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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이야기는 내가 최근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투자해서 읽은 깊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은 1974년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베트남 승려로 남 베트남 정부에 의해 추방당한 틱낫한 스님과 반전 평화 운동을 펼치신 대니얼 베리건 신부님이 나눈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1974년이면 30여년이 지난 기록인데도 어쩌면 공감가는 부분이 그리 많은지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 어려우니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이 누리는 힘이나 만행은 여전한것 같다. 사실 60년대의 세계정세나 베트남이 처한 상황을 이해 할 수 가 없어서 처음 책을 읽을때는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 가는 것 같아서 본문 들어가기에 앞서와 뒷 부분에 있는 후기 부분을 반복해서 읽고 다시 앞 부분으로 넘어가서 읽었다 틱낫한 스님과 베리건 신부님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으니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인것 같다.
평화 이야기라는 제목과 종교계의 큰 어른이신 두분의 대담기록이라 하여 어려운 종교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책을 접했는데 종교 이야기라기 보다는 세상의 힘에 의한 이야기라고 할까 인간으로서 어떠한 삶을 추구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까 오랜만에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1.기억,성만찬 그리고 죽음 2.세상의 종교 3.추방 4.성직자와 죄수 5.자기희생 6.정부와 종교 7.경제학과 종교 8.예수와 붓다. 9.저항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1.2장은 약간의 종교적인 느낌으로 읽었다. 책을 읽으며 딱히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종교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두 분을 통해 책임있는 신앙인 지도자상을 보았다고 해야하나 베리건 신부님은 미국인 이면서 베트남 침략에 대해 투쟁하다 투옥 되신 분이다. 종교와 평화중 당연히 평화를 택한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남는다. 이스라엘과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종교인들이 평화의 전도사로 나서기는 커녕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고 종교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30여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진 않은것 같다.
너무도 좋은 구절이 많은데 몇개만 남겨본다. 미국은 “우선 죽인 다음에 나중에 구해주자”는 발상을 베트남에 적용해 왔다. 종교적 관점에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는 에너지는 자비, 사랑, 관심이다. 정치가 잘못되어갈 경우 성직자는 그것을 앞장서 비판할 수 있어야하며 그것이 민중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꼭 다시 한번 시간을 갖고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왜 30여년이 다된 대담집이 다시 출판 되었는지 책을 깊이 있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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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밖에서의 삶도 감옥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은 곧 감옥이니까요. 전쟁.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이 무서운 말을 우리는 일상에서 입버릇처럼 사용한다. ‘삶이 곧 전쟁터다’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따위의 말들. 이런 말을 하는 저변에는 ‘평화를 향한 갈망’이 깔려 있다. 평화. 우리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그럼에도 이놈의 인간 세상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슬픈 현실이다. 우리들이 그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가고, 이들을 죽인 ‘전쟁 - 악의 무리들’은 “현재의 악을 호도하기 위해 추상적인 미래의 선을 내세우는 끔찍한 결의론”으로 전쟁과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악의 근절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평화’일까. 베트남 출신 선승(禪僧) 틱낫한과 미국 출신의 예수회 사제 대니얼 베리건은 ‘베트남 전쟁’을 중심 논제로 삼아 몸소 체험한 전쟁, 악의 실체를 이야기하며 평화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그 뜻이 깊다. 귀중하다. 단순히 평화를 염원하는 종교인들의 관념적 고민 내지는 판에 박힌 설교가 아니라 종교와 문화와 국가와 개인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참된 교류란 것이 어떤 것인지 ‘영혼의 교류’, ‘정신의 교류’가 어떤 것인지의 예증이기 때문에 그렇다. 참된 교류에서 평화는 싹트는 것이다. 묵인과 침묵, 가난한 사람들이나 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의 용인을 뜻하는 시민권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어리석고 퇴행적인 짓입니다. 틱낫한은 본토에서 추방당한 이래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대니얼 베리건은 베트남전 징집거부로 몇 개월의 감옥생활을 한 일이 있다.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사회로부터의 추방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추방당한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추방시켰는가. 대니얼 베리건 신부가 들려주는 교도소의 실상은 충격적이다. “교도소에서는 늘 입버릇처럼 죄수들을 갱생시키려 노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갱생하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죄수들의 갱생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이더군요. 죄수가 새사람이 되면 저항을 합니다. 대량소비, 전쟁, 경제적인 야망, 포르노 등을 비롯한 모든 것에 노,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국가에 참으로 골치 아픈 존재가 됩니다.” 악행에 대한 저항 분자들을 향한 두려움. 그것이 이들을 추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야기한다. 