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7)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29%
  • 리뷰 총점8 57%
  • 리뷰 총점6 14%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7.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파농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파농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용보기
실천문학사에서 '체 게바라 평전'으로 히트를 치더니 저항적인 인물들의 평전에 더 열을 쏟고 있다. 여하튼 즐겁다. 그들이 다시 부각된다니 말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가 근래에 책으로 다시 만났던 '마르크스', '마르코스' 등과 더불어 유사한 판형과 유사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일단 꼼꼼한 번역으로 소문한 이세욱 선생님의 번역을 믿고 읽었으며, 또 파농을 생각하며 읽었다. 민족해방
"파농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용보기
실천문학사에서 '체 게바라 평전'으로 히트를 치더니 저항적인 인물들의 평전에 더 열을 쏟고 있다. 여하튼 즐겁다. 그들이 다시 부각된다니 말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가 근래에 책으로 다시 만났던 '마르크스', '마르코스' 등과 더불어 유사한 판형과 유사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일단 꼼꼼한 번역으로 소문한 이세욱 선생님의 번역을 믿고 읽었으며, 또 파농을 생각하며 읽었다. 민족해방론이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 다시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파농을 다시 읽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우리 역시 식민지 속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시대의 역사적 트라우마 속에서 살고 있다. 파농의 말마따나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 다시 파농을 읽어야 한다. 그의 삶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라! 남겨진 현실을 생각하라! 우리가 있는 지금은 파농이 살다가 그때보다 무엇이 더 나은가? 다만 식민지성이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러번 그의 삶에 경외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현실의 무게에 두려움을 표시했다. 아, 프란츠 파농.
e****l 2004.03.20.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아프리카를 사랑한 위대한 사상가 파농
"아프리카를 사랑한 위대한 사상가 파농" 내용보기
프란츠 파농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두 가지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감돌았다. ‘인도’라는 주제와 ‘프랑스’라는 주제였다.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를 들여다 볼 때마다 늘 생기던 의문이 있었다. ‘이 대륙은 왜 이렇게 바둑판처럼 갈려져 있어야 하는 걸까?’ 아프리카에 비해 인도 대륙을 들여다보자. 인도 대륙 역시 인종과 말과 역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땅덩
"아프리카를 사랑한 위대한 사상가 파농" 내용보기
프란츠 파농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두 가지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감돌았다. ‘인도’라는 주제와 ‘프랑스’라는 주제였다.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를 들여다 볼 때마다 늘 생기던 의문이 있었다. ‘이 대륙은 왜 이렇게 바둑판처럼 갈려져 있어야 하는 걸까?’ 아프리카에 비해 인도 대륙을 들여다보자. 인도 대륙 역시 인종과 말과 역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땅덩어리이다. 그런데도 인도는 여전히 한 나라로 남아 있다. 인도도 독립 이전에는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따위의 깡패 국가들에 의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식민지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도는 한 인도다. 물론 남으로 스리랑카와 동쪽으로 방글라데쉬, 북쪽으로 파키스탄과 네팔, 부탄 따위의 나라로 쪼개져 있지만 이들 나라들은 애초부터 한 나라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던 지역들이었고, 근대 들어와 여러 정치 상황과 맞물려 서로의 길을 갔을 뿐이다. 따라서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나는 파농을 읽는 동안, 파농이 미래지향적으로 꿈꾸고 실제로 현실화시키고자 했던 아프리카 대륙의 통일에 대해 엄청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을 위해 과감하게 자신의 한 몸을 던진 한 숭고한 혁명가의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실제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보다 아프리카의 통일을 꿈꾸어 온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진정 바둑판처럼 쪼개져 있던 아프리카 대륙의 어떤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공통점을 밑천 삼아 거대한 대륙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나가려고 하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쉽게도 서른 여섯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아프리카는 훌륭한 지도자를 너무 일찍 잃어 버렸고, 그 뒤로 파농과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결국 아프리카는 여전히 바둑판 같은 모습을 하며 오늘날 서구 열강의 밥그릇 노릇을 착실히 해주고 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른 한가지 주제인 ‘프랑스’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과 같다. 나는 파농을 읽는 동안 프랑스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저질렀던 온갖 못된 짓들에 대한 이해를 피부 깊숙이 이해했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와 만주 따위에서 저질렀던 그런 못된 짓들과 같았다. 아프리카라는 남의 땅에 대한 남의 이야기가 마치 내 나라에 대한 내 이야기처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도 그와 똑같은 아픈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파농을 혁명가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파농을 사상가로 보고 싶다. 그는 아프리카를 진정 사랑했던 한 아름다운 사상가였다.
a********n 2002.05.02.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다시 만나는 파농
"다시 만나는 파농" 내용보기
다시 만나는 파농 언행일치의 휴머니즘   Ⅰ. 프란츠 파농의 삶            맨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땐 프랑스 장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캐러비언의 앙띨레스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Postcolonial poetry in English』란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더라면 캐러비언 지역의 그가 왜 알제리 독립 전투에 뛰어들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1961년 12월 6월에
"다시 만나는 파농" 내용보기

