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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분야에 대하여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으나, 이 불후의 명작을 출간된지 40 여년이 지나서 겨우 접하게 되었다. 늦게라도 읽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21세기의 시각에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과학문명의 진보라는 맹신이 판을 치던 20세기 중반, 메카시 열풍의 어두운 그림자가 채 가시지 않은 1960년대 초 미국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대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음이 분명하다. 레이첼 카슨이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는 화학약품의 남용 사례를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람들이 그처럼 무지하게 살았을까 의아해진다. 물론 카슨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태가 극단에 이르렀다면, 언젠가는 그녀에 버금가는 양심적인 학자나 환경단체가 그 역사적 임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또는 아무도 생각하기 싫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주의 환기와 적절한 대안을 제시한 선구자적 소명(召命)을 평가절하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레이첼 카슨이 이 책에서 이루어낸 업적은 무엇보다 먼전 화학 약품의 남용에 대한 고발이다.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대규모 방제 사업의 실질적 효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안타깝게도 자료 부족으로 ''입증''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녀의 직관은 이후 대부분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병충해 방제라는 당초 목적은 전혀 달성하지 못한 채, 토양·하천(바다)를 회복불능 상태로 오염시키고 야생동물의 삶을 앗아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고발로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과학자답게 건설적인 대안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요즘에야 당연시되고 있는 생태계의 균형을 이용하는 생물학적 방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이 방법도 완전무결한 것을 아니지만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건설적인 차선책 중의 하나다).
카슨의 보다 중요한 업적은 거대기업의 실체를 파악한 날카로운 통찰력이다. 왜 정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낭비적인 대규모 방제사업을 강행하는 것일까. 이 실효성 없는 방제사업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은 누구인가. 카슨은 주저하지 않고 대규모 화학약품 제조업체의 부당한 이익 추구와 그에 동조하는 정부 관료,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비양심적인 과학자[단체]를 지목하고 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철학에 힘입어 농무부의 방제 관련부서는 갑자기 매우 과격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1쪽)
지난 세기의 대기업은 비용을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떠 넘기고, 개별이익을 극대화하는 반사회적인 방법으로 성장을 추구해왔다. 경제학 용어로는 ''시장의 실패''라고 하는데, 이런 개념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 경제학자보다도 더 의미있는 분석을 제공한 것이다. "침묵의 봄"이 단순히 일반 과학교양서의 범주를 뛰어 넘어, 현재까지 충분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이 책은 1962년 "New Yorker"란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묶어서 출판한 책이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잡지에 실린 글이므로, 몇 가지 익숙치 않은 화학 약품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평이하게 씌여 있다(환경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독자라면, 그녀의 메세지를 이해하기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 몇 종의 대중을 위한 과학 서적을 낸 바 있는, 보기 드믈게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겸비한 과학자 카슨이 암투병 중에 엮은 그녀의 ''백조의 노래''라 하겠다. 하여간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라면 누구든 가장 먼저 읽어 봐야 할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린피스를 비롯하여 현재 왕성한 활동 중인 NGO·시민단체들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진 것일까.
냉소적이고 때로 그녀를 ''왕따''시키려고 애쓴 정부·기업·과학계에 강철같은 의지로 맞선 왜소한 체구의 이 여인, 숲속 나무 둥치에 기대어 돌아오지 않는 새들의 노래소리를 염원하는 레이첼 카슨의 그윽한 눈빛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상깊은구절] ''자연을 통제한다''는 말은 생물학과 철학의 네안데르탈 시대에 태어난 오만한 표현으로,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응용곤충학자들의 사고와 실행 방식을 보면 마치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원시적인 수준의 과학이 현대적이고 끔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 곤충을 향해 겨누었다고 생각하는 무기가 사실은 이 지구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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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게 남다른 기억이 있는 책이다. 90년이었는 지 89년이었는 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어 모의고사 지문으로 나왔던 문장으로 나는 이 책을 기억한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수필, 내가 이 책의 영문 부분을 읽으면서 느꼈던 첫 감정이다. 그리고 그 글을 문학의 한 부분으로 오해했었다. 물론 그 덕에 나는 모의고사에 나온 문제를 틀렸다. 답이 DDT였기 때문에 생뚱맞게 존재한 그 보기에 놀랐었다.
