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때 우스개 소리로 떠돌던 이야기 중에, 미술 시험에 '로뎅'이라는 답을 앞에 학생이 '오뎅'이라고 잘 못 컨닝하자 그 뒤에 학생은 잔머리를 굴려 '덴뿌라'라고 답안을 기입해 시험지를 제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뎅이 덴뿌라로 둔갑하는 아이러니. 이것은 A에 대한 이야기를 A로부터 직접 들을 때와 B를 통해 전해 들을 때 발생하는 가장 나쁜 결과중 하나일 것이다(특히 A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B로부터 들을 때는 더더욱 더!). 물론, 때에 따라서는 B만의 독특한 시각이 반영되어 A를 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주는 양서들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은 이런 레벨의 책은 되지 못하는 듯 싶다. 저자가 아무리 직접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취재했다고는 하지만, 저자의 필체는 오타쿠라는 신기해 보이는 인종에 대한 서구식 호기심 수준을 뛰어 넘지 못하고 있을 뿐 더러 사실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은 오류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이나 정의상의 차이가 있을 뿐, 오타쿠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만 있는게 아니다. 미국에도 있고 프랑스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치 오타쿠라는 계층(많고 많은 인간군상중 한분류일 따름인)을 기인열전 소개하 듯 말초적인 사례들만 편집해 나열해 놓음으로 인해서 솔직이 3류 도색 잡지들이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나 싶다. 오히려 신문에 실린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읽어 보면 '오타쿠'에 대한 발전적인 가능성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정작 이 책에서는 오타쿠는 변태 아니면 정신병자(혹은 이단 교주 추종자) 등으로 못을 박아 버리고 있으며, 더우기 문제인 것은 객관적이어야 저자의 취재 자료가 신뢰하기 힘들 수준의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유백서'가 졸지에 야오이 만화의 대명사로 소개되고 있고 '소년 매거진'에게 이미 오래전에 왕좌를 넘겨준 '소년 점프'가 일본 만화계의 맹주로 오기되어 있고 이름도 없는 무명의 다나카 레나가 현역 일본 최고의 아이돌로 근거 없이 포장되고 있으며 그밖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데이터 오류가 여과없이 기재 되어 있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일본의 오타쿠 문화라는 측면에서 분명 새로운 시각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책이었지만, B를 통해 전해 듣게되는 A에 대한 이야기의 한계를 극복하진 못하지 않았나 싶다. 책상태: 인터넷에서 캡쳐 받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자료들의 해상도가 알아 보기 힘든 수준이다. 정말로 저자가 직접 취재를 해서 쓴 책이라면, 왜 취재시에 찍은 생생한 사진들을 넣지 않고 웹상에 떠도는 질 낮은 사진들을 실었는지 의심스럽다. |
|
개인적인 독서 경험에 비추어보면, 프랑스 작가의 책들은 재밌게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 이건 아마도 한 언어가 갖고 있는 나름의 어순과 문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프랑스의 경우, 좀 현란하고 집중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하지만 <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은 읽는 동안 ‘이 책이 정말 프랑스 사람이 쓴 것인가?‘라고 생각할만큼 확연히 달랐다. 저자가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져 일본어가 갖고 있는 확정적이고 결정적인 문체에 동화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스피드가 있고 흡입력이 있다.
게다가 가장 칭찬하고 싶은 점은 ‘성실하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오타쿠 =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이돌이나 전자 제품 따위에나 편집증적인 애착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오타쿠의 원인이나 오타쿠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 자체가 생각조차 하지않게 만들어 버린다. 끔찍하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오타쿠라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연상작용으로 끝나도 좋은 문제일까?
산업화 과정에서나, 문화적 유행의 측면에서나 우리나라는 시간차로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오타쿠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부류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냥 나와는 상관없는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이 책은 그 여정을 함께 하는데 있어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일본에서 학교는 평등주의 원칙에 입각해 있어요. 하지만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로 간주하여 일말의 여지 없이 배척해버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괴물을 좋아하는 오타쿠, 기리토시 리사쿠의 인터뷰 中오타쿠> |
|
저자는 1986년부터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 문화를 접하였다. 일본은 교육과 정보와 소비를 강조하는 사회다. 오타쿠 문제는 20세기 말 일본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이 세 지주라 할 수 있다. 오타쿠들은 이 세 분야에서 일본 사회의 과도함에 대한 일종의 촉매 구실을 했다. 동시에 그로부터 비롯된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하나의 현상이다.
오타쿠 현상을 통해 일본 사회를 진단하고, 그들을 이해한다 오타쿠는 '체계'에서 제외되고, '생활 세계'에서도 의사소통의 장애를 겪는다. 그런 이들이 자기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체계'의 도움에 의해서다. 미디어와 시장의 상품을 통해 오타쿠의 의사소통 욕구는 전해지고, 시장은 다시 오타쿠를 포섭한다. 오타쿠는 사람보다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의사소통을 이루어나간다. 오타쿠는 분명 근대 이성의 산물이며 피해자이다.
