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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애들한테 어른들이 짖궂게 물어보는 말이 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슬기로운 아이는 말한다. "엄빠!" "아마!"
그렇지만 열에 아홉의 아이들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어른들이 싫다. 엄마를 고르자니 아빠가 마음에 걸리고, 아빠를 대자니 엄마가 서운하겠고... 그래서 아이들은 망설이다 얼버무리고 만다.
살면서 이렇게 어느 쪽을 골라야 하는데 쉽게 고르지 못하고 망설이게 될 때, 그의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어지러워진다.
알란 제이 파큘러 감독이 1982년에 만든 <소피의 선택 Sophie's Choice>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에서 아들과 딸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했던 엄마의 아픔을 담은 영화였다. 누구라도 그런 갈림길에서 선뜻 하나를 고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고르든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고르게 한 세상이 크게 잘못된 것이리라.
2. 미국 남부에서 태어나 1947년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온 스팅고(피터 맥니콜)는 같은 집 2층에 사는 가시버시한테서 월트 휘트먼의 시집을 선물로 받는다. 좋은 이웃을 만난 셈이라 스팅고는 기쁘다. 쓰고 있는 소설이 이곳에서 잘 쓰여질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2층이 시끄럽다. 잠옷 바람의 소피(메릴 스트립)가 내려오던 계단에서 네이단(케빈 클라인)을 붙잡는다. "날 버리지 말아요. 우린 서로가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잖아요?" "내가 있기를 바래? 그렇다면 온갖 더러운 게 다 있어야 하겠군. 당신에겐 말이지..."
칼로 물베기인 다툼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소피와 네이단은 알콩달콩 사랑하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스팅고가 이들과 어울리면서 알게 된 게 몇 가지 있다.
소피 라이코프스키는 폴란드에서 살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두 해 앞서 미국으로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법학 교수였어요. 폴란드 사람들에게 나치의 위협을 미리 알리는 글들을 쓰기도 했죠. 그런 아버지 일을 도우려고 제가 옆에서 타자를 치기도 했고...나는 아버지 제자와 일찍 혼인했어요"
네이단은 하버드를 나왔으며 제약회사인 화이자에서 일하는 생물학자라는 것. 형이 의사라며, 네이단은 소피를 만났을 때 어땠는지 말해준다. "소피를 처음 만났을 때 머리칼 한 줌만 남은 넝마 같은 모습이었지. 나치가 만든 수용소에서 나온 지 한 해가 넘었는데 빈혈에다 성홍열까지 있어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어. 대학병원에 있는 내 형의 벗에게 소피를 데려가 살렸어. 약을 먹더니 장미꽃처럼 피어났다니까..."
3. 영화는 소피와 네이단, 스팅고가 엮여 있는 날들은 컬러로 보여주고, 소피가 폴란드에서 제2차 세계대전때 겪은 일들은 흑백으로 나타내었다. 어찌보면 150분동안 영화 두 편을 보는 셈이기도 한데, 컬러 영화도 좋지만 흑백 영화가 가슴을 졸이게 만들고 아프게 했다.
나치 장교가 강제수용소로 보낼 때 소피한테 고르라고 한 일은 소피의 삶을 망쳐놓았다. "유대인이라면 둘 다 가스실로 바로 보낼 것이지만,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사람이라 봐준다... 하나는 같이 데려 가게 해주겠다. 아들과 딸 가운데 하나만 골라 같이 가라. 누굴 고르겠는가? 안 고르면 둘 다 가스실로 보내겠다"
폴란드에서 아버지와 옆지기는 나치 무리들한테 총에 맞아 죽었고, 엄마는 폐병을 앓다가 저승으로 갔으며, 나치 무리들한테 아들과 딸과 같이 끌려가다가 하나는 가스실로, 다른 애는 어린이수용소로 보낸 소피. 나치 무리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겪는 소피한테 삶은 괴롭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씻겨지지 않는다.
엄마로서 아들과 딸 가운데 하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을 하고도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곁에서 네이단이 때로는 웃기고 힘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소피의 아픔을 깨끗이 도려낼 수가 없다. "하느님이 아예 날 저버린 걸...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만 살아남은 거에요... 난 교회로 가서 무릎을 꿇고 손목을 베었어요..."