그렇게 '침묵의 봄'은 내게 각인된 책이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잠자리에서 한 장, 한 장을 읽어내린 후 어젯밤 드디어 마지막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생각했다.
남들과 다른 생각, 남들보다 앞서 나간 생각, 이 책이 없었다면 아마 현재의 지구는 조금 더 황폐했을 지도 모르겠고 그녀가 아닌 다른 이가 나서서 환경을,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자고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름 아닌 그녀의 주장과 문장이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글의 소박함 속에 녹아든 진정이 아닐까 싶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참으로 자연을 사랑한다고 느꼈다.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이 아닌 진실을 향해 한 발을 더 내딛었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 깊이있는 사고없이 사용되어지는 물질의 편의성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 그것을 그녀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 편의성과 경제성이란 것이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킨다. 그녀의 손 끝이 지시하는 곳에는 온전한 자연이 있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있다.
그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발 아래 놓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임의로 판단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연을 조종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간의 힘은 자연의 힘 아래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짧은 세대 주기를 가진 곤충들과의 전쟁은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 지를 보여준다. 결국 자신에게 이로운 것들을 해치면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창궐하게 만든다.
나는 환경주의자는 아니다. 단지 환경이란 것이 보다 깊이있게 다뤄지고 단순한 경제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것이 싫다. 그런 내게 어쩌면 이 책은 잘 맞았는 지 모르겠다. 내가 그녀에게 동조하는 것, 그녀의 주장에서 약간 꺼려하는 것, 그 많은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그녀의 경고덕분인지 세상은 그녀의 암울한 전망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이며 변해왔다. 그녀가 쓴 것 처럼 새가 울지 않는 봄이란 얼마나 삭막할 것이며 우리를 슬프게 할 것인가? 이제 봄에 새 우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한 번 자연을 생각해봐야겠다. 저 새들이 우는 것, 새들이 번성하고 곤충들이 번성하는 것 모두 우리가 자연과 공존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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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책을 두고 역사를 바꾼 책, 세상을 변화시킨 책 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전인 1962년에 발행된 책으로 2002년 한글로 번역되어 나왔다.
[침묵의 봄]이란, 봄이 되어도 숲은 살아날줄을 모르고 새들의 울음소리도 사라져버린 그야말로 황폐해진 이땅의 현실을 빗대어 말한다. 이 책은 각종 살충제, 제초제들이 자연 생태계와 사람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밝혀내 화학물질이 환경오염과 자연훼손의 주범임과 동시에 [침묵의 봄]으로 불리우는 재앙을 경고하고 있다. 처음 합성 살충제가 개발되었을때 우리 사람이나, 가축, 농작물에 해롭다고..아니 귀찮다고 생각되어지는 곤충을 박멸하기 위하여 합성물질은 무차별적으로 살포 되었다. 그것이 박멸하고자 하는 곤충 이외의 생태계 및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도 전에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탁상행정을 고집하는 관료와, 합성물질을 생산하는 기업의 탐욕이 더해져서 이지만...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로(곤충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잡초들) 수많은 살충제들을 만들고 방제라는 핑계로 살포되는 동안 생태계는 무너지고 인간들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 시작한다. 한 곤충을 박멸하고자 시작한 방제가 오히려 다른 곤충들을, 상위 포식자들을 박멸하고, 정작 박멸하고자 했던 곤충들은 천적이 없어진 가운데 화학물질에 대한 내성을 키우며 더욱 번창해 나간다.