다시 만나는 파농

언행일치의 휴머니즘

 

. 프란츠 파농의 삶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프랑스 장군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캐러비언의 앙띨레스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Postcolonial poetry in English』란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더라면 캐러비언 지역의 그가 알제리 독립 전투에 뛰어들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1961 12 6월에 36세의 짧은 나이로 사망한 그는 언행일치의 독립운동가로도, 새로운 정신요법을 찾아 실험하는 능동적인 정신의사로서도 손색없는 삶을 살았다. 그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Les Damnés de la terre ), 그의 사후 3년 뒤에 나온 『알제리 혁명을 위하여』(Pour la Révolution africaine)등이 있다.

. 정신과 의사로서의 삶

그는 블리다와 튀니지에서 정신과의사로서 일을 하였다. 블리다에서 그는 예전 자신이 2차 세계대전에서 아프리카 흑인으로 오해받아 친구 망빌등과 함께 백인들에게 엉덩이를 차인 수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 아닌 그 저변에 깔린 백인의 인종차별에 대해서 숙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제리의 알제에 있는 블리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흑인들의 차별에 대한 수치심과 굴욕감에 대해 진실에 가까운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블리다 병원에서는 다른 백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른 요법을 사용한다. 이른바 사회요법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종래의 알제 정신 의학 학파의 창시자인 포로 박사의 제사인 라메박사는 북아프리카 원주민의 두뇌 발달에 해부학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와 같은 원시인의 특성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인종적 차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다른 혁식적인 것이었다.

           사회요법은 단지 병원제도를 인간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주체가 스      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조직을 돌보는 사람들과 환자들이 함께 만들어냄으        로써 병원을 진정한 치료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모     든 창조적인 활동이 이 감정의 재동원에 기여하면서 먼저 감각과 정서와 몸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는 하나의 삶, 하나의 역사를 펼쳐 보이는 행위            발전한다.”

           3개월이 지나자, 유럽계 여자들의 병동에서 이루어진 성공과 무슬림 남자들의 병동에서 나타난 실패 사이가 너무나 극명해졌다. 그로 인해, 그는 토착민 사회의 토대에 근거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탐구부터 먼저 해야 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서양의 환경에서 나온 사회요법을 무슬림 환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믿고, 그들의 지리적•역사적•문화적•사회적인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로 인해 그의 알제리 문화 다가가기를 다른 각도를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항상 그의 간호사들에게 이런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우선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늘 솔직하고 진지하게 환자들을 대하십시오.”

           사실 파농은 주로 카발리 지방의 마을들을 찾아가 지역사회의 구조를 이해하고 이야기꾼들의 야간 공연과 주술의식을 구경하면서 알제리 사회와 그것의 변동에 관한 자기 지식을 심화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자연스레 알제리 독립을 위해 일하던 알제의 지하조직 사람들과 연분이 생기게 된다. 그가 그 조직사람들에게도 의료시술을 베풀면서 그의 명성이 그 조직에게 뻗어 나가게 되었고 파농의 환자의 주요정보로 알제 지하조직의 타진이라는 프랑스 정부의 간계 일촉즉발의 나쁜 상황에서도 그 조직을 빠져 나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 터라 FLN의 지도자 람단 아반과 벤 케다도 파농을 만나고 싶어하게 된다. 하지만 1957 1월 초에 이후에 조직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고, 그들 가운데 운이 좋은 사람들만이 죽음을 면하고 감옥에 갇혔다. 파농은 이해 1월 첫째 주에 추방 명령서를 받고 혼자 블리다를 떠나 알제를 경유하여 파리로 갔다. 1957 1-2월 동안에 탄압은 더욱 심해져서 FLN의 최고 책임자들을 비롯한 많은 지하운동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던 조직망이 와해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아반과 벤 케다와 많은 다른 지도자들이 알제를 떠나야 했다. 그들은 1957 2월에 알제리 내 무장 독립운동가들이 다니는 길을 통해 모로코나 튀니지로 떠난다. 사실 당시 신생독립국 튀니지에는 의사가 부족했다. 그래서 튀니지 정부는 의료 부문의 자격증과 학위를 지니고 온 알제리인들에게 공공병원에서 보수를 받으며 반일제 근무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숄레, 마르티니, J.벨코자등도 개인 개업보다는 병원의 월급으로 자립적으로 살면서도 FLN의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잇점으로 튀니지의 병원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그가 일한 샤를니콜 병원은 주간 신경정신의학센터가  파농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종전엔 환자들을 수용해서 치료하였지만 파농은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여, 이제는 주간 통원치료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우리 주간 병원에서 환자는 자기 가족과 단절되지 않으며, 때로는 자기 직업세        계와도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의학적 증후들은 수용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억압되지 않는다.”