4. 무른 사람이라면 벌써 미쳤을 텐데 그나마 버티고 있는 아낙네 소피 모습을 메릴 스트립은 잘 보여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일 만큼 견디기 힘든 건 없어요. 그건 죄에요..."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엮여 괴로워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네이단 노릇의 케빈 클라인이 내 눈에는 더 들어왔다. "아우슈비츠에서 당신이 살아난 건 누굴 팔아먹었거나 속였기 때문이지..." 하며 소피를 괴롭히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난 당신 뿐이야" 하며 소피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기도 하고, "남부 풋내기가 엉터리 글이나 쓰는 주제에..." 하면서 스팅고를 나무라다가도 "스팅고를 위하여" 하며 추켜세우기도 하는데,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모습은 케빈 클라인이 아니면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가 겪은 일들을 많이 보여주고 네이단의 이야기를 곁들이지만, 이런 줄거리를 끌어가는 건 스팅고다. 그런데 메릴 스트립과 케빈 클라인이 남의 눈치 같은 건 눈꼽 만큼도 보지 않고 스팅고 앞에서 껴안고는 얼굴을 부비고 입맞춤을 하는 닭살 짝이라 그런지, 스팅고를 맡은 피터 맥니콜은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보기 좋은 모습으로만 나왔다.
5. 스팅고와 소피, 네이단이 글을 쓰고 시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와서 그런지 시가 많이 나온다. 그래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좋아할 영화였다.
네이단이 가져온 1937년산 삼페인 '샤토 마르코'를 마시고는 소피가 내뱉는 말은 영화가 아니라 시였다. "한 평생을 성인처럼 살다가 죽은 뒤에 천국에서나 마실 것 같은 술이에요"
토마스 울프의 시집 <천사여 고향을 보라>를 소피는 폴란드말로, 네이단은 영어로 읊으며, 나중에는 소피가 보고 싶어하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같이 읽는다. "이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 심판의 새벽이 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도 두둑히 하여 / 아침 햇살 외 그 어떤 것도 훼방치 못하게 하라"
소피와 네이단이 침대 위에서 시집을 같이 읽을 때 세상은 두 사람만의 것이겠지만, 시집을 손에서 놓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둘 다 생채기가 난 마음 때문에 괴롭기 짝이 없다. 이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생채기는 누가 풀어줄까? 무엇으로 달래줄까?
풀어줄 무엇도 없고 달래줄 길도 없는 나로서는 그저 답답하고 안쓰럽기만 했다. 그렇지만 잘 짜여진 얼개와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를 보면서 별 다섯 개를 줄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6. 감독은 구경꾼들에게 있는 보따리를 먼저 다 풀어놓지 않았다. 이 보따리를 푸는 듯하면서도 옆에 있는 보자기를 슬며시 열어놓고, 그 보자기를 보는 이들한테 다른 보따리가 있다며 눈길을 달라고 끌어간다.
소피의 아픔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뿌리를 바로 내놓지 않고 에둘러서 내놓고, 네이단이 떠난 자리를 스팅고한테 넘기는 듯 꿈을 주다가도 거둬들이는 일도 뒤에 살며시 감추어놓았다. 그래서 줄거리를 엮어가는 감독의 빼어난 솜씨까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영화가 나온 지 서른 해가 지났지만 디뷔디는 화면이나 소리가 깨끗하다. 덤도 푸짐해서 좋았다.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겪었던 일들을 짧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에다, 감독이 영화를 보면서 만들 때의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는 것도 들어 있으며, 어떻게 만들었는지와 감독과 배우가 어떤 사람인지 써놓은 글도 우리말로 옮겨놓았고, 예고편도 있다. 이만 한 디뷔디에 2,900원이라면 먼저 사는 게 임자다. 그리 나무랄 데가 없는 디뷔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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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강물 위에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단순한 또 하나의 아침이었다. 아침, 아름답고 희망에 찬 아침이었다. (엔딩에서 스팅고의 독백)
나는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토록 벅차게 감동적인 일인지, 그게 나에게도 그런지 미처 몰랐었다.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살아가며 깨닫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침과 내일은 늘 주어지는 것이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던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소피와 네이단,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주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내일 아침의 햇살을 기약하며 살아갈 스팅고. 셋이 보낸 시간의 찬란함과 추억이 주는 뭉클함을 남쪽 시골마을에서 상경한 스팅고의 꿈이 이뤄지는 날, 우린 다시 꺼내보게 될까. 그럴 날이 과연 올까.
