 주인공을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적 이미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노동자들에게 ‘마녀’로 몰린 로봇 마리아는 노동자들에 의해 화형을 당하게 되는데 여기서 ‘화형’이라는 처벌 방식은 고대 유럽에서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거나 특히 15~17세기 유럽에서 횡행했던 마녀 사냥 당시에 널리 쓰인 처형법으로 이 영화에서 프리츠 랑이 연출한 화형 시퀀스는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로봇 마리아를 화형시키자고 주장하는 영화 속 노동자들의 모습에는, 악한 짓을 한 마녀·마귀는 그 신체를 파멸시켜 완전히 근절하지 않고는 악마의 힘을 깨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중세 유럽의 시대적 관념11)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화형이 독일에서는 1749년에 법으로 금지된 처형법이며 근대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특히 <메트로폴리스>와 같이 미래적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 안에서 연출되는 화형 장면은 초근대성과 원시성이 공존하고 서로 충돌하는 모순적인 사회상을 더욱더 강조하는 효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시에 로봇 마리아를 화형대에 올리는 노동자 계급이 중세 유럽의 집단적 광기12)와 동일한 (시대에 뒤떨어지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는 곧 기계문명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랑은 로봇 마리아의 이미지를 잔 다르크에서 착안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영화에서 화형당한 로봇 마리아는 인간이 아니라 금속 재질로 이루어진 ‘로봇’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의 아이러니함은 강화된다. 화형대 위에 선 채 불이 붙여진 로봇 마리아는 계속해서 몸을 기형적으로 비틀면서 웃거나 사람들을 노려보는 등의 행위를 하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더 큰 공포를 느끼게 되며 마지막 순간 로봇 마리아가 금속 로봇으로 변하게 되는 언캐니한 광경(과학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지는)에서 군중들은 경악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가 다시 인간에 의해 처단되는 현상에 대해 피조물들이 인간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로맨스적 요소의 불협화음


최첨단의 영화 기술과 미래지향적인 상상력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프리츠 랑은 이 영화에서 프레더와 마리아의 로맨스를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대중을 염두에 둔 지나친 설정이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도 이 영화는 그러한 지점에서 역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노동자들이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고 홍수가 나서 메트로폴리스의 지하세계가 물에 잠기는 시퀀스에서 마리아는 부모와 떨어져 도시에 남겨진 아이들을 물 속에서 건져내고 있다가 프레더와 조우하게 되자 바로 아이들에게서 손을 거두고 프레더와 진한 키스를 나눈다. 그 때까지 영화는 물에 점차 잠겨가는 노동자들의 마을과 혼란에 빠져 울부짖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어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키스로 인해 영화의 흐름은 뚝 끊겨버리게 된다.  


영화 속 오리엔탈리즘적 요소


이 영화 속에서는 서구중심적 시각에 비친 오리엔탈리즘적 관점 또한 목격되는데 가장 먼저 메트로폴리스의 환락가의 이름이 일본어인 ‘요시와라’라는 점을 지적할 수가 있다. 일본 에도 시대에 도쿄에 있었던 유곽가의 이름을 따온 ‘요시와라’는 명칭은 그 자체가 성적인(또는 에로틱한) 쾌락이 타자적 문화의 ‘이국 정서’와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며 영화 안에서도  환락적이며 퇴폐적인 광경들이 연출되는 장소로 묘사된다. 영화 속 상징적 장소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본래 단어의 뜻에 담긴 의미도 그렇지만 이는 일본의 발음에서 연상되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효과도 노렸음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요시와라’에서 춤을 추는 로봇 마리아는 고대 바빌로니아풍의 머리 장식을 하고 이국적인 느낌의 시스루 소재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녀는 화려하며 거대한 회생제단을 타고 서서히 솟아오른다. 그녀의 춤동작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성애화되고 자극적인 율동은 고대의 ‘퇴폐적’ 분위기, 특히 어느 외국(아마도 중동) 문화의 분위기를 풍기게끔 연출된다.13) 이것은 바벨탑이 지어졌던 지역 바빌론 풍의 이미지와 성경에 나타난 ‘악마’의 모습을 동시에 재현하는 있는 장면이며 앞서 언급했던 고대 신 ‘몰록’의 환영 장면과 함께 성경과 신화에서 발견되는14) 퇴폐적이고 악마적인 이미지와 비서구 지역의 원시성15)을 결합해 메트로폴리스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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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4,25,26 이국적이며 퇴폐적으로 묘사된 로봇 마리아의 춤추는 장면



