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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어릴적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 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느곳을 가더라도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아이들에게 내가 어릴적 이야기를 해주면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간주한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나 변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어릴적 모습이지만 꿈속에서 겪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이 우리 인간들이 살기에 그만큼 편리해진 것일까? 분명한 것은 지금이 그때보다 풍족하고, 육체적으로 편하고, 또 여유롭다. 그러나 비록 그 시절에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풍요로웠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배는 곯았지만 나눌줄 알았고,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교과서를 빼곤 아무런 책도 없었지만 서로에게 배울줄도 알았고, 밤하늘에 별들이 많은 줄도, 달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것은 부모, 그리고 동네 어른들을 통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들을 깨우쳤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얻는 대신, 어쩌면 더 소중할지도 모르는 순수함을 잃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힘들다는 사막. 그렇지만 사하라사막에는 두건과 푸른색 베일을 쓰고 새로운 물과 목초지를 찾아 유목생활을 하는 투아레그족이 있다. 아프리카 말리 북부의 투아레그족 유목민 야영지에서 태어난 이 책의 저자 무사. 그가 열세살쯤 되었을 때, 파리-다카르 랠리를 취재하기 위하여 프랑스 여기자가 그들을 방문한다. 어느날, 여기자가 가방에서 떨어트린 책을 보고 무사는 주워준다. 여기자는 그곳을 떠나면서 무사에게 그 책을 선물로 주고, 무사는 그 책속의 그림에 매혹되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글을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어린 왕자]를 읽게 된 무사는 [어린 왕자]를 지은 생텍쥐페리를 만나러 프랑스에 가기를 꿈꾼다. 그에게 어린 왕자에게 형제가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꿈을품고 프랑스에 건너온 무사, 생텍쥐페리는 이미 타계한탓에 비록 그 꿈을 실현하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다는 꿈은 이루어낸다. 그러나 그가본 새로운 세상은 그가 살던 사하라와는, 아니 투아레그족이 생활하던 방식과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그가 문명화된 사회에서 보고겪는 에피소드들이 그들 투아레그족의 생활과 비교되며, 우리에게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할수 있는 시간을 준다. 아직도 새로운 세상을 보고싶다는 무사의 꿈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를 통해 우리 또한 새로운 세상, 아니 어렸을 때 보아왔던 세상을 다시 한번 꿈꾸게한다. 사막에서의 삶은 매우 단순하다고 무사는 말한다. 갖고 있는 것들도 단순하고, 생각도 단순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투아레그인 들에게 있어 시간은 잃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대지 역시 마찬가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투아레그족만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문화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아직 잃지 않았을 뿐이다. 문명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사막에서의 생활을 이야기 해주는 무사,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면의 떨림을 맛본다. 무엇인지 알수는 없지만 가슴속에서 울림이 일어난다. 문명사회의 이기(利器)들을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유목민 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 남는 것은 씁쓸함이다. 그들이 내면의 길을 따라갈 때 운명의 눈짓은 그 길을 계속 갈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문명화된 세계에서 이성은 오직 물질적인 것, 구체적인 것에만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저자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유목민들의 오래된 지혜와 자연이 가르쳐준 교훈으로 현대에 사는 문명인들에게 참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하루하루 부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도시인들에게 진정으로 풍요로운 것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고통도 삶의 한 구성요소로 여기며, 행도 불행도 모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이미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투아레그족, 그들이 사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이다. 밝아오는 태양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고, 지상에 어둠이 내리면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루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들은 시간을 재지 않는다. 서두르지도 않는다. 시간을 재고, 서두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관조할 시간도 없이 소멸로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 이라고 무사는 말한다. 우리들이 예전의 어릴적 생활로 돌아갈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라도 투아레그족, 그들처럼 살수도 없다. 하지만 문명이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길을 잃고 방황하게 만들지는 않나 생각해 볼 일이다. 치열하게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가슴속에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허전함이 있다. 