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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전 드라마 <무인시대>를 모 채널에서 틀어주는 중인데 우봉 최문(崔門)의 가노 만적이가 드디어 참고 참다 봉기를 일으키는 대목이다. 정사의 기록이 너무 소략해서, 정말 신분제 모순에 대한 진지한 각성의 발로로 그런 사건이 터졌는지, 뭐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고 지근거리에서 벼락출세가 이뤄지니 제놈에게도 뭔 수가 터지겠거니 헛바람이 들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역사 기록에 공백이 많으니 극작가들은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겠는데 이 드라마는 그 나름 그럴싸하게 '경우의 수 한 가지'를 시청자들에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 <혁명아 자파타> 역시 다큐도 아니고 정사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후대인(시대 간극이 큰 차이는 안 나지만)의 상상, 재구성된 결과물일 뿐이다. 더군다나 이후 벌어진 매카시즘 열풍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힌 카잔의 연출이라서 과연 '만민평등 경제정의의 대의'를 외친 인물의 생애가 어떻게 그려졌을지, 아직 이 고전을 못 본 이들에게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더군다나 각본은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의 솜씨이다.
카잔이나 스타인벡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라 해도, 타이틀 롤 '자파타(스페인어에는 [z] 발음이 없으므로 '사파타'가 옳으나 극중에선 내내 '자파타'로 불림)' 역을 말론 브란도가 맡았으므로 이 점 하나만으로도 꼭 챙겨 보고 싶은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말론 브란도는 이보다 1년 앞서 <줄리어스 시저>로 정극연기의 총아로 이미 세계에 이름을 알린 젊은 유망주였으며, 연기만 잘한다고 극복이 안 되는 팩터인 '외모' 조건까지 두루 갖춘 자원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열광했던 건 당연하다. 생긴 것만 잘생긴 게 아니라 이 극에서도 잘 드러나듯 과연 캐릭터 속에 완전히 몰입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에밀리아노 자파타'는 영화 시작부터 민생고를 호소하러 대통령 앞에 청원을 넣는 대열 맨앞에 서는 농부로 등장한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에 투박한 표정, 촌스럽기 짝이 없는 콧수염까지 길러 처음에는 누군지 못 알아봤다. 어떤 분장을 해서가 아니라(콧수염빼곤 맨얼굴에 가까움) 캐릭터에 완전히 몰입을 하는 통에 정말로 비전 없는 촌뜨기의 감정을 완전히 뒤집어써서였던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작보다 1년 전에 찍힌 <줄리어스 시저>와 대조해 보면...
사실 태생부터 귀공자였던 시저나, 브란도가 실제 말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뭐 이런 역과 달리, 브란도는 거친 밑바닥 (주인공) 역을 꽤 자주 맡은 편인데 이를테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내가 쓰면서 착오를 했는데, 앞의 언급과 달리 <줄리어스 시저>가 1953작이니 이 작보다 오히려 1년 후이며 <... 전차>가 1951년 제작이다)에서의 스탠리 코발스키 같은 게 대표적이다. 그 작이야말로 영화로 빚어진 중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힐 만한데(테네시 윌리엄스의 원작을 고려 않고도), 브란도도 브란도지만 비비안 리의 연기가 압권이다. 반 세기가 다시 지나도 저런 배우(외모 조건 포함)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을 듯하다.
여튼 정말로 브란도는 글 한 줄 모르는 무지렁이 기믹을 너무도 그럴싸하게 소화해 낸다. 이때로부터 이십 년 후쯤 찍혔던 <대부>에서도 우물우물하는 발음이나 무리의 모가비처럼 위엄(허세가 아닌 태생의 자연스러움)을 부리는 투가 비슷하긴 한데, 자기 복제, 표절이 아니라 <대부>에서의 연기를 이 (그 당시 기준) 20년 전의 연기에 대한 자기 오마쥬, 혹은 발전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 군웅(軍雄) 역은 예컨대 <패튼 대전차 군단>의 조지 C 스코트처럼 카리스마 넘치고 귀족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또 스코트는 정말로 멋진 연기자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 당시로부터 이십 년 전에 찍힌 이 배역의 형상화가 훨씬 고퀄, 고난도 연기라고 생각한다.