상부/하부구조와 상승/하강의 구도


영화에서는 끊임없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영화의 배경인 메트로폴리스의 구조가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영화의 앞부분에서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터로 내려가는 장면(하강)을 그 예로 살펴볼 수 있다. 반면 프레더슨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바벨’은 메트로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그의 사무실은 ‘바벨’탑 중에서도 그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프레더는 스스로 지하로 내려가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게 되며 노동자들은 마리아에게 ‘말씀’을 듣고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그들의 지하세계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있는 납골당 카타콤으로 내려간다. 거기서 마리아가 들려주는 성경 속 이야기인 ‘바벨탑’ 역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최고로 높은 탑을 쌓다가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탑을 무너뜨리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두 번째 ‘상승’의 이미지는 ‘요시와라’에서 로봇 마리아가 선보이는 일종의 ‘쇼’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속이 비치거나 상체가 거의 드러나는 의상을 입은 채 성경 속의 악마로 묘사된 머리가 일곱 달린 괴물의 등에 올라탄 채 무대 아래에서부터 솟아오른다. 이렇게 상승의 동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그녀는 결국 도시의 잔해물들 위에 높이 쌓아올려진 화형대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로봇 마리아에 의해 선동된 노동자들은 지하세계에서 메트로폴리스의 핵심인 M-machine을 부순 후 지상세계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광분에 사로잡혀 서로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위해 다투는 노동자들의 광경은 흡사 아비규환을 연상시킨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후반부, 성당에서 로트왕에게 쫓기던 마리아는 그를 피해 계단에서 뛰어내려 극적으로 종의 줄을 붙잡는다. 그 때 울린 종소리를 들은 프레더가 달려와 마리아를 구출하게 된다. 이것 역시 위로부터 아래를 향한 동선이 생명을 향한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또한 로트왕과 프레더가 성당의 옥상에서 싸움을 벌일 때 로트왕은 마리아를 업은 채 지붕 위를 기어 올라간다. 하지만 프레더와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로트왕은 추락하여 죽고 만다.

이처럼 영화 속에 드러나는 상승의 동선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게 됨으로써 영화는 절대자가 자리하고 있는 ‘높은’ 곳과 그의 백성이자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낮은’ 곳의 대비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한다. 지하세계의 노동자들은 지상세계의 부르주아들을 상대로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그 부르주아들 역시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로봇 생명체를 만들거나 높은 탑을 쌓는 등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도(혁명)는 실패로 돌아갈 운명을 지녔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영화 내 설정들은 무산계급들에게 체제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부르주아들의 횡포를 정당화함과 동시에 절대권력(중재자가 아닌)으로서의 나치즘의 등장을 예고한다는 면에서 충분히 비판받을 만 했다.

영화 속에서 상승의 동선을 보여준 인물들 중에서 처단되지 않은 대상은 노동자들의 어린 아이들 뿐이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지하세계에서 고립된 아이들은 프레더와 마리아, 요셉의 도움으로 지상세계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가 죽음을 면하게 된다. 어린아이만이 유일하게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지상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을 연상시키는 ‘주인님의 아들’인 프레더와, 프레더슨과 노동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아들’에 대한 애정 등 인간이 본연적으로 자신보다 생물적 하부 구조에 놓인 존재에 대해 갖는 감정(사랑)의 순수성 역시 강하게 드러난다.


 

클라이맥스


영화의 중반 부분 영화는 세 가지로 분류된 군중씬을 차례로 비추며 극의 긴장감을 더해 간다. 맨 처음 공장의 기계들을 부수고 지상세계로 몰려가는 노동자들의 그룹이 나오고 두 번째는 ‘요시와라’에서 로봇 마리아와 함께 ‘세상이 악해지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몰려나온 환락자들의 무리다. 그리고 마지막은 물에 잠겨가는 도시에서 구출된 노동자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프레더에 의해 ‘아들의 클럽’으로 이동한다. 번갈아 가며 차례대로 보여지는 군중씬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구성함과 동시에 그 시대 영화에서 보기 힘든 스케일을 구사하여 독일 영화의 부흥과 스튜디오 제작 시스템의 힘이 한 눈에 읽혀지도록 하는 대목이다.

