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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곳에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 성인의 이야기도,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런 `흔한`이야기가 아니라, 지옥에서 보통 사람으로서 살았던 드문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현실에 맞부딪치는 방법은 단 두가지이다. 자신을 버리고 신의 가치 아래 모든 희망을 맡기던가,자신을 지옥에 들어바치고 그 지분을 받는 악마가 되던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없지만, 그곳은 현실이 아니라 지옥과 세상의 경계이기에 쉬운 일이다.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보통 사람으로 살아남았다. 가족, 일상, 사랑하는 아내...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에 기댄채로 말이다.
흔히 아우슈비츠라는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산더미같은 시체나, 강철 하켄크로이츠는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되새기는 기억은 주로 그 자신의 경험에 한정되어 있다. 분노와 고통, 절망등은 기억에서 휘발되어 버리고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난일들을 써두고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한 사람이 살았던 모든 흔적. 그 이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없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는 자신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책의 전반부는 저자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수록해두었고, 후반부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개발해낸 `로고테라피`(logotherapy)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던 어느날 저녁 무렵이었다. 우리들은 각기 수프 그릇을 들고 지칠대로 지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갑자기 한 죄수가 뛰어들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밖의 점호장으로 나가서 해가지는 멋진 광경을 보라고 했다. 우리들은 밖으로 몰려나갔다. 점호장에 서서 서쪽에 노을빛으로 찬란한 불길한 구름을 바라보았다. 연보라색에서 핏빛으로 변하는 빛과 수시로 변하는 형상의 구름들로 하늘은 온통 살아있는 듯했다. 그런데 진흙바닥의 웅덩이에 찬란한 햇빛이 비치고 있는데 비해 초라한 잿빛의 진흙으로 세운 임시막사들은 날카로운 대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후 몇분간 침묵이 흘렀다. 문득 한 죄수가 다른 죄수에게 속삭였다.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울수 있으련만......" |
| 우선 저자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삶에 대한 끈질긴 욕구와 희망을 가지고 이책을 저술했다는 1장의 내용들은 상당히 여러가지로 나에게 삶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후반부의 종교문제 특히 무의식적인 신의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이해 할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에 문제가 있었다고 볼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중간중간 활자의 크기가 틀려 진다거나 하는 부분들은 책을 성의 없게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좀더 정확하고 책의 인쇄 상태나 이런 부분들에 대한 배려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물론 내용 자체가 상당히 철학 적인 내용들로 되어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유대인이라서 그런지 종교적 편견에 대한 내용들이 눈에 띄였다. 우선 종교라는 것에 대한 정의 예를들어 이슬람교나 다양한 인류가 갖고 있는 종교들은 어떻게 이해 할 것이며 기독교적 유대교적인 종교의 관점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하는 부분은 많은 공감을 할수 없었다. 이런 부분들과 책의 상태에서 상당히 많은 실망을 안겨준 책이었다. ---- 기대가 컸음으로.. |
| 신은 각각의 인간에게 그들이 간신히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을 만큼만의 짐을 지운다고 한다. 하지만, 신에게도 실수가 있는지, 그 짐의 무게에 눌려 삶을 포기하거나,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책의 저자 빅터프랭클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단하나의 생각으로 살아 남았고,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므로써 데모그라피라는 정신병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이책을 읽은 후론 견디기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아래 문장들을 수없이 되내인다. "현상황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바꾸므로써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덧글>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몇번 선물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그속에서 답을 찾는 모습을 보아왔다. 