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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아마 고등학교일 때니 30년 전에 삼성출판사의 세계명작 전집 시리즈(기획은 100권이었는데 몇년에 걸쳐 나와서 형편상 우리집은 60번까지만 샀던 것 같습니다.)에 들어 있어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곤 다시 들춰볼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재작년부터 책을 다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였을 때 처음에는 애들이 원하는 것과 아내가 말한 것을 중심으로 사기 시작했었지만 곧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을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당장 읽을 만한 것들을 해치워 나가다가, 작년 10월에 드디어 이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당시에 이 출판사 것을 선택한 이유는 읽는 김에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함께 읽고 싶어서 둘이 합본된 것을 찾았고 또 일부 논술대비용 서적이나 청소년을 상대하는 책처럼 내용의 일부만 실은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1978년에 출간되었던 것을 2007년도에 중판인쇄한 것이었습니다. 중판 때에 재편집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여러 군데에서 이름이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거나 번역 자체가 어색한 것 등이 관찰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전 등의 명작이라고 읽는 이유는 그 글 자체에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원 저서의 뛰어난 기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역이 시작되면 이미 원작자의 글이 아니라 번역가의 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문 자체도 중요한데, 이러한 실수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아쉽게 됩니다.
서사시로 알려져 있지만 읽다 보면 이것은 일종의 연극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바로는 당대의 시라는 게 지금의 1인극이나 유사한 발표처럼 진행되므로 그것을 역할분담하여 나온다면 연극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보다는 희곡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는데,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글을 읽다가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전개상 필요해서 그랬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손님이 방문했을 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종종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이유로 묻지 않았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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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독서회에서 지난 12월에 읽은 책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입니다. 모임에 즈음에서 책을 읽다보면 생각할 여유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모임에서 의논할 주제가 미리 정해지면 책을 읽을 때도 유념할 수가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이달에 토론할 <일리아스>는 두어 주 전에 미리 읽었고, 프랑스의 모험가 실뱅 테송이 쓴 <호메로스와 함께 하는 여름>과 플라톤의 <국가>에서 호메로스와 관련된 내용을 읽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1. 일리아스를 읽고 난 소감을 간단히 준비해주세요(3분 이내) 한 마디로 지루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트로이의 헥토르가 전투에 나서서 그리스의 영웅들을 죽였다거나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나서서는 트로이의 영웅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인간의 전투에 신들이 개입해서 전세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극한 조건의 모험여행가로 알려진 실뱅 테송은 역시 중학교 1학년에 들었던 호메로스 시간이 지루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짜릿한 현대성을 띤 시, 독창적이기에 영원한 황금시가, 소란과 격노로 들끓는 노래가, 풍성한 교훈과 더없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시인들이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암송하는 노래”라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찬양하는 것을 보고는 반성했습니다. 조금 더 집중해서 읽어야 했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리스 신들의 행태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왜 그리스 사람들은 신들이 정한 운명대로 살아가는지 이해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인간이 보기에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면서, 인간은 비윤리적인 짓을 하면 벌을 받아야 하고, 죄를 지은 당사자뿐 아니라 자식과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만간 우리 모임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읽어보기로 추천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를 비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추악한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과 영웅들의 본성을 나쁘게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신들끼리 서로 전쟁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싸움질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만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나 영웅들이 설사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젊고 지각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들려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적인 면을 고려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2. 일리아스가 서양문명을 대표하고,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일리아스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그리스 신화는 유럽문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시구를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호메로스의 작품을 비롯한 그리스 신화를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차낙칼레에 있는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한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도 어려서 들었던 <일리아스>의 내용을 믿었기 때문에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의 시구를 읊조리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죽은 언어라고 치부하는 라틴어 학습은 엘리트주의라는 프랑스교육당국의 정책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쟁입니다. 호메로스에 의하여 <일리아스>가 쓰여진 것이 기원전 8세기 무렵이라고 하고, 400년 전에 일어난 전쟁 때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보면 트로이 전쟁은 12세기 무렵에 일어난 사건 같습니다. 슐리만에 의하여 트로이가 터키 땅에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지금의 터키 땅도 그리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도시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을 수도 있고, 터키가 있는 아나톨리아반도가 아닌 그리스 반도 어디에 있는 트로이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일리아스>는 10여 년간 지속된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51일 동안 일어난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호메로스가 전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트로이아의 왕세자 헥토르와 아카이아의 장군 아킬레우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전쟁에서 죽을 것임을 알고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만 결국은 운명이 결정한 대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아와의 전쟁에서 죽을 운명임을 알고는 여장을 시켜서 스키로스의 리오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 숨겼습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 없이 트로이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신탁이 나오자 오디세우스를 보내서 아킬레우스를 설득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이 정한 뜻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면서 정해진 운명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트로이가 전쟁의 원인인 헬레네를 그리스에 내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결국 제우스의 뜻이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아진 인간의 숫자를 줄이기 위하여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의논하여 큰 전쟁을 일으켜 많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로 한 것입니다. 그 전쟁의 실마리조차 티탄족인 테티스와 인간인 펠레우스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이 결혼식에는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이 초대되었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 빠졌습니다. 화가 난 에리스여신은 결혼식장에 불쑥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여신(καλλ?στ?)’에게 주라면서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를 던지고 갔습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황금사과의 주인을 자처했습니다.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습니다. 세 여신은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하여 파리스에게 각각 제안을 합니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아테나는 어떠한 전쟁도 승리를 할 수 있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젊은 파리스는 부와 권력을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하고 사과가 아프로디테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파리스의 심판) 아프로디테는 약속한대로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와 인연을 맺도록 합니다.