이제 영화 안의 모든 인물들이 모두 한 장소(도시의 성당 앞)로 모여든다. 로봇 마리아를 찾기 위해 모여든 노동자들, 제정신을 잃고 ‘헬’을 찾아 나선 로트왕, 프레더를 찾아 노동자들을 찾아온 프레더슨, 마리아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프레더와 요셉 등의 인물들의 이동이 보여주는 역동성은 영화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응집시키고 로봇 마리아를 불태워 죽이는 것으로 그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메트로폴리스>의 체제굴복적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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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부르주아의 화해는 또 다른 부르주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제 이 영화의 ‘옥의 티’로 지적받는 결말 부분이다. 봉기가 끝난 후 한 곳에 모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들 앞에서 프레더슨이 내민 손을 노동자들의 대표 그로트는 쉽게 잡지 못한다. 그 순간 마리아는 프레더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심장이 중재하지 않으면 머리와 손은 이해하지 못해요.” 결국 프레더가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게 만들고 영화는 끝이 난다. 여기서 발견되는 이 영화의 한계는 유산자(머리)와 무산자(손) 계급의 극적 화해가 부르주아 신분인 중재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민중 스스로 일으켜진 혁명이 사회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그 혁명이 부르주아에 의해서 중재가 되는 한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또한 지하세계 노동자들에게 ‘중재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호소한 마리아 역시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었다는 점 역시 지적될 만 하다. 최소한 영화상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은 공장에서 노동하지 않으며 메트로폴리스의 지하세계 사회 안에서 일종의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식과 믿음을 전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적으로 혁명을 주동하지 않으며 마지막에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를 화해시키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또한 노동자들의 혁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사회 구조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메트로폴리스’는 노동자들이 공장의 기계를 부수면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인 지하세계가 물에 잠기도록 되어 있는 구조다. 그래서 프레더슨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만한 구실이 생길 때까지 사태를 방관한다. 그런 그가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노동자들 사이에 자신의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야 나서다. 이렇듯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의 혁명에 무관심하며,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에마저도 지하세계가 물에 잠기고 아수라장이 되는 반면 지상의 메트로폴리스는 건재하다.

또한 노동자들의 존재는 무모하고 무책임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자신들의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주체적이지 못하며 그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누군가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중재자의 존재만을 믿고 기다리며 스스로 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로봇 마리아의 선동에 의해 기계를 부수고 공장장인 그로트에 의해 아이들의 존재를 떠올리고 슬퍼한다. 그리고 그 화살을 로봇 마리아에게 돌려 그녀를 화형시킨다.) 이 영화에서 대중은 혁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자각을 갖추지 못한 무지한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켜 줄 중재자의 출현을 그토록 고대했지만 결국 그 중재자에 이끌려 부르주아와 얼떨결에 화해하고는 다시 지하로 내려가 노동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언뜻 평화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평화 안에 더욱 큰 모순과 부조리 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평화는 더욱 공포스럽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극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은 그들의 비극이 부르주아들의 지상세계에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는 결점들은 결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가 종교와 부르주아의 ‘중재’에 의해 결코 밖으로 노출되거나 해결되지 않게 되는 현실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6) 프리츠 랑 역시 이후에 영화의 이러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이는 프리츠 랑의 아내이자 영화의 각본을 썼으며 나치스 당원이었던 테아 폰 하르보우Thea Von Harbou의 성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Epilogue


프리츠 랑 감독은 살아 있을 때 그의 완성도 높은 작품들에 합당하는 대우를 받지 못한 불운의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정신은 시대적 배경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시대적 조건이 지닌 한계 때문에 그 예술성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측면도 있다. 또한 영화를 보는 도중 원본 필름 중 유실된 부분이 자막으로 대체된 장면들이 있는데 걸작의 온전한 필름을 감상할 수 없다는 현실과 이제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나머지 장면들에 대한 궁금증은 영화사에 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일의 표현주의의 모든 장르의 예술을 집대성한 ‘메트로폴리스’가 우리에게 아직 위대한 독일 영화 부흥 시기를 증명하는 유품으로 남았다는 것이며 이후 수많은 영화들의 시각적 상상력과 종합예술의 집합체로서의 영화 작업의 양식17)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프리츠 랑이 영화의 처음과 말미에서 강조한 ‘머리와 손의 중재자는 심장이어야 한다!’는 문구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당시에 그가 겪었던 혼란스러운 독일의 정세와 정체된 인간의 이성, 기계 문명을 구가하는 노동의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한꺼번에 ‘영화’ 매체라는 예술 안에서 녹여내고 싶었던 그의 꿈이 아니었을까.