아마 다른 분들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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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신(또는 조물주)으로부터 "네가 한번 살아보고 맘에 안 들면 미련없이 버려라"는 말과 함께 던져진 것이라면,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까? 운 좋게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사람은 ’그래 죽을 때까지 살자.’라고 할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인 신이나 운명에 저주를 퍼붓고, 그 무형의 실체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 광범위하게 퍼진 이러한 현상('실존적 공허')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라슈 교수가 영어로 옮긴 저자 프랭클 박사의 끔찍한 체험 수기이다. 온갖 잔악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 얽힌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부는 1부에서 기교적으로 다룬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이 사례와 함께 간결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제3부는 <무의식적인 신 : The Unconscious God>이라는 제목으로 로고테라피의 실존분석을 다루고 있다. 정신의학자인 프랭클 박사는 스스로 창안한 현대의 '실존적 분석'과 '로고테라피'의 목적을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잠정적 실존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강제 수용소에서의 실존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도 없었을뿐 아니라 지나간 과거에 몰두함으로써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일반 죄수들의 모습과 결국에는 강제 수용소의 '잠정적 실존'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되는 혹독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목격하고 같이 겪으면서도 정신의학자로서 자신이 겪는 실존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그리하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운명을 초월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개개인은 삶에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겠다는 의지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어떤 목적이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결국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이며 삶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테라피는 개개인의 삶에서'의미(logos)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삶은 우리의 행동과 처신에서 그 대답을 제시할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니이체의 말은 참으로 유용하다. 나의 심리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2부와 3부의 내용은 반복하여 읽었음에도 확연하게 깨닫기 어려웠다. 그의 방대한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한 탓도 있었겠지만 비전공자에게는 분명 그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이미 두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라!"외치는 저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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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사실 이 책은 읽었던 날들을 생각하면 아주 끔찍하다.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지은이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쭉 나열되어 있고, 2장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약간의 설명, 그리고 3장은 어려운 용어들이 남발하는 자신의 로고데라피에 대한 설명이다. 사실 이 책이 굉장히 좋다고 하길래 덜컥 사서 봤는데, 영화 '쉰들러 리스트'정도로만 알고있던 유대인 수용소에 대한 인상이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더욱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영화는 좀 더 사실과 다른 것들이 가미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목소리로 유대인 수용소의 실태를, 잔인하고 역겹지 않은 정도에서 잘 풀어내주고 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평점을 높게 준다면 1장을 생각해서 주고 싶다!
그렇지만 좀 아쉬운 점은 난해한 3장이다. 물론 저자인 빅터 프랭클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의 3장은 일반인이 읽기엔 조금 난해할 것이며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로고데라피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하게 하기 위해 썼다고. 그래도 나름 이런 쪽에 문외한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호기롭게 도전했는데 결과는 박살나고 말았다 ㅠㅠ 3장은 너무너무 어려웠다. 안 그래도 1장부터 쭉 이어지는 어색한 번역체 어투가 간간히 거슬렸는데 3장에 가서는 그런 말투에, 난해한 단어까지. 게다가 한두군데 오역된 곳도 있어서 안 그래도 어려운 내용, 이해까지 더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긴 했는데 아... 그 시간은 얼마나 더 길었던가.
