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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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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가톤은 그의 집에서 친분이 있는 친구 몇을 초대해 술 한 잔 하고자 했다. 이 반가운 소식에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쏘냐! 주빈의 애인 파우사니아스, 문필가 파이드로스, 의사 에리크시마코스,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 정처 없이 사색하며 걷고 있던 소크라테스까지, 이들은 한걸음에 아가톤의 집까지 내달린다. 그러나 어제 과음해서 그런가 몸이 마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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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아가톤은 그의 집에서 친분이 있는 친구 몇을 초대해 술 한 잔 하고자 했다. 이 반가운 소식에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쏘냐! 주빈의 애인 파우사니아스, 문필가 파이드로스, 의사 에리크시마코스,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 정처 없이 사색하며 걷고 있던 소크라테스까지, 이들은 한걸음에 아가톤의 집까지 내달린다. 그러나 어제 과음해서 그런가 몸이 마음만큼 따라주지는 못했나보다.
“자, 여러분, 가장 편한 음주의 규칙은 무엇일까요? 나는 어제 폭음을 해서 녹초가 되었고 그래서 쉬고 싶다는 말을 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어제 이 자리에 계셨으니까요. 그러므로 가장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규칙이 무엇인가를 토론해 봅시다.『향연』”라고 파우사니아스가 백기를 들었고, 이 말에 동감한 에리크시마코스는 의사답게 ‘가장 편하게 술을 마실 제안’을 한다.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사랑의 위대한 신, 에로스에게 찬양을 바치며 마시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 자웅의 구분, 역사에 남을 만한 위대한 사랑으로 말문을 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성애에 대한 얘기로 넘어간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존경받던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경멸하고 성도착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소년애와, 이성애에 대한 동성애(남성-남성)의 우월성, 소년을 ‘사랑’할 때의 적절한 행동 가짐 등의 의견을 주고받더니, 성인(聖人) 소크라테스의 ‘남성 편력’으로 이날의 ‘향연’을 마무리 짓는다. “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저 소크라테스 선생은 잘생긴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는 경향이 있고, 언제나 그런 젊은이들과 사귀고 그런 젊은이들에게 넋을 잃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향연』은 오늘날 평범한 사람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텍스트이다. 기독교가 탄생한 이유로 반 자연적이고 신의 의지에 부합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온 동성애에 대한 주제로 가득하며, 사실상 사랑의 예찬에서도 그 주요한 대상은 동성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가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들의 신체에는 약 이 천년 동안 각인된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알게 모르게 가득하다. 오죽하면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시선을 피해, 스스로를 ‘이반’으로 칭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플라톤의 이 명저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세간의 오해처럼 동성애에 대한 변태적인 찬양도, 동성애가 만연했던 그리스 시대를 보여주는 시시한 사료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향연』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존재미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미적·윤리적 주체로 세우고, 자기의 배려를 통해 제 삶을 예술적 완성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편적 윤리규준이나 도덕규범을 개인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제 삶에 형식과 스타일을 부여하는 떳떳함!

 

고대 그리스인들의 성에 대한 접근방식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달랐다. 이들은 정상적이지 못한 체위 혹은 상식에서 벗어난 성적 행동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에는 이성애,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세 가지 성애가 공존하고 있었다. 물론 이중 어느 특정한 성애를 보편적 규범, 신이 부여한 질서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성이란 규제되지 않은 방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그것을 규제하는 방식이 오늘날과는 달랐다. 이들은 성의 윤리적 문제로 양적인 문제(강도, 횟수)와, 질적인 문제(능동과 수동)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먼저 양적인 기준은 ‘과도하냐, 적절하냐’, 즉 행위의 수와 빈도가 나타나는 행동의 정도와 관계된 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성애의 형태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성애든 과도함을 규제했다. 사실 성행위에는 강도 높은 쾌락이 수반되므로, 사람들은 욕망의 충족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먹고 마시는 것, 자는 것 등의 기본적인 욕구는 일정정도 충족되고 나면 그것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매일 20시간씩 자고 열 끼씩 먹는 것은 고문과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반면 성적 활동은 그것의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항상 욕구충족 이상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면 쾌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약한’ 인간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렇듯 성적 활동은 과도해지는 경향이 다분한데, 그것을 보완해줄만한 방어계획으로서 ‘절제’가 등장한다.
인류는 성행위를 쫒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성적 활동에 대한 불안감을 보여주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새 생명이 암시하는 개체의 죽음이라 던지, 남성의 경우 정액의 ‘손실’이라는 측면이라던가, 아니면 일생 생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를 겪게 됨에 따라 의식도 평상시의 ‘안정’이 아닌 ‘혼돈’을 느껴서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 에로스는 타나토스(thanatos; 죽음본능)와 짝을 이뤄 오늘날까지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절제’는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나친 성행위가 도덕적 주체의 형성을 방해하고 위협할까봐 절제를 부르짖은 것이다. 쾌락을 지배하느냐, 아니면 쾌락에 지배되느냐의 문제. 물론 돈이건, 여자이건 간에 쾌락에 지배되는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메마르다는 점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절제를 기독교적인 ‘금욕’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이처럼 욕구를 조절함으로서 의도하는 것은 쾌락의 ‘억제’가 아닌, 쾌락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절제의 모범 소크라테스 역시 쾌락에 대해 충분히 무장되어있지 않을 경우 어지간하면 미소년을 보지 않고, 필요하면 은둔까지 불사하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쾌락의 포기를 말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쾌락이 유지되지 못할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쾌락은 감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제를 통해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명백한데, 그것은 바로 쾌락 그 자체이다. “배고픔, 목마름, 사랑의 욕망, 수면, 우리가 이러한 욕구들을 가능한 한 최고로 기분 좋게 충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참았을 때, 비로소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잠자고 쉬는 데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향연』” 결국 그리스인들이 절제하는 것은 쾌락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닌, 기억할 만한 쾌락을 느끼기 위한 쾌락의 기술이자 실천인 셈이다. 흔히 말하는 ‘플라토닉 러브’란 플라톤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질적인 기준은 ‘성관계 속에서 역할이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남성은 성관계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했다. 능동적 기능이란 성 관계에서 ‘남성적’이라 불리는 역할, 다시 말해 삽입에 의해 정의되는 ‘능동적’기능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고대 그리스에서 자주 다루던 문제였으며, 특히 아르테미도로스의 「해몽의 열쇠」에 잘 나타나 있다.
아르테미도로스는 이 당시 그리스에서 결혼한 남자는 정부를 가지거나, 자신의 하인이나 소년 또는 소녀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창녀를 찾아가는 것 또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실이 그러니 난잡한 관계는 갖는 꿈은 사실 나쁜 꿈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리스인들이 나쁜 꿈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하나 있는데 주인의 역할, 성행위에서의 남성적 역할과 같은 능동적 역할이 아닌, 노예의 역할, 성행위에서의 여성의 역할, 수동적 역할의 꿈이 그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만큼 주도하고, 능동적인 남성적인 역할에 집착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르테미도로스를 극단적인 꿈 해석으로 몰아간다. 사람이 살다보면 근친상간의 꿈같이 망측한 꿈을 꿀 수 있다. 오늘날 그런 꿈을 꾼다면, 그 사람의 심리적 변화 내지는 가족 간의 관계 등 주변사항에 중점을 두고 꿈 해석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아르테미도로스는 ‘아버지-딸’, 어머니-아들‘ 심지어는 자매간, 형제간의 관계 모두를 능동/수동의 견지에서 해몽하였다. 즉 누가 누구에게 삽입하는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우세한가 열세한가, 지배하는가 복종하는가의 문제로 본 것이다.
결국 그리스인들의 자기지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남자가 되는 방식이다. 즉 원칙이 없는 곳에 스스로 원칙을 부과하며, 본래 수동적인 것들에 대해 능동적이 되는 것이. 반면 이들에게는 자연이 여성에게 마련해 준 역할, 즉 ‘여성적’이라 불리는 성행위에서의 ‘수동적’ 역할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여성뿐만 아니라, 파트너에게 삽입을 허용하는 소년이나 남성, 노예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은 성차별이라고 느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들이 여성에게 보인 경멸은 어쩌면 성차별적일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의 첫 번째 성 윤리인 ‘절제’에 대해서는 쉽사리 수긍하면서도, 두 번째 윤리인 삽입으로 대변되는 남성적 긍정성을 오늘날 적용시키는 데는 많은 반감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넓은 아량을 갖고 다시 집고 넘어간다면, 이 문제는 ‘언어의 그물망’ 즉 언어로 인해 생긴 오해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학자 유클리드는 ‘직선’, ‘원’, ‘점’ 등의 일상용어로 기하학을 정의했기에 충분히 대중적일 수 있었으나, 이 장점은 곧 단점이 된다. 예컨대 그는 「원론」에 나오는 ‘점’과 ‘직선’을 실생활에서의 ‘점’과 ‘직선’과 분명 다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우리는 유클리드가 말한 ‘점’과 ‘직선’을, 우리가 평소 생각해온 ‘점’과 ‘직선’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고, 결국 유클리드 기하학 ‘제5공준’은 결국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남성’, ‘여성’과 같은 단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철학자 가타리가 기존의 남성적인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여성도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여성’은 기존질서에 편입하여 지위상승을 꿈꾸는 여성이 아닌, 기존의 가치(남성적 가치)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모든 시도를 일컫는 말이다.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에 시달리면서 남성보다 더 남성적인 시선으로 여성들을 평가하는 여성을 어찌 여성이라 말할 수 있으랴. 따라서 남성도 여성이 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여성도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여성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니다. 그들이 남성적인 것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강하고 우월하여서이지, 그 반대여서는 아니다. 만일 그리스 철학에서 여성이 우월함을 주도했다면 그리스 남성들은 기꺼이 여성성을 따랐으리라.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고려해볼만한 중요한 문제는 하나만이 남는다. 바로 삶을 꾸려나가는 데 능동성과 자발성, 그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이 그것이다.