유럽에서도 이런 주간치료가 퍼지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참으로 혁신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언제나 자신의 영역에 최대한 발맞춰나가기 위해, 전시의 신경증과 정신적 손상에 관한 페렌치의 관심으로 연구의욕을 불태웠다.  그는 정신과 의사의 일과 정치활동으로 대단히 바쁜 나날을 보내는 속에서도 창조적인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빈번한 강의도 활발히 하고 있었고 저술 작업도 마리 잔 마뉘엘랑과 함께 꾸준히 하고 있었다.

 

 

. 독립운동가로서의 파농

파농은 FNL의 홍보부서에 들어가면서 그 일원으로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러가지로 독립내부 조직의 비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그가 아끼던 독립 지도자인 아반을 잃게 된 것이었다. 부수프와 벤토발은 권력 욕심으로 아반을 견제할 목적으로 크림 벨카셈에게 시켜 외딴 농장으로 데려가 살해하게 된다. 파농에게 그 비극적인 죽음은 한 친구를 잃은 것인 동시에 알제리 해방전쟁의 지침이 될 하나의 혁명적인 개념이 사라진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반은 독립 혁명으로 알제리의 식민지 상황을 종식된 후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크림, 부수프, 벤토발의 3두체제는 여전히 독립될 알제를 위한 미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파농에게 보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58년 말에서 1959년 내내, 알제리 공화국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프랑스에서 드골이 권좌에 오른 뒤 파농은 정치적 면에서 시종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드골의 회유정책으로 독립노선이 축소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또한 파농은 독립 이후의 전망도 걱정스러웠다.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이 식민지 권력을 계승하려 들 수 있었고, 부족 간에 권력 투쟁을 벌이거나 (이슬람 같은) 종교가 국가를 지배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파농은 독립된 이후의 훗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알제리 정신의학의 미래도 생각하였고, 세계 곳곳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알제리 대학생들을 찾아내어 그들이 받은 교육을 조사하고, 미래의 알제리를 위한 정신의학 구조를 재창조하겠다는 뜻도 품고 있었다. 많은 장애와 난관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줄곧 희망을 놓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파농은 비슷한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운동 단체 대표들을 만났으며 이 지도자들의 가장 선호하는 대화 상대자가 되었다. 결국 알제리 공화국 임시정부도 파농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와의 외교관계에서 파농에게 점점 더 많은 임무가 부여되었다. 파농은 대의를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엄격한 운동가였고, 자신의 정치 활동에서 혁명가의 미덕을 보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 아프리카 식민지 흑인의 정체성 문제

           『앤틸리스의 아프리카인들』(195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5년 이전에 아프리카인은 흑인이었고, 앤틸리스인은 유럽인이었다. 그랬는데      1945년 이후에 앤틸리스인은 백색의 착각에서 검은 색의 신기루로옮겨간다.”

 

           그들은 백인으로부터 노예성을 부여받았다. 종교적으로도 Christianity가 제일 진화한 것이라 하여 정신적으로도 그들의 토속 종교를 박탈당하였다.[1] 또한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에서는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이라는 글을 통해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의 모순을 지적해내기도 한다. 그는 그 해결책을 네그리튀드(Negritude) 백인 정체성에 대립하는 흑인 정체성에서 보지 않았다. 오히려 흑백의 구분을 명확히 하여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사고인 흑인•백인에 머무르기 보다는 흑인이 가지고 있는 백인에 대한 부러움을 두 인종 모두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휴머니즘적으로 아우르고자 했다. 그는 백인 후손의 후회와 죄의식도, 흑인 후손의 상처와 열등감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식민자들의 악의를 품은 의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카메룬인민연합과 싸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카메룬 민중에게 독립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떠나기 전에 카메룬 민중 속에 배신과 직무유기와 원한이 만연하도록 해놓았다. 결국 카메룬 민중은 독립을 얻은 대신 그들에게 미래를 저당잡힌 셈이다.”

