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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알게 된 기독교인 선생님들과 함께 발제하며 꼼꼼히 읽은 책이다. 스터디 첫 날, 책 제목에 부정적 어감을 가진 '모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신기해서 원제를 궁금해했다. 10장까지 다 읽은 지금 돌아보니 아마도 원제 "The Divine Conspiracy"는 '신(들)의 모의(공모)'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책은 삼위일체적 인격이신 하나님이 함께 모의하고 움직여서 마련한 인간 구원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기쁜 소식의 핵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인간 보통의 삶을 영원한 삶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나라이며, 내세 뿐 아니라 현세에도 이미 임재해 있다. 책 읽는 동안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좋은씨앗 5집에 수록된 ccm의 가사가 생각나곤 했다.
하나님 나라는 (좋은 씨앗-5집 더 좋은 세상)
주님이 오시는 날 영원히 완성 되는 나라(x2)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 기다렸던 그 나라 오랜 세월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메이던 땅 사자와 어린 양이 다함께 뛰어 놀 거룩한 땅 오직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기쁨 주님이 오시는 날 영원히 완성되는 나라
저자는 신앙과 삶, 내세와 현세는 동떨어져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 삶은 올바른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定置). 잘못된 방향을 갖는 것은 마치 제트기가 전복된 채로 상승을 하는 것과 같은데, 조종사는 자신이 하늘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땅으로 곤두박질 치게 된다. 현대는 관용을 최대의 미덕으로 삼지만, 그 와중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방향성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관점이다.
저자는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인간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를 믿는 자에게 오신 성령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의 산상수훈에서 생생한 비유들을 들어 그에 대한 사례들을 보여주셨다.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과 성품을 배워가는 제자도를 따름으로써 신앙과 삶을 통합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에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삶을 보여주지 못해 욕을 먹는 이유는, 소비자 교회나 그리스도인의 풍조 속에서 아무도 제자도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도는 특별히 헌신한 사람만 추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바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삼아 그 인격을 배우는 학생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지상명령하신 것처럼 다른 이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은 특별히 '현세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대에 들어 기독교는 '1. 내세에 천국에 가기 위한 도구(우파)', 혹은 '2. (인격이신 예수님과 상관 없이 혁명적인 예수님 모습을 강조하여) 사회를 개혁할 도구(좌파)' 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복음에 대해 한쪽 측면 만을 강조한 반쪽짜리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은 개인적 회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속된 공동체 속에서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성화되어가는 과정이다. 전자처럼 전통과 신학적 교리에만 집착하거나 후자처럼 삶과 체험에 매몰되는 것은 위험하고, 양자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현세의 삶에서의 인격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앞으로 올 영원한 삶을 향해 성숙해가야 한다.
현대인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인간의 삶이 고통스럽고 유한하다는 경험적 사실 때문에 여전히 영혼, 내세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러나 현대의 유물론이나 과학주의적 패러다임은 그것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므로 알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면서 현대인들로 하여금 그 문제를 외면하게 만든다. 그것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는 있는데 충족되지 않아 현대인의 삶은 공허하다. 물질적 분자만이 실체이고 마음이나 영혼은 실체가 아니라는 과학계의 주장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미래가 없다는 것은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격신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영혼과 내세의 존재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들은 현재의 삶을 살 때에도 현세와 미래의 연관성 때문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과학의 법칙으로 뭔가가 설명되려면 그전에 “최초의 상태”가 있어야 한다. 법칙이 나오게 된 출발점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과학의 법칙은 그 최초의 상태의 존재와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먼저 그것이 없이는 어떤 것도 설명될 수 없다. 많은 재미있고 중요한 것들이 과학으로 설명될지 모르나 존재는 설명될 수 없다. 과학의 법칙이 자연의 법칙인 이유도 과학은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학은 과학 자체도 설명하지 못한다.”(573쪽)
“인간의 삶이나 인간 세상은 미래가 존재함으로 지탱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본질적으로 의미가 수반된다. 우리에게 의미란 사치품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삶을 가능케 하는 영적 산소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초월하여” 그것을 완성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현 사건들의 의미는 대체로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서 무엇이든 “미래가 없는” 것은 의미 또한 없다.”(576-577쪽)
특별히 선생님들과 함께 읽다보니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를 믿고 그분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며 그분의 성품과 삶의 태도를 배운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들은 그 인격에서 아가페 사랑을 배워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성품과 인격을 가진 인간은 매사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유한한 인간이 정말 현세에서 그것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싶다고 결단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그러한 목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시고(하나님 나라가 임한 모습), 고침 받은 당사자들과 그것을 실제로 본 자들에게 바로 팔복을 말씀하셨다. 그들에게는 팔복의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임재했다는 것이 절절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평소 사람들이 친숙해하는 것을 사례로 들어 구체적인 비유를 하시거나,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통념이 잘못 되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시는 방법을 사용하시기도 했다.