추방당한 삶이야말로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런 것이 그들이 말하는 고귀한 ‘자기희생’의 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저는 인간이 참다운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정할 때, 자신의 생각과 열망이 하나가 될 때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예로 들어 사회적 통념이나 도덕관념이 절대적 진실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부조리를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평화의 길을 걷는 이방인임을 인정한다. “형상의 세계와 비형상의 세계, 욕망의 세계는 우리의 본고향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얻기 위해 방황하는 공간입니다.” 틱낫한과 대니얼 베리건, 이 위대한 이방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평화를 깨뜨리는 악, 혼돈, 죽음을 부르는 증오, 폭력에 대응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종교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기도하고 염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통당하는 인류 속에서 함께 분노하고 항의하고 투쟁한다. 인류의 고통과 자신들의 고통을 따로 여기지 않는다. 함께 걷는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는 삶”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이다. 삶으로써 종교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을 때야말로 우리가 참다운 자신에게 돌아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은 ‘참다운 자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여로이다. 인생의 본질, ‘나’의 본질을 향한 추구는 비단 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자각은 개인을 비롯해 인류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통찰은 끊임없는 전쟁과 죽음, 가난과 폭력... 크고 작은 재앙들에 관한 근본문제에 보다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힘을 길러주고, 종교와 문화와 국가를 넘어서서 사랑과 이해로 평화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그대 자신의 등불을 밝히고 그 등을 들고 가라 틱낫한과 대니얼 베리건은 종교인인 동시에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평화이야기’ 속에는 시적 은유들과 철학적 사유들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지 못한 사람이라면 쉽게 읽어내지 못할 수 있다. 하품을 하거나 깜빡깜빡 졸음이 찾아들지도 모른다. ‘평화이야기’를 읽는 시간이야말로 전쟁 그 자체라고 느낄지 모른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술술 읽어낼 만한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질긴 소고기와 같다. 꼭꼭 씹어 삼켜야 한다. 참을성 있게 천천히. 그러고 나면 그것은 우리의 피와 살을 이룰 것이다. 충분히 인내하며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우리들 또한 전쟁과 피의 자식이며, 평화는 종교나 특정 단체, 특정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궁극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우리의 발이 놓여 있는 곳과 아직 도달하지 못한 목표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을 뜻합니다. 희망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힘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궁극의 존재로부터의 초대 같은 것. 그렇다면 평화를 위해 지금 당장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 자신부터 희망의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희망을 바탕으로 눈앞의 일상에서 평화를 이룩하려는 조그만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세계평화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 습관적 망각이 나의 평화를 추방하도록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평화를 소망하는가? 전쟁을 끝내고 싶은가? 삶에 희망을 뿌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들, 평화의 존재로부터의 초대를 받아들이라. ‘평화이야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희망의 존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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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틱낫한스님과 대니얼 베리건신부님은 시인이다. 이들은 정치와 손잡지 않고, 잘못된 정치에 대해 앞장서 잘못됨을 소리치다 감옥에도 다녀온 분들이다. 베트남의 민중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가를 위한 정치를 하는 정부를 향해 잘못됨을 외치다 쫓겨난 틱낫한 스님,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하던 평범한 신부에서 미국의 베트남을 향한 총성에 반대한 이유로 감옥에 들어가야 했던 성직자는 종교가 이 세계의 평화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지 비판한다. 또한 종교가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담당해야할 역할에 대해 말한다. 종교를 가진 강대국이 그들의 이익 논리에 의해 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약한 나라를 향한 폭력에 대해서 말한다. 그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는 법도 알지 못한다. *삶을 절대적 부조리로부터 구해주는 유일한 길은 삶이 ‘죽음에 대한 행복한 정복’이 되는 것이다. **사찰, 교회를 죽음의 의인화를 원숭이 하나님이라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사회 부조리에 대해 종교인은 가끔 발언을 하기는 하는데 차라리 그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대해-이스라엘의 종교인들은 그들마저도 민족주의에 빠져있다. 팔레스타인과의 화해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시도도 안하고 있다. 군대의 보호아래 군대가 원수를 갚는데 종교는 저당한 이유가 되어주고 있다. 종교의 역할은 단지 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역할만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종교인들이다.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사람을 죽이면서라도 반드시 보존해야 할 성스럽고 세속적인 실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유태인들과 미국인들이 소통할 수 있는 다리를 놓는 과정에서 환상의 다리를 놓았다.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하나의 파도가 존재한다. 피의 파도, 다른 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도덕적 무책임성의 파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특징적인 협상들을 인지할 수 있다. 