잠시나마 삶의 속도를 늦추어 보고 싶다. 그나저나 투아레그족 그들도 carpediem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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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소쿠리로 새의 덫을 놓았던 적이 있다. 싸리나무로 엮은 커다란 소쿠리를 땅에 엎어놓고는 한쪽 편을 들어 그 밑에 작은 나무 막대기를 괸 후에 새가 좋아할 만한 곡식 낱알을 뿌려 놓는다. 그 괴임목에 긴 끈을 매달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곡식을 쪼아먹던 새가 소쿠리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 끈을 잡아 당기면 새는 소쿠리 안에 갇히고 만다. 어린 나는 포로로 잡은 새를 의기양양하게 자랑하곤 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미래라는 시간 곳곳에 스스로 쳐놓은 덫을 바라보며 불나방처럼 돌진하고 있다. 내가 만든 덫에 내가 잡힐 줄이야 그 어린 시절에는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는 자라면서 자신이 갇힐 덫을 미리 준비하도록 교육 받는다. 돈이 많아야 되고, 건강해야 하고, 명예와 권력을 얻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항상 우러러 봐야 하고, 오래 살아야 하고...... 그 절대 기준의 덫에 걸린 나는 자유의지를 잃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미래라는 시간을 항상 염려하고, 시시때때로 탈출을 꿈꾼다. 그 덫에서 풀려나는 어느 순간 나는 또 다른 덫을 준비하곤 한다. 나는 그 절대 기준의 덫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는가. 현대인 대부분이 그럴 터이고, 나의 자식에게도 대물림 할 것이다. 삶의 긴 여정을 걷노라면, 때로는 고통과 직면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사고와도 직면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나의 절대 기준에는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오직 편안함과 안락함 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그 기준에 수시로 갇혀 더 큰 고통을 맛보는 것이다. 결국 삶이란 고통이고, 미래는 두려움이며, 과거는 잊어야 할 대상이다. 그 어디에서도 삶의 아름다움과 충만감은 찾을 수 없다. 이 책은 사막의 유목민 투아레그족 젊은이가 영혼을 잃고 흔들리는 모든 현대인에게 들려주는 진실의 울림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어느 여기자로부터 우연히 선물로 받게 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한 권은 그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오직 그 책을 읽기 위해 자신의 야영지에서 왕복 30km에 이르는 학교를 다니고, 온갖 고난 속에서도 <어린 왕자>의 저자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프랑스 유학의 길을 떠났던 원시 부족의 한 소년은 태양과 바람과 모래의 땅을 떠나 상상할 수 없었던 낯선 문명과 마주했다. 많은 인파 속에서 살지만 고독한 사람들과,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지만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엄청난 속도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도 조급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섹스를 즐기지만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생활은 그 소년에게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잃고, 끝없이 자신을 잊으려 한다. 자신을 잊음으로써 삶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도시인들에게 원시 부족의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쌓는다. 우리는 구전사회다. 따라서 우리가 잊는다면, 우리의 역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과거가 지워지는 것이다. 망각은 작은 죽음이다. 진정 살아있다는 것은, 명철한 의식으로 삶에 참여하여 모든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도피, 자신에게서 벗어남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P.204) 사막의 유목민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도시의 문명인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내 생각에 참 삶이란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다. 이를 누리는 방법 또한 간단하다. 매일 아침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 건강을 유지하는 것,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 자연을 존중하며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 온전히 시간을 사는 것, 그러한 것들이 참삶을 이룬다.(P.165) 영혼을 찾아 사하라 사막으로 향하는 문명인과 더 큰 영혼의 확장을 위해 프랑스의 도시로 향한 원시인 사이에서 나는 몹시 혼란스럽다. 법정 스님이 추천을 했던 이 책은 문명 사회의 원시 부족, 그 문명인의 필독서라고 말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다. 나는 미래의 덫을 하나씩 걷어내려 애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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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사막학교 아이들이란 책에 관심을 가졌다. 그 저자가 쓴 전작이 '사막별 여행자'란걸 알았고 전작부터 읽어보는게 좋을거 같다는 생각에 읽게 되었는데, 오잉? 제목이 낯설지 않다..라고 생각한건 내가 류시화님의 '지구별 여행자'를 오래전에 무척이나 잔잔하고도 여운이 남게 보았던 이유이리라. 그때 당시 인도라는 그닥 관심도 없던 나라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보게 해주었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오랜 여운으로 인해 주위 지인들에게 종종 추천하고 선물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류시화님의 추천사도 한몫했고, 제목도 그렇거니와 사막이라는 곳에 대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막연한 느낌은 끝없는 모래벌판,낙타,오아시스,한낮의 엄청난 열기와 밤의 서늘한 추위..그정도?