팔복 다음에 이어지는 산상수훈에서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보여주셨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평소에는 토막난 것으로 접해왔던 말씀들이 연결되어 있고 맥락과 순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놓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기도문을 비롯해 그 말씀들은 인간이 분노와 멸시를 버리고, (타인과 하나님께) 강요가 아닌 구하는 삶을 살며 사랑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원 기간 동안 선생님들과 "완전한 진리",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하나님의 모략"을 읽어왔다. 기독교 세계관을 큰 틀에서, 현대 세태와 비교하면서, 개별적인 나의 현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참 좋았는데, 항상 한 책을 끝내고 나면 '알게 되어서 기쁜데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남는다. 올해의 말씀으로 '옳은 것을 알고 행하라'는 말씀을 받았는데, 비판하고 회의하기 때문에 더욱 움직이려 하지 않는 내게 실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매 순간 결단하고 도전하는 모습도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불어 이 책에서 맛을 본 팔복과 산상수훈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졌다. IVP에서 나온 책은 참 알차고 좋은데 혼자 읽기엔 버거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다음 학기에 가까이 계신 분들과 또 좋은 책을 선택해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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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만 읽어도 무수한 밑줄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언어가 가슴 벅차다. 소문에 듣던 대로다, 아니 그 이상이다. 10여 년 전 지인이 언급했던 책이지만 분량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얼마 전 다른 지인과의 대화 속에 또다시 등장해서 오랫동안 책장에 대기 중이던 이 책을 마침내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금 아니면, 삶에 조금은 더 진지해질 수 있는 지금이 지나버리면, 영영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중력을 많이 요하는 책이라 한 번에 많은 분량을 읽지 못했지만 첫 페이지를 시작한 이상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책이었다. 때로는 공감하고, 위로받고, 때로는 새롭게 깨달으며 (너무) 천천히 읽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은 것은 지난 여름이지만 내가 소화한 분량이 너무 적어 감상을 남기는 것을 자꾸 미루게 되었다. 아주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듯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온 세상이 나를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수많은 상황과, 관계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모략 때문이다. 그 확신 속에서 오늘도 나는 천국을 누린다. 내게 일어난 어떤 일도 그분의 실수가 아니라, 계획과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현재가 소중하다. 내 병까지도 껴안을 수 있다.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 리스트가 자꾸 늘어나지만 다 낫기 전에 한 번 아니, 두 번 세 번 더 읽고 싶다. 우리 삶의 로켓은 이미 발사대를 벗어났다. 행동이란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장차 영원히 우리가 될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p. 41). 예수가 중요한 것은 그분이 하루 하루 주변 환경에 대응하며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셨고 지금도 가져다주시는 그 무엇 때문이다. 그분은 그들의 삶에 온전함을 약속하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지심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우리의 동반자가 되심으로 영원한 질의 삶을 나누어 주신다(p. 45). 하나님의 능동적 통치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행위는 그분의 영원한 역사의 한 요소가 된다. 우리의 행위 속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삶의 일부가 되고 그분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p. 66). 신약의 본문들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받아들이고” 나중에 즐거워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 들어가는 곳임을 명확히 보여준다(마 5:20, 18:3, 요 3:3, 5)(p. 67). 이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현재 통치에 관한 한, “이미 여기”와 함께 “아직”의 부분이 분명 남아 있다(p. 69).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 영혼의 “내면의 성”에는 많은 방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장할 시간과 공간을 주시며 그 방들을 서서히 점령해 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략의 결정적 측면이다(p.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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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로는 내가 접한 두 번째 책. 다른 리뷰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같은 저자의 책을 동시에 여러 권을 읽었더니, 읽는 책마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크게 보아, 성경에서 던져주는 메시지를 현재의 개념에 잘 맞추어 설명하였다. 다만, 저자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것이 많이 지루하다. 번역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내 독서 스타일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른 책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윌리엄 폴의 소설 <오두막> (원문: the Shack)을 역시 같이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어쩌면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책들에서 하고 싶은 주제를 윌리엄 폴이 읽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이 말이 혼란스러운 독자가 있다면, 윌리엄 폴 대신, C.S. 루이스를 대입해도 별로 행간의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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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중에 걸작이다. 책이 600page가 넘고 두껍다. 그리고 다루고 있는 주제도 광범위하다.
하나의 주제로 소급되거나 환원되는 느낌이 아니라 각 챕터가 고유의 가치를 지니며 알아서 뛰어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책을 더 꼼꼼하게 독해한다면 하나의 분명한 주제로 달려가는 글들을 목격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에서 감탄이 나오고, 주목하게 된다.