선택은 소피의 회상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폴란드 유대정책을 '말살'로 밀어부친 아버지의 딸이지만 반유대주의자를 사랑해 아들과 딸을 낳았고, 레지스탕스 남자를 애인으로 두었다. 남편이 총살 당한 후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중에 폴란드인 답지 않은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금발이 눈에 띈 나머지, 아들과 딸 중 누구를 가스실로 들여보낼 것인가에 대해 선택을 강요당한다. 둘 다 잃지 않기 위해 하나를 잃어야 한다면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그녀는 더 어린 딸을 버린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으므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배제된다. 우리가 어떻게 그녀를 비난할 수 있으며,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선택은 반드시 하나여야 했고, 선택이 더 나은 것을 택하는 게 아니라 더 못한 것을 버리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처럼, 그녀는 선택했을 뿐이다. 선택해야 할 나쁜 상황이 오는 것 아니,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실이 슬픈 비극이지 딸을 선택한 소피의 결정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심판의 새벽이 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도 두둑히 하라. 아침 햇살 외에 그 어떤 것도 훼방치 못하게 하라.
-에밀리 디킨스
슬픔을 넘어선 충격 앞에 인간의 나약한 심성과 한계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잠시 소피가 되어보지만, 이 순간 내가 소피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감사할 뿐이다. 누군가의 운명적 참극에서 사랑과 희망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가. 모든 것을 잃고 참혹한 경험을 하면서도 잃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진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 뿐이었을 그녀의 손목 긋기는 죽음으로도 편히 가지 못하는 삶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비로소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천재지만 광기로 가득한 유대인 네이단과 함께 지낸다. 그들이 사는 아래층에 스물 두 살의 남부출신 작가지망생 스팅고가 이사오면서 셋은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눈다. 참혹한 전쟁과 그로인한 스크래치 같은 상처들을 고스란히 안고 서로를 보듬는 동시에 할퀴는 네이단은 종종 위험해 보인다. 곧 결혼할 커플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며 기쁨과 슬픔, 분노와 한계를 경험하는 스팅고의 마음은 착잡하기 짝이 없다. 네이단의 정신질환적 광기에 소피가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상태에서도 네이단과 소피의 충격적인 비밀들을 고스란히 감싸안는다.
위험의 순간이 오자, 스팅고는 과감히 소피를 데리고 나가 사랑고백과 함께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지만, 소피는 다시 네이단에게로 떠난다.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아픔은 본인에게만 내재하는 질병은 아닐 지도 모른다. 연인이 서로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이나 동일시하는 것, 그것을 감당하는 동시에 감당하지 못하는 것 등 함께이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것도, 상처를 할퀴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소피가 돌아간 이유는 네이단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버릴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는 지점에 영원히 고여 있을, 아픔. 때로 책임질 수 없는 상처가 위안이 되기도 하고 살아나가게도 하는 것이다. 간접적 상처를 가진 스팅고 곁에서 평온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강압적 치유의 힘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연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과 상처 입힌 세상을 계속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은 결국 같은 것 아닐까.
당근과 채찍,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 사랑과 배신, 기쁨과 슬픔 등 상반되는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필요하지 않을까. 삶이 죽음과 맞닿아 있듯, 살아가는 일은 이 모든 감정들의 화합이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상처가 많은 사람을 더 이해하는 것처럼, 상처 입은 사람이 평온무탈한 사람을 만났을 때 입게 되는 부수적 파편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소피와 네이단이 결국 함께 죽음을 택한 것처럼. 이야기는 모두 펼쳐져 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한 영화가 아니라 그들이 어째서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가에 관한 영화다. 나아가 신념과 제도 안에 희생되는 이들의 넋을 가만히 응시해주어야 하는 영화다. 그날 밤에는 아무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골라야 하는 선택지는 늘 무엇이 더 나은가가 아니라 어느 것을 더 잘 할 수 있나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행복해야 했다. 오늘 죽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내일의 빛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늘 의미가 있을까 싶은 입장이었다. 감은 눈 속에도 찬란한 빛은 있기 마련이니까. 아무도 묻지 않으면 다가올 새벽과 아침에 대해 얘기하는 건 월권이라 믿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살아있잖아. 아직 살아있잖아,라고.
죽어버리면 함께있지 못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