지은이의 말처럼 이쪽 분야 전공자나, 좀 식견이 많으신 분들은 읽기에 무리는 없으실 것 같다. 그렇지만 나같은 그냥 평범한 일반인 분들은 그냥 3장은 버렸다.. 생각하시고 이 책을 구매하셨으면 좋겠다. 1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개정판의 목차를 보니 이 3장 부분이 빠진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자세히 보지는 못해서 확신은 못하겠다. 그래도 너무너무 좋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니, 심리학에 대해 공부를 좀 더 듣고난 다음에 다시 도전해보려고 생각중이다. 철학책 좀 더 읽고 도전해볼 심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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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부여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니체의 말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거창한 물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는 왜? 라는 질문이 숨겨져 있다. 내가 하루를 보내는 데 소모되는 모든 행동의 하나하나에도 숨겨진 이유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반복되고, 일상화 되면 우리는 그 의미를 떠올리지 않고, 그냥 그런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왜 그런지를 곰곰이 생각해서 내 나름의 이유를 붙이게 되면, 내가 하는 행동들이 가치 있어지고, 열정까지 생겨서 몰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린왕자가 수많은 꽃들 중에서 자기별의 꽃이 유일하게 중요한 이유는 외형적인 생김과 가치는 다른 꽃들과 같더라도, 그 꽃에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나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꽃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의 순간순간 목적을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순간순간이 유일한 삶의 일부가 되고, 활력이 생기고, 어떠한 시련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로고테라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도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적 있지 않은가? 무대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무대에 올라가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을 더듬게 되는 것을 정말로 두려워하게 되고, 지나치게 그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오히려 정말로 그 걱정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나게 되는 경험 말이다. 이것을 예기불안이라고 하는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바로 그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그 상황이 발생하면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얼굴이 붉어지고, 땀을 많이 흘리는 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자유의지 저자가 처해있던 상황은 악몽에서조차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환경이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결정한다는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곤 한다. 그러나 그게 과연 100% 사실일까? 환경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그 처참했던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은 악당의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이익만을 쫓지만, 반면에 그 어려움 속에서도 타인을 희생하는 숭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세상을 조금더 좋은 쪽으로, 그리고 개인을 조금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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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빅터 플랭클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담은 1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와 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 3부 [무의식적 신]을 묶었다. 빅터 플랭클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첫날, 고참죄수에게 그가 품에 갖고 온 정신치료 논문을 소각치 않도록 부탁한다. 이 원고는 그에게 가장 소중한 인생의 의미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논문과 인간적 대우 모두를 그 순간부터 빼앗기고 벌거벗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남기 위한 3년을 보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깨달은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이 박탈된 순간 찾아온 [참다운 인간됨]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 상대를 존재로 사랑하는 것, 우정, 예술, 웃음... 이 모든 것이, 어느 순간 삶의 끈을 놓으면 죽어야 하는 그곳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것이다. 재산, 명예, 학문적, 예술적 성취, 자손... 사람들은 이런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고 살다가 이것을 잃으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니면 죽을때 잘못 살았다 깨닫기도 한다. 플랭클은 진정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진 후에 그 너머에 진정한 인간성의 모습이 존재함을 수용소의 뼈만 남은 모습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런 [현상]에 놀라와하고, 살아남게 되자 이를 통해 실존적 인간이해와 그 개념을 정신치료에 적용코자 했다.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포함한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기 발견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자기것으로 여기게 한다. 자기거부와 무의미성에 대한 허탈감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적 정신병리에서 이는 치료의 단초가 된다. 도피와 연관된 신경증들과 자기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기력한 우울은 [고통이 의미가 있는 인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와 아울러 책임을 포함하는 인간의 실존의 회복이다. 