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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널 때리는 거야.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교육이라는 제도 하에 우리가 받은 폭력들이 정당하다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사랑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폭력만이 여기 남아 있다. 선생님, 선배, 친구들 모두 폭력에 의해 규정되어진 관계를 유대라, 사랑이라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관계에 있어서 순종적이다. 싸우지 않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선량한 사람은 욕하지 않고 점잖으며 빨간불에는 길을 건너지 않는다. 길에서 침을 뱉는 사람을 보면 얼굴을 찌푸린다. 대로에서는 누구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걸음 골목 쪽으로 발을 디딘다면 어떠한가. 소년들은 다른 소년을 때리고 돈을 뺏는다. 취한 자들이 오줌을 누고 토한다. 골목을 기어다니는 성추행범들과 어두운 틈을 타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다. 멱살 잡혔네 조용히 어디로든 끌려가 등짝을 차였네 핑그르 도는 봄날 떨어지는 단추 -<단추 뜯기는 계절> 中, 18p. 미디어의 폭력은 이제 만성화 되었다. 폭력은 남성다운 것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 피해자인 '빵셔틀'의 목소리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다.
나는 왜 그때
그 절친한 개새끼를 연필로 찍어 버리지 않았던 걸까 -<단추 뜯기는 계절> 中, 19p. 우리는 잠들기 전 때때로 후회한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굴종했던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저항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 했다. 착하고 선량한 학생으로 남기 위하여. 그러나 니체가 말했듯이 선량함으로 위장한 노예도덕자들보다는 악인이 더 순수하다. 폭력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내보이는 것은 올바른 시민이 아니다.
학생주임이 쑥 들어온다 동기들을 개 패듯 패는 새끼도 조지면 다 똑같다 혁대로 때리는 소리는 정말 리얼해 당신은 우리의 엔도르핀 우리는 당신의 연료봉 회전하는 것들은 결국 연소한다 남자답게 끝까지 참고 있던 녀석이 애원한다 살려 달라고 죽을 거 같다고 더 맞으면 정말 죽일 것 같다고 - <성기의 기술> 中, 60p 그러나 우리의 모든 관계는 폭력으로 묶여 있다. '동기들을 개 패듯 패는 새끼도 조지면 다 똑같'은 서열 싸움의 폭력적 관계 안에서 희생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계와 이성에 대한 거대한 폭력이다. 망가진 세계를 더 망가뜨리는 선량함일 것이다. 반성은 불구의 몸을 움직여 본 적이 없다 자전하는 반성의 뒷면을 본 적이 없다 눈물 흘리는 반성은 문을 걸어 잠그는 반성은 반성을 만지작거린다 (중략) 눈을 감은 반성은 더 심각하게 반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성의 골탕 머리를 잘 쓰는 반성은 반성을 이용해 먹을 준비를 한다 (중략) 스파르가눔 반성은 아나사키스 반성은 오징어 젓갈 속 벌레를 삼켜 버린 멍청한 사병의 표정같은 것 (중략) 그 밑에서 어떤 조각칼이 왔다 갔다 했는지 알 게 뭐야 눈 딱 감고 무릎 꿇고 무릎으로 걸어가서 반성의 장부에다 반성의 도장을 땅땅 찍으면 그게 당신의 운명인가 (후략) -<반성과 배신과 당신> 中, 73p 어떤 날은 이러한 폭력적인 순간 속에서 반성하고 자책하지만 그것 마저도 반성 자체가 스스로 반성을 이용한다. 결국 '오징어 젓갈 속 벌레를 삼켜 버린 멍청한 사병의 표정'으로 폭력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성이 무슨 소용인가. 시의 말미에 나온 것처럼, '반성은 사인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부터 세계에 대한 욕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살할까 봐 진짜 걱정돼요? 씨발 놈아>처럼. 이 제도와 폭력에 대해 욕을 해야 한다. 나는 이상하고 슬픈 활기 속을 당신과 함께 걸어 나온다 -<렛 다운>, 91p 김승일 시인의 화자와 함께 실컷 욕하고 분노하고 나를 버린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나면, 이러한 구절을 만날 것이다. 지금까지 소리질렀던 것과 분노했던 것 그리고 욕설들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세상에 대한 도저한 구애 였다는 사실이 저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타인을 저주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사랑이다. 모르는 사람을 저주하기는 쉽지 않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노는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정당함이다. '나는 불씨를 어금니에 물고 있는 어둠'인 빨간 불을 건너는 <프로메테우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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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나는 비겁하다. 세계나 사회가 요구하는 납득할 수 없는 것들에 수없이 이해를 강요당하고, 이해가 도저히 안 되는 것에는 수긍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 어른이 되는 방식이라고 배웠고, 착실히 수행해나가고 있다. 폭력이란 직접적인 물리력이든 복잡한 형태든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피해자를 변화시키는 힘일진대, 나는 도저한 폭력들 앞에서 침묵과 수용으로 폭력에 동조하며 폭력을 조장해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김승일의 첫 시집을 읽고, 일상에서 흔히 혼잣말로, 사석에서 했던 욕들은 진정한 욕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에 찬란하게 편재해있는 비속어들은 분명 친숙한 욕들인데 낯설게 다가온다. 그것은 그의 언어가 신세한탄이나 지렁이의 꿈틀 같은 성질이 아닌,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세계의 부조리함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에 당한 이후의 다음 단계에 이르는 원동력을 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 내어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비속어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을 실어 아주 찰진(?) 발음이 나온다. 그때 떠오르는 모든 얼굴들, 관습들, 나를 사랑한다 말했던 것들에게 힘주어 외치는 말은 솔직해서 아름답다. 그들에 대해 솔직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나의 욕설도/무지막지한 주먹 앞에선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中)처럼, 그래, 시인과 나의 욕설은 나약하다. 하지만 우리는 욕다운 욕도 마음대로 못하는 비겁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므로 거대하고 만연한 폭력 앞에 꺼질 듯 말 듯 조용히 분노하며 타오르는 촛불들이 새삼 밝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