'생 떽쥐베리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날아가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수없이 웃음 지을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끝없는 아연실색과,경악이 톡톡히 한몫했다. 얼마나 수많은 경악을 해대시는지^^ 그런 나도 경악까지는 아니고 저자에 대해 약간 의외의 반응을 보인게 있다. 어린시절 자동차경주 취재차 사막에 온 프랑스 여기자에게 '어린왕자'를 건네받고 '생 떽쥐베리'를 만나고 싶어 프랑스까지 가게된 유목민 소년의 이야기라고 해서 난 이 책을 쓴 저자가 지금쯤은 꽤 나이가 많은 중년 혹은 그것보다 더 나이많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런..나보다 불과 예닐곱살밖에 많지 않았다..(정확한 출생년도는 유목민의 특성상 알수없었고 대충 저자가 말하는 년도와 나이에 유추하였을때) 이것이 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문명인과 유목민의 차이인가? 우리의 시각으로는 생 떽쥐베리는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세상에 없었던 사람이라는걸 당연한(?)듯이 알고있었고...문명세계와 접할수 없었던 저자는 알지못했다는 그것.. 그것을 간과하고 읽던 나는 어랏? 할아버지가 아니네~하는 생각으로 약간은 놀랐다..
푸른베일을 쓴 사하라 사막의 투아레그족 유목민 무사! 그가 프랑스라는 거대 문명나라에서 보고,느끼고,겪게되는 모든 일들을 유목민인 자신의 시각과 생각과 오랜 관념과 비교하여 써져있는 이 책은 에세이임과 동시에읽는 나에게 많은 교훈과 뉘우침을 주는 지침서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심지어 지금 이렇게 내가 블로그에 글을 남기려 타자를 치고있는 일상까지도 그의 눈에는 경악스러운 일이었을거다. 허나 우리는 이게 일상이다. 나는 너무 당연한듯이 살아오고 있는것이다. 수돗물이 나오고, 티비를 보고,못먹겠으면 억지로 먹지않고 음식을 남기고, 높은건물에 엘리베이터는 필수이고, 대형마트 같은곳에는 당연히 손 쓸 필요없는 자동문이 있어야하고 말이다. 심지어 우리는 현재를 살고있는데, 그 현재인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고있다. 무사는 이런 우리들이 다 놀랍게 보이는거다. 사막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그네들은 물을 찾고,목초지를 찾아 떠돌고 음식은 필요한큼만 그날그날에 구하고, 낙타가 모든 이동수단의 다인..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과 미래보다는 지금 이순간,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오늘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
문명세계에 살고있는 우리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이기심과 욕심에 시달리고 있는지 똑똑히 일깨워주고 있는데, 글쎄..일단 우리는 사막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이나라 이땅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이 세계에 길들여져있는건 당연하지 않은가.. 다만, 우리는 사막에 살고있는 유목민보다 엄청나게 방대한 양의 많은것을 누리고있고 갖고있으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소유하려 하는, 그런데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갖지못해 안달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아가고 있는거 같다는 그말은 어찌나 이리 와닿는지.. 그래서 무소유가 행복한 것인가. 한번 가져봤으니 더더욱 갖고싶어지는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고,애초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그네들처럼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우리도 하루하루를 만족해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에서는 행복한 웃음을 머금었을거라는...