 

그는 『알제리 혁명 기원5년』에서 자신의 사상을 견고하게 보여준다. 우선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식민지 질서와의 단절뿐만 아니라 경직된 전통과의 단절이 불가피하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문화나 국가는 새로운 상황을 바탕으로 생성되거나 재창조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말한다. 이는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Les Damnés de la terre )을 쓸 무렵에 생각의 변화를 바꾸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식민지 피지배 민중의 폭력에 관한 생각에 대해 언급하는데 주체성이 완전히 파괴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 폭력만이 그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고 말하였다.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난 사람들은 기본적인 인성을 잃고 식민자가 했던 잔인한 짓을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아니면 유사한 형태의 폭력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하지만 파농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면 삶이 죽음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기 동료들이 (독립지도자 내부에서의 갈등의 정점으로 나타나는) 숙청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식민 지배의 폭력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 오늘날의 파농

파농 사후에 그가 진작에 예감하고 우려했던 일들, ‘후기 식민주의’, 타협적인 정부들의 출현, 권력투쟁, 부정부패 등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알제리에서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파농 죽이기에 나섰고 그의 일부 친구들도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Les Damnés de la terre )의 폭력성에만 초점을 두어 그를 오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분석하는 탁식민화는 단순한 주권 회복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탈식민화, ‘인간의 해방으로 나아가는탈식민화였다. 그는 진정한 해방에 실제적으로 도달하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파농은 다시 한번 폭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넓은 범위에 적용을 시켜 말한다.

자기 구성원들, 특히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발언의 장을 열어주지 않는 사회는 어느 것이나 다 폭력적이며, 이 폭력은 자기 표현의 권리를 얻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부르기 때문이다. 폭력을 개인의 기질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이런 문제를 간과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그는 한 인간이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 행위의 결과 만큼이나 의지와 실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던 이 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갈수록 기술의 고도화와 자본주의 병폐로 불평등의 골이 깊어져 가는 세계에 대한 경고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파농이 주장했던 폭력문제는 미국 비평가들에게 상대적으로 차분한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미국 비평가들은 미국 사회에도 그 나름의 폭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파농의 사상이 미국의 흑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지 못했다. 말콤 엑스는 그의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Les Damnés de la terre )를 지침서로 생각하였다. 물론 쿠바의 체게바라에게도 이 책은 홍색보서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흑표범단의 창설자인 휴이 뉴턴과 바비 실은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Les Damnés de la terre )를 하나의 기본 텍스트로 삼ㄷ아 내부 식민주의에 관한 분석을 미국 사회에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사실 미국 흑인들에게 이분법적인 세계, 소외, 네그리튀드, 폭력 등은 그들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란에서도 이 나라 사상가인 알리 샤리아티에 의해 파농의 저작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 신식민지주의 현실과 파농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지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과 관련된 여러자료를 찾다 보니 신식민지주의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신식민지주의(Neo-colonialism)[2]는 기존의 식민지를 독립시켜 지배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독립된 나라를 지배하는 데도 쓰인다. 그 지배방법은 지배의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제국(帝國)을 공동체로 바꾸어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식민지에 자치 또는 독립을 인정하고, 공동체를 통하여 지배를 지속하는 방법, ② 군사동맹 ·군사기지 ·군사원조 등의 방법에 의하여 지배하는 방법, ③ 경제원조 ·기술원조의 조건을 붙여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방법, ④ 통일독립을 인정하면 식민지 전체가 반()제국주의 세력의 지배하에 놓일 우려가 있는 경우나 식민지의 어떤 특정지역을 제국주의를 위하여 꼭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식민지를 분할하여 제국주의에 필요한 지역을 반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격리하여 두는 방법, ⑤ 제국주의 쪽에서 보아 바람직한 세력의 지배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연방을 만드는 방법, ⑥ 자기 나라 힘만으로는 지키기 어렵게 된 제국주의 이익을 다른 제국주의 제국과 공동으로 지키는 방법, ⑦ 국제조직의 그늘에서 제국주의의 이익을 지키는 방법 등이다

 

형식적인 독립이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가 눈에 띄이고 거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파농이 예견한대로 줄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와 파농