 

그리스인의 윤리 덕목인 ‘절제’와 ‘능동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동성애이다. 그들은 육체적 영원성에 도달하기 위해 여자에게 가서 후손을 얻고, 정신의 영원성을 얻기 위해 미소년에게 가서 그의 머릿속에 자기 생각의 씨를 심어주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그 어떤 성행위보다 큰 의미를 부여했다.
파우사니아스는 『향연』에서 세상에는 ‘세속의 아프로디테’와 ‘하늘의 아프로디테’가 있다고 말한다. 이 중 세속의 아프로디테는 여자를 사랑하고, 정신이 아닌 육체를 사랑하지만, ‘남성의 혈통’만을 가진 하늘의 아프로디테는 남성에게 이끌린다. 그렇다고 이때의 남성 간 관계가 결코 맹목적인 성애에의 탐닉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먼저 “소년들이 어느 정도 지성을 보일 때까지, 다시 말하면 수염이 날 무렵까지 기다”린 후, “생애를 통해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일생의 반려로 삼겠다는 의도를 밝힐” 경우에만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회에서 동성애는 필연적으로 기성세대가 2세들을 교육하는 공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성인 남성은 소년과 성관계를 맺지만, 그 과정에서 소년과 함께 운동하고 도덕적인 지도를 함으로서, 소년의 몸과 마음을 성숙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애인이 결합될 때, 각자에게 적합한 원칙에 따라서, 곧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을 위해 어떤 봉사든 다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원칙에 따라서, 사랑받는 사람은 자기를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의 뜻에 따라 어떤 행동이든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원칙에 따라서 결합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의 지혜와 덕을 위해 기여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자신의 교육과 지식 일반의 증진을 우해 열성을 기울일 때, 오직 이 두 원칙이 일치할 때에만 한 소년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명예로울 수 있습니다.『향연』”
이만 하면 동성애 특히 소년에 대한 취향은 변태노인네들의 성도착이 아닌, 사적 애정의 충족과 공적 의무의 수행이 통일된 그리스만의 특징이다. 오히려 어른들은 소년에 대한 성애를 ‘절제’하여 남는 힘을, 대화나 교육과 같은 방법으로 소년에게 투자해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시키니 어찌 아름답지 않다 하겠는가.
하지만 이 경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성인 남성 어른은 필연적으로 둘 간의 관계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겠지만, 소년은 수동적 역할·여성적 역할을 맡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년도 언젠가는 폴리스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한 사람의 주체, 즉 남자가 될 몸이기에 언제까지나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그래서 동성애에 관대했던 그리스 사람조차도, 다 큰 성인남자간의 동성애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봤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들의 성적 열망을 잠재우기에는 욕망이 너무 크다. 따라서 이 모순은 소년이 자라남에 따라 점차 그 관계를 사랑에서 우애(philia)로 전환시킴으로서 해결한다. 
바람직한 우애는 사랑의 관계와는 구별되는데, 성인 남자와 청년 사이의 에로틱한 관계에 있던 불균형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성인 남자는 자신의 ‘지혜’로서 소년에게 구애를 하고, 소년은 아름다운 ‘몸’으로 성인을 만족시켜 주었다. 성인의 지혜는 점차 소년에게 이어지고 소년은 그 대가로 제 몸을 허락한다. 점차 소년은 나이를 먹고 매력이 사라지지만 이 둘은 ‘지혜’를 통해 평등해지고 그만큼 서로에 대한 우정 역시 돈독해져간다. 더 이상 누구는 능동적이고 누구는 수동적인 일방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한 우애의 탄생이라고나 할까. 둘은 평등한 동반자로서 서로를 배려하며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도반(道伴)! 모두가 주인인 삶이다.

 

고대 그리스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성들을 가리킬 때 ‘좋음’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스인들이 ‘좋음’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인 ‘agathos’는 ‘고귀한, 온화한, 용감한, 능력이 있는’ 등을 의미한다. 이와 병행하여 ‘평민적인, 비속한, 저급한’등의 개념이 ‘나쁨(kakia)’의 개념으로 바뀌어간다. 그러나 이때의 ‘나쁨’에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도 들어있지 않았으며, 단지 겁이 많고 소심한 품성을 지녔거나 스타일이 엉망인 사람들을 지칭했을 따름이다.
‘좋음’이라는 규정에는 귀족적 인간들의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들어 있다. 이들은 ‘좋음’을 우월한 자, 명령하는 자, 지배자인 자신들에게 부여했다. ‘훌륭함’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arete̅’가 단독적 용법을 갖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arete̅인가’, ‘누구의 arete̅인가’라는 식의 용법이 가능했다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가치 판단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좋음(agathos)’이나 ‘올바름(dikaiosyne̅)’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누구의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관을 지녔던 고대 그리스인이었기에, 그들은 성적 대상과 성적 유형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중요하게 고려했던 요소는 성적 행위에서 스스로를 주인으로 세울 수 있는 가였다. 절제를 통해 욕망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며, 주도함으로서 스스로 능동적여 지는 삶. 존재 미학.
이렇듯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삶, 스스로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삶이란 멀지 않다. 푸코의 마지막 작품 제목처럼 「자기에의 배려」(Le souci de soi)로 충만한 삶과 같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행간(行間)을 읽으라고 했다! 자신만의 가치들을 창조하며 적극적인 삶을 사는 것. 주인의 철학이 저물어가는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친구들이 술기운을 빌려 말하고자 한바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저기 차이고, 얽매이고, 찌든 노예와 다름없는 우리들이 주인으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어쩌면 혀 꼬부라지는 소크라테스의 술주정이 유일한 희망이 아니련지.
 