화학물질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태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알려주는 한예로 농병아리의 떼죽음을 들수있다. 캘리포니아 클리어 호수에 모기와 비슷하지만 피도 빨지않고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각다귀를 박멸하기 위하여 - 박멸 이유는 단지 그 수가많아 낚시꾼들에게 성가시다는 것 하나이다 - DDD를 살포한다. 그런데 이듬해 어떠한 전염병도 없었는데 호수를 찾아오는 농병아리가 떼죽음을 당한다. 사인을 분석하기 위해 농병아리의 지방조직을 검사한 결과 1600 ppm에 달하는 DDD가 축적되어 있는것이 검출 되었다. 왜 농병아리의 몸에 DDD가 축적된 것일까? 호수에 살포한 DDD의 최대농도는 0.02 ppm을 넘지 않았고 이듬해 호수물 에서는 DDD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는데...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을 분석하자 그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가장 작은 유기체(플랑크톤)에 함유된 DDD가 상위 포식자에게 먹히는 과정을 통하여 화학물질은 축적되기 시작하여 결국 물고기를 잡아먹는 농병아리의 몸에까지 축적된 것이었다.
위의 예와는 반대로 저자는 화학물질의 사용없이, 혹은 제한적 사용이 즉 미국의 극히 일부지역에서 실시하는 생물학적 방제법이 더 효과적 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럽이 원산지인 염소풀이 서부로 향하는 이주민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다. 서식환경에 적응한 염소풀은 곧 퍼지기 시작하여 토종식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토착식물들이 사라진 가운데 이 염소풀을 먹은 가축들이 구토등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유럽에서는 이 염소풀을 먹어 치우는 딱정벌레가 있어 개체수를 적절하게 조절 해주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으나 미국에선 개체수가 급증하여 문제가 된것이다. 주당국은 제초제를 사용하는 대신 이 딱정벌레를 수백만 마리씩 수입하여 염소풀이 있는 목초지에 풀어 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염소풀은 사라져 갔고, 사라졌던 목초들과 이로운 토착식물 들이 다시 나타났다.
저자가 이 책을 쓴지 5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침묵의 봄]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화학방제의 해로움을 깨달은 것 때문이 아니라 생태계의 회복력 때문이며 이는 우리 인간과 이 지구에 또 다른 위협이 되고있다. 바로 자연의 역습이다. 점점 화학물질에 내성을 가지는 곤충들과 더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을 제조하려는 인간들 사이에서 우리 인간의 몸은 내성을 가지지 못한채 병들어가고 지구의 숲(식물)은 사라져 갈것이다. 곤충을 향해 겨눈 무기가 실상은 인간을 포함한 이 지구전체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통제한다는 오만한 발상에서 벗어나, 이 세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왜 집파리들이 죽지않고 끝까지 살아남는지...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살충제들이 실상은 얼마나 위험한건지를 조금은 느낄수 있다. 생태계에서 인간만이 암등의 질병을 유발하는 물질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종이라고 한다. 아무리 미세량의 화학물질 이라도 몸안에선 더 해로운 물질로 변화되어 쌓일수 있으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태아에게 까지도 전달될수 있다고 한다. 한사람 한사람 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 생태계라는 거창한 것을 떠나,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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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은 내가 대학시절 들었던 전공과목의 책과 연관이 있었다. |
| 우선, 이 책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에 있는 감수의 글에서 말하는 대로 이 책은 분명 [고전]이다. 그것도 과학과 관련된 용어들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니 또한 [과학고전]이라 할 만 하다. 그리고 책의 뒷면에 적힌 말대로 '고전이면서 아직도 그 내용이 유효한' 것은 일면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과학분야에 있어서 [고전]은 [고전]에 다름아니다. 문학에서의 고전이 지니는 영향력만큼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을 이제와서 이야기한다고 누가 그 사람을 석학이라 이야기하겠는가? 이미, 도래한 사실이고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술 당시의 현재를 포함한 그 다음의 미래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이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일들을 여러 경로로 수집하여 늘어 놓았으나, 그것이 구체적이긴 해도 수치상으로 명확한 자료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저자가 내놓는 대책도 당시로는 혁신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일반화된, 일견 모호한 것들이다. 그런 이유로, 현재의 환경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이 책 자체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현재에 맞는 더 적합한 저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을 읽다보면 환경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가장 바탕이 되어야 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문제로 생각이 천착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환경문제의 해결책은 인간이 '공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합리'와 '순응'의 두 가지 과제를 풀어야 한다고 본다. [합리]는 이성의 힘이다. 