첫째, 악마적인 에큐메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 주류 종교들은 침묵을 통해서 살인을 수용하게 한다는 것, 두 번째 현상은 이제 교회나 민족이나 종교전통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풍조가 그것이다. *미국은 “우선 죽인 다음에 나중에 구해주자”는 발상을 베트남에 적용해 왔다. *누구도 국민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죽기를 바라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국민들은 그냥 죽어갈 뿐이다. *양 진영 모두에게 지도자들을 둘러싼 지식인 집단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당화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나쁜 역사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사람들 역시 살인이 정당한 것이라고 믿는 것같다. 교회 역시 이런 식으로 오염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진ㄴ행되는 동안 우리가 목격했듯이 종교는 해묵은 죽음 게임의 또 다른 원천이 되었다. *종교가 참된 직분을 다하는 것은 정치가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럴 때 정치가들은 반드시 종교를 침묵시키려 들거나 추방해 버리려 하거나 다른 형태의 사고방식으로 전환시키려든다. *묵인과 침묵, 가난한 사삼들이나 죄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의 용인을 뜻하는 시민권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어리석고 퇴행적인 짓이다. *감옥 밖에서의 삶도 감옥이기 마찬가지다. 전쟁은 곧 감옥이기 때문에. **대중매체를 통한 폭력의 전달성은 인간을 폭력적이게 한다.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는 에너지는 자비, 사랑, 관심이다. *분노는 어느 한 편에 대한 지지를 외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분노는 상황에 거의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루터의 이론 중에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기독교인이 사람을 죽이는 동안 마음 속에서 사랑을 품고 있는 한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직자가 정치와 손을 잡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 정치가 잘못되어갈 경우 성직자는 그것을 앞장서 비판할 수 있어야하며 그것이 민중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이 책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라면, 자신이 가진 종교로 인한 사회적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라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종교를 가졌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며 지식이 있다는 말이다. 각 종교마다 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하는 책임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종교인들의 행동이다. 특히 전쟁을 하고 있는 지역의 종교인들에 대한 책임, 강대국의 종교인이 져야할 책임에 대해 깊이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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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는 가족간에 크게는 나라간의 종교관이 달라 서로 싸우고 헐뜯는 경우가 많다.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불교신자와 가톨릭 사제의 만남이 이토록 평화롭고 진지하게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진정한 종교인이 어떤 것이며 종교인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관념에 사로 잡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지 못하고 싸우는 현실은 평화수호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5년이 지난 지금도 끝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부와권력을 누리다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권력과 폭력에 끝임없이 저항하고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는, 물론 스스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틱닛한 스님과 데니얼 베리건 신부님의 대화를 보며 진정한 지도자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였다.
예수와 붓다가 사람들의 영혼을 맑게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르쳤듯이 지금 이사회에서 종교인이 해야 할 일은 묻지 않아도 안다. 굳이 종교인이 아니라더라도 사회의 지도자라면 자신을 따른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돌봐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부의 지도자들은 부정,부패,권력의 남용으로 많은 사람 들을 슬픔과 고통속에 빠뜨리고 있다.
'평화'란 모든 인간이 누려야할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의미조차 잃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틱닛한 스님과 데니얼 신부님의 대화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며 많은 이들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
각자의 나라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추방을 당하면서 평화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며 끝임없이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면 독려하는 두분의 모습은 어떤 한 종교인의 모습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공동체임을 알게한다.
'평화'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답게 살아가는 그날까지 우리가 추구하고 찾아야 하는 우리 삶이 아닌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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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3년 동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였다. 꿈도 많았고 희망도 많았던 그 시절 매순간 나의 종교관을 뿌리 채 뽑아내려 하던 친구가 있었다. 타인의 가치관은 전혀 배려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종교만이 참이라 여기던 그 친구는 모태신앙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을 기억한다. 주말마다 학교를 마치고 법회를 보았던 우리나라 3대사찰중의 하나인 승보사찰, 꽤 열심히 활동을 하였던 탓으로 그 친구의 타킷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틈만 있으면 불교성전을 들고 찾아와 나를 곤혹스럽게 하였던 그 친구의 종교관은 2ㅇ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었음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렸다.
