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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은 호르몬과 관계가 있다. 특별히 더 우울해지는 날 하필 <<처녀들, 자살하다>>를 종일 읽었다. 무거워진 마음 때문에 책장을 덮고 책상에 엎드려 한없이 창밖을 보면서 바람이 강처럼 거리에서 무겁게 흘러가며 이제는 앞 건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진 나뭇잎들의 밑 부분만 잘잘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 모든 것이 낮게 무겁게 마음과 함께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10대를 지나 기성세대가 된 지금 당시의 기성세대들이 우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벽 앞에서 답답하고 좌절했던 것을 기억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10대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을 담보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느낀다. 13살에 스토아 철학자처럼 손목을 그었던 서실리아는 6월의 어느 날, 그맘때면 극성을 부리는 하루살이들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죽여야 할 지긋지긋한 벌레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초탈한 듯, ‘알에서 깨어나 번식하고 죽는다. 그뿐’이라고 말한다. 곧 죽을 것들을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투다. 이 말은 곧 그 소녀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가지는 지극한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원인이 그 소녀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그러한 사유를 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일까? 하루나 이틀을 사는 하루살이의 삶을 그 시한과 여정의 한 부분에만 집중하게 한 어떠한 영향을 그 소녀는 받았던 것일 것이다. 며칠 전, 늦은 오후에 도서관을 들렀다가 상가와 극장이 몰려 있는 번화가에서 저녁을 먹을 일이 생겼다. 어렴풋이 어둠이 내리려는 거리에는 젊은이라고 하기에는 어린 중고생들이 삼삼오오 무리져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대게의 여학생들이 그 뽀얗고 보드라운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하고 짙은 눈 화장과 붉은 루주를 칠한 모습을 보고는 적이 놀랐다. 덩치는 성인 같은 남학생들은 여린 몸과 어수룩한 말투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울리며 하는 행동과 말들은 그들이 아직도 성인이 아님을 반대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저렇게 버리지 못해서 안달하고, 건너뛰어 가고 싶어 하는지, 왜 아직도 아무도 그들의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지 않았는지, 아니 그들은 아무리 알려주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도도한 시간 속에서 바뀌지 않은 채 유유히 이어지고 있었다. 전능한 힘을 가진 누군가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준다면 난 어느 시점으로 가고 싶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청소년기의 그 시간으로는 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우리가 그리고 지금의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에게도 청소년기라는 시간이 고통을 동반하는 시간이라는 것에는 의의를 달수가 없어진다. 그렇게 서실리아는 손목을 그었고,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그보다 더 처참한 최후의 모습으로 자살에 성공한다. 이후 그녀의 4명의 언니는 일 년 후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러한 그녀들을 사랑했던 소년들이 그녀들을 추억하고 그녀들의 죽음을 추적하는 일을 하면서 리즈번 가의 다섯 자매가 왜 자살을 했는가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것은 1+1=2라는 극명한 답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소녀들의 자살이 아무 이유 없는 반항이라든가 청소년기의 통계가 보여주는 우울 등의 호르몬 또는 청소년의 사회가 유발할 수 있는 이유만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상황과 여건과 증거를 나열하며 드러내 보여준다. <<처녀들, 자살하다>>의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이 책을 통해 가장 큰소리로 하고 싶었던 말을 너무 장황하게, 너무 많은 증거를 나열함으로써 어수선하게 만들었지만, 그 요소요소들이 얼마나 필요했던가를 또한 부정할 수 없다. 10대들의 이성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성찰과 의심 그리고 억눌려지지 않는 자유에 대한 욕구를 보면서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10대를 떠올릴 수 없다. 그것은 10대라는 짧은 시간이 만든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닫아버린 마음의 문 때문이며, 그 문을 나서면서 자아의 혼돈이라는 순수한 낭만과 결별해야 하는 성인식으로부터 연유한다. 