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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4. 절망의 나락, 그 끝을 생생히 보여주는 주제 사라마구
"13, 14. 절망의 나락, 그 끝을 생생히 보여주는 주제 사라마구 " 내용보기
얼마나 신성모독이길래 교황청이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자 유감성명을 발표했을까.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과 "눈먼자들의 도시"의 끝없고 지옥같던 암흑의 유혹 때문에 (무섭지만 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는 그 묘사가 아무리 장황하게 19금이라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나에게 충격
"13, 14. 절망의 나락, 그 끝을 생생히 보여주는 주제 사라마구 " 내용보기

얼마나 신성모독이길래 교황청이 이 책이 노벨문학상을 받자 유감성명을 발표했을까.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과 "눈먼자들의 도시"의 끝없고 지옥같던 암흑의 유혹 때문에 (무섭지만 또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는 그 묘사가 아무리 장황하게 19금이라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나에게 충격인 것은 예수가 너무나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문제가, 인류나 신앙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왜 자신이 (육체적) 아버지 요셉의 죽음후 악몽에 시달리는지, 베들레헴의 많은 죄없는 아기들이 죽는 가운데 그가 왜 자기만 구해서 도망쳤는지, 왜 꼭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지, 왜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자기 말을 믿지 않는지, 모든 것이 예수를 괴롭게 하는 상황이다.

 

어찌 보면 코믹하고, 황당하면서, 그 속의 무수한 비판과 냉소가 담긴 안개 속 호수 장면은 압권이다. 작은 배에 예수와 하느님, 그리고 악마 (예수는 그를 '목자'라고 부른다!)가 삼자대면을 한다. 하느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범세계적인 종교의 숭배를 원하고 "충격요법" 으로 아들의 순교를 명한다. (하권 172~209쪽) 예수는 당차게도 그 제의 (보상으로 권세를 준다고 했음에도)를 거절하며 아예 "직접 다른 나라와 민족을 정복하시는 것이 더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하 182쪽) 라고 몰아부치고 "사람들이 하느님과 마귀가 얼마나 닮았는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어울리는지 볼 수 있게"(하 182-183쪽)하겠노라 소리지르기도 한다. 이 삼자회담 중 백미는 예수의 죽음이후 일어날 일의 리스트인데, 순교자 성인들의 이름과 그 죽음의 묘사가 여섯쪽에 이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십자군 운동과 종교전쟁 이전의 리스트이다. 도대체 예수의 죽음으로 인간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어란 말인가.

 

하지만, 그런 예수가 너무나 갑자기 삼자회담후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가롯유다에게 어서 가서 자기를 고발하라고 독려하고, 순순히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형을 직접 내리고 직접 자신의 십자가 위에 쓰일 말까지 이야기 하는 모습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그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멘트에 "제단으로 끌려간 어린 양이 속았듯이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하, 275쪽) 깨닫고, 그의 피는 마귀의 검은 질그릇에 떨어져 고인다.

 

심각한 어투와 장난스러운 말투가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우리'라고 독자를 부르며 윙크하는 듯한) 교차되면서,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을 어디까지 심각하게 그 의미를 따져야 하는지, 혹은 어느정도로 웃긴 패러디로 넘겨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신성모독의 최고봉을 달리는 겁없는 문장들이 하권에 넘어가서는 나를 처음보다는 덜 놀래키기는 했지만 (이미 두번 째 장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합방신에서 거의 모든 독자들은 기함을 했을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이야기가 내심 이런 비극 중 비극으로 끝나지 않길 조금은 바랬다. (물론 책 처음 장면이 골고다 였으니 피할 수 없는 결말이지만) 이 책과 성경과의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이다: 이 "제2복음"은 "부활"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내 종교적 신념은 제쳐두고, 책 속의 예수가 너무나 안쓰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수 이후의 인간들이 조금도 더 하느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 안의 하느님이라면 인간들이 가깝게 다가서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겠지) 주제 사라마구는 역시 비극을 저 바닥 끝까지 끌어내서 일말의 희망이나 꿈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의 문장력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왜 꼭 이렇게, 사람들이 불행과 절망을 이토록 절감하도록 만드는지 원망도 스럽다.  

y********o 2009.02.10. 신고 공감 1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사라마구와 그 통렬한 상상속으로...
"사라마구와 그 통렬한 상상속으로..." 내용보기
지난 8월 25일은 니체 사망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니체는 목사였으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신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그리고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기독교 집단의 모습에 반기를 들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근저를 이루고 있는 고귀한 그의 지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비단 기독교 집단에 대한 비판과
"사라마구와 그 통렬한 상상속으로..." 내용보기
지난 8월 25일은 니체 사망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니체는 목사였으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신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그리고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기독교 집단의 모습에 반기를 들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근저를 이루고 있는 고귀한 그의 지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한다. 비단 기독교 집단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나약함, 실존에 대한 고찰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예수의 제2복음'에선 픽션의 형식을 빌려 드러내고 있는 듯 하다. 예수의 일화 중에 간통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한 한 여인을 구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를 따른 여자들 중엔 창녀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그런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에서는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육체적인 순결을 평생동안 간직한 모습으로 기록하고있다. 이 같은 그의 순결은 하나님의 육화된 모습인 예수를 절대적 순수성을 가진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의 근거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가 가진 이 같은 이중적인 잣대는 이 책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예수와 마리아의 정사신은 그 내용의 파격성에 더해서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의 4복음서는 당시의 핍박으로부터 자신의 종교에 대한 결속력 내지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예수라는 존재를 절대적인 우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같은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같은 절대화가 기독교 신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은 그와 같이 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구차한 변명을 뒷받침해 주고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암묵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의 의식 속에 자리한 이 같은 사고에 대해 저자는 예수를 지극히 인간적인 , 목수의 아들로 그려냄으로서 다시 한 번 꼬집어 내고 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는 사탄의 모습을 통해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 저자는 예수라는 인물 내에 인간적인 모습과 신의 대리자의 모습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그가 속한 유대인 문화 속에서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위기상황(로마의 지배)하에서 고뇌하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부분이다. 예수는 관용과 이해, 사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오지만 결국 인간들에 의해 처형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신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마치 예수는 절대선을 추구해온 이상주의자였으며 신은 인간에 대한 약점을 잡고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리저리 이용하는 현실주의자처럼 묘사되고 있다. 저자가 허구 속의 상상을 통해 그려내는 과거 2천년전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현실의 기독교를 통해서 느끼는 답답함이 실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인간적인 나약함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l********0 2000.08.27. 신고 공감 0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