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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우스운 구석이 나온다. 영화는 물론 1981년 'U 보트' 등의 수작을 찍어 적당한 나이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던 독일 감독 볼프강 페터젠이 메가폰을 잡았고, 그가 비록 헐리웃 데뷔야 늦긴 했고, 나이로 따져 이스트우드보다 대략 10년 연하라곤 하나, 예컨대 1960년 '스파르타쿠스'에서의 큐브릭처럼 거물 주연 배우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꼭둑각시 연출자로 그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누구의 시각으로 보건, 경호원이니 뭐니 어설픈 가면만 뒤집어 썼지 이스트우드 개인의 불평, 한탄, 포효, 냉소로 가득한 자전 영화에 다를 바 하나도 없음을 곧바로 눈치 챌 수 있다. 요원 프랭크 호리건이 육성으로 말하는, 혹은 대변하는, 모든 스토리와 사연은 바로 그 자신, 1960년대에 곡절 많은 질풍 노도의 청춘을 보내고, 이제 그 정력을 소진한 채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그 위에서 대담히 독자 행보를 디디려 하는, 혹은 아무 생각 없는 일탈과 방황을 못마땅하게도 일삼는 젊은 세대, 이 둘을 동시에 바라보며, 나이에 걸맞는 심오한 금언보다 대뜸 "집어 치워!"를 뇌까리길 주저하지 않는, '꼰대'의 고약한 성질을 그대로 표출하는 '올드 피니스(버자이너가 아닌) 모놀로그'에 다름 아니란 말이다. 훌륭한 것은 요원 릴리 레인스의 극중 배치이다. 그녀는 첫 대면에서, 심각하게 곡해할 경우 성희롱에 가까운 언사를 노요원에게 듣고서도 당황함 없이 받아칠 줄도 알고, 어려운 어휘를 듣고도 무리 없는 이해가 가능할 만큼 지성도 갖추었으며(그녀는 비서 인력이 아닌 현장 요원이다), 직장 내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기 위해 가벼운 프랙티컬 조크도 꾸밀 만큼 대담하기까지 하다. 말이 많지는 않으나 일단 입 밖에 나온 말은 정곡을 찌르고, 태도는 상대로 하여금 오해나 공격의 빌미를 남기지 않을 만큼 명쾌하다. 프랭크 호리건(클린트 이스트우드 분) 요원은 이 성별(sex), 세대, 가치관 등 거의 모든 소속 준거 집단에서 대조를 이룬다 할 까마득한 딸 뻘 후배에게, 한편으로 정신적 대결을 신청하여 신조와 가치적 우위를 가르려 들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보는 이들 일부에게 큰 불쾌감을 던져 줄 수도 있겠지만)그녀를 성적(sexual) 맥락의 이성으로 파악, 일종의 '작업'을 걸기도 한다. 지난 시대의 가치를 손상될 수 없는 성역으로 간주, 그에의 침노를 자신 개인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간주하는 그이지만, 동시에 한참 손아래 나이의 여성과 로맨스에 빠지거나, 심지어 잠자리를 같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히 철없는 자기애(indulgence)의 발현일까, 이중기준의 미숙한 교활함일까(극중에서, 케네디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며 논박하자 그는 고작 "그건 달라!"라고 어린애처럼 외칠 뿐이다. 다르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니면 그 나이 또래의 마초적 남성으로 당연히(?) 가질 법한 어리석고 사악한 구시대적 마인드의 일환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좀 들을라치면 그는 능청스레 재즈 피아노을 연주하며 딴전을 부린다. 이 모든 건 가상의 요원 프랭크라는 번거로운 허울 없이, 우리가 익히 아는 실물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 자신과 정체성 면에서 거의 정확한 일치를 보인다. 세미다큐인지 극영화인지 모를 강변과 들이댐의 연속 중에 그나마 지금 지켜 보는 게 픽션의 일환임을 실감케 하는 건 바로 잔 말코비치가 열연한 미치 리어리라는 캐릭터겠다. 연기의 달인이라는 별칭이 무색치 않게 그는 한 편의 영화 속에서, 그 연출과 제작의 의도에 참으로 충실하게, 너절한 룸펜에서 야수적 본능 충만의 킬러, 부유한 신사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살인마에 이르기까지 넓은 폭의 컬러 변신을 잘도 소화한다.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만, 과연 멋진 수트와 세련된 헤어스타일(그는 대머리이니 가발의 덕을 볼 수밖에 없다)의 치장이 사람을 어디까지 달라 보이게 하는지 이 영화는 실감하게 해 주며, 본래 목소리 연기에 대단히 능한 그이니만치 외양의 도움 없이 입으로 발화하는 음색의 변조, 변주만으로도 정신의 주파수와 진폭을 듣는 이로 하여금 쉬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극에서 이스트우드가 상대하는 건 이 두 적수가 역을 나누어 맡고 있지만, 사실 프랭크의 정당한 분노란 못마땅한 세태 그 자체를 향해 있으며, 다만 젊고 발랄한 신세대(릴리 레인즈가 상징하는)가 그 타겟이 될 수는 없기에, 이런 괴물(freak, wacko), 테러리스트 하나가 속죄양 격으로 그 모든 '피박'을 뒤집어 쓰는 걸로 뻔하고 상투적인 결론을 맺는다. 영리한 말코비치는 면밀한 계산의 결과로, 관객의 지나친 연민이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향하지 않게 (얄밉고 사악한) 어조와 표정을 통해 정당화의 수위를 조절하니, 우리는 악당의 파멸을 보고 개운한 기분으로 스크린을 나서며, 주인공 프랭크의 어처구니 없는 악덕도 그 순간 깨끗이 잊게 된다. 이것이 잔 말코비치 식의 선배사랑이다. 훗. 릴리 요원 역을 맡은 르네 루소는,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겠으나 이 즈음에 '리쎌 웨폰'시리즈에 나오면서 나름 잘 팔리던 배우였다. 그때도 그리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보니 헤어스타일로 세심하게 가릴 필요가 있을 만큼 그 억센 윤곽이 영 눈에 차지 않았다. 과연 영감과 어울려도 그닥 아까울 건 없겠다 싶었다면 좀 지나친 심술일까? 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