우리는 항상 무엇이든 더 가지고 싶어하고 소유하려 한다. 나부터도 그렇다. 예를 들어 끊임없이 책을 사려한다. 가지고 가져도 더 갖고싶다.(근데 이건 어쩔수 없는데?) 사실..책 한권에 만족할수는 없다. 다른것, 무사가 제일 부질없다 생각하는 돈! 그래 돈이라는게, 흔히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만 하지들... 진실로 없으면 않되는게 지금 이 세계이지 않나. 돈이 있어야 살아갈수 있다. 그러나 죽기살기로 돈을 모으고 빚을 지고 집을 사고 차를 산다한들 죽을때 그것을 짊어지고 갈거냐라고 저자는 말하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돈을 소유하려 욕심내기 보다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불가결정도로 생각하는 저자의 마음가짐을 어느정도는 본받을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 두껍지 않은 두께인데도 저자의 마음을,생각을 간혹 흘려보듯이 본게 있어서 몇번씩 앞장을 다시 넘기고 넘기고 하다보니 읽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좀더 저자의 마음이 되고싶었다. 나 스스로가 유목민의 마음이 되고싶었다. 그런데..온전히 다 납득할수 있으려면 내가 사막으로 가야할거 같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이 광활한 사막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일들을 어찌 직접 겪어보지 않고 글로만 보고 다 이해할수 있다 하겠는가~
인생은.. 삶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오늘에 감사하며 너무 욕심내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겠다고 오늘도 난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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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책이라고 해서 교훈을 억지로 주는 책은 싫다 단지 저자가 보고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점에서 이책은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또다른 세계를 간접 경험 할 수 있으며 막연한 어머니의 그리움을 자아낸다. 우리는 많은것을 갖기 위해 애쓰다가 잃는 것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사막의 여행자는 최소한의 것을 갖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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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에서 태어난 투아레그족인 유목민 남자가 몇몇 일들을 계기로 사막을 떠나 프랑스로 오게 되고 머물면서도 사막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뿌리, 즉 본질을 잊지 않은 채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우리에게 가르침과도 같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프랑스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받은 문화적인 충격등에 대해서도 한 치의 거짓 없이 너무나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동문이라던지, 엘리베이터, 수도꼭지 등등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이 그에겐 무척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편리하면서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물과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척박한 환경을 가진 곳에서 자라온 그는 도시에선 모든 것이 풍족한 데 반해 자신의 고향은 그렇지 않은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물은 물론 음식물등이 낭비되고 버려진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식욕 즉 욕망에 의한 것이므로 절제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목표와 세상, 나아가 멸족의 위기에 처한 부족의 미래를 꿈꾼다. 동생을 통해 '모래학교'라는 투아레그족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것인데 환경(잦은 가뭄 등)과 정치적 요인들로 부족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 만큼 교육을 통해서 장차 커나가는 투아레그족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얻고 나아가 꿈을 꿀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자 '꿈'인 것이다.
요즘들어 계속 이런 쪽의 책들만 읽게 되는 것 같은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들 책에서 느낀 공통점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져야한다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론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어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는 의미로 귀결될 수 있겠다. 이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살아가면서 갖게되는 불만과 끊임없는 욕심 사이에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구나 싶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들어도 마음은 결코 쉬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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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왜 가끔 여행을 떠나는 걸까? 모든 일상에서 벗어나 간단히 짐만 챙겨 새로운 땅과 새로운 삶에 우리자신을 내동댕이쳐 봄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닐까? 이런 의미라면 여행은 현실에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여행이란 결국 자기자신에서 출발해 타인을 통과해 다시 자기자신에게 돌아오는 그러한 삶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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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만 사는 현대인에게 시간이란 있어도 늘 없는 것이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바쁘기만 하다. 그런 시간 속에 나를 얼마나 들여다보고 나를 고찰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몇년전에 빌려서 읽고는 새로 구입해서 읽었다. 특별히 어머니에 대해 회상하고 어머니의 신념을 말하는 그의 화법이 마음에 와 닿았다. 또 사랑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좋았다. 천박하지 않지만 은밀하면서도 아름다운 지극히 고귀한 사랑의 관계. 거리를 차표의 값으로 환산되는 현대, 그러나 내 발걸음의 시간으로 환산되는 사막의 공간. 많은 것을 아름답게 고귀하게 바라보려는 자연인인 무사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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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푸른색 베일을 쓰고 사하라 사막에서 대대로 살아온 유목민 투아레그족 야영지에서, 자동차 경주를 취재하러 온 프랑스 여기자가 나타난다. 그녀가 우연히 책 한 권을 떨어 뜨렸다. 이른 본 소년이 뛰어가 책을 집어 건네준다. 소년을 귀엽게 여긴 여기자는 그 책을 소년에게 선물로 주고 떠난다.
