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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낙엽 고통스럽게 보내야 하는 백만 가지 이유, 포스트 잇으로 붙어 있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떨어진 낙엽 고통스럽게 보내야 하는 백만 가지 이유, 포스트 잇으로 붙어 있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내용보기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 죽지에 부리를 묻고 /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 <새들의 페루> 중  새, 하늘의 상처 난 틈을 열고 쏟아져 내렸다. 희미하다가 뚜렷해지는 공포와 뚜렷하다가 희미해지는 그리움이 떼로 몰려다녔다. 어느 군인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키던 우악스러운 초병에게 붙잡힌 어린 새가 발가벗겨지는
"떨어진 낙엽 고통스럽게 보내야 하는 백만 가지 이유, 포스트 잇으로 붙어 있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내용보기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 죽지에 부리를 묻고 / 폭우를 받아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 <새들의 페루> 중


  새, 하늘의 상처 난 틈을 열고 쏟아져 내렸다. 희미하다가 뚜렷해지는 공포와 뚜렷하다가 희미해지는 그리움이 떼로 몰려다녔다. 어느 군인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키던 우악스러운 초병에게 붙잡힌 어린 새가 발가벗겨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나는 어려서 마음껏 소리치지 못했는데, 그것이 영영 트라우마로 남아 버렸다. 그 저녁 나는 꿈을 꾸었고, 새의 발자국, 굳은살처럼 남아 있던...


  “새떼가 푸른 소반에 한 점씩 찬으로 떠 가지런한 아침을 지나” - <우우우우> 중


  아침, 열쇠고리에 매달린 자물쇠처럼 이율배반이었다. 야유가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린 담벼락은 장벽처럼 길고 높아서 그 아래에서 많은 환상이 자라났다. 벽을 향해 날아가는 구슬과 튕겨져나온 구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달랐다. 벽을 향해 기어오르고 뛰어 내리면서 벽에 생채기를 냈다. 그 생채기가 적당한 홈이 되었을 때 나는 그 홈에 발을 딛고 꼭대기에 오르고 벽 너머로 떨어졌고, 그렇게 내가 도착하였던...


   혀의 해안


  저녁이 발을 헛디딘 곳 - 지팡이를 빚으러 가야 하네


  물은 왜목의 좁은 해협을 지나며 어촌 불빛에 묽은 뺨을 건넨다


  누가 제 혀를 잘라 서쪽하늘 붉게 기웠는가


  섬 산 능선 늦바람에 감기는 고백도 되지 못하고 죽어서야 입 벌리는 조개들, 무슨 말을 삼키려다 속을 태웠는가


  석양에 넘어진 저녁 - 지팡이를 건네러 가야 하네


  혀, 구슬리고 구슬리다 결국 삼키지 못하여 살아남았다. 오직 나만의 것으로 여겼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삼켜지지 않은 혀와 그을린 혀가 우로보로스의 형상으로 엉킨 것은 어느 새벽 개척 교회가 몸담고 있던 빌딩의 이층, 문 닫힌 작은 은행 아래 계단참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새벽, 더 이상 밀고 나아가지 못하는 어린 연인을 닮아 있던 새벽은 오래도록 그곳에 남아 비어 있는 채로...


  “도심 공원에서는 벤치에 누운 / 사람이 야생이고 // 건너 고깃집 야외식탁을 들러온 바람은 / 검은 냄새의 문명이다 // 빈 낙엽 한 장 누더기처럼 내려와 / 습성처럼 어깨를 덮는” - <야생동물보호구역> 중


  벤치, 허기에 바짝 말라 여윈 채로 버티는 중이었다. 서울세관사거리 룰루랄라 벤치에서 이십대의 내 젊음이 건조되었다. 내가 야생의 습속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문명의 습성으로 훈제되어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억은 이용자를 잃은 언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사라져갔다. 벤치와 길은 공생의 관계, 서로를 향해 눈길 주지 않고 무심한 듯 굴고 있지만, 결국 함께 스러져갈 수밖에 없는...


   처연한 저녁


  가을 감나무는 한 주먹씩 노을을 쥐고 있다 그 아래 누우면


  가지 사이사이로 조각조각 비치는,


  감나무에 걸터앉아 하늘은 무슨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고구마 캐던 어머니가 그 자리
  고구마순 깔고 앉아 땀을 식히듯


  문득 일어나는 어머니 뒤에 고구마잎 몇장 붙어가듯


  서쪽으로 걸어간 하늘 그 엉덩이에 남은, 붉은 노을을

 
  어머니 대바구니 가득 고구마 이고 돌아오는 발목에, 알 박인 어둠
  어둠이 넝쿨째 딸려와
  감나무 훤한 가지에 척 걸쳐지는 모양을


  물 빠진 냇가 나뭇가지가 떠내려온 잡풀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그 물에 낙엽 한 장 떠 붉게 흘러가는 것처럼


  저녁, 퇴로가 없는 고통으로만 깊어간다. 비가 내렸고 바람이 불었고 낙엽은 피고름처럼 포도에 흩뿌려져 있다. 떨어진 낙엽을 고통스럽게 보내야만 하는 백만 가지 이유가 노란 포스트 잇으로 붙어 있는 저녁, 지나가고 있다. 빈 놀이터 흔들리는 그네에서 발 동동거리며,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탑 오브 더 월드를 부르고, 저기 철봉에서는 커다란 달이 낑낑거리며 매달려 앞돌기를 하고 있던 저녁이...


   저녁에


  사선으로 떨어지는 저녁, 옆구리에 볕의 장대를 걸치고
  새가 운다


  저녁 하늘은, 어둠이 갇힌 볕의 철창

 
  저녁, 새소리는


  허공에 무수히 매달린 자물통을 따느라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


  저녁 감나무에, 장대높이로 넘어가는 달



신용목 /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창비 / 127쪽 / 2007 (2007)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17.11.12. 신고 공감 1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