 

YES마니아 : 로얄 a*****e 2008.10.12.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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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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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중이라 오독, 오해 여지 있으며 향후 수정할 수 있음/스크롤 압박 주의) 요즘 눈 뜨면 읽는다는 자세로 푸코 원 저작과 강의록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푸코 말년 저작 “성의 역사” 시리즈는 제목 때문에 안타까운데 사실 성의 역사 자체를 깊이 분석한다기보다는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 ‘성’이라는 영역이 주체화,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에 관해 가졌던 독특한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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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중이라 오독, 오해 여지 있으며 향후 수정할 수 있음/스크롤 압박 주의)

요즘 눈 뜨면 읽는다는 자세로 푸코 원 저작과 강의록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다. 푸코 말년 저작 “성의 역사” 시리즈는 제목 때문에 안타까운데 사실 성의 역사 자체를 깊이 분석한다기보다는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 ‘성’이라는 영역이 주체화, 자기 통치와 타자 통치에 관해 가졌던 독특한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언급한 소재 중 하나일 뿐이고, 다른 영역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특별히 '성'을 언급한 이유는 '쾌락'이 인간 삶에서 가장 ‘강한 힘’을 미치는 영역 중 하나이기도 하고, 몸에 관한 영역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작동했던 기술을 드러내기 편한 분야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사실 푸코는 자기 생애에서 내내 지식, 권력, 정신의학, 규율기관(사법, 처벌), 통치 기술 등 다양한 영역을 소재로 삼아 역사(이론 나열X)적으로 특정 시기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해 분석을 시도해왔다. 개인적으로 ‘자기 배려’를 다룬 2차 문헌에서 이미 많이 접한 내용이라 읽지 않았는데도 이미 읽은 기분이 드는 책이었는데 이번에 완독했다. 2편을 먼저 읽었고 곧 3편을 읽을 예정이며 1편은 막 구입해두었다. 푸코 제자들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성의 역사” 1편/2, 3편을 구분해서 논의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1. ‘쾌락의 활용’ 방법 문제에서 도덕/윤리에 대한 관심

푸코는 “성의 역사” 2권 내내 자신이 이 작업을 시도하는 이유는 성의 역사(특히 근대식 심리학적, 욕망에 집중해 분석하는 이론) 자체를 나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대-중세에 나타난 삶의 양식으로서 구체적인 기술들을 분석함으로써 당대 사람들이 자기나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주체화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주 거칠게 정리하면 서구 역사적으로 근대와 같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덕’ 성격이 아니라, 고대에는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과 자유롭게 맺은 관계가 삶으로 드러남으로써(자기 통치) 타자에 대한 관계 맺기나 통치도 가능했고, 중세에는 자기(자신과 영혼에 대한)에 관한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는 제도를 종교적으로 만들었다. 늘 그랬듯 이 책에서도 푸코는 역사적 문헌을 파헤치는 작업을 거쳐 각 시기에 나타난 구체적인 삶의 양식들을 드러냄으로써,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다. 주체화 관심자로, 도덕/윤리를 공부해온 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인상 깊었다. 아래에는 다소 길지만 공부를 위해 관련 내용을 인용해둔다.

 

푸코는 이 책 서두에서 도덕과 윤리를 구분해보고 있다. 일단 도덕에 ‘금욕’적 면모가 포함됨을 인정하고 설명을 시작하는 듯하다. 이 부분에서 근대 규율에 입각한 도덕은 ‘규약지향’에 가깝고,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시공간인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 나타난 양식은 ‘윤리지향’에 좀 더 가까운지 더 공부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 따르면 윤리는 좀 더 자유로운 주체가 단순하고 덜 엄격한 삶의 양식, 공식, 원리를 가지고 자기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자율적으로) 적용해 보인 행동으로 나타났을 테다. 푸코는 종교개혁 이전 중세 가톨릭 제도에 대해 금욕주의적 영성운동들이 주기적으로 법률화, 규약화에 항거해왔다고 분석하고 있다. 

“‘도덕’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자는 이 단어에 내포된 다음과 같은 여러 다른 현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도덕성’의 역사, 즉 어떠어떠한 개인이나 그룹들의 행동이 여러 다른 심급에 의해 제안된 규칙과 가치에 어느 정도나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연구하는 역사. ‘규약’들의 역사, 즉 어떤 사회나 그룹에서 문제되고 있는 규칙과 가치들의 여러 다른 체계, 그 체계들을 활용하는 심급이나 구속, 장치들, 그리고 그 체계들의 다양성, 차이, 혹은 모순이 취하는 형태를 분석하는 역사. 마지막으로 개인들이 스스로를 도덕적 행동의 주체로 세우게 되는 방식들의 역사, 이 역사는 자기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자기에 대한 성찰, 자기에 의한 자기인식, 검토, 파악, 자신에게 행하고자 하는 변형 등을 위해 제안되어 온 모델들의 역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윤리’와 ‘금욕주의’의 역사, 즉 도덕적 주체화의 형태들, 그리고 자기를 확고히 하기 위한 자기실천의 역사라 불릴 수 있을 그런 역사인 것이다.

실제로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도덕’이 내가 방금 지적한 두 가지 측면, 즉 행동규약의 측면과 주체화 형태의 측면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두 가지 측면이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으며 서로가 상대적 자율성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가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떤 도덕에서는 특히 규약과 그 규약의 체계성, 방대함, 모든 가능한 경우에 들어맞을 수 있고 모든 행동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그 규약의 능력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도덕에서는 이 규약을 활용하는, 도덕을 체득하고 준수하도록 강요하며 그 위반을 처벌하는 권력의 심급 측면을 탐구해 보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상황에서 주체화는 주로 거의 사법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도덕적 주체는 하나의 법, 혹은 일련의 법들을 따르게 되는데, 그는 이 법에 종속되어 있어서 이를 어기면 과실로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도덕들은 그와는 반대로 주체화의 형태들과 자기실천의 측면을 탐구하는 데 뛰어나게 역동적인 요인을 지닌 도덕들이다. 이 경우 행동규칙과 규약들의 체계는 아주 단순할 수 있다. 어쨌든 개인이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그의 여러 다른 행동, 사고, 혹은 감정들 속에서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고자 할 때 이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 규칙체계의 엄격한 준수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강조되는 것은 자기에 대한 관계들의 형태, 그것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기법들, 스스로를 자신의 인식대상으로 부여하는 훈련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실천들이다. 기독교에서는 쾌락의 금욕주의적 포기라 불리는 도덕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이 같은 ‘윤리지향성’ 도덕들이 ‘규약지향성’ 도덕들에 비해 상당히 중요했다...”, 47-48쪽.

 

푸코는 이 책 서두에서 고대에 나타난 ‘윤리’로서 삶의 양식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앞으로 당대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 진리와 맺는 관계(여기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분석하겠다고 책 내용을 개괄하고 있다. 규율도덕이 익숙한 근대를 살아가는 독자로서 아래와 같은 푸코의 문제의식이 흥미롭고 새로웠으며, 실제로 푸코가 읽어낸 구체적인 면모가 의미 있었다. 즉 그는 이 작업에서 고대(정치에 참여할 시민인 자유인이나, 자기-가정-국가를 통치해야할 남성)인들이 그런 삶의 기술을 왜 필요로 했는지, 그들이 그러한 기술을 구사해서 얻고자 했던 효과를 드러내 보이고 있어 재미있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성이나 쾌락이 불러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구조를 보고 있노라면, 푸코가 다른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했던 작업도 큰 틀에서는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수행한 작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자유인인 남자가 불가항력적 금지에 부닥치지 않고 그의 활동을 펼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네 개의 큰 관계영역들이 어찌해서 바로 성적 행동이 강력히 문제로 제기되는 영역이 되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만 했다. 왜 그 지점에서 육체에 대해, 아내와 소년과 진리에 대해 쾌락의 실천이 문제가 되는가? 그 관계들에 성적 활동이 끼어들자 어째서 불안과 논쟁과 숙고의 대상이 되었는가? 어떤 이유에서 성적 행동의 감소, 그것의 절제, 그것의 형태화, 그리고 쾌락의 실천에서 엄격한 양식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고가 이 일상적 경험의 축들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는가? 어떻게 성적 행동이, 이 여러 다른 유형의 관계들을 함축하는 한에서, 도덕적 경험의 영역으로 판단되었는가?”, 42쪽.