어느 날 찾아온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뮤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에게 헬레네를 찾는데 도와 달라 청하였습니다. 아가멤논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트로이로 향하였습니다. 트로이의 입장에서는 헬레네를 돌려주면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네를 돌려주지 않은 것은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한 책임과 명예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런 설명은 호메로스의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헤로도토스가 인용한 페르시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지중해 연안국가들 사이에서는 납치혼이 흔히 일어났던가 봅니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납치한 것을 시작으로 헬라스쪽에서는 포이키네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고, 그리스 사람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 일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파리스가 헬레나를 납치하여 아내를 삼았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트로이가 스파르타의 헬레네 반환요청을 거부한 것은 당시 납치사건에 대한 사과나 배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전쟁 당시 트로이에는 헬레나가 없었다고 헤로도토스의 주장입니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하여 귀국하는 길에 이집트 땅에 들렀는데, 그곳 왕에게 헬레네를 비롯하여 보물을 빼앗기고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메넬레오스가 트로이에 사람을 보내 헬레네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없는 헬레네를 내줄 도리가 없다는 트로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보니 정말 헬레네가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헬레네를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4. <일리아스>에서 그리스 동맹군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 동맹군의 영웅 헥토르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나라의 영웅이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공통점으로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알고서도 마지막 전투를 피하려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두 영웅은 성품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아 진영에 전염병이 번져 어려운 지경에서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갈등을 빚습니다. 아킬레우스에게 전리품으로 배당되었던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가져가기로 한데 반발하여 전투에 참가를 거부합니다. 적전에서 태업을 감행한 셈입니다. 심지어는 어머니 테티스를 졸라 제우스에게 아카이아 군이 전투에서 지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트로이아와의 전투에 나섰던 같은 편 장수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도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아가멤논이 화해의 전령을 보냈지만 화해를 거절하기도 합니다.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다시 참가하게 된 것은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방패를 들고 참전했다가 헥토르에게 죽음을 당한 뒤입니다. 어머니 테티스가 헤파이토스에게 부탁하여 만든 갑옷과 방패를 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 맞대결을 펼칩니다. 결국 제우스는 헥토르의 파멸을 결정하고 아폴론으로 하여금 감싸지 못하게 하여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죽은 헥토르를 전차에 매달아 끌고다니면서 모욕을 주었습니다. 영웅을 영웅답게 대접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결국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은 몸값을 내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반면 헥토르는 참으로 훌륭한 성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동생 파리스의 한심한 행동에 분노하고, 패배를 면치 못할 트로이아의 운명을 괴로워합니다.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안고 찾아온 아내 안드로마케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면서 이별을 하고 아들을 품어주기도 합니다. 헥토르는 ’인간들 가운데 신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헥토르는 전쟁 내내 선두에서 아이오아의 장군들과 싸워 트로이아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헥토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트로이전쟁이 끝난 뒤에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의 딸 폴릭세나에게 반하여 아폴론 신전에서 혼담에 나섰습니다. 이때 트로이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파리스가 쏜 독화살이 아킬레스의 발꿈치를 맞추어 죽게 됩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낳자 불사의 몸을 만들기 위하여 스틱스 강에 아킬레우스를 담갔는데, 테티스가 붙든 발꿈치에는 강물이 닿지 않아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것입니다. 발꿈치에서 장딴지로 올라가는 단단한 인대가 바로 아킬레스건입니다.
한편 파리스는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래는 프랑스 바칼로레아 시험항목입니다. 내용이 좋아서 같이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A.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한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화를 내고 전투에 나서지 않은 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로 인해 개인의 명예가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개인의 명예가 중요한가, 동맹군의 약속이 중요한가?