           파농은 수치와 굴욕이라는 정신적인 충격이 주는 부분에 대해서도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에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거대해진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으며 (수치 및 모멸감과 같은) 정신적으로 박해를 받는 이주 노동자의 입장과 잘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파농이 현재까지 살아있다면 이 부분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여 그들의 인성을 돌려놓는 데에 여러 가지 제안을 하지 않았을 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 참고 도서

1.     Rajeey S. Patke, Postcolonial Poetry in English

2.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

3.     에릭 샤프, 종교학그 연구의 역사―』

4.     네이버 백과 사전



[1] 에릭 샤프, 종교학―그 연구의 역사―』

[2]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YES마니아 : 플래티넘 a******8 2011.05.0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아름다운 혁명가 이야기
"아름다운 혁명가 이야기" 내용보기
아프리카의 혁명적인 사람 파농의 이야기이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태생이고 평론가·정신분석학자·사회철학자. 이면서 혁명가이다. 처음에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흑인이었고 정신과 의사였다. 젊은 시절 2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를 위해서 전쟁에 참여 했다. 돌아온 그는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검은 피부이면서 하얀가면을 벗어 버
"아름다운 혁명가 이야기" 내용보기
아프리카의 혁명적인 사람 파농의 이야기이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태생이고 평론가·정신분석학자·사회철학자. 이면서 혁명가이다. 처음에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흑인이었고 정신과 의사였다. 젊은 시절 2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를 위해서 전쟁에 참여 했다. 돌아온 그는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검은 피부이면서 하얀가면을 벗어 버리고 아프리카를 위해서 산 사람이다. 북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를 하면서 독립투쟁에 정신적 이론을 제시한 사람이다. 알제리의 독립과 아프리카를 위해서 힘을 바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파농의 전기는 "알리스 셰르키"가 썼는데 파농의 옆에서 같이 아프리카를 위해서 힘을 쓴 여인이다. 파농과 그의 책에 대해서 상세히 볼 수 있는 책이다. 이땅에 위대한 혁명가들 정치인들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 그중에 파농은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잊혀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여러 책을 통해서 그의 이론과 열정들이 아프리카와 여러 나라들 가운데 힘을 주는 듯 하다.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보면 마음이 답답한지 모른다. 그리고 알제리를 보면은 더 마음이 애린 것은 파농의 피가 그 땅 가운데 있는데 헛데게 뿌려졌을까 라는 조바심을 내기도 하다. 체게르바에게와 많은 지성인들의 우상인 파농의 전기를 권한다.
e****7 2005.12.1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아프리카의 검은 진주
"아프리카의 검은 진주" 내용보기
프란츠 파농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자신이 그렇게 빨리 죽고 싶어서 죽은 건 아니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다. 그는 혼혈아인데 아버지는 흑인이고 어머니는 백인이였다. 프랑스는 흑인이라고 백인이라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존중받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색깔이 다르다고 무시받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프란츠
"아프리카의 검은 진주" 내용보기
프란츠 파농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자신이 그렇게 빨리 죽고 싶어서 죽은 건 아니지만 그가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다. 그는 혼혈아인데 아버지는 흑인이고 어머니는 백인이였다. 프랑스는 흑인이라고 백인이라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존중받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색깔이 다르다고 무시받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프란츠 파농은 자신의 많은 저서에도 그런 이야기들에 관한 것들이였다. 자신의 삶속에서 직접 노력한 흔적이 있다. 자신에 삶속에서 그러긴 힘들텐데... 그는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다. 35세의 나이로... 한창 활동한 시기에.. 그는 알제리의 전쟁에 나가 의사로서 활동했다. 전쟁이란 좋은게 아니다. 죽음과 피만 있을 뿐이다. 결국 상처를 받는 건 싸운이들도 아니고, 정치관들도 아니다. 민중들이다. 그들이 상처받을 뿐이다. 몇 달 전에 이라크 전쟁이 있었다. 미국과 이라크 전쟁이라고 하지만 수많은 민중만 죽었을 뿐이다. 지금도 소규모로 전쟁하고 있다. 미국은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 평화를 위해서라고 부르짖는다. 근데 그렇게 안 보인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고, 죽고 피를 흘리고 삶마저 포기당한채 사는 건 이라크 민중들일 뿐이다. 후세인이 죽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평화라는 이름아래 전쟁을 하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 프란츠 파농의 삶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말이다...
YES마니아 : 골드 g******4 2003.08.2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 내용보기