글과 그림이 실린 그 책을 반드시 읽겠다고 결심한 소년 무사는 아버지를 졸라 날마다 30km를 걸어 학교에 다니게 된다.
글을 깨우친 소년이 읽게 된 그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어린왕자의 형제가 아직 사막에 살고 있음을 말해 주기 위해 프랑스로 가서 그 작가를 만나리라 결심한다.
이미 고인이 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년월일도, 나이도 모르는 무사는 마침내 스무 살 무렵에 우여곡절 끝에 파리에 도착하게 되고, 그의 앞에는 마술과도 같은 문명 세계가 펼쳐진다.
문명인에게는 일상적이기만 한 일들 앞에서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투아레그족 청년을 떠올려 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재미중의 하나지만, 나는 웬지 그 웃음 뒤에 느껴지는 씁쓸함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 이면에는 우리들 문명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과 잃어버린 영혼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무사는 도시인들의 결핍된 열정, 고독을 감춰 버리는 마천루와 빌딩 숲, 돈과 쾌락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 영혼과 육신, 지혜가 가득한 노인들을 외톨이로 가두는 양로원, 빨라야 직성이 풀리는 조급증,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따끔한 비판을 한다.
아랍어로 '사막에 사는 이들'이라는 뜻의 투아레그족은 사하라 사막 중부에 살고 있단다.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사막을 자유로이 떠도는 유목부족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란 뜻의 '이모하'라 부른다.
이 책은 2004년 5월. 학교 부근의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합석한 한 남자에게 무사 자신의 어린 시절, 사막의 야영지, 단봉낙타와 염소들, [어린 왕자], 학교 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남자는 그에게 명함을 내밀며, "당신의 삶은 한 편의 소설입니다. 내가 그 소설을 책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가 바로 이 책의 출판사 발행인인 티에리 파야르이다.
주옥 같은 글들이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 주는 느낌이다. 좋은 책을 만나게 되어 행복한 4월의 말일~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에서도 이 책을 소개하고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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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별과 사막별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도시 안에 살고 있다. 그것의 규모와 상관없이 일정 공간 안에 밀집하여 거주하며 특정한 재화의 생산 능력이 있다면 기초적인 삶의 도구, 예를 들면 식량 생산능력이 없어도 자신이 생산한 재화와 교환하여 살아가는 곳. 바로 도시에 살고 있다. 현대화된 나라들에서는 아직 자연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농촌, 어촌들 조차도 도시에 연관되어 살아간다. 도시에서의 삶은 몇 가지의 중요한 것에 집중하여 살 수 있고 내가 싫어하는(?) 일이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고 능력만 된다면 내 욕망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점점 도시로 몰리고 도시는 팽창하였다. 이 것이 지난 세기 내내 진행되던 도시화와 도시이주 문제의 원인이었다.