B. <일리아스>속 영웅들은 신의 뜻(운명)에 좌우되어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결국 운명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
C. <일리아스> 속 신들은 ‘절대적 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인간적인 면모를 그래도 드러내는 신들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신은 어떤가? 절대적 신과 인간적인 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신다울까?
D. 트로이 전쟁은 헬레나라는 미인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다. 인류역사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은 언제나 그렇게 사소한 일일까? 전쟁이 벌어지는 원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토론해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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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독서회에서 이달에 토론할 예정인 책을 미리 읽었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에서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오던 시를 뛰어난 음유시인 호메로스가 문자로 정리해냈다고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판소리와 같이 소리하시는 분들을 통하여 구전으로 전해오던 것은 조선말에 채록하여 기록으로 보존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케네 문명 시기에서부터 영웅들에 관한 노래와 이야기들이 전해져왔다고 합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1200년 무렵에 있었던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트로이 시권(詩卷)’에 속합니다. 트로이 서사 시권에는 <퀴프리아>,<일리아스>,<아이티오피스>,<소일리아스>,<일리오스의 함락>,<노트로이(귀국담)>,<오디세이아>,<텔레고니아> 등 8가지 작품이있는데, 그 가운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만 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리아스>만을 놓고 보면 트로이 전쟁이 9년을 넘어 10년째로 넘어가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각각 24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동서문화사에서 합본으로 내놓은 <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무려 925쪽에 달하는 것을 보면 여기담긴 이야기를 구송하는데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나라의 판소리의 경우도 박동진 명창께서 춘향가를 완창하는데 8시간, 심청가는 6시간, 적벽가는 5시간, 수궁가는 4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엄청난 분량의 가사를 외워서 이야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음유시인들 나름대로 외우거나 공연의 비법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큰 틀을 외우고 상세한 내용은 임기응변으로 늘이거나 줄이기도 했던가 봅니다. 청중에 따라서 구송하는 사람에 따라서 내용이 더해지기도 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송되는 서사시를 채록해보면 내용에 차이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동서문화사 판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우리말로 옮겨진 것이지만, 서사시 본래의 특성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영화의 경우는 장면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등장인물 중심의 삽화가 끝나면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삽화가 이어지듯이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각각 24개의 삽화로 구성됩니다. 일리아스편을 보면 트로이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그리스군의 내분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충돌하면서 아킬레우스가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그리스군이 몰리는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그리스신화를 보면 신계와 인간계가 구분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뒤섞이는 상황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트로이전쟁도 파리스의 심판이 발단이 되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파리스와 눈이 맞아 트로이로 도망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우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여러 신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그리스군을 돕거나 트로이군을 돕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전장에 직접 개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들끼리는 직접 대결을 벌이지은 않는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여전히 헷갈리고 있습니다.
일리아스의 경우는 전투장면이 이어지면서 몇 사람의 영웅이 상대편 장군들을 죽이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집니다. 나중에는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아마도 구송자가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등장인물의 숫자를 늘이기도 줄이기도 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를 중심으로 한 장면이 주로 나오고 오디세우스가 귀국길에 겪는 고초는 짧게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다소 아쉬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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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전이다. 그 기운을 느끼면 단숨에 독파할 수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많이 다르다. 일리아스가 감정의 격발, 목숨을 건 싸움, 애틋한 이별, 죽음의 슬픔 등 삶의 격동적 순간을 웅장하게 묘사했다면, 오디세이아는 남편을 기다림, 여행의 간난, 괴물의 괴롭힘, 혼령들의 세계, 부당한 자에 대한 복수 등 흥미로운 이야기의 연속이다. 몇 달 전에 책을 펼쳤으나 지루하여 50쪽 정도 읽다가 말았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펼쳐니 흥미진진하였다. 책은 그대로인데 왜일까. 다시 볼 때 사전에 주요 인물을 숙지한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좋은 책을 만나 감동을 받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함을 새삼 느낀다.