또한 실존주의 철학과 정신병리학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우연에 따라 결정되는 생존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도리어 신의 존재를 발견케 된다. 이것을 그는 3부에서 영적 무의식spiritual unconsciousness에 새겨진 신의 존재, 혹은 무의식적 신이라 부른다.그리고 이런 신의 존재를 인정함을 통해서야만 진정 자기 삶의 책임과 의미를 발견하는 무의식으로의 여행이 자기 파괴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적psychoanalytic 무의식의 탐구가 인간을 어린 시절 성적경험으로 [결정지워진 존재]로 보는 대신, 이러한 이드id의 무의식이 아닌, 인간 안에 존재하는 초월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영혼의 무의식은, 인간을 [선한 의미를 따르고자하는, 책임감이 가능한 존재]임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무신론으로 억압된 무의식을 풀어낼때 인간의 영혼의 의미들과 각 개인들의 상황에 부여된 의미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 다시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가치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앞을 스쳐가는 경험을 한 적이 누구든 있을 수 있다. 그때 본 것은 사실은 인생의 진실한 모습이다. 죽으면 끝이구나, 언제든 죽을 수 있구나, 이렇게 살게 아니구나...죽음이 알려주는 가르침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이론적 논변보다 더 심오하다. 참된 심오함은 인생자체에서 나온다. 죽음을 느끼는 것은 인생이 의미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이론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플랭클은 죽음의 앞에서 인간을 찾았고, 정신병리의 해결이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신을 가지고 있으며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향해 대답하는데 있으며, 여기에 또한 인생의 목적이 있음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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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계에 놓인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인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존엄한 존재로서 행동할 것인가. 이 책은 빅터 프랭클 박사가 유태인 수용소에서 삶과 죽음을 오가며 겪은 체험을 승화시킨 저서이다. 자그마한 충격에도 항상 좌절하고, 실망하는 나에게 죽음에 다다른 순간의 '실존'을 생각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날카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빅터 프랭클 박사의 체험 자체가 매우 특별한 역사의 산물이며, 그 특별한 경험을 로고데라피로 응집시킨 통찰력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부분은 저자의 수용소 경험을 담은 65개의 에피소드와 그 에피소드에서 발견한 철학적 고찰로 이루어져있다. 65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생사의 경계에 서보지 못한 사람은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며, 그것에서 얻어진 저자의 고찰 또한 생사의 경계에 서보는 듯한 깨달음을 얻게 한다. 사형수가 느끼는 집행유예의 환상, 죽음을 앞둔 수용소에서의 유머, 인간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삶, 이런 것들을 어느 누가 경험하겠는가.
가운데 부부인 로고데라피는 다소 어려웠다.로고데라피의 궁극적 목적은 환자를 발병전처럼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전통적인 요법과 달리 고통을 견디는 능력과 숨겨진 의미를 발견토록 해주는 것인데, 이러한 로고데라피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무의식적인 신은 빅터 프랭클의 종교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실존에 대해 보다 깊이 논하고 있다. 나도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의 경계에 놓인 집단에서의 독특한 경험과 그로 인해 얻어진 실존에 대한 고민을 읽는다면 정말 다른 지적 쾌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너의 의지의 주인이 되고 너의 양심의 종이 될지어다!" 우리는 이 도덕적 한 마디의 명제로부터 우리가 양심의 초월성이라고 불렀던 현상을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너의 의지의 주인이 되어라..." 나는 인간이고 나의 인간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만큼 이미 나의 의지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내가 책임감이라는 견지에서 이 인간성을 설명을 하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나의 양심의 종'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양심이 내 자신이기보다 다른 어떤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게 될 것이다. 즉 양심은 단순하게 양심의 '음성'을 지각하는 자체보다 차원이 높은 어떤 것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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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인터내쇼날 대학교의 로고테라피 교수인 빅터 프랭클의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의 저서는 27권이 있다고 알려져있으나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은 많지 않은 듯 하다. 지금 소개하는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두 가지 번역본이 나와있다. 내가 읽은 1997년 청아출판사 발행본과 2004년 고요아침 발행본이 그것이다. 그리고 프랭클의 또다른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역시 1997년 동일한 역자의 번역으로 청아출판사에서 나온 본이 하나 있다. 이 책은 심리학 책이다. 또한 한편으로 매우 철학적인 책이다. 프랭클은 책의 중간중간 니체와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 실존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그 인용구들이 자신의 로고테라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로고테라피'는 '로고스'와 '테라피'의 합성어로, '로고스'는 '이성', '추론', '논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테라피'는 '치료한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는 이성과 논리로서 정신을 치료한다는 의미이다.