 

푸코는 이 책에서 내내 삶의 형식(방식)이 가진 전략, 기술 예술적 면모를 강조해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양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보편적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적절하게 선택한 방식에 대한 문제였다. 푸코는 이 문제에 대해 근대적 도덕보다는 윤리에 가깝지 않느냐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실존의 미학 논의에서 ‘윤리’, ‘태도ethos’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성행위가 그리스 사상에서 ‘아프로디지아’, 즉 통제하기 힘든 힘들의 투쟁의 장에 속하는 쾌락행위들의 형태로 도덕적 실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행위는 합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동양식을 갖기 위해 절도와 시기, 횟수와 호기의 전략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전략은 그것의 완성 지점과 최종 목표로서 철저한 자기통제를 지향한다. 이러한 자기통제에서 ‘주체’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 있어서까지 그 자신보다 ‘더 강하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주체의 형성에 내포된 엄격성의 요구는 각자 그리고 모두가 따라야 할 보편적 법칙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자신의 삶에 가장 아름답고 완성된 형식을 부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행동을 양식화하는 원리로서 제시된다... 성적 엄격함은, 도덕적 체험의 변화를 이해한다면, 법전의 역사보다도 더 결정적인 하나의 역사에 속해 있다. 그것은 개인을 도덕적 행동의 주체로서 성립하게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양식의 완성으로 이해된 ‘윤리’의 역사이다.”, 304-305쪽.

 

고대 철학 전체를 봤을 때 ‘자연’(타고난 본성, 계절 상황 등)에 따라 적절하게 삶의 양식을 선택하고 행동을 관리하는 일은 중요한 문제였을 테다. 푸코가 ‘자기의 테크놀로지’ 등 삶이 가진 ‘기술적 측면’을 드러내고, 이 책에서도 양생술을 중요한 한 장으로 배치하여 논의한 이유일 듯하다. 

“아스클레피오스나 그의 최초 계승자들의 시대에 양생술에 전념하지 않았던 이유는 인간들이 실제로 따랐던 ‘관리법’, 즉 그들이 섭생하고 운동하는 방식이 자연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양생술은 굴절된 의학이었다. 양생술은 삶의 방식으로서의 관리법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날에 가서야 이러한 치료술의 연장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항시 의학에 필수적인 부속물이 되는 것은, 실제로 사람의 병을 유발시킨 삶의 양식을 바로잡지 않고는 아무도 치료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그러한 것이다.

어쨌든 양생술적 지식을 원초적 기술로 치부하건 아니면 그것을 차후에 파생된 것으로 보건 간에 ‘식이요법’ 그 자체가, 즉 관리법이 그것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본적 범주임은 분명하다. 그것에 의해 사람이 자기 존재를 영위해 가는 방식이 특징지어지며 행동에 대한 규칙들의 총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보존하고 순응해야 하는 자연에 따라 이루어진, 행동의 문제설정 방식인 것이다. 관리법은 삶의 기술 전체이다.”, 133쪽.

 

2. 세 영역: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 그리고 진실과의 관계

“주체의 해석학”: http://blog.yes24.com/document/10404936 에서 푸코는 고대 안에서 다시 그리스(소크라테스) 시기와 헬레니즘 시기(기원 후 1-2세기) 주체화 양식을 구분해 분석한다. 이 “성의 역사2”에서도 아직은 전자에 집중해서 분석하는 편에 가까운 듯하다(“성의 역사3”에서 다음 시기와 중세를 분석하는지? 아직 읽기 전이라). 전자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언급하며 앞으로 통치자가 될 알키비아데스가 수행해야 했을 자기 통치(자기 인식)를 중요한 문제로 다룬다. 비슷하게 여기 “성의 역사2”에서도 자기 통치-타자 통치, 가정관리-도시통치 기술의 동형성이 중요한 이슈이다. 고대에 ‘자기가 자기와 자유롭게 관계 맺어야 하는 사람“은 자유인인 성인 남성이었다. 그들은 정치에 참여해야하는 시민이었다. 그들은 대중이 보기에 ’통치할 성향과 능력‘을 갖춘 자로 ’드러나 보여야‘ 했다. 푸코가 보기에 ’양생술‘은 자기 몸을 계절이나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활용하는 기술, ’가정관리술‘은 가장이 아내와 재산을 잘 통치하되 외부에서 주어진 규율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예를 들어 가정을 잘 돌보는 아내라는 특별한 지위를 존중하기 위해 외도하지 않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킴) 실천, ’연애술‘은 장차 정치에 참여해야할 소년이 자신이 그러한 자질이 있음을 연애 상대에게 인정받으면서도 그 연애를 함부로 수락하지는 않고 적절히 처신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기를 다루고 있다. 푸코는 이 세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인 자유인인 남성들이 어떻게 자기와 타자를 통치하는데 자기 자신과 적절한 관계 맺기 및 삶의 양식 선택을 잘 활용했는지 드러내 보인다. 특히 그가 보기에 전과 달리 소크라테스-플라톤 철학적 맥락에서 ’진정한 사랑‘에 관한 정의를 내리는 흐름이 생겨났다. ’진실‘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며 선택한 삶의 양식을 상황에 따라 적용해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통치 능력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인정‘ 받는 자유인 남성들의 모습이었다. 

“특별한 영혼 훈련 기술이 없는 데 대한 설명을 제공해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기지배와 타인들의 지배가 똑같은 형태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정을 지배하고 국가 내에서 자기의 역할을 행하듯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 미덕, 특히 엔크라테이아에 대한 교육이, 다른 시민들보다 더 우월해져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는 그런 교육과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수련을 통해 미덕과 권력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확실히 감독하고 자기 집안을 관리하며 도시국가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 이것은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세 가지 실천들이다. 크세노폰의 “가정관리술”은 이 세 가지 ‘기술’들 간의 계속성, 동형성, 더불어 한 개인의 실존에서 그것이 연대순으로 잇달아 사용됨을 잘 보여준다.”

“... 그것이 뛰어난 육체적·도덕적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민의 정치교육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미덕의 훈련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역으로 미덕의 훈련에 도움이 되는 것은 시민의 정치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국가에 유용한 인간의 교육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제어하고자 하는 자의 도덕적 훈련인 것이다.”, 106-107쪽.

 

‘가정-국가 이질동형성’(가정관리기술-도시통치기술 동형성) 때문에 통치할 사람이 ‘절제’ 능력을 가졌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했다. 자기 통치에서 절제가 어려운 사람은 통치할 때 ‘권력 남용, 폭력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다. 이렇게 당대에 “절제와 권력 사이의 연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특히 장차 정치에 참여할 소년은 대중들 앞에서 (연애술에 있어) 절제에 관한 ‘시련’, ‘시험’을 받는 맥락이 있었다.    

“지주의 생활이 갖는 이 모든 사적·공적 이점들은 “가정관리” 기술의 주된 장점으로 보이는 것 속에 모두 포함된다. 즉, 그는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지휘 실무경험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오이코스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곧 통솔하는 것이고, 가정을 통솔한다는 것은 그가 도시에서 행사해야 할 권력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193쪽.