일리아스는 격정적이고 굵직한 삶의 모습을 호쾌하게 그려, 읽는 이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마음을 넓어지게 하며 정신을 고양시킨다. 주인공들은 전투에서나 연회에서나 마음이 시키는대로 살며 자신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순박하고 비루함이 없다. 불멸의 신과 함께 천하를 호령한다. 전투에 패해 비탄에 빠지기도 하지만 불굴의 용기로 믿기 어려운 힘을 보이기도 한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는 충실하고 기운생동한다. 글 속의 인물, 몇 명을 적어본다. 아킬레우스,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여 칩거하고, 벗의 죽음에 복수의 광란을 펼치고, 가련한 적의 아버지에게 아량을 베푼다. 아가멤논,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하여 분란을 일으키고, 싸움에 패해 절망하고, 반성하고 고개를 숙이고,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다. 헥토르, 사랑하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투에 뛰어들고,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메넬레우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며, 수많은 적을 만나서도 벗의 시체를 지킴에 두려움이 없다. 파리스, 자신의 약함을 알고 결투를 피하려고 하다가, 용기를 내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신이 속삭이니 도망친다. 오디세이아는 재미있고 우의적인 글이다. 신비한 이야기와 현실의 이야기가 충첩된다. 뱃사람을 유혹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리, 외눈박이 거인, 행복이 넘쳐나는 섬, 저승으로 가는 영혼이 머무는 곳 등이 신비한 이야기라면, 남편이 실종된 미모의 여인에게 방자하게 구는 구혼자들, 어린 아들의 분노, 벗의 아들에 대한 진심 어린 지원, 가난한 돼지치기의 충성, 돌아온 주인의 복수 등은 현실의 이야기다. 인생에 숨어 있는 다채로운 길을 보여주며, 온간 간난을 만나더라도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지 보여준다.
이 글을 읽으며 일어난 생각이다. 삶의 아름다움이다. 호메로스는 뛰어난 묘사로 삶의 순간순간에 깃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찰나의 현장을 자연의 웅장함 속에 녹여내었다.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싸움의 현장을 수렵과 동물의 움직임을 통해 묘사하여 격동의 장면으로 화하게 했다. 자연과 인간을 세심히 관찰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묘사이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신과 다를 바가 없다. 호메로스는 신을 불사로 인간을 필멸로 그리면서도 묘하게 이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신은 우리에게 속삭이고 때로는 우리를 직접 움직이게 한다. 신의 속삭임은 인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이나 생각의 다른 이름이며, 신이 불어넣는 힘은 인간의 초월성을 표현한다. 통상의 나를 넘어서는 내가 존재함이요, 눈에 보이는 나의 한계의 무의미함하다. 삶은 영원하다. 일리아스에서 표출되는 격동의 장면들은 지금도 같은 모습이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니, 그러한 순간은 영원한 것이다. 그런 순간을 사는 우리 또한 불멸인 것이다. 인생의 가혹함에 신을 원망하는 것도, 간난의 극복에 신에게 감사하는 것도, 용기와 두려움도, 영원의 일부이다. 죽음도 영원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이 생이 다하려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 백배하기도 한다. 왜소해지려는 나에게 들려오는 동료의 일갈 또한 생명수로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불멸의 소리인 것이다. 영원의 소리인 자신의 마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인간은 獨存者가 아니고 관계 속에 있다. 호메로스는 인물을 누구의 아들, 누구의 남편, 무엇을 한 누구 등으로 묘사한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를 있게 한 인물들과 그가 행한 일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왜 이러한 수사가 붙지 않을까. 개인화되어 무리로 살고, 교감하지 않기 때문일까. 늘 옮겨다니고 매일 낯선 사람을 만나 부대끼는 뿌리 없는 삶이기 때문일까. 어제까지의 나를 잊고 새로운 나로 살고 싶음일까. 여하튼 부초 같은 인생이다. 허나, 뿌리 없는 삶이 없고, 어제의 내가 없이는 오늘의 내가 없기에, 내력을 붙여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에게 불려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고 살아야 마음이 겉돌지 않는다. 관계를 맺음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인물이든 군대든 언급의 대상이 된 모든 것을 특정하게 묘사한다. 허투로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반드시 묘사한다. 죽임을 당하는 일개 병사라 하더라도 이름만 부르는 일은 없다. 각국에서 몰려온 군대도 어떤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던 사람들의 모임인지 묘사한다. 마치 성경에서 많은 비슷한 부족을 묘사하면서도 각 종족 앞에 별 차이없어 보이는 묘사를 생략하지 않는 것과 같다. 수 많은 사람 속에서 살지만, 어떤 이와 관계를 맺는 순간 그를 묘사할 수 있을 정도의 한자락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글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동양의 시가, 굴원의 초사가 생각난다. 우국충정의 우수가 깔린 전혀 다른 글임에도 떠올랐다. 묘사의 웅장함, 신들의 등장, 자연과 함께 하는 서정 등이 비슷해서인 듯 한다.
대체적으로 충실한 번역이지만, 간간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좀 더 나은 번역이 있을까하여, 도서관에서 다른 역자의 책을 빌려보았다. 시적인 모양새를 살려 행 별로 번역한 책이었다. 몇 군데 읽어보니 별로 나은 점은 없었고, 책의 분량만 크게 늘어나 있었다. 이 책, 이상훈의 번역본을 서가에 두고 한 번씩 볼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