 

 

각주

1) 1920년대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의 편수는 나머지 유럽 국가에서 제작된 수보다 많았으며 독일영화는 무엇보다도 오페라이며, 건축이었고, 그리고 회화였다. 프랑스 영화가 초현실주의 다다와 인상주의적 회화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면 독일 영화는 표현주의와 오페라의 그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 <모던타임즈 1> (우리 시대의 최고의 석학 폴 존슨의 대표작), 폴 존슨, 조윤정 옮김, 살림

2) 이 영화는 2개의 인테르메초(intermezzo)를 포함한 오페라의 형식을 띠고 있다.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오페라적 요소는 영화의 중반부 로트왕이 프레더에게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마리아가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다고 말하여 프레더를 분노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 때 두 사람은 검은 커텐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연기를 하는 데 이 장면과 같은 세트의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오페라의 무대를 연상시키도록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3) “영화가 역사 바깥에서 만들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일 볼셰비키 혁명이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만들었다면,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는 나치즘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세계 영화 100>, 한겨레신문사

4) 1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의 건축가에게 유리의 투명성은 “천국이나 우주와 같은 깨달음과 결부되어 있었고 수정과 같은 유리단면은 절대불변의 형태, 완전무결한 정신적 물체 등의 낭만주의적인 고결성에 대한 판타지였다.  ‘1920년대 전후 유럽 영화와 시각문화의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eology)', 김지훈, 2006

5)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옮김, 새물결, 2005

6) <피노키오의 모험>은 인간이 되고자 소망하는 로봇에 대한 가장 오래된 동화로 간주된다. 피노키오는 비록 과학적인 원리가 아니라 요술에 의해 나무인형이 살아 움직인다는 스토리상의 한계는 있지만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장난꾸러기 로봇이 던진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특히 나무인형이 진짜 소년으로 바뀐다는 설정은 12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영화 <A.I.>에 그대로 차용됐고, 일본인들은 이족보행 로봇의 이름을 ‘피노’라고 붙이는 등 비쩍 마른 피노키오의 그림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 다음은 로봇이다>, 배일한, 동아시아

7) 같은 책.

8) 이러한 기계화된 인간의 장면은 이후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유머러스하게 재현된다.

9) 몰록 (Moloch) : 셈족이 섬기던 신으로 한때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도 신앙되었던 신(사도 7:43). 원래 바빌로니아(바벨론) 지방에서 명계의 왕으로 알려졌고, 가나안에서는 태양과 천공의 신으로 알려졌다. 어린이를 제물로 바쳐 제사지내는 인신공희(人身供犧)도 행했다. 예루살렘 남쪽의 힙놈계곡에서는 이러한 이교적 제의가 많이 행해졌던 모양이나(예례 32:35~), 그 후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 때에 전부 퇴치되었다(열왕 23:10~)고 전한다. 출처 두산백과사전.

10)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과 라헵의 12명의 아들 가운데 11번째 아들. 이집트에 팔려가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이집트 주변의 흉년과 기근을 예지하고 대책을 미리부터 세운, 이상적 덕목을 갖춘 명재상으로 묘사된다.

11) 중세 독일에서도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는데 예수회 수도사이며 시인인 프리드리히 폰 슈페(1591-1635)는 파더보른(Paderborn)의 도덕 신학 교수로서 마녀 사냥 열기에 비판적이었던 당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는 익명으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어느 곳보다도 요술쟁이, 마녀, 악인이 더 많아서일까, 독일에서는 도처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에서 불에 굽고 태우고 볶아 죽이는 일아 만연하니, 외국에서 독일의 명예는 적잖이 훼손될 것이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지 않았다> 게르하르트 프라우제, 한길사

12) 마녀 사냥의 집행인들은 집단 히스테리라든가, 미신에 사로잡힌 무지하고 교양없는 민중이라든가, 이성과 정신을 굴복시키고 개가를 올린 ‘암흑의’ 중세라든가 하는 따위였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길을 잃은 이성 그 자체였다. 즉, 교회가 100년에 걸쳐서 부정해 온 마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녀를 색출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 것은 학자와 대학 교수들,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신학자였으며 철학자, 문헌학자, 법학자 들이었다. 같은 책.