도시화, 지속되는 문제들
물론 지난 세기 초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대공황이라는 것을 겪었다. 하지만 세계 대 공항과 그 뒤의 세계대전 끝에 인류는 고도의 산업화와 막대한 부가가치의 창출이라는 방법으로 고통을 해소할 방법을 찾았고 그로 인해 이 후 수십 년 동안의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이 부유한 삶(매우 편향적인)을 이루었기에 대 공항과 세계대전의 아픔은 잊혀져 갔다. 그러나 금융위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공항은 모든 것이 풍부하다고 생각하였기에 환란의 조짐 조차도 철저히 무시되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만들었다. 90년 중반부터 삐걱거리던 지구 경제는 금융위기 이후 개선의 여지가 없이 여전히 힘들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경제문제만 존재하는가? 정신 건강적인 문제는 각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현상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 문제야 말로 터지면 정말 무서운 문제들인 것이다.. 20세기 동안 이룬 인류의 부가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감까지 고려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난 세기 우리의 삶에 무엇이 문제였던 가를 살펴볼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럼, 과거 돌아가라 말인가? 흔히들 옛날은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과거의 삶은 추억으로 우리에게 남아 힘들고 지칠 때 꺼내보면서 힘을 얹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 어린 시절 같은 과거의 일들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힘이 되거나 위로 받지는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잠시 쉴 수 있는 여유는 제공해 주기 때문에 아무리 그 효과를 줄여 본다고 해도 최소한 인간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것 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점은 과거에 죽을 만큼 힘든 기억도 그 것에서 멀어지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긍정적으로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힘들었던 것, 나빴던 것들 조차 담담하게 그 것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약이라는 옛말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났다고 그 문제가 자연히 해결되거나 평가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당히 바라보고 입에 올리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미화가 된다. 배고팠지만 행복했던 시절, 다리는 아팠지만 새로운 모험이 가득했던 등굣길… 정말 과거로 돌아가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래도 과거도 우리에게는 관념으로 존재한다. 즉 ‘과거로 돌아간다’ 던지 미래에는 ‘어찌 하겠다’는 이야기는 결심이나 휴식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현실 문제에서 만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은 바로 지금의 내 행동과 단지 몇 시간 앞을 위한 준비뿐이다.
여기 우리와 다르게 인생을 바라보는 청년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그가 ‘어린 시절 했던 주장’대로 어린왕자의 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사막 별에서 지구별로 날아온 우주 여행자이다.
사막별의 어린왕자 도시별로 여행을 떠나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는 어린시절 우연히 선물 받은 ‘어린왕자’를 보고 책의 저자 ‘생텍쥐베리’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 갈 생각을 가지게 된다. 막연히 책의 저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그를 그의 가족과 선조들과는 좀 다른 길을 걷게 한다.
그의 가족들은 대대로 사하라 사막 주변을 이동하는 유목민으로 지금도 많은 수가 국적이나 주거지 없이 아주 오래 전의 전통의 방법을 살아간다. 국적이 없으니 당연히 여행을 할 수가 없고 현대식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다. 시골 학교를 다니는 일조차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결국 생텍줘베리가 살거라 믿었던 프랑스로 떠나고야 만다.
도시별 – 충격과 공포
무사는 프랑스에 도착하자 마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 곳곳에서 시선을 자극하는 전광판과 모니터들… 그러나 공항에서 받은 충격은 시내에서 받을 충격과 그가 세계적인 도시인들, 아마도 서구화된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그런 일들에서 느끼는 절망감과 괴리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도시 별에서는 무엇이든 넘쳐나서 물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린다. 그 뿐만 아니다. 늘 풍족하고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사람들은 혼자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돈 주고 사람을 만나고 어디서나 미혼의 남녀가 넘치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정보 회사에 등록을 해야 한다. 사막 별에서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신의 관계는 늘 자연스러웠고 평등하면서 늘 서로를 존경했다. 하지만 도시 별에서는 사람도 자연도 심지어 신도 어떤 틀 안에 넣어서 구별하여 버려서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벽을 넘거나 어떤 출입문(?)을 통해서만 교류가 가능하다. 자연스러운 어떤 것도 그대로 남지 않아서 교류라는 것이 어려운 곳이 바로 도시별이다. 사방 어디에도 담이나 문이 없던 사막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물성화하고 상품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남들에게 더 가치 있게 보이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로 인해 결국 더욱 고독해지고 그럴수록 자신이 아닌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그 뒤에 숨어서는 더욱 외로워 하는 도시별 사람들…
도시별에도 희망은 있었다.