평화이야기를 읽어가며 나는 두 성직자의 투명한 영적인 교류에 가슴이 설렌다. 지금은 추억이라 말하게 된 친구의 얼굴이 순간순간 오버랩 되는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갈망은 하였으나 답이 없었던 무엇인가를 찾아낸 듯한 기분이었노라 말한다면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 되어 버릴려나...... 언젠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고 가슴에 담았던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 편지, 내용과 의미가 다를지라도 두 성자의 대화처럼 성스럽게 기억되는 것도 서로가 다른 종교인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여겨도 본다.
평화란 그렇지 않을까. 참으로 광범위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평화란, 틱낫한 스님과 데니얼 베리건 신부님처럼 길목은 다를지나 가고자 하는 길, 닿아야할 길이 같다면 여러 갈래의 길목 중 어떠한 길을 선택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된 마음 길을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얻게 되는 마음의 중심을 평화라 여긴다면...... 그러나 왜곡된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우리네 세상은 서로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캐내려 애쓰고, 핑계의 구실을 갖추면 금방 허물려하는 탓으로 도처에 불신을 생산해내고 있지 않는가. 개개인의 삶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나라와 나라의 자기합리화는 결국엔 폭력마저도 정당화되어 가고 있지 않는가. 한 번 더 되새김하고, 한 번 더 배려하는 또한 존중하는 가슴을 만들어 간다면 지구상 곳곳의 전쟁의 불길도 조금씩 소멸되리라 위안해본다.
베트남 전쟁과 그 불길 속 틱낫한 스님의 비폭력 저항운동, 반전 평화운동가 베리건 신부님의 고된 행보와 삶과 세상으로의 진중한 대화록이 내가 세상의 햇살과 처음 대면할 즈음의 상황이었음에도 4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깊은 공감대를 형성함은 세월과 함께 자란 인간의 배타적 종교관에서 기인한 에고이즘이 또 다른 폭력을 만들고 정당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두 성직자가 제시했던 저항을 통한, 저항 공동체의 노력을 통한 자기 삶의 길은 어울림을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공동의 세계, 존중이 깃들은 어울림의 세상. 아직도 진행 중인 이라크전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는가를, 앞으로 또 치루게 될 수많은 희생을 가늠한다면 우리는 두 성직자의 메시지를 온전히 기억하고 새겨야 하리라.
어쩌면 나의 이기는 오늘을 보내고 또 하루 그리고 여러 날을 보내면서 점점 고약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 눈앞의 상황이 아니라 해서 전쟁으로 황폐해진 여러 나라의 참혹함을 단지 스쳐가는 한 페이지로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전쟁인질이었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것처럼 분명 눈 앞의 아픔에만 마음을 주는 방관자가 되어 가리라. 그래서 나는 두 성직자의 세기를 넘어선 평화의 메시지를 기억하려 애쓴다. 내 생활에만 묻힌 이기가 세상의 아픔에 방관자인 채로 살아가는 오류를 줄여가기 위해 오늘은 내일을 위해 내일은 또 그 다음 날을 위해 채찍을 든 손에 힘을 더해본다.
"그대가 불교와 평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평화를 선택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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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부터 평화로움이 가득 느껴지는 이 책을 보고 꼭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읽다보니 최근 출판 된 책이 아니란것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고전처럼 고귀하게 읽혀졌을 책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베트남전쟁이 있을 무렵 두분이 나눈 대화라는 시대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린 평화를 갈망하고 있지요
그 시절엔 눈에 들어나는 커다란 사건 (전쟁)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돈, 경쟁, 취업. 이런 문제들로 우리 삶이 너무 황폐해져 감을 느낍니다. 누구도 양보하고 싶지않아하고 손해보고 싶어하지 않고 .... 아주 작은 일도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이건 마음의 평화를 잃어가는 우리 들의 삶의 모습이겠지요.