그러한 이유로 리즈번 가의 소녀들은 그녀들의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이후 그녀들을 둘러싼 모든 주변인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 그 소녀들과 같은 소녀들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했던 것도, 자신의 청소년기를 부랴부랴 빠져나와 허겁지겁 성인식을 치르고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왜 뛰는지도 모르고 뛰어가는 많은 사람의 관습적 인식에 의한 합의 아닌 합의로 이뤄진 집단행동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의 영향을 받는지,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지, 우리가 어떠한 집단의식에 합의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리즈번 가의 소녀들을 사랑했던 소년들은 그녀들의 죽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에 상대하여 진실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들이 소년이었을 때는 알 수 없었고, 머리가 벗겨지고 출렁이는 배를 가게 된 후에는 흐른 시간 속에서 자신들과 함께 퇴색되어 버렸음을 알게 된다. 베어질 운명에 처한 느릅나무 한 그루를 리즈번 가의 살아있는 4명의 소녀가 전기톱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자 서로의 팔을 걸고 끌어안았다. 거의 모든 느릅나무들이 감염되었고 베어졌다. 도시의 허물을 감추고 녹음의 풍성함을 선사했던 느릅나무들의 처형은 개성 없이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과 벗겨진 페인트 등 도시의 본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게 했다. 우리가 결코 자의라고 믿지 않으면서 합의를 이룬 집단의식은 바로 10그루의 감염되지 않은 느릅나무를 지켜보고자 1그루의 감염된 나무를 가차 없이 베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모든 느릅나무의 처형이었다. 우리들의 청소년기의 고질병이 유유히 이어지고, 우리들의 무의식적 집단 합의가 여전히 굳건히 지켜지는 속에서 세상의 시간은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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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제목, 어딘지 괴기하지만 코믹(?)한 표지 리즈번가의 다섯명의 딸이 자살을 하고 자살을 하던 그 때와 몇년 후 그들을 관찰했던 동네 소년들의 입을 통한 그들의 이야기
우리가 거쳐가는 질풍노도의 시기, 주변인- 사춘기 10대 안정되지 않은 감정과 확신할 수 없는 모든 상황이 그들을 방황하게 한다. 물론 나도 그런 시기를 거쳤지만 지금의 그들을 보면서 나도 그랬으니 괜찮아보다는 불안불안 그들을 책망하며 내가 살고 있는 울타리 안으로 그들을 몰아가려하는 것 인정한다.
막내 서실리아가 13살에 손목을 긋고 그 일로 인해 동네에서 주목받는 집이 되어버린 리즈번가 부모로 부터 통제받던 그녀들에게 동네 소년들을 파티참석을 제안하고 어렵게 참석하게 되지만 통금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 이후 집밖을 거의 나오지 못하게 되는 자매들... 막내가 자살한 지 1년이 지난 날 동네 소년들에게 SOS를 구하지만 결국 그날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자살을 하게 된다.
섬뜩하고 무서운 일이며 그리 극단적일 필요까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주변인의 눈을 통해 또한 그들의 입을 통해 묘사되는 자매들의 상황은 우리가 거쳐오며 느끼며 분노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며 눈물 짓던 많은 상황들의 대변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살은 러시안룰렛과도 같다. 총알은 오직 한 개의 약실에만 들어 있다. 리즈번 자매들의 경우에는 모든 약실에 총알이 들어 있었다. 부모의 학대라는 총알, 유전적 성향이라는 총알, 시대적 병리라는 총알 피할 수 없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총알, 나머지 두개의 총알에는 딱히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약실이 비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10대를 거치는 성장의 시기는 본인 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들도 함께 앓으며 힘들어하는 시기임에는 분명한 듯 하다 그러기에 다양한 각도의 다양한 모습의 그들의 겪어나그는 성장이야기들이 있고 또 관심받는 듯 하다. 자신의 회상하며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만 모든 고난을 겪은 후의 그 뒷모습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 자매들은 그 뒷모습을 남기지 않고 목숨을 끊었지만 그 모습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 잔해들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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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에 딸이 다섯이 있다. 그런데 그 딸들이 모두 십대에 자살을 한다. 그것도 일 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막내가 먼저, 일 년 후 네 명의 딸들이 자살을 하고 살아남은 마지막 딸이 다시 자살을 해서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떻게 보면 잔인한 이야기를 화자인 소년과 친구들이 그들의 자살 전에서부터 그들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알기 위해 조사를 하는 나이가 든 뒤인 지금까지를 담아내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자살하게 만들었을까 에 대해서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다. 살아서 주목받지 못한 아이들이 죽어서 주목받게 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며 이들은 얼떨떨해하지만 분개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소녀들로 인해 뜨겁게 달아오른 듯 보여 지지만 사실 미지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담담하게 사실만을 쓰고 있다. 