“니코클레스가 생각하는 절제의 또 다른 이유는 한 국가의 통치와 한 가증의 관리 사이의 연계성과 동질성에 기인한다. 여기서 연계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되는데, 우선 타자와 확립할 수 있는 모든 협력관계(koinoniai)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해 정의된다... 정의롭고자 하는 군주는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도 공정해야 한다. 또한 군주의 가정을 지배해야 하는 질서와 백성을 지배하는 데에 필요한 질서 사이에도 연계성과 일종의 이질동형성 같은 것이 있다. 즉, “훌륭한 군주는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만이 아니라 그가 사는 집과 영지를 일관된 정신으로 다스리고자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절제와 공정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니코클레스가 문헌 내내 언급하는 절제와 권력 사이의 연계는,...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와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 사이의 본질적 관계로 생각된다.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큼이나 너 자신(arche sautou)에 대해서도 권한을 행사하라. 그리고 왕에게 가장 합당한 행동은 어떤 쾌락의 노예도 되지 않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잘 다스리는 것이다.” 니코클레스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한 도덕적 조건으로서 자제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남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집착하는지, 그리고 이런 유의 권력남용에서 얼마나 자주 정치적 위기와 혁명이 초래되었는지를 상기하였다.”, 216-217쪽.

 

“모범적이면서도 우월성을 드러내주는 이 미덕이 모두가 보기에 존경받을 만한 행동이라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치적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미덕은 피지배자들에게 군주가 그 자신과 맺는 관계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군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의 사용을 조정하고 규제하는 것이 바로 이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그 자체로서, 그리고 이것이 가시화될 때 나타나는 광채로 인해, 또한 그것을 보증해주는 합리적 기반으로 인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니코클레스가 자신의 소프로쉬네, 즉 절제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종의 시험을 치렀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이유이다. 실상 자신이 정당하고 금전이나 쾌락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가 별로 어렵지 않은 상황과 시기가 있다. 하지만 한창 젊은 나이로 권력을 물려받았을 때, 자제력의 과시는 일종의 자격시험이 된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미덕이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logismos)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의도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훌륭하게 처신하는 것은 우연도 아니고 상황에 따른 것도 아니다.

이처럼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고 영원한 이성에 의해 보장된 군주의 절제력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일종의 계약을 수립하는 데에 이용된다. 피지배자들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지배자에게만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주의 덕이 보증되는 경우에만 신하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기 자신을 통제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절제할 수 있다.”

“...군주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그가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방식은 정치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 자신의 권위도 그 일부로서 정치조직을 확고히 하는 데에 기여한다. 또한 군주는 금욕을 실천하고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요컨대 운동선수가 체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의무는 군주가 자신의 정신을 단련시켜야 하는 의무만큼 크지는 않다. 왜냐하면 경기가 제공하는 가치는 군주인 당신들이 매일 매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치들과 비교해볼 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219-220쪽.

 

푸코가 책 내내 강조하는 부분은 당대 문헌에서는 세밀한 외부 규율인 도덕 법칙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을 도덕·윤리 교육 맥락에서 읽고자 할 때, 당대에는 어떤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교육은 중세나 근대처럼 세밀한 외부 규율 없이 단순하지만 상황에 따라 주체가 자발적으로 선택, 적용 가능한 큰 공식이나 원리로서 삶의 양식 가르쳐주기에 초점을 맞추었을 듯하다. 이 책에 따르면 당대인들은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사는 사람이 가정과 도시도 잘 다스리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제(아스케시스)’를 실천한다. 그 절제는 “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는 데 필요 불가결한 실천적 훈련으로서의 아스케시스”이다. 쾌락에 예속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는 기술(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성 뿐만 아니라 행동과 영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중세에는 ‘고백’ 문제로, 근대에는 (심리학 등등) 욕망 해석 문제로 변하게 된다(아마 “성의 역사” 다른 시리즈들에서 더 깊이 논의했으리라 기대).

“4. 자유와 진리

... “하지만 육체의 쾌락에 지배당하고 그래서 선을 실천할 수 없게 된 자, 자네는 그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나?”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제력을 훈련함으로써, 그리고 쾌락의 실천에서 자제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인 소프로쉬네는 자유와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자유롭기 위해, 그리고 계속 자유로운 상태로 있을 수 있기 위해 그런 것이다.”, 109쪽.

 

3. 자유, 진리

푸코를 몰아 읽으면서 계속 부딪치는 단어가 ‘자유’, ‘진리’이다. 푸코는 여러 강연과 글에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진리 게임’을 논의한다. 그는 권력이 관계 문제이고, 권력-지식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권력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진리 게임’을 벌인다. 푸코가 이 시리즈 마지막 장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 논의에서 ‘진정한 사랑’ 이슈가 생겨났음을 굳이 짚고 넘어가는 의도가 있었을 듯하다. “향연” 등지에서 엿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플라톤 논의에서 진정한 사랑은 그야말로 ’본질‘적이며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도 성립 가능, 소년만이 주체인 연애술과는 다르게 나이가 들어서도 ’우정‘처럼 유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 일종으로 변형되었다. 당대에 이성을 가진 인간은 ’인식=실천(앎=삶)’이 이루어져야 진실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에서 실천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타자 통치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리라고 믿었다. 

“절제력 있는 남자의 존재양식을 특징짓는 이러한 자유-지배력은 진리와의 관계를 배제하고는 이해될 수 없다. 자신의 쾌락을 지배하는 것과 그것을 로고스에 복종시키는 것은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절제하는 자는 “올바른 이성이 명하는 것”(orthos logos)만을 욕망한다... 절제에 있어 인식이 가지는 역할... 크세노폰은 “회상록”에서 인식과 절제를 분리시킬 수 없으리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상기시킨다.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면서도 그와는 반대되게 행동할 가능성을 언급하는 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항시 무절제한 자들이 바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사람들은 “모든 행동 가운데서 그들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행동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절제의 본질적 조건들 중의 하나인 어떤 형태의 인식 없이는 절제를 실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로 세우지 않고서는 쾌락의 활용에서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울 수가 없다.”, 119쪽.

 

 

4. 실존의 미학

푸코 후기 저작이라 ‘미’, 아름다움을 포함하는 문장이 자주 등장하고 있어 다 옮겨두었다. 표현은 존재의 미학, 삶의 방식, 가시적 미와 같은 방식으로 변주한다. 특히 요즘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삶의 양식이 ‘현시’된다는 부분이다. 특히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으로 실천한 기술들을 무엇으로 선택했는지는 어떻게든 자기나 타인이 확인할 수 있도록 ‘드러나 보인다’. 푸코가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실존의 미학을 연관시켜 언급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앞으로 “성의 역사3: 자기 배려”에서 또 언급하리라 기대한다.    

“절제하는 주체의 구성요소인 이 진리와의 관계는 후에 기독교적 정신성에서 그럴 것 같이 욕망의 해석학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존재의 미학으로 향하게 된다. 이 존재의 미학이라는 것은 어떤 삶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 삶의 방식의 도덕적 가치는 어떤 행동규범에 합치되는가, 자신을 깨끗이 하는 작업을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쾌락의 활용과 배분, 우리가 준수하는 한계, 우리가 존중하는 위계 관계에서의 어떤 형식, 보다 정확히 말해 어떤 일반적인 형식적 원칙들과 관계된 것이다. 로고스에 의해, 이성과 그것을 지배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의해 그러한 삶은 존재론적 질서의 유지나 재생과 접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삶은 어떤 미의 광채를 받게 되는데, 이 같은 미는 그것을 관조하거나 그것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자들에게 뚜렷이 보이는 것이다. 이같이 절제할 줄 아는 삶의 척도는 진리에 근거한 것으로, 어떤 존재론적 구조의 존중인 동시에 어떤 가시적 미의 윤곽이다.