더 편안한 생활, (인간의 관점에서) 더 인간적인 생활을 위해 우리는 환경을 희생시킨다. 산업혁명 이후 속도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이것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것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를 인식하고 충분히 깨닫고 있다. 하지만 왜,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 나은 상황을 향해 스스로를 개척하고 변모시킨다. 환경마저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것이 다른 짐승들과 차별하여 우리만 할 수 있는 이성적 행동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합리적 양태라는데 이견이 없다. [순응]은 적응과는 다르다. 있는대로, 주어진대로, 그대로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적응은 자신을 환경에 맞추고, 환경 또한 자신에게 맞추는 과정이다. 인위적 행위가 가해지지 않았을 때의 '아름다운 조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순응]밖에 해답이 없다. 이것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 그대로이다. [침묵의 봄]의 저자는 때때로 이 [순응]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이야기한다. 토를 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말도 분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합리]와 부딪혔을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양손에 떡을 쥐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한 손에 쥔 떡을 그냥 던져버릴 수도 없다. 포기하고 말면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개발에 기초한 [합리]는 우리에게 '문화'란 이름으로 생존의 필수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끼리의 오해인지 몰라도) 오랜시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살았다. 왕좌를 버리는 것이 쉽다, 어렵다 말하기 전에, 그 위치를 벗어나서는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그것이 환경문제의 딜레마인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는데, 대체 어느 선에서 어떻게 타협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이고,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이고, 경제학적인 문제이다. 저자가 연구한 분야인 생물학적, 의학적, 약학적 분야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난제이다. 끝으로, 개인적인 직업의식의 발로에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즉각적인 환경적 위기에 대해 덧붙인다. 항생제 오남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는데, 오남용되는 항생제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시스템에 뿌려지는 또 다른 농약이나 살충제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책에서 말하는 [침묵의 봄]은 인간의 몸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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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판이며, 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이 책을 도서실에서 찾았다. 다행이다. 이제라도 읽게 되어서.>
아마도 내가 단편적으로 알게 된 환경 오염의 지식 일부는 이 책에서 비롯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모른 상태에서 충격적이라며 받아들인 온갖 종류의 오염들에 대한 설명이 이 책 속에 다 담겨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출간되었지만 원서가 나온 지는 50년이 되었다고 하니, 미래에 대한 경고는 진작부터 있었던 셈이다. 들었으면서도 모른 척 하고 싶었겠지. 그러다가 폐해가 하나둘씩 현실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위험을 확인하게 되었겠지.
그랬을 것 같다. 지금은 이 책 속의 상당 부분을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려니 하겠는데, 50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당장의 눈앞의 이익에 마음을 빼앗겨 닥쳐올 불행한 사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들의 자손들이 어떤 불행을 겪게 될지 모르고.
선구자의 시각과 판단은 무섭다. 얼마만큼 믿고 받아들이고 따라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살고 있는 당시의 형편으로는 누구나 혼란스러울 것 같다. 저 말을 믿어야 하나, 어쩌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확실해지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또 당장 확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니. 앞으로 50년 후에 있을 현상을 예측하는 과학자들이나 미래학자들의 말에 반응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을 일이다. '무슨 그런 일이 있으려고?' 하면서.
안다는 것이 가끔 무섭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안다는 것은 그만큼 실천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반성 또한 많아지고. 그럼에도 알고 나면 보이는 세상이 달라진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진 것이리라.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고, 조금 더 조심해야 하고, 조금 더 겸손해야 하고, 조금 더 사랑해야 하고, 조금 더 기뻐해야 하고, 조금 더 눈을 넓혀야 하고.....