그 집에 대한 묘사, 학교에서의 묘사, 마을에 대한 묘사가 오히려 소녀들의 내면에 대한 표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등장하고 소년들의 눈과 어른이 된 눈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사건을 자신들의 성장통처럼 여겨지게 만들어 소녀들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이 마치 수많은 하루살이가 살다 죽고 다시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찾아와 온 마을을 뒤덮는 것처럼 그런 일련의 인간이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그들은 그렇게 그녀들의 자살과 함께 성장하고 그 자살의 실체를 조사하며 아직도 자라는 현재진행중이기 때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녀들은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자살이라고 하기보다는 한 집안의 한순간의 몰락으로 그려지는 모습은 마치 한 세대의 실패, 한 나라의 추락, 하나의 문명의 붕괴를 나타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의 자살이기 때문이다. 여자들, 처녀들의 사라짐은, 자발적 사라짐은 인간의 종말과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크게 보면 인류의 멸망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 원인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소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위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소녀들의 자살과 그 집안의 붕괴, 이웃들의 시선과 소년들의 조사를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읽는 독자의 몫이라는 듯이. 하지만 책을 덮은 뒤에도 마지막에 어떤 말을 했던 간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 아이들은 자살을 한 것일까? 그렇게 산다는 것에 어떤 미련도, 희망도 없었을까? 언제나 늦은 뒤에 이웃은 손길을 뻗다가 만다. 친구들의 눈물도, 자책도 뒤 늦게 찾아온다. 소년들이 소녀들의 자살을 통해 알고자 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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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처녀들의 자살소동>이라는 영화 때문에 알게 됐다. 꽤나 나의 스타일과 비슷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영화를 언제 보지 미루고 있던 차에 영화의 원작인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책을 적어도 2년 전에만 읽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몰려오더라. 단지 그 때 읽었다면 고등학생 시절인 나와 그리고 내가 무한하게 가지고 있던 자아에 대한 성찰, 부모님과의 갈등 등에 더 현명하게 또는 오히려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의미에서이다.
"슬픔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지요." (p.123)
10대들이, 물론 나이가 더 들어서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감정. 슬픔. 그 슬펐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감정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정도는. 왜 그 때는 이 땅 위에는 나 혼자인 것 같고, 그리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닥치는 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뇌이고 절망하고 또 절망했었다. 이 소설속의 딸들, 리즈번가의 다섯 딸들 또한 그랬을까. 꼭, 나와 같았을까. 지붕 위로 올라가 비행을 하듯 떨어져 쇠창살에 꽂혀버린 서실리아. 그리고 남겨진 네 딸들의 이야기. 그치만 '자살'이라는 어쩌면 끔찍하고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이 단어를 작가는 물 흐르듯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써내려갔다. 그저 이 책의 소재를 잊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저 평범한 십대들의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듯이. 그래서일까. 소재는 한없이 무거운데 문장은 그저 흐르듯 읽혔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슬픔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서실리아의 죽음 뒤에 일어날 일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전까지는.
한 아이가 죽고,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 슬픔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었을까. 아니면 부모님과의 이해차이와 자신들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사회와 학교에 대한 불만이었을까. 아직 부모의 입장이 되보지 않은 나로서는 딸들에게 손을 드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부모들은 너무나도 유난스러웠다. 어쩌면 그 나이 때의 이러한 부모를 두었다면 극단적인 자살말고는 할 게 없었다는 트립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는 부분이었다. 럭스의 초대(?)를 받아 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많다는 트립은 리즈번가의 집에 가게 된다. 숨막힐듯한 분위기.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내용에 대한 알람같이 타이밍이 딱딱 맞는 웃음 소리.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느낌까지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단지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극적인 부분으로 나도 함께 달려가는 듯 한 리즈번가.