...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는... “... 각각의 사물에 고유한 특징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사물의 본성에 적합한 어떤 질서, 적절함, 기술(taxis, orthotes, techne)로부터 생겨난다... 그렇다면 각 사물의 덕목은 질서정연함과, 질서에서 비롯된 만족스런 배치에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네. 결국 각 사물의 본성에 고유한 어떤 정돈의 미(losmos tis)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물이 훌륭해지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결과적으로 또한 그 영혼에 적합한 질서를 가진 영혼이 이러한 질서가 없는 영혼보다 더 나은 것일까? 당연히 그렇네. 그러면 질서가 있는 영혼은 잘 정돈된 영혼인가? 물론 그렇네. 그리고 잘 정돈된 영혼은 절제력 있고 현명한가?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네. 따라서 절제력 있는 영혼은 훌륭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바이며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바일세.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우리 각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절제를 추구하고 그것을 훈련해야만 할 것 같네(diokteon kai asketeon).”

절제와 (그 고유한 본성이 질서인) 영혼의 미를 결부시키고 있는 이 문헌에 대한 반향으로 “국가”가 보여주게 될 것은 그와는 반대로 영혼과 육체의 완벽함이 쾌락의 과도함, 격렬함과 얼마나 대립되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영혼 속에 아름다운 품성(kala ethe)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용모에도 품성에 어울리고 일치되는 동일한 유형의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다면...”, 123-135쪽.

 

“이성에 합당한 사랑(ho orthos eros)이란 질서와 미에 의해 지배되는 현명한 사랑이란 말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또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크세노폰이 제시했던 씨루스 궁정의 이상적 묘사인데, 이 궁정은 각 개인이 자신을 완벽히 제어함으로써 그 자체가 미의 광경으로 제시된다. 군주는 자제력과 신중함을 공공연히 과시하고 있으며,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도 서열에 따라 절도 있게 행동하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며, 영혼과 육체를 세심하게 조절하고 행동을 관리하는지라 어떤 무의식적이고 격렬한 움직임도, 모든 사람들의 정신에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대 문헌에서 만날 때마다 흥미로운 음악가 은유)

“...신체적 양생 생활의 엄격함,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결단성에는 도덕적 강인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 강인함 덕택에 이 양생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힘과 아름다움과 육체의 건강을 얻으려하는 실천들에 부여해야 할 진짜 이유이다. “국가” Ⅸ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지각 있는 사람은 “동물적이고 부조리한 쾌락에 몸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자기 관심사를 그쪽으로 돌려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할 것이다. “그는 자기 건강을 고려에 넣지 않을 것이며 강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제력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육체적 관리법은 일반적 존재미학의 원칙에 편입되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육체적 균형이 영혼의 올바른 위계를 위한 조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영혼 속에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의 육체 안에 조화를 세울 것이다.”-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진정한 음악가(mousikos)로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136-137쪽.

  

고대 문헌을 분석한 내용이라 지금 읽으면 여성들이 분개할 만한 지점이 많은 책이기는 했는데 푸코가 ‘그러한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려고 의도적으로 가져온 부분은 아닌 듯하다. 당대에 결혼한 아내가 외모를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한 부분이 (현대인인 여성으로서 선호와 별개로) 흥미로웠다. 결혼한 아내를 실제로 아름답게 만드는 미덕은 가정에서 자기 할 일을 잘 하는데서 드러난다. 당대 사람들은 심지어 그런 행동(살림살이?)을 통해 아름다운 육체까지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아내는 어떻게 자기 남편에게 변함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언젠가 그녀보다 더 젊고 예쁜 다른 여자한테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즈코마쿠스의 어린 아내는 분명하게 묻는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아름답기 위해서,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겐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결정적 사항이 되는 것은 가정과 가정의 관리이다. 이즈코마쿠스에 의하면 어떤 경우라도 여성의 실제적 미는 그녀가 집안일을 훌륭하게 돌볼 때 그 일에 의해 충분히 보장된다. 실제로 그는 아내가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노예처럼 기진맥진한 채 앉아 있거나 겉멋부리는 여자처럼 한가롭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녀는 늘 서서 감시하고 관리하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진행 중인 작업을 점검하러 다닐 것이다. 똑바로 서 있는 자세와 걸음걸이는 그녀의 신체가,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자유로운 개인의 형상을 특징지어주는 행동방식과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부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의복 또는 모포의 먼지를 흔들어 털고 정돈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해서 육체의 아름다움은 형성되고 유지된다. 지도자의 위치는 육체적으로는 아름다움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게다가 아내의 의복은 하녀들과 그녀를 구별짓는 청결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내는 이 하녀들과 비교할 때, 언제나 복종하고 속박 받는 노예처럼 의무로서 강요당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 한다는 이점을 지닐 것이다.”, 204-205쪽. 

   

한편 소년이 보여야 할 아름다움은 통치자로서 힘과 용기를 드러내 보이는 육체적 힘, 건장함 등등이었다(성인 남성이 소년에게 연애를 거는 문화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스럽게? 연약하고 예쁜’ 소년이 인기 있었으리라는 편견이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푸코는 여러 차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치 좋은 통치자가 될 역량을 보이는 소년은 (유력자인) 성인 남성에게 연애 대상으로 선택되어, 연애술이라는 시련, 시험에서 어떤 처신을 보이는지 검증, 평가 받았던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활력, 인내력, 격정이 이 아름다움의 일부분을 이루었던 것이다. 당연히 훈련, 체조, 시합, 사냥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매력이 유연함이나 연약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증하였다. 후에 (이미 고대에서도) 청년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요소로-더 정확히 말해 은밀한 이유로서-여겨지게 될, 묘하게 여자 같아 보이는 점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오히려 소년이 스스로도 경계하고 또 조심해야 할 점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소년의 육체에 대한 도덕적 미학이 있다.”, 250쪽.

 

“그리스의 젊은이들에게서, 애인들의 추종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불명예스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자질의 가시적 표식이었다... 아름다운 것과 사랑 받는다는 것이 이중의 행운(eutuchia)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킨다. 즉, 그것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orthos chresthai)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것이 이 문헌이 주장하는 요점이며, “명예에 관한 문제”라 불릴 수 있는 것을 지적해준다. 이러한 사실들은(ta pragmata) 그 자체로서 그리고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 따라(para tous chromenous) 이는 달라진다. 다른 곳에서도 진술된 바 있는 원칙에 따르면, 이것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활용”이다. 우리는 “향연”에서도 이와 대단히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실천의 비열함이다.”, 258-259쪽.

 

피에르 아도,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yes24.com/document/11015475 속 주장처럼 고대에 철학이 ‘삶의 양식’이었다면 소년이 연애술에서 보이는 ‘삶에 관한 자기 자신의 선택’ 역시 일종의 철학적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을 테다. 그 그리스 소년이 처한 시련(추종자에 대한 처신, 연애술) 상황에서 스스로 적절한 수행을 통해 자신이 지배력(능력과 자질) 있는 자임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푸코는 소년에게 ‘철학에 대한 훈련’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철학을 갖추어 나갈수록 그는 자기 통치, 타자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철학... “더 강한 자아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그 위에 다른 사람을 능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 자체로서 철학은 지배의 원칙이다... “... 이 사고를 철학이 훈련시키면서 동시에 이끌어갈 수 있다.” 우리는 철학이 청년의 지혜에 매우 필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가 삶의 다른 형태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면한 시련을 극복하고 명예를 보존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서,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64쪽.