이 극에서의 자파타는 정말로 격정과 직정, 정의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진짜 사내다. 그 진정성이 누구에게도 느껴지기에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고, 그를 경계하는 라이벌들도 한편으로는 찬탄을 거듭하고(이 극에서의 판초 비야), 한편으로는 '호랑이 새끼는 일찌감치 죽여야 한다'며 경계의 칼날을 곤두세운다(이 극에서의 후에르타 장군- 실제 역사에서는 나이가 대충 부자지간 정도인데 여기서는 거의 할아버지뻘로 보인다). 전투 씬은 최대한 자제되고(자제인지, 아니면 제작비 이슈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물들 간의 치열한 감정 교류, 의지의 대립으로 극이 주로 채워지는데, 이 작이 지금으로부터 근 칠십년 전에 찍혔음을 감안하면 그 섬세한 내면의 묘사, 극의 진지하고 오밀조밀한 발전이 놀라울 정도다. 본래 카잔의 최고 장기가 이 대목에 있기도 하며 진정 그는 드라마 데코레이션의 신(神)이라 할 만하다. 스펙터클에 승부를 걸었으면 이 작은 현대 관객의 눈으로 꽤 촌스러웠을 텐데, 이처럼 본질이 드라마에 있으므로 영원한 고전의 자리를 내어 놓지 않을 걸작으로 남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너를 얼마든지 힘으로 가질 수 있지만 이렇게 점잖게 청혼을 하는 거야.'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나를 아내로 삼은 니가 방심하여 자고 있을 때 바로 널 찔러 죽일 수도 있거든 '
'너같이 착한 애가 설마?'
'얼마든지! 게다가 누가 너처럼 비전 없고 돈 없는 촌뜨기하고 결혼하겠어? 당장 나가!'
정말로 자파타는 아무 폭력 행사 없이 나가 버리는데, 호세파의 하녀가 살짝 '여튼 저 젊은이, 너무 마음에 드네요!'라고 하자 호세파 하는 말 '누가 아니래!'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세상에, 누가 이런 씬을 담은 영화가 칠십 년 전에 찍혔다고 믿겠는가.
자파타는 여튼 포기 않고 장인한테 찾아가 딸을 달라고 조르는데 지역 유지인 그가 이런 빈털터리 청년을 반길 리가 없고 급기야 자파타는 예비 장인을 구타하고 만다. 자존을 모욕당했으니 못 참는다는 식이고, 며칠 전 호송 중인 죄수를 탈출시킨 혐의까지 더해 그는 바로 당국에 의해 체포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농부들이 몰려와 그를 구해내고 그는 뜻하지 않게 '의적 두목, 장군' 노릇을 떠맡는다는 게 이 각본, 극의 설명이다. 즉 그는 모종의 의식, 정치적 야망에 들뜬 혁명가가 아니라, 선의와 정의감에 따라 살다보니 어쩌다 '해방군을 이끄는 장군님'이 되었다는 소리.
자파타는 다른 삶을 살 기회도 여러 번 있었는데, '당신 같이 풍신도 좋은 사람이 왜 태도가 그리 불량하며, 가진 분들 말만 잘 들으면 얼마든지 출세를 할 사람이 왜 그러고 사나?' 같은 회유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처럼 이 극은, 판에 박힌 영웅담이나 대의를 위해 죽은 스케이프고트(이를테면 스파이크 리의 <말콤 X>처럼)로 그린 게 아니라, 인간 에밀리아노의 방황과 격정을 프레임 없이 '이야기로서 충실하게' 들려 준다.
시저의 등원을 그 아내가 폼페아가 말리듯, 또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아내가 '그 죄수 일에 간여하지 마십시오, 꿈자리가 몹시 안 좋았습니다.' 라고 했듯, 이제 자파타와 부부의 연을 이룬 호세파는 '함정이야 이 멍청아! 뻔히 보이지 않니?' 라며 절규하지만, 마치 자파타는 장엄한 자결이라도 하듯 말을 타고 길을 나선다. 임꺽정이가 서림이에게 배신당하듯 그도 측근 페르난도의 간악한 밀고로 몸이 벌집이 되어 죽는데(마치 시저의 최후와도 흡사), 이미 전세가 기운 판에 차라리 장렬한 죽음으로 그의 추종 세력에게 신화 하나를 선사해 지속적 추동력을 남기려는 원모심려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시신을 보고서도 농부들은 '웃기시네, 누가 이 시신을 자파타라고 믿을까? 자파타는 죽지 않아. 일시 산으로 후퇴했지만 결정적일 때 반드시 내려와서 우릴 도울 거야!'라며 (희한한) '신앙'을 새로 품게 된다. 이 결말은 꽤 인상적인데, 신화적 영웅의 일대기를 쫄깃한 드라마로 여태 꾸려낼 줄 안 카잔은, '나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는 듯 결말만큼은 유독 '좌파적 대의'로 장식한 것.
또 이 결말은 예컨대 <7인의 사무라이>의 마지막 대사 '정복자가 수없이 바뀌어도 끝에 가서 남는 승자는 농부들'가 생각나기도 하며, 이걸 그대로 차용한 <황야의 7인>은 멕시코가 배경이기까지 하므로 더욱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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