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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나치독일이 유태인 뿐 아니라 동성애자까지도 탄압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나치는 독일민족의 건강과 복지, 전체 인구의 증식이라는 미명 아래 동성애자들을 수감해왔다. 다양한 형태와 색상으로 구분된 다카우(Dachau) 수용소의 ‘포로 분류 일람표’를 살펴보면, 동성애자는 강제수용소 목록에서 유태인 다음으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생체실험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같은 포로 심지어 유태인들에게까지 극심한 경멸을 받았다고 한다.
정치적 틀의 변화 역시 고대 그리스의 윤리와 단절을 가져온다. 제국이 점차 확장하게 됨에 따라 사회제도들은 복잡해지고 동시에 방대해지는데, 이 행정적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관료제가 등장한다. 과거 그리스 사람들은 각자의 신분에 걸 맞는 삶의 미학에 의거하여 살아갔다. 그래서 최고 권력을 잡은 니코클레스는 자기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는 잠자리를 갖지 않음으로서 다른 시민들에게 우월감을 행사했던 반면, 알키비아데스는 닥치는 대로 소년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취함으로서 니코클레스와는 또 다른 삶을 선택하였다. 물론 이때 니코클레스에게 신분에 따라 행동하라고 강요한 사람도, 알키비아데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요한 사람도 없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따른 행동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사람들은 그때의 선택(철학)을 존경한 것이다.
자기 혼자서 건강을 관리하다가 실패한 경우 흔히 의학적 처방이 뒤따른다. 아마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리라. 이미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남들과 똑같은 방식이 가장 안심이 된다.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최고는 될 수 없다 해도 중간은 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완성하는 철학이 실패한 고대 그리스 사회 끝 무렵에는, 객관성·보편성의 윤리가 서서히 마수를 드러낸다.
소크라테스는 심히 목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야 물을 마심으로써, 물을 마실 때마다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배고픔, 목마름, 사랑의 욕망, 수면, 우리가 이러한 욕구들을 가능한 한 최고로 기분 좋게 충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참았을 때, 비로소 먹고 마시고 사랑을 하고 잠자고 쉬는 데서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향연』” 성교를 절제한 소크라테스의 금욕은 결코 쾌락을 포기한 기독교적인 처녀성의 도덕이 아니다. 그의 성에 관한 ‘절제’는 쾌락의 포기가 아니라 더 큰 쾌락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고대 말에 이르러 소크라테스의 ‘절제’는 ‘금욕’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기독교 문명이 시작되면서 영혼은 육체를 경멸하고, 성행위와 쾌락은 그 자체로 악한 것으로 천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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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이후의 철학은 소크라테스가 축성한 바로 자기에 대한 배려의 주제를 다시 취하여 마침내 그들이 주장하는 삶의 기술의 심장부에 위치시켰다. 그 걸과 이 주제는 원래의 틀을 넘어 처음의 철학적 의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점차 진정한 자기 연마의 차원과 형태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때 자기연마란 말은 자기 배려의 원칙이 매우 일반적 가치를 획득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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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쾌락의 활용’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여주고 있는 3권 ‘자기에의 배려’는 읽어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인지 긴 시간을 읽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그리 많은 내용이 기억나진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냥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 그럼에도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낯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가장 알맞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역설적으로도 느껴지게 되는 ‘자기...’는 자기 자신에게 성적인 배려를, 쾌락의 활용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 외부-교육의 시선 속에서 다뤄지게 되는 것인지를, 어떤 식으로 통제받고 일정한 틀과 규율-교화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지를,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성에 관한) 기독교적 교화 이전 얼마나 기독교적 교화와 닮은 방식들이 있었는지를(혹은 어떤 식으로 기독교적 교화가 그것들을 교묘하게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하지만 그 방식과 관점 그리고 여러 시도들이 어떤 식으로 다르기도 했는지를 (혹은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다뤄내고 있다... 고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것이 맞는지 그게 아닌지는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질 못하겠다. 제대로 읽었는지 자신이 없다. 성과 쾌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어떤 식으로 개인적인 욕망과 성적 긴장의 해소가 아닌 통제와 권력 그리고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그런 식으로 발전적 혹은 확대된 관심이 어떻게 자기, 타자, 그리고 부부관계와 동성애에 하나의 기준과 (일종의) 법칙이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그 과정의 기원, 원형을 찾으면서 (반대로) 지금 시대의 성에 대한 관심과 관점들의 틀을 생각해보게 된다. 동성애를 기피하고 이성애와 부부관계를 좀 더 옹호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그것이 도덕적 정치적 우위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면서 엄격함과 절제, 그리고 지배-복종이 하나로 겹쳐지도록 만들고 있으며, 그 정교한 틀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복잡한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에는 아는 것이 많이 부족하고 이해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그저 그런 논의들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는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이런 논의들을 소화해내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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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저서를 읽어야겠다고 각오를 하게된 계기는 <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를 읽고나서부터다.그 책은 내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었다.책을 읽으면서 번역을 너무 어렵게 한 책이라고,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같은 책을 읽은 다른이의 서평을 읽어보고 미셸 푸코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잘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푸코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권력’이라는 장치다.<성의 역사1-앎의 의지>,<성의 역사2-쾌락의 활용>은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다.하지만 푸코의 작품은 어려우면서도 앎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다.<성의 역사3-자기에의 배려> 도 쉽지 않지만 도전해볼만한 책이다. <자기에의 배려>는 고대 이교도의 자아의 테크닉에서 제반 양상들에 대한 논문집을 계획하면서 탄생된 작품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윤리를 다룰 때 자아의 테크놀로지와 관련시키지 않고는 그 시대의 성윤리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P5) 성은 이제 더 이상 권력과 연관지어 논의될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의 기술’,’자아의 테크닉’으로 사용되는 개인적 윤리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P6p)자신과 자신의 신체에 대한 배려는 성적 활동의 가장 중요한 축을 구성하며 성행위에 있어 가치란 곧 ’자제’된 행동으로 귀착된다. 흔히 프로이트를 꿈을 해석할 때 성적인 측면과 관련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하지만 푸코는 그보다 앞선 서기 2세기에 활약한 아르테미도로스의 <해몽의 열쇠>를 문헌으로 참고하고 있다.아르테미도로스는 꿈의 해석에 있어서 현실과의 연관관계에 많은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꿈의 이미지를 통해서 가족적,경제적,사회적 삶의 짜임을 밝혀보려고 한다.