 

실존의 미학이 존재의 ‘미덕’을 ‘현시’하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장차 통치자가 될 자질을 보이는 소년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그의 처신에 관한 ‘평판’이 존재했다. 푸코에 따르면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도시에 속한 사람들은 공동의 예술 작품처럼 소년의 삶을 함께 만들어갔고, 소년은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쌓아갔다.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의 젊음과 앞으로 그가 갖게 될 지위...는 하나의 “전략적” 거점을 형성하며, 이를 둘러싸고 복잡한 게임이 요구된다. 육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좌우되는 소년의 명예는 또한 어느 정도 미래의 그의 역할과 평판을 결정지을 터인데, 바로 이 소년의 명예가 중요한 관건이다. 이것은 그에게는 적응과 훈련을 요구하는 일종의 시험이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염려와 배려의 계기가 된다. 에피크라테스에 대한 예찬의 끝 부분에서, 저자는 소년의 삶, 그의 ‘비오스’(bios)가 “공동의” 작품이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마치 완성해야 할 예술 작품인 것처럼, 그는 에피크라테스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의 그의 모습에 “가능한 최고의 영광”을 부여하도록 촉구한다.", 266쪽.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9.01.29. 신고 공감 5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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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대상에서 활용의 주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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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책의 배경에 대한 소개가 조금 필요할 것 같네요. 1976년 『성의 역사 ; 앎의 의지』를 낸 푸코는 8년 후에야 『성의 역사 ; 쾌락의 활용』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3권인 자가에의 배려를 쓴 푸코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이 책 '쾌락의 활용'이 나오기까지 8년이란 기간이 걸려야 했던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기존의 푸코가 권력과 담론에 중심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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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책의 배경에 대한 소개가 조금 필요할 것 같네요. 1976년 『성의 역사 ; 앎의 의지』를 낸 푸코는 8년 후에야 『성의 역사 ; 쾌락의 활용』을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3권인 자가에의 배려를 쓴 푸코는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이 책 '쾌락의 활용'이 나오기까지 8년이란 기간이 걸려야 했던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기존의 푸코가 권력과 담론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면 이 책 '쾌락의 활용' 이후부터는 중심 축이 조금 분산되어집니다. 그 분산되어진 관심은 바로 '주체'에게 돌아가게 되지요. 다시 말하면 이 책은 푸코의 사상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된 책이기도 한 것입니다. 푸코는 책의 서론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축, 즉 성과 관계된 지식의 형성과, 그것의 실천을 조절하는 권력 체계, 그리고 개인이 그 안에서 스스로를 이 성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해야만 하는 형태들.." 이렇게 '쾌락의 활용'에서 등장하는 주체의 모습은 윤리적인 담론과 규범 안에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규정하고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책의 내용은 그리스인들의 성생활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싣고 있습니다. 동성애, 특히 성인 남성과 소년과의 관계, 그리고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 그리고 남성의 육체 등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엄격한 규약과 도덕률을 통해 자신들을 인식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인식작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푸코의 주체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검열'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나더군요. 이 책을 통해 제가 푸코의 글의 의도를 얼마나 파악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대로 이해나 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푸코의 글은 역시 그 중심을 잡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숲을 뚫고 나왔을 때의 만족감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지요.
b****0 2003.07.08.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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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 - 쾌락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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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헌책방에 별게 다 들어온다. 이걸 헌책방에서 구입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ㅎㅎ 어려운 책이라 머리에 쥐가 나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푸코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이상한 소리겠지만, 푸코에 대해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이후의 푸코에 대해서는 극히 거리감을 두는 것 같다.   푸코에 관한 책들에서도 '앎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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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헌책방에 별게 다 들어온다.
이걸 헌책방에서 구입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ㅎㅎ 어려운 책이라 머리에 쥐가 나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푸코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이상한 소리겠지만,
푸코에 대해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이후의 푸코에 대해서는 극히 거리감을 두는 것 같다.
 
푸코에 관한 책들에서도 '앎의 의지' 이후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고 단지 그가 기존과는 달리 분석의 방식을 전환하고 맹렬하게 작업에 임하다가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는 식으로 넘겨버린다(알다시피 AIDS로 인해 사망했다).
때문에 그가 죽기 진전까지 작업을 했던 성의 역사 4, 5권은 출판되지 못했고, 그가 몇번의 탈고를 거듭한 결과물만이 존재한다(출판을 절대 하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 출판이 될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혹시 스미스 씨처럼 불태워달라고 해서 불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던 '쾌락의 활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분석을 했다.
'앎의 의지'에서 어느정도 자신이 그동안 끝없이 얘기했던 '권력'이나 기타 많은 것들을 직접 설명해주며 어느정도 자신의 그동안의 작업을 정리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면, '쾌락의 활용'도 기존처럼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은 여전하지만(말 그대로 뒤집어서 생각하게 만드는데는 도가 튼 인간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권력이나 감시 등등을 얘기하며 거대한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묶여버리는(그리고 보는 자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정성일 씨의 말대로 밑에서 위를 보도록 만들거나 위에서 밑을 보게 만드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 보다 뜬금없어 진다.
이해했을리 없겠지만 그가 '쾌락의 활용'에서 말하는 것은 이전의 작업들이 어떻게 휘둘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였다면 지금부터는 어떻게 너가 너로서 판단하고 지배할 것인지(이것 말고도 얘기를 하지만 큰 줄거리는 이거라고 생각된다) 말하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는,
삽입되지 않고 삽입하는.... 등등등
 
푸코야 읽어도 읽은게 아니기 때문에 말하기는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충 이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구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쾌락의 활용' 부터는 푸코를 무시하고 모르는 척 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푸코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이 항상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 등등을 끝없이 얘기하면서도 절대 '쾌락의 활용'과 '자기에의 배려'는 얘기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젝이 '삐딱하게 보기'에서 말년의 두 작품에 대한 한마디 촌평을 한것이 내가 읽은 두작품에 대한 평가가 전부이다. 그외에는 그는 관점을 달리 했고 그 결과물이 그것들이다 정도일 뿐이니까.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성에 대한 관념과 남성애와 부부관계 및 연애술 등에 대해서 얘기를 하며 당시는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다루었는지를 얘기하고 그것을 말하며 지금을 다시금 돌아보는 방식을 취한 푸코는 확신에 찬 느낌이라기 보다는 보다 곤혹스러운 느낌으로 말을 하는 것 같다.
 
너무 끊어서 읽었기 때문에 제대로 읽지 못한 느낌이었고,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이 못난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되는 단순한 인간이기에 이렇게 수다를 떨게 되는 것 같다.
 
여전히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면 떠오르게 되는 사람이고,
무언가를 판단할 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도록 권하도록 만든다.
 
 
 
간만에 책장에 묵혀둔 '감시와 처벌'을 끄집어 내게 만들도록 했는데...
이걸... 어쩌나? 다시 집어넣을까?
y*******o 2007.08.0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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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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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가 본질적으로 남성적 구조라는 것, 이로부터 앞의 결론과 대칭적이고 반대되는 도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무절제라는 것이, 그것을 여성다움에 결부시키는 수동성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무절제하다는 것, 사실 그것은 쾌락의 힘에 대해 무저항의 상태, 그리고 무력하고 복종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 같은 남성다움의 태도를 가질 능력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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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가 본질적으로 남성적 구조라는 것, 이로부터 앞의 결론과 대칭적이고 반대되는 도 다른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것은 무절제라는 것이, 그것을 여성다움에 결부시키는 수동성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무절제하다는 것, 사실 그것은 쾌락의 힘에 대해 무저항의 상태, 그리고 무력하고 복종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이 같은 남성다움의 태도를 가질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s*******i 2018.07.1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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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 쾌락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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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8915915앎의 의지 / 지식의 의지 : http://blog.naver.com/ghost0221/220617132934항상 미셸 푸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마다 들게 되는 생각은 어째서 성의 역사 2권부터, 즉 2권 ‘쾌락의 활용’과 3권 ‘자기에의 배려’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은 것일까? 였다.‘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과 같은 내용과 관련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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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8915915

앎의 의지 / 지식의 의지 : http://blog.naver.com/ghost0221/220617132934





항상 미셸 푸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마다 들게 되는 생각은 어째서 성의 역사 2권부터, 즉 2권 ‘쾌락의 활용’과 3권 ‘자기에의 배려’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은 것일까? 였다.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과 같은 내용과 관련해서는 항상 자주 거론되는 경우가 많고 여전히 그 논의를 다시금 검토하고 지금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독 이전 저서들에 비해서 그가 죽기 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성의 역사와 관련된 논의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논의가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게 아니면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지만 그게 그다지 관심을 주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일까?