오타쿠는 일본 사회의 집단주의와 교육 시스템, 그리고 경제 성장에 의해 생겨난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오타쿠는 개인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대중을 위해 구상된 교육제도의 희생자들이다. 사회는 교육의 가치를 존중하지만, 학교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합리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최대 효율, 최소 인력"은 이들에게 목표도, 이상도, 개인적 표현의 만족감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집단의 가치를 우선시 하는 일본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인형이나 아이돌을 사랑하며, 기존 상품을 튜닝하여 자기화한다. 그들은 그 관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오타쿠들은 사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 분야의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오타쿠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모두 잠재적 오타쿠들이다. 일본의 집요한 장인 정신은 사실 근대화의 산물이다. 개인을 충분히 고려치 않은 일본 교육의 원인을 집단주의에서 찾으며 그것이 유교의 영향이라고 말한 에티엔 바랄의 진단은 적확한 것은 아니다. 과거나 현대 모두 일본인에게 유교의 영향은 미미할 정도다. 단지 우리가 근대화를 이루면서 구습으로 여겼던 유교를 일본은(우리 입장에서 특이하게) 근대화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했을 뿐 유교 윤리의 생활화는 이루지 못했다. (……) 그래서 일본의 전통 문화는 일본인의 정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들이 즐기는 다도나 하이꾸 짓기 모임 등은 단지, 그들이 그런 일을 즐겨할 뿐이다. 그래서 오타쿠들은 그들의 몰입에 대해 회의하지 않는다. -함성호(시인, 건축가) 발문 중-
이 책에 나온 일본의 학교 이데올로기나 학력 경쟁, 이지메 현상 등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존재하는 문제다. 친구와 노는 시간보다 학원에 가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시간이 많은 요즘의 젊은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곳은 '오타쿠'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도 발견된다. '묻지마 살인'이나 '어린이 강간'이 늘어나는 이유도 이런 측면과 비슷할 것이다. 사물을 인간화하고, 인간을 사물화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정작 젊은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소통'의 방식이 아닐는지……. 정치인들의 소통 방식이 아닌, 사람과 인류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소통'을 꿈꿔본다
|
| 문학과지성사의 책은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읽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아서 좋다. 눈독들이고 있던 책인데 드디어 읽게 되었다. 전철안에서 틈틈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타쿠에 대한 일본 사회에서의 논의가 활발했던 것인지, 저자가 일본에 나와 있는 연구 결과물들을 읽고 쓴 것인지, 일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도 내가 아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얼마전에 읽은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동양적이고 일본적으로 부드럽게 다루었던 내용을 프랑스인인 저자는 인터뷰하고 숫자를 들먹이고 원인에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사회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철저히 분석하고 있다. 오타쿠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그리 좋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지 않나보다. 세번에 걸친 미디어의 오타쿠 죽이기도 그 원인이 되겠고, 오타쿠는 보통 한번쯤 이지메 당한 경험이 있고 똑똑하긴 하지만 편안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좋은 직업을 버리고 어린 아이나 좋아할만한 것을 좋아하며 자기 세계에 빠져 지내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벌이거나 이상한 종교에 빠져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위험한 테러를 벌일수도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로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오타쿠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skin to skin'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물리적, 심리적 상처를 줄 뿐이다. 인형, 만화, 게라지키트, 아이돌은 자신이 언제나 통제하고 속속들이 알 수 있도록 순순히 24시간 그만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괴물을 좋아하는 오타쿠는 도시를 파괴할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에 자신을 동화시키며 예전에 자신을 괴롭혔던 그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타쿠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성(性)'이다. 오타쿠는 유명한 만화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을 등장시켜 동성연애물인 야오이를 그려 사고 팔거나, 아이돌들의 사진을 찍어서 모으다 못해 보일듯 말듯한 팬티까지 찍어대는 카메라 고조가 되기도 한다. 남들은 당연히 돈을 내고 쓰는 공중전화, 전철과 같은 것을 공짜로 쓰고 아낀 돈으로 자신이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찌르는 것은 꽉 짜여진듯해 보이는 일본 고도산업자본주의의 상업주의적 체계의 허점이다. 이렇게 오타쿠는 사회에 의해 억압된 것들에 대해 반항하고 투쟁한다. 저자는 오타쿠를 대량으로 양산해낸 것은 일본 교육이라고 결론짓는듯 하다. 이 점에서 일본과 비슷한 교육열과 교육 체계를 가진 우리나라도 왕따 문제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게된다. '일본 교육 문제-> 이지메-> 오타쿠 대량 양산'이라는 도식이 신빙성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찌감치 자신만의 놀이는 포기한 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지식을 암기식, 주입식으로 머리에 쑤셔넣고 방과후에 학원에 다니며 철저히 문제 빨리 푸는 기계가 된다. 일본 교육 체제 상 점수와 관련된 경쟁은 피할 수 없고, 친구들 사이에서 월등하게 좋은 성적을 받으면 이지메의 대상으로 낙점되기도 쉽다. 이지메에 대한 상처를 가득 안은채 좋은 대학교에 가고도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고민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다가 오타쿠가 된다. 자신이 공부했던 방법대로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철저히 외우고 암기하고 분류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버린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우리나라 교육도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그러면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오타쿠가 되어 쏟을 열정을 어디에 쏟고 있을까? 결국 이 책을 읽고 나면 오타쿠에 대한 좋았던 이미지가 사라져버린다. 서양적 사고방식에 철저히 난도질 당해 드러난 오타쿠의 실체를 알고 나면 씁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 vs 오타쿠의 대결 구도를 보았을 때 역시 손을 들어주고 싶은 쪽은 오타쿠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들 개개인의 정신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