무사가 도시에 와서 충격만 받은 것은 아니다. 도시별의 기술은 무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는 그것을 충분히 즐기게 되었다. 처음 테제베를 탔을 때 창 밖의 모든 엄청난 속도에 나무도 들판도 초원 위의 소도 하나로 뭉개져 버리는 것과 무서운 속도에 질려버린 무사는 공포심에 구토증세까지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 무서운 속도 즐기기 시작한다. 이 엄청난 문명의 이기는 사막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여 무사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해준다. 이 기계의 도움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별, 사막 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된다.
도시 별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그 자신의 뿌리인 사막별의 삶을 자랑스러워 하고 도시별의 역동성을 즐기며 희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도시별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서 자신 안에 부끄러워 숨어있는 희망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바로 이 책이 도시 별 사람들에게 소개 된 것이다.
황무지에서도 꽃은 자라는 법
우리가 사는 도시 – 인류의 삶은 점점 더 피페 해진다. 사막별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도시 별이 물질적 풍요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에 멸망의 씨가 자라고 있었고 사막 별은 점점 더 더워지고 사막에는 풀 한 포기 자라기 어려워진다. 사막별의 삶도 더 이상 사막별의 모습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사막 별 사람들도 도시별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들도 언젠가는 도시별의 어딘가에서 우리와 구분 없이 살 것이다. 아마도 무사가 그랬던 것처럼 경악하고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무사가 도시별의 황페 함 속에서 희망을 꽃을 보았듯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도시별 사람들은 도시 밖에 다른 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그 별에는 그 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나와 가족 또는 그 어떤 넓이라도 나와 관계된 관계사회를 벗어난 사회와 사람들을 적극적인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 인류는 지구라는 작은 섬 안에 함께 살고 있다. 지구 안에 다른 별로 바로 이동 가능한 장소가 있어 다른 별과 수시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지구별 안에서는 하나의 삶으로 같이 살고 같이 죽을 것이기 떄문이다. 좋은 방안에 누군가 고통으로 신음한다면 조만간 그 영향이 나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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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많은 타인들을 통과하면 자신에게서 자신으로 떠나는 거야."
-------- 본문 중에서 P55
요즘..내 독서 취향이 너무 편중되어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
누구나 다들 그럴 때가 있는 것 같다.
앞으로 가고 있긴 있는 거 같은데 이 길이 맞나 싶은 느낌, 혹은 내가 앞으로 가긴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 아니, 앞으로 가는 게 정말 맞는 건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까지...
사막에서 온 투아레그족 여행자는 이런 날 위해 무언가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책을 펼쳐 들었다.
사막에는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진짜 사막이라고 하기는 뭣한, 내몽고의 작은 사막.
하지만 사막에 머물렀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콧 속으로, 입속으로 들어오는 모래 바람에 숨을 쉬기 힘들었고, 뜨거운 햇볕을 피할 그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찾아 헤맸었다.
사막 안에서도 수많은 생명이 숨쉬고 있다는데, 옷 속으로 들어오는 모래 가루를 털어내기에 바빴던 나는 그 생명의 숨결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같은 사람에게 사막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안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투아레그족 사람들에게 사막은 생명,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사막의 품 안에서 그들은 생명을 얻고, 지혜를 얻고, 물 흐르듯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지도가 없어도 그들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고개만 들면 언제나 보이는 하늘의 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도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지도에 얼굴을 파묻고 들여다 보고 있는 동안에도 하늘의 별은 언제라도 우리를 안내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내게는 아직 낯선 사막에서 온 또 한 명의 어린왕자.
그는 하늘의 별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우리의 인생은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따뜻한 손길로 방황하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다 괜찮아질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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