종교를 초월한 두 현자의 말씀이 때론 형이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시대에 아픔을 가슴 절절이 아파하시는 모습도 보입니다. 게다가 그 분들이 말씀 뿐만 아니라 실제 삶을 통해 평화를 구현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 글들이 더욱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끔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시간이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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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신부님이 만났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두 분의 만남은 아름다웠다. 어떤 분열과 다툼이 없이 각각의 종교가 하나의 일치를 향하여 가고 있다. 이 책은 종교 서적이 아니다. 평화와 정의 구현을 위한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종교가 그 교리에만 집착한다면 이미 그 빛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노력은 종교를 초월하며 진정한 평화 운동인 것이다. 베트남전쟁에 대안을 찾고자 미국을 찾았던 베트남 승려 틱낫한은 고국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미국 예수회 사제인 데니얼 베리건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징집영장을 불사른 죄로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출소하여 반전 평화운동을 펼치다가 1974년 파리에 망명 중인 틱낫한 스님을 만나 나눈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그 분들이 원한 것은 평화였다. 세월은 삼십 여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아직도 평화를 구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많은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 베트남전이 진행되는 동안 무사태평하게 지낼 수 있었던 기독교학 교수는 학생들에게 괴로움만 안겨주는 교수에 불과했습니다.” –베리건 “ 불교 교리까지를 포함한 모든 교리에 집착하는 불교도들은 붓다를 배반하는 사람들입니다.” –틱낫한 종교는 수단일 뿐 세상을 구하지 않는 종교는 이미 종교의 의미를 잃은 것이다. 두 분이 종교는 다르지만 일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종교나 정치를 내세워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중동의 불씨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미국의 제국주의, 전세계의 정치, 종교적 분열들은 언제 끝날까?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두 분은 근원적인 ‘저항’을 이야기한다. 전쟁에 대한 저항보다 더 깊은 온갖 종류의 전쟁에 대한 저항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됨, 참다운 자신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우선 체제에 의해 침해당하고, 점령당하고, 폭행당하고, 파괴당하는 것에 반대하여 자아를 치유하자는 것이 저항의 목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경이나 내용면에서 아름답고, 치유를 도와주고, 우리를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해주는 저항 공동체이다.
“ 많은 수행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하나 저항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기도하고 명상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틱낫한 두 분의 이야기를 보면서 눈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다. 그 동안 외면했던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전쟁과 폭력은 TV 속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선택하고 명상하고 내면적인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건전하고 온전한 마음자세를 가져야 큰 세계와 큰 거짓말과 거리를 두고 참된 세계를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 내면에 목적을 의미하는 삶에서 꼭 필요한 순수성과 사랑을 일깨워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 한가지를 꼽으라면 <평화>라고 말하고 싶다. <평화>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도록 해준 아름다운 책이다. 모든 분들과 함께 <평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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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틱낫한 스님의 글은 여러번 접하여 눈에 익으나 데니얼 베리건 신부의 글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동양종교 불교와 서양종교 천주교의 대표적인 종교인이 지금 으로부터 약 30여년전 파리에서 나눈 진솔한 대화이야기를 엮은 이 책은 이 시대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주자인 김훈이 번역하였다는 점도 상당히 새롭다.
대화의 주인공인 틱낫한과 데니얼 베리건은 양 종교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종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그러하지 아니하다.즉 비록 종교인이지만 그들이 책속의 대화에 서 내세우는 진리는 대부분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하게 인정되는 것으로서 종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마음에 와닿는 것들이 대부분이다.특히 틱낫한은 종교가 인류평화를 위하여 사용되어지기 보다는 상당히 편협적이고 이기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짐을 완곡하게 질타하고 있다.지금도 항시 국제적인 분쟁지역의 기본적인 요인은 역시 종교적인 배타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여러가지 해법요소가 있을 수 있으나 두 저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러이 도출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타인을 우선시하는 배려감이 앞서고 대화와 이해를 하려는 마음만 충분하면 전쟁 과 분쟁이 없는 평화로움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화의 주인공인 두 종교인은 이러한 평화해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통하여 함께 고민하느 모습이 보인다.현대의 종교는 초기단계의 순수함에서 많이 벗어나 대형화,금권 화 등 세속적인 면을 많이 받아들여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다.얼마전 강성 이슬람 지역인 아프카니스탄지역으로 선교활동을 떠난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무모한 행위도 어떻 게 보면 타 종교에 대한 배려함이 결여된 교단 팽창제일주의에 주 된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전에 타인의 입장과 가치관을 먼저 존중하려는 생각이 필요 하다는 것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가 허심탄회하게 평화를 위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이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