|
대학교를 다닐 때, 문화사회학 관련 수업에서 이 책에 대해서 발표가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내용이 표면적으로만 다뤄졌다면서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었다. 개인적으로는 읽지 않았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당시에는 ‘오타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몇몇 영화잡지들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고작이었기 때문에(지금도 별다른 차이는 없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 많았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의 경우나 기타 일본 이외의 사회에서는 ‘오타쿠’라는 의미가 꽤 긍정적으로 다뤄지고 있었는데(최근 한국에서는 일본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되어가는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오타쿠’라는 의미는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조건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고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8년 현재의 한국은 일본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한 예상을 하게 된다) 저자는 프랑스 인이면서 일본에서 오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외부인이면서도 일본의 내부적인 상황을 보다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의 논의를 보다 심도 있게 이어가지는 못하고 있다. 자주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해야 하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방식은 미셸 푸코나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각을 생각하게 만들고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오타쿠라 불리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오타쿠’라는 집단이 내성적이고 지저분한 복장에 집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단순화하고 있는 것을 해체시키고 있기도 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인터뷰를 통한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와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저자가 미리 단정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자신의 생각했던 것들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어봤는지 궁금하게 하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서 어떻게 그들은 저자의 판단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일본 미디어의 자극적인 소재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과 집단적인 사회구조에 대해서 자주 지적을 하고 있지만 본인도 오타쿠의 자극적인 부분에만 치우쳐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보다 일본의 사회-경제-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오타쿠’라고 불리는 이들의 인터뷰를 더 많이 활용했다면 더 좋은 책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오타쿠’라는 집단에 대해서 일본인이 아닌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독특한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오타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책이 될 수 있겠지만 다양한 인터뷰와 저자의 분석은 사회에 대한 다양한 분석의 시선을 보다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곱씹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일본의 교육제도와 사회구조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정확한 분석은 아니라고 발문에서 다뤄지고 있지만 좋지 않은 부분은 일본과 닮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썩 괜찮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오타쿠의 과대망상이 부정적이고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으로 옴진리교를 분석한 부분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오타쿠라는 집단에 대해서 최근은 보다 긍정적인 부분을 많이 지적하게 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기본적으로는 퇴행적이라는 것과 현실과 환상 중에서 환상에 우위를 두고 있는 집단이라는 부분에서는 부정적으로 봐야할 부분이 있기 때문에 보다 단정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참고 : 개인적으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론을 내었었지만 이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과 오타쿠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와 동일한 결론을 내게 되어서 약간은 놀라게 되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일본 사회는 전부 오타쿠가 되어갈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
|
'오타쿠'하면 일단 둔해 보이는 비대한 몸에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의 사회부적응자..변태적인 취향같은 부정적인것부터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타쿠'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쓰인 것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좋지 못하단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타쿠'라는 것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 먹던 중 발견 한 책이 엔티엔 바랄의 <오타쿠 - 가상 세계의 아이들>이다.
오타쿠의 발생에 대해 몇 몇 문제있는 개인의 일로 치부한 것이 아니라 고도경제성장과 극심한 경쟁 그리고 새로운 모델의 부재 등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일본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고 시작한 것은 좋았으나 뒤로 갈수록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다.
사례로 소개되는 것들이 처음 시작과는 달리 유별난 사례들을 흥미 위주로 뽑아놓아서 더 그런것 같다. (사실 그들을 오타쿠로 취급해줘야할지 의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단순히 이지메를 당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너무 비약적이고, 마지막에 옴진리교와 오타쿠의 연결은 솔직히 억지스럽다. 외국인의 눈으로 본 일본 오타쿠의 세계라는 시도만 좋았던 책이다.
2009. 4.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