지금의 세상에 지금처럼 살아 있다는 것이 요즘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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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chel Carson이라는 분이 Time 지가 뽑은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중 한 명이라는군요. 이 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침묵의 봄.. 원제는 Silent Spring이죠. 저자가 원래 문학을 전공하려고 했다가 생물학으로 방향을 튼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경력답게 문장들이 대중과학서적답지 않게 부드럽고 유려한 느낌입니다.. 이 책에서 Rachel Carson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한 가지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하나이며, 자연의 힘을 거스르려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자연의 역공을 받어 인간을 파별시킬 것이다라는 거죠. 그에 대한 근거로 당시 많이 사용하던 화학 살충제들, 즉 DDT 같은 약품들의 패혜를 많은 자료들과 함께 보여줍니다. 그 약품들이 물과 공기와 토양을 어떻게 오염시키는지, 그 오염의 결과로 숲과 물고기와 새와 익충들이 어떻게 피해를 보는지,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어떤 피해를 보고 있는지 역시 상세한 자료들과 함께 제시해주죠. 뿐만 아니라 화학약품의 남용으로 인해 결국 약품들의 target이었던 해충들에게 내성이 생겨 약의 효과가 없애지는 사태까지 왔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책이 1962년에 나왔기 때문에, 지금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면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DDT 같은 유독성 화학약품들은 이미 그 사용이 중지된 상태지요. 생물학자로서 Rachel Carson이 보여준 화학약품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예 중에서도 사실과 다른 설명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지금에도 읽어야하는 고전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에 담겨있는 저자의 정신 때문이죠. 그 당시를 살던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보여주는 데이타들을 빼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추스려 본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경고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책 안에서 Rachel Carson은 화학약품이 아닌 천적 같은 걸 이용한 생물학적 방제를 주장합니다. 지금 당장 화학약품이 편하다그래서 생물학적 방제의 개발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훨씬 많은 손해를 볼 것이라고 주장하죠. 마치 지금의 원자력 논쟁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원자력이 전력 생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좀더 안전하고 깨끗한 대체에너지 개발을 도외시한다면 결국 더 많은 손해로 돌아오겠죠. 인간도 자연의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이 살기 위한 방법을 자연에 적용함에 있어 자연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의 작용이 자연에 의한 반작용이 되어 인간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경고를 Rachel Carson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워낙 오래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상세한 data를 유념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그녀가 그 data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면 되는 것이겠죠.. [인상깊은구절] 인간이 아무리 안 그런 척 행동해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이 세상 곳곳에 만연된 공해로부터 과연 인간은 도망갈 수 있을까? ... 앞으로 재앙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확실치 않은 위협은 그저 무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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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만큼 우리는 우리에게 해가 가는 해충을 잡기 위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해충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의 자연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 가게 되었다. 속담에서 초가삼간 다 태워 벼룩을 잡아서 시원해 지면 모르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자연 환경을 훼손해 가며 잡은 해충이지만, 그들의 수는 오히려 더 늘었다. 더군다나 더 강력한 놈으로만 살아서 우리를 끝까지 괴롭힌다. 과연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진정 자연을 위하는 길일까? p45의 '참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다.' 이제 참지만 말고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날이 갈 수록 생태계는 더욱 파괴되어가고 이상기상 현상까지 생기게 되었다. 어렸을 적 우리가 배운 먹이사슬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산자는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소비자는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자를 먹음으로써 양분을 보충한다. 서로 먹히고 먹히는 관계가 유지 될때 생태계는 유지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결국은 먹히고 먹히는 관계의 상위에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위협적이게 되었다. 우리는 과연 무너진 생태계 앞에서 무엇을 해야할까? 이 책은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세제 줄여쓰고, 물 아껴쓰고, 쓰레기 버리지 않고 등의 실천이 아니라 더 고차원적으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더 자극을 받아서, 우리는 침묵하는 봄을 맞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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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 시골의 시원한 푸른 들. 한쪽에 벌겋게 타는 ‘둑’을 본적이 있는가. 농촌 여행자나 살아계신 나이든 농부를 부모나 조부모로 둔 이들이라면 아마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2005년 처음 전북 고창으로 거처를 구해서 살게 되었을 때 가장 충격적인 기억을 꼽으라면 붉게 물들어 타오르는 논과 밭의 풍경일 것이다.