로마,헬레니즘 사회에서 사적 측면과 개인적 행위의 가치,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 점점 더 많은 자리를 부여하게 된 것은 공권력의 강화라기보다 오히려 과거 개인들의 삶이 전개되던 정치적,사회적 틀의 약화일 가능성이 더 크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와서 절정을 이룬 하나의 현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강화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자기연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단이다.(P59).곧 자기배려의 원칙이다.자기배려는 개인상호간의 관계,하나의 사회적 실천을 형성,어떤 인식의 유형과 지식의 형성을 야기했다.
결혼은 점차 공적 영역 안에 자리잡기 시작한다.즉,가족의 틀을 넘어서게 된다.결혼에 가치를 부여했던 사회.경제적 목적에서 해방되면서 그와 동시에 일반화된다.
기원전 3세기부터 도시국가의 붕괴는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고,어떤 자성 행위를 유도해 낼 수 있었다.정치활동에 대한 문제를 제기를 촉발하게 된다.다른 사람을 통치할 때의 합리성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때의 합리성과 동일한 것이 요구된다.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권력의 행사는 불안정한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즉,스스로 미리 한계를 정함으로써 대비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신체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고,이러한 틀 속에서 의학은 성적 쾌락의 문제를 제기한다.성적 쾌락의 성질과 메커니즘의 문제,유기체에 대한 성적 쾌락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가치의 문제,성적 쾌락에 따라야 할 양생술의 문제등에서 푸코는 갈레누스의 생리학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너무 어려워서 책을 중간에 덮었다가 한 달만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어려운 부분은 그냥 건너 뛰고 읽는 거나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이 책을 반만 이해하기로 마음먹고 읽으니 다 읽을 수 있었다.
^^;; <자기 배려>라는 것은 성생활로 인한 자기자신의 건강에 대해 근심하고,걱정하는 것을 말한다.자신의 건강을 너무 염려하다보니 철학,의학,모든 분야에서 성을 죄악시하게 되고,쾌락에 대해 절제가 미덕이 된다.부부간이나 남녀의 관계 뿐만아니라 그리스 특유의 소년애가 주된 관심사에서 강도가 낮아진다. 소년애가 죄악시되거나,성에 대해 절제를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도덕의 영향인지,이미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부터 예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확언을 하지 않는다.성도덕의 변모는 결국 자기배려의 결과로 보인다. |
| 푸코는 흔히 '주체의 죽음'과 관련되어 얘기되거나, '감시와 처벌'과 관련된 (미시)권력 및 담론 등과 결부되어서만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푸코의 한 단면일 뿐 그 사유의 전부일 수 없다. 특히 성의 역사 3부작 가운데 2, 3권에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히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그의 후기 사상은 전기 작품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을 말하며 거대한 구조속에 매몰되어 갔던 그의 사상의 한 단초는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자기의 긍정, 자기의 강조로 돌아서게 된다. '자기에의 배려'라는 이 제목은 이후 푸코의 미완성 프로젝트인 '자기의 테크놀로지'의 밑그림으로서 그의 알려지지 않았던 나머지를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그 시작은 이미 성의 역사 2부인 '쾌락의 활용'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기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에토스를, 플라톤의 '향연'에서 읽어내고 있는 푸코야 말로 진정한 독해자이자 독서가의 면모를 지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착안한 개인 윤리를 그는 이제 현대의 주체들에게서도 부활하고자 꿈꾼다. 비록 그것이 미완의 프로젝트에 그친 채 우리에게는 구조로부터 출발하는 반쪽만 부각되고 있긴 하지만, 그의 후기 사유에 대한 조명과 활발한 논의를 통해 다시 한번 자기에의 배려라고 하는 개인 윤리의 부활을 꿈꿔보게 된다. 푸코가 우리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앗아간 댓가로 주고간 마지막 선물은 다름 아닌 이 책 속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