그러나 지나고보면 그 때의 일은 그저 흘러가기 딱 좋은 유치한 스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무도 모른다. 지나가면 그 일들이 모두 종이의 재처럼 새카맣게 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그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아이러니. 그 누구도 이러한 시간들을 겪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책을 덮은 후의 기분은 말 그대로 '먹먹함'이었다. 단지 침울하게, 무겁게만 쓰지 않은 작가의 문장력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문장마저 숨 막히게 써내려 갔다면 나도 그대로 책을 덮자마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짚어 썼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잠만 자기를 원했을지도. 단지, 이러한 감정을 잊을 때까지만 자고 다시 "일어나겠"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살아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주위에서 도와주는 애정어린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인생의 '벗'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의 슬픔을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생각할 때, 나의 손을 이끌어줄 그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고민이 너무 많은 소년 소녀들, 아니면 그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님들이 읽어보면 좋지 않니한가.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속에서만이 아니라 겉으로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로는 자신의 딸들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그 안타까움의 위로 등이 필요하다. 아무리 살아있어도 정신적으로 딸들은 이미 죽었다. 아, 사랑은, 그리고 관심은 말로써 표현해도 전해지기 어려운데 그것을 마음속으로만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이 제일 안타까웠던 부분이 아닐까. 새삼 나의, 내 일에 눈을 돌려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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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 했던 생각이, 처녀들, 자살하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것이였다. 처녀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 하지만 이 책에서 처녀라 함은, 리즈번가의 13살 먹은 서실리아부터 17살 먹은 터리즈까지 다섯 딸들을 지칭하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어떤 내용일지를 암시하고 있었기에, 사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판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멘트와 함께 데미안에 버금가는 성장소설이라는 문구가 내게는 참 자극적으로 다가 왔다. 성장소설이라,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 호밀밭의 파수꾼과 데미안을 읽었기에, 읽는 내내 그것들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제프리 유제니스다스는 다섯 소녀의 자살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10대의 모습을 위에 말한 두 권의 책들보다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청소년들이 자살이라는 것들을 한번쯤은 생각해볼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자살이라는 것을 한번쯤은 생각해봤기에 이 책은 독자와 동떨어진 성장소설이 아니라, 읽으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다섯 소녀의 심리를 그녀들과 함께 시간을 공유했던 소년들의 눈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20년 전의 다섯 소녀들의 자살에 대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 그 소녀들의 입장이 아닌 제 3자, 소년들이라는 화자 설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만 같다.
이 책은 리즈번가의 막내 서실리아 첫 번째 자살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 물론 그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게 되고, 그 후 그녀의 집에서 파티 중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녀의 자살에 관한 확정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녀의 자살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 10대, 그리고 부모의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명령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10대. 이것들은 충분히 우리들도 공감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서실리아의 죽음이후 더 보수적이 되어가는 부모의 모습 속에서 나머지 네 딸들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 버거웠기에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실,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내 자신에게 만약 나라면 어떻했을까?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한 순간 자살이라는 것을 꿈 꿀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10대들의 자살, 이 책을 한번 읽어보면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살이라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문제는 우리가 그냥 넘어갈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한번쯤은 생각하고 넘어가야하는 문제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리즈번가의 다섯자매들의 자살이야기. 청소년들이 정말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자녀를 둔 부모라면 더더욱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20년전의 다섯자매의 자살을 통해서 우리는 10대들이 과연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왜 하게 되나를 알수 있을 것이다.
사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녀들의 자살에 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책 한권을 다 읽었다가 아니라, 이제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한번 해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 정말 소설 속의 그녀들과 함께 하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고, 아, 정말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참 많이 공감하기도 했다. 읽으면서 스스로 정신적으로 성숙되어 가고 있구나 느낄 수 있는 책. 처녀들, 자살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