봄이 시작되는 즈음이었는데 나는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죽는 특이한 풀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촌(村)에 대한 경험이라고는 대학 일학년 때 농활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 정체를 파악하고는 더욱 경악했다. 농부가 등에 맨 약통에서 약을 뿜어내는 분무기를 들고 이동한 곳이 바로 다음날, 내가 궁금해 마지않던 충격의 ‘불타는 둑방’으로 변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였다.
그 후로는 둑길 산책은 자제하게 되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았다. 50여 평 되는 앞마당에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주변 농부들이 견디지 못해했다. ‘게으른’ 옆집 총각을 위해 옆집 아주머니는 친히 본인의 노동력과 농약비용을 들여가면서 남의 집 마당까지 ‘풀약’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신 것이다.
다음날 나는 호들갑스럽게 누가 이랬느냐며 항의를 하려 했으나 항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고마워할 것까지 없다는 뜻의 말씀을 전해 듣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무성한 풀밭을 보면 답답한 심정인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투약‘의 친절을 베풀곤 했다. 이후 작물들을 심고 ’관리‘를 한 덕택에 사태는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당시보다 5년이나 더 나이 먹은 농촌에서는 이제 ‘독약’이라고 써 붙여도 땅과 농작물에 뿌리는 ‘관성’을 버릴 수 없다. 아이들이 흐르는 냇물에서 물놀이조차 할 수 없어도, 하천이 오염되어 물고기 한 마리가 살지 못해도, 두루미가 논에서 식사하고 근처 언덕에서 비명횡사하는 모습을 보아도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약’ 처방에 대한 믿음은 공고해졌고 없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나마 최근 젊은 농부들은 약의 사용을 줄이고 둑의 풀도 기계를 이용해서 깍지만, 선택성 제초제를 논에 뿌리는 것만큼은 그만두기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다.
인간이 자연을 조종할 수 있다는 기만에서 출발한 살충제와 제초제로 대표되는 ‘농약’은 20세기를 거치며 많은 문제를 낳았고, 이를 통해 환경문제와 유기농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확대됐다. 하지만, 오늘의 문제는 우리 곁에 여전히 남아있다. 분명히 독약이 분명한데 눈에 띄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하나, 그리고 어른이면(어른이 아니어도 심부름으로 위장하면) 누구나 구매가능하다는 것이 둘, 산과 들, 물 등 어디에나 뿌리고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셋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예로 담배 포장지엔 담배를 피우는 것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경고문이 들어가 있는 것과 비교해서 그 보다 훨씬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살충제에는 아무런 표시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 이상하다. 급기야 에프킬라로 대표되는 가정용 살충제는 마치 향수라도 되는 것처럼 냄새가 향기롭다느니 하는 광고로 소비자를 기만한다.
농약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벌레를 죽인다면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이치이나 이에 대한 영향력이나 효능(?)은 전혀 표기되지 않고 있다. 제초제는 더 독한 것이다. (자살을 시도해도 살충제보다 제초제가 확실하고 빠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위험물질에 등급에 맞는 경고문이 큼직한 글씨로 표기가 되어야 하고, 이를 사용하는 이들은 ‘관리’가 되어야 한다. 얼마의 농지에 얼마만큼의 농약을 얼마 동안의 기간에 사용하는지를 알게 하고 남용을 막아야 당연한 것이다. 제초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는 농민들은 무덤, 길가, 논둑, 야산, 마당, 잔디밭등지에 마구 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고스란히 우리가 먹는 물 등지에 흘러들어 결국 우리와 아이들의 입속을 타고 몸에 축적된다.