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은 빅터 프랭클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으로, 흔히 정신분석학에서는 제 1대 정신분석학을 '프로이드'로, 제 2대 정신분석학을 '알프레드 아들러'로, 제 3대 정신분석학을 지금 말하고 있는 '빅터프랭클'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프로이드가 성과 쾌락의 관점에서 꿈을 해석한데서 정신을 분석했다면, 아들러는 권력을 토대로, 프랭클은 의지를 토대로 정신을 치료한다. 따라서 프로이드가 인간 내면의 잠재된 욕구를 기본으로 한데 비해 프랭클은 좌절한 인간의 내면의 이성과 의지를 불러옴으로써 스스로 좀더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빅터프랭클은 나치하에서 핍박당한 유태인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이곳저곳 수용소로 옮겨다니며 아우슈비츠에 가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생존해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직업, 정신신경학 의사라는 점을 이용해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각 상황별로 생존하기 위한 행동 유형을 구성한다. 프랭클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기가 쉽다는 것이다. 반드시 나 아니면 안되는 일, 예를 들자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들을 만나기 위해, 혹은 자신이 이전부터 연구해오던 연구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수용소를 나간 뒤에 해야할 중대한 일이 있는 사람들은 생존욕구가 더욱 강하다는 것이다. 즉 목적과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힘겨운 상황을 비관하고 자살을 택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을 말리는 경우 나치들로부터 찍히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프랭클은 그들이 자살하기 전에 자살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로고테라피'는 시작된다. 이 책은 그냥 읽으면 단순히 빅터 프랭클의 수용소 경험담이지만, 이 경험담들이 일관된 체계와 성찰을 담아낸다면 일종의 심리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 아우슈비츠에 대해 이야기한 책들은 많았다. 홀로코스트들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저마다의 경험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인류 최대의 비극이었던 지난 2차 대전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어떤가? 저자 역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지만 그 시각은 참으로 독특했다. 심리학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책이지만 로고테라피는 심리학이라기 보다는 심령학(?)에 더 가까운 듯 했다. 심리학과 신학의 복합이랄까. 그렇기에 저자의 영적 생활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 책을 접근하는 것은 어려움이었다. 아니, 오히려 난 심리학 보다는 사회학적인 관점에 더 익숙한 사람인지라,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를 사회학적으로 읽어나가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은 생존률 1/28 이하의 극한 상황 그 자체였다. 모든 이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듯 했다.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 저자에게 하루하루의 삶을 가능케 했던 것은 빼앗긴 원고를 다시 작성해야 된다는 그 신념이었다. 그 사소함은 어느 순간 그의 삶 중심에 들어서 그를 하루하루 숨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아내와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그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가 그를 살아있게 만들었다. 그 사소함이 그에게 ‘실존’이라는 것에 감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실제로 하루에도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고, 조금만 지치거나 아파 보이면 바로 삶의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아픔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은 인간을 인간답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죄수들 중에서 운 좋게(?) 뽑혀 카포가 된 이들은 같은 처지의 죄수들에게 가학적으로 대하기도 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부인하고픈 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는 극한에 처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을 지켜나가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의 이야기는 감옥, 수용소에 대한 사회학적 고민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아우슈비츠는 다른 여타 감옥에 비해 훨씬 잔혹한 상황이었지만,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곳에서 죄수(?)들은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들에겐 이름이 없었고, 그 곳에 들어오기 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따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죄수번호일 뿐이었다. 하나의 번호가 한 인격체를 대변하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삭제되었다. 그렇게 죄수는 죄수일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철저히 재사회화 되었고, 이는 독일이 패망한 후 자유를 되찾은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자유 앞에서 전혀 기뻐할 수 없음으로 나타났다. 카포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노 분열이라고 하던가? 물론 죄수와 노동자는 다르지만, 카포는 죄수끼리 동질의식을 형성할 가능성을 낮추며 더 나아가 그들 스스로 분열케 하는 하나의 사회적 기제가 아닐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그 순간 비로소 이 책이 심리학 책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잘못된 방식으로 읽었다는 생각보다는, 내 방식대로 독특하게(?) 잘 읽었노라는 생각이 든다. (알 수 없는 이 무대뽀 정신이란-_-) 저자의 독특한 관점은 분명 심리학계에서 주목 받을만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책은 심리학 이상의 무언가를 읽게끔 만들었다. 난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대했고, 결국 내 안에 형성되어 있는 사회학적 틀을 토대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