대표적 저작으로,[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이 있는 프란츠 파농의 전기입니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에 속한 엔틸리스 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알제리해방에 투신한 정신의학자이자 혁명가입니다. 알제리는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태어난 도시입니다. 식민지해방을 위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만,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제대로
"" 내용보기
대표적 저작으로,[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이 있는 프란츠 파농의 전기입니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에 속한 엔틸리스 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알제리해방에 투신한 정신의학자이자 혁명가입니다. 알제리는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태어난 도시입니다. 식민지해방을 위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만,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의 식민지화, 북아프리카지역의 종주국 프랑스와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알제리는 163년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겪었고 1962년인가에 겨우 독립국이 되었지만, 그 이후의 행로는 많은 제3세계가 겪어야했던 이야기의 재판입니다. 혁명세력의 분열, 내부의 투쟁, 암살과 반대파학살, 군부독재정권의 출현, 이슬람의 국가종교화, 그리고 부패,압제,반독재투쟁, 지금은 많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수도 알제에는 폭탄폭발사고가 나고있습니다. 지금, 전체적으로는 아랍과 이스라엘,미국의 대립, 이슬람과 기독교사회의 대립이 더 큰 문제가 되어 있으나, 알제리사회의 기층은 아직도 위에서 말한 비극적인 사태전개의 결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전기를 읽다보면 그는 죽은 1961년이전부터 이러한 사태 진전의 가능성과 그 비극적 결말을 예견했다고 하는군요. 그가 우려한 가장 큰 문제점이 이슬람을 국가종교화함으로써 사회전체의 조화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교일치의 문제]는 분명히 쉽게 다룰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국가권력 뿐만아니라 그 체재하의 대중들의 다원화을 가로막는 인자인 것 만은 틀림이 없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의 알제리 대통령은 젊은 시절 파농의 저작을 구술받아 타이핑을 하는 일도 자원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파농을 따르고 존경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만, 그를 포함하여 이전의 군부출신 알제리 지도자들은 식민지해방투쟁을 거쳐 알제리를 군부통치하에 두기 시작하면서 역사의 미화, 우상화작업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파농을 소외시켜 왔다고 합니다. 독재정권에서는 누구나가 하는 필수적인 코스라고 할 수 있겠죠? 인간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손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음에도 사람이라는 이토록 간사한 존재는, 반복해서 그런 우를 행하고,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다른 전기, [체 게바라]를 읽다보면 우리는 다시 알제리와 부닥치게 됩니다. 알제리를 방문한 [체게바라]와 악수하는 당당한 모습의 알제리 초대 대통령 [벤 밸라] 때문이죠. 그도 나중에는 군부 쿠데타로 인해 오랜기간의 연금생활끝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모두들 알제리를 한번 만나보시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카뮈의 '이방인'과 프란츠 파농을 같이 읽어보면 더 흥미가 진하게 느껴질 것 같군요.
h*****m 2002.10.1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검은 전사~
"검은 전사~" 내용보기
실천문학사의 '인물찾기'시리즈 중에 하나다.   프란츠 파농은 흑인으로 과격한 알제리 혁명 투쟁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폭력을 혁명의 주요 수단으로 인정할 수 있음을 지지한 이로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이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그놈의 오해는~   정신과 전문의에서 점점 독립운동으로 옮겨간 그의 활동은 어느 정도 필연성을 지닌다. '자신의 땅에서 유배받았다'는 표현처
"검은 전사~" 내용보기

실천문학사의 '인물찾기'시리즈 중에 하나다.

 

프란츠 파농은 흑인으로 과격한 알제리 혁명 투쟁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폭력을 혁명의 주요 수단으로 인정할 수 있음을 지지한 이로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이것이 오해라고 말한다.

그놈의 오해는~

 

정신과 전문의에서 점점 독립운동으로 옮겨간 그의 활동은 어느 정도 필연성을 지닌다.

'자신의 땅에서 유배받았다'는 표현처럼 식민지 지역에서의 정신과 환자들의 상당수의 질환의 원인을

식민지 생활에서 피지배자로서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란 것을 알게 된 후

병의 치료를 위해서 결국은 병의 원인인 '식민주의' 철폐를 위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안다고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하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본을 보여준 듯 하다.

자신의 고향도 아닌 알제리에 가서 온 힘을 다해 투쟁한 그의 모습에서

체 게바라가 떠오르기도 한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검은 얼굴, 흰 가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등이 있다.

제목에서부터 느낌이 팍팍 오지 않냐?

k*****k 2008.12.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