또 하나, 농약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잔류성이다. 어디에 뿌려지든지 간에 남아 있게 되며 어떤 것은 수년까지 그대로 농도를 유지한다. 우리가 과일을 깎아 먹기 시작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물로 아무리 씻어봐야 씻기지 않는 독약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껍질을 깎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식초나 흐르는 물 등이 노하우라고 하지만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그저 마음의 위안이 될 뿐이다. 농약이 그렇게 잘 씻긴다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적어질 수 있고, 이는 다수확을 바라고 피해를 예방하려는 ‘일반적인 농부’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안전을 증명하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자료도 없이 수많은 농약이 농촌에 풀려서 사용되고 있으며, 장소의 제약도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법적 규제를 통해 판매와 유통을 제한하고, 정해진 곳에 정해진 양만 뿌리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전히 내 머릿속을 떠돌 뿐이다.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당장 농사로 소득을 내야 생계를 유지하는 늙고 힘없는 농민들이나 방제법과 농약사용법으로 먹고 사는(?) 많은 농촌 지도소 관계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농사를 짓되 최대한 흙을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유지하며 풍부한 미생물과 균류, 지렁이와 곤충들이 어우러지는 곳. 그 곳에서 작물과 그 밖에 잡초라 불리는 식물등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곳만이 미래농업의 비전이라고 하면 지나친 주장인가.
4천 년간 이어져온 농업방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외면한 채 서양에서 들어온 화학비료와 제초를 기본으로 하는 ‘관행농’을 수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다품종 소규모의 농사가 대규모 단일 품종의 경작방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필연적인 병과 단일작물에 적합한 곤충의 집단서식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방식의 편리성을 거부하기 힘든 것인가.
약제의 해악이 꾸준히 인간 세상에 안 좋은 결과를 낳았고 소비자들의 요구로 좀 더 독성이 약해지고 선택적 효과를 기대하는 합성물이 개발되어 사용 중이다. <침묵의 봄>이 겨냥한 50년 전의 미국은 지금 많이 좋아졌을까? 항공방제로 농업을 유지하는 규모의 농업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렇지 않다고 보인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은 철지난(?) 위협 속에 그대로 살고 있다.
세대교체가 없는 한 ‘관행’은 계속될 것이며, 하천과 지하수, 농민과 그 후예들에게 보이지 않는 공격이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중장기적인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을 수 없는 늙은 농부들은 편리함과 굳어진 관습으로 ‘독약’이 우리 먹을거리와 앞으로의 터전인 농토에 축적하는 것, 지하수와 지표수를 오염시키는 것의 영향력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전없는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남들의 눈에 요란스럽지 않게(?) 마무리 했으면 하는 것이니 그들을 설득하거나 논쟁을 통해 현재의 방식을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상황이 이러하니, 위에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민생을 생각하는 ‘국회’가 서민의 건강한 미래와 녹색 대한민국의 발판인 건강한 먹을거리와 농토를 위한 법제정에 나서야 한다. 물론 대안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책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60년 전에 당차게 외치던 ‘레이첼 카슨’ 의 이름으로, 상경하기 짝이 없을 소리 없는 봄의 미래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힘으로 <침묵의 봄>을 막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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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 쓰여진지는 40년이 훌쩍 지나서 객관적인 지식을 습득하기엔 알맞지 않은 것 같다. 40~50년 전에 쓰였던 화학 물질들을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특히 문과인 나로서는. 아무튼 이 책이 쓰일 당시에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해충을 잡기 위해서 살충제를 뿌렸지만 결과적으로 잡고자 하는 해충들의 개체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도리어 다른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들이 피해를 보았다. 직접적으로 살충제를 맞지 않았더라도 간접적으로 중독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그들이 먹는 먹이들의 몸 속에 화학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살충제, 제초제 등을 뿌릴때 당국이 대상 지역 주민들에게 충분히 통보를 하지 않았다니 정말 놀랬다. 그러한 유독 물질들을 살포하는데 제대로된 경고 조차 주지 않았다니.. 그로 인한 피해가 일어나자 당국 관계자들은 그러한 화학 물질은 인체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피해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40~50년 전 이런 마을에 태어나지 않은 걸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책 내용은 대게 이러한 인간들의 환경 오염에 대한 무지, 어리석은 행동들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이 책이 출간 되었을때 그 여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세상에 소개되었던 덕분에 아마 현실에서 침묵의 봄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21세기 우리도 심각한 환경 문제에 직면해있다. 침묵의 봄이 아닌 침묵의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이 책을 쓴 레이첼 카슨 만큼 인류에 대해 걱정하는 과학자, 정치 지도자들이 많았으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한 시민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환경 문제는 지구인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