13) <하이테크네 : 포스트휴먼 시대의 예술, 디자인, 테크놀로지>, R.L. 러츠키, 김상민·윤원화 옮김, 시공사, 2004

14) 로봇 마리아는 춤이 끝나면 다시 제단 위로 올라가 머리 일곱 개 달린 황금 히드라 우상의 등에 앉는데 전설에 따르면, 히드라의 머리가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 자리에 머리 두 개가 자라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히드라의 형상을 통해 억압된 리비도적 충동(또는 ‘죄악’)의 끈질긴 귀환을 재현하려고 처음부터 의도했던 듯 하다. 이와 동시에 히드라는 ‘진짜’ 마리아의 분신이 되는 가짜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복제하는 테크놀로지의 역량에 대한 형상화이기도 하다. 같은 책.

15)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원시성과 모더니즘의 테크놀로지의 합성은 사이버펑크 장르 문학에서도 발견되며 ‘중동’적, 아프리카의 느낌이 나는 원시적 제례나 의식의 의상과 몸동작을 모방한 표현은 원시성과 미개함의 퇴폐적인 면만을 극대화시키는 이미지 연결법으로 이미 굳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화 ‘300’(2007)에서도 잘 나타난다.

16) 이러한 영화의 한계에 대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프리츠 랑은 이러한 결말을 통해 선동과 집단 봉기라는 계급투쟁의 결과를 ‘공상과학영화라는 모호한 변명 속에서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변질시켰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자본가와 자본가 아들 사이의 화해로 변질된다. 결국 노동자들의 혁명은 단순한 폭동으로 격하되고, 영화는 노동자계급의 패배와 부르주아 휴머니즘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세계 영화 100>, 영화평론가 정성일, 한겨레, 1996

17) 하지만 이런 랑의 관점에 대해 크라카우어는 경계하는 입장을 나타낸다. 크라카우어는 그의 책 ‘Cult of Distraction'에서 ‘대중문화가 총체예술작품을 지향하는 경향, 그럼으로써 관객을 미디어의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시공간 내부로 통합하려는 경향은 전자매체와 디지털 매체 시대에도 문화산업의 달콤한 유혹’이라고 말했다. <1920년대 전후 유럽 영화와 시각문화의 미디어 고고학>, 김지훈, 2004에서 재인용

 

* 참고문헌 *


<1920년대 전후 유럽 영화와 시각문화의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eology) : '기계적 시각(Mechanical Vision)'의 중요성 및 이후 미디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지훈,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석사논문, 2004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하지 않았다> 게르하르트 프라우제, 한길사

<모던 타임스 1> (우리 시대의 최고의 석학 폴 존슨의 대표작>, 폴 존슨, 조윤정 옮김,       살림, 2008

<세계 영화 100>, 안병섭 외, 한겨레신문사, 1996

<인터넷 다음은 로봇이다>, 배일한, 동아시아, 2003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새물결, 2005

<하이테크네 : 포스트휴먼 시대의 예술|디자인|테크놀로지>, R.L.러츠키, 김상민·윤원회      외 옮김, 시공사, 2004

<The Introduction to Visual Culture>, Nicholas Mirzoeff,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9



* 참고 사이트 *


‘계몽사상과 합리성’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프레시안, 2008/3/26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아무거나 표현주의’ 카페 http://cafe.naver.com/dionyssh

‘무성영화 시대의 SF '계급투쟁’ - 프리츠 랑, 그 저주받은 위대한’, 월간 키노, 김용언·홍지은, 2000. 09

‘표현주의란 무엇인가? .. 메트로폴리스(1927)에 대하여’, 블루 플래닛의 모범주민 란치아, http://blog.daum.net/ranthia/14554711, 2008/1/12



* 참고 기사*


‘창녀인가 성녀인가... 왜곡 있다면 누가 왜’, 한겨레, 2006/ 1/ 11, 조연현 기자

s*****e 2008.11.01. 신고 공감 1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