역자의 말대로 어떤 형태로 성행위가 도덕적 영역을 이루게 되었는지에 관한 논의로 가득한 ‘쾌락의 활용’이 그다지 관심이 들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항상) 푸코의 논의는 무척 의미심장한 부분들도 많고 지금 시대를 생각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를 돌이켜 봤을 때 흥미로운 구석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스꽝스럽게 말한다면 ‘쾌락의 활용’을 통해서 자기에 대한 관리에서 시작해서 절제력에 대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권력과 지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에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제력과 규범과 도덕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지배를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지켜내게 되었던 것인가? 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쾌락의 활용’은 푸코가 항상 그랬듯이 흥미로운 논의들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처럼-생각처럼 쉽게 읽혀지지는 않고 있고, 간혹 글을 읽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거나 헤매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기도 해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관점들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푸코는 자신의 논의와 연구의 방향이 ‘앎의 의지 / 지식의 의지’에서 다뤘던 방식에서 많이 벗어났음을, 다른 각도에서 다른 접근을 하려고 했음에 대해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서론을 통해서 어째서 그런 입장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설명 이후 그가 말하는 존재의 기술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을 하고 있다.


결국에는 도덕적 엄격함이라는 것이, 지금과 같은 종교적 도덕적 엄격함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선택과 입장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규범-양식화로,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강제적으로 다뤄지게 되는 과정(강제성을 갖게 되는지를)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정하고 생각하던 입장에서 어떻게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일종의 강제적인 성격을 보이게 되었는지를,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그 뒤바뀜의 과정을 고대 그리스 시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쾌락을 인식했는지에 대해서, 그 다양한 성격들과 특성들을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남성과 남성-소년의 사랑(여성과 여성의 사랑은 크게 다뤄내지 않고 있다)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했고 생각했는지에 관해서 자주 검토하고 있다.


푸코는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자기 지배에 대해서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다시 말해서 절제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에 대한 상세한 논의들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절제하고 관리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확인하고 있다.


주체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고 그것이 변화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국가가 어떤 식으로 개입되게 되는지

상대적 유연함이 어떤 식으로 경직되고 공고하게 되는지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를 하게 되는지

남성과 남성-소년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화를 겪게 되는지

지배와 피지배에 있어서 자제력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게 어떻게 권위를 갖게 되는지


자기 스스로에 대한 강제력과 절제가(상대적 유연성과 자율성이) 하나의 규정된 틀로, 정해진 규범으로 외부의 강제와 절제로 이행하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를 자세하게 탐구하는 ‘쾌락의 활용’은 반드시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며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기에는 아직은 부족하기만 한 능력 때문인지 그저 읽어봤을 뿐이라고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좀 더 잘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의 생각들을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조금은 새롭게 생각하는 경험이었다.

y*******o 2016.03.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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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의 쾌락의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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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앎의 의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과연  성이 억압되었을까? 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한다.즉,성은 오히려 담론화되고,확대,재생산되었다고 말한다.푸코는 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했다.성도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과 함께 나고 자라고 다양화 된 것이다.즉,2편(쾌락의 활용)에서는,경험으로서의 성을 말하고자 한다.2편에서는 주로 고대 그리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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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앎의 의지)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과연  성이 억압되었을까? 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한다.즉,성은 오히려 담론화되고,확대,재생산되었다고 말한다.푸코는 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했다.성도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과 함께 나고 자라고 다양화 된 것이다.즉,2편(쾌락의 활용)에서는,경험으로서의 성을 말하고자 한다.2편에서는 주로 고대 그리스에서 쾌락이 어떻게 담론화되고 활용 되었는지를 다루고있다.

 

푸코는 성을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가정을 하고나서,어떤 진실의 작용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욕망인으로 인식했을까? 문제를 제기한다.그래서 처음 책을 쓸 때와는 달리 고대에 걸쳐 형성된 자기 해석학을 연구에 재편성한다.1편에서는 기독교(고백)에서 담론의 진원지를 찾으려 했다.하지만 2편에서는 고대 이교도문화에서도 금욕적인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고 말한다.이교문화에서는 금욕보다 '자기통제의 기술'을 중요시했고,<성의 역사>는 자기 통제기술의 역사로 말 할 수 있다.진리의 축,권력의 축,윤리적 축 이라는 세 개의 축은 푸코의 사상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계보다.2편<쾌락의 활용>은 윤리적 축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독교는 성행위에 악,죄,타락,죽음과 연결시킨 바면,고대 그리스에서는 오히려 긍정적 의미들을 부여했다.아프로디지아(Aphrodisia)란 아프로디테의 행위의 개념으로 표현되며,이것이 윤리적 경험의 씨앗으로 본다.쾌락의 도덕적 제어는 무절제에 대항해야 한다.그러나 의무와 금지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부과되지 않는다.엔크라테이아(Emkrateia)란 용어는 자기에 의한 자기지배의 역학과 그것에 필요한 노력을 가리킨다.쾌락에 관한 도덕적 행동의 기호가 되는 것은 권력을 의한 투쟁이다.즉,쾌락과 욕망에 맞서는 것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사상가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탈레스,디오게네스등)의 쾌락과 도덕에 대한 실천의 영역과 철학적고찰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고대 그리스사상에서는 쾌락의 절제가 중요한 도덕적가치,미학적가치,진리치이기도 하다.그리스인들은 성행위를 악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윤리적 가치 폄하의 대상도 아니었다.푸코는 주체화의 양식이 없는,금욕주의나 자기의 실천이 없는 도덕적 주체의 정립은 있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양생술>에서는 특히 자기 절제와 위험한 행위의 폭력성에 대한 통제가 문제였다.폭력에 대한 공포와 노쇠에 대한 두려움,개인의 생존과 종족 유지라는 이중의 근심이 나타난다.<가정관리술>에서는 남편의 아내에 대한 권력의 행사에서 자기 자신에게 행사해야할 권력이 문제시되었다. P245 남편이 가진 어떤 특권에 의해 규정되는 절제의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부부관계의 정치적 형태가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력은 귀족정치적 성격을 띤다<연애술>에서는 무조건적인 금욕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러한 금욕을 지향한다.

 

소년애를 다루는 그리스 사상에서 소년의 지위는 난해하다.역사적 특수성은 그리스인들이 소년에게서 쾌락을 구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러한 쾌락의 수용이 단순하지 않았으며,모든 문화의 생성을 야기하였다는 데에 있다.소년애는 고대 그리스에서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담론을 만들어냈다.그들은 왜 성적 취향(남색)을 둘러싸고 환심을 사는 행위,도덕적 성찰,철학적 금욕주의를 만들어 냈을까? 그것은 성 관계와 사회적 관계와 동일한 유형으로 파악된다.금욕주의가 소년애를 평가절하하는 방법은 아니었다.그것은 반대로 소년애를 양식화하는 방식이자,그것에 형식과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가치화하는 방식이었다.

 

푸코는 그리스에서 쾌락의 담론이 소년애에서 여성으로,육체로 문제제기의 핵심이 매우 느린 속도로 그 중심이 이동하고 교리들은 통합된다고 2편을 마무리하고 있다.3편(자기 배려)까지는 출판했으나,4편(육체의 고백)은 사후출판을 원하지 않는 다는 그의 유어에 따라 출판되지 않았다. 2편은 번역이 매끄러워서 1편보다 조금 쉽게 읽었다.어렵지만 3편이 기대된다.

d********3 2009.05.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