이 책에서 느꼈던 감동을 조금이나마 전달해 주기 위해 추천사를 몇 개 인용해 보겠다.
"사실 나는 [하나님의 모략]을 디트리히 본회퍼, 존 웨슬리, 장 칼뱅, 마르틴 루터, 아빌라의 테레사, 빙겐의 힐데가르트, 나아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귀한 저작과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싶다. 만일 주님의 재림이 늪어진다면 이 책은 다음 밀레니엄으 ㄹ위한 책이다." - 리처드 포스터-
"나는 여태껏 성경 외에 [하나님의 모략] 만한 책을 만나 보지 못했다. 주님 앞에 겸손히 부복하여, 그분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의 나라를 살아내도록 간절한 열망을 품게 한, 내 평생의 책 가운데 하나다." -고 옥한흠 목사-
"캠퍼스 선교단체 대표로서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하나님의 모략]을 추천한다. 이 책은 우리의 신앙관과 제자도, 인생의 목적에 대해 성경적 원리와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김중안 한국 IVF 대표-
"이 책은 다른 경건서적들처럼 잔망치로 톡톡 치는 정도가 아니라,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준다. 오늘날 피상적인 '소비자 기독교'에 익숙해 있는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더불어 묵상하며 읽어야 할 지침서이다." -신국원 교수-
추천사만 봐도 이 책의 진가가 드러나는 신기한 책이다.
사실, 버릴 만한 요소가 거의 없어서 이 책 전체를 이곳에 실어 놓고 싶다.
하지만 지면에 한계가 있으니 간단히 몇 가지 지침만 제시하겠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3장: 현대 문화의 모습을 진단하고, 오늘날의 기독교와 교회가 처해 있는 여러 현상과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을 보여준다.
3~7장: 산상수훈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핵심 가르침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8~10장: 예수 학교의 제자들이 도제가 되어 변화받는 길을 제시한다.
기억에 남기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몇 가지만 나누겠다.
[1]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한 그의 고뇌
"용서받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영생의 선물이 그 정도로 그친단 말인가?
"우리는 완전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용서만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용서받은 자라는 것은 명백히 밝혀야 할 내용이다. 용서의 조건이 완전함에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히 알려야 한다. 그러나 이 슬로건의 의미가 과연 거기에 있을까?"
"우리는 정말 테레사 수녀로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내면이란 누구나 다 동일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인간의 진정한 욕망은 다 똑같은데 그중에 누구는 의지가 굳거나 '재수가 좋아' 거기에 빠지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정작 성품과 영성을 좌우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옳을까? 예수가 우리의 '현실 생활'에는 사실상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치밀한 고뇌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우익의 개인에 치우친 복음과 좌익의 사회 정의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좌익의 복음을 소개하면서 양 극단의 한계를 간파해 내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두복음의 관심은 죄책이나 구조악(사회적 죄) 및 그 해결에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들의 실제 삶이 복음 없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양 극단에 서서 신앙활동을 하는 이들은 정말 '진리'를 말하지만, 예수님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아간다.
[2] 팔복에 대한 설명
"팔복은 복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팔복은 우리 쪽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거나 인간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제시해 주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여덟 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팔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팔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팔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 기존의 팔복에 대한 서술과 상당히 다른데,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은혜가 넘친다.
"팔복은 영적 거인들의 목록이 아니다. 종종 이들 '복 있는' 자들로부터 남다른 품위와 영광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광채다."
-> [하나님의 열심]에서 느꼈던 하나님만이 드러나는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3]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 정도가 아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그분은 '가진'자, 하나님 편에 '있는'자, '복 있는' 자를 외적 조건을 보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하나님 나라와 크고 작은 인간의 나라는 오직 그 마음 속에서만 하나로 맞물릴 수 있다. 마음대로 문화적, 사회적 반경을 그어보라. 하나님은 반드시 뚫고 나갈 길을 찾아내실 것이다. "사람읁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4] 율법과 영혼
"예수는 인간 영혼의 구조를 정확히 아시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 자체에 중점을 두시지 않고 행동의 근원을 주로 다루신다. 따라서 그분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율법을 궁극적 답으로 삼으시는 백해무익한 일을 피하신다. 사람들은 한사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인간 실존의 문제는 잘못된 행동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분은 잘 아셨다. 그것은 증상일 뿐이다. 물론 그 자체로도 적지 않은 악을 유발할 때도 많이 있다.
행동의 근원을 살피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의 골자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5:20), 즉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인간적으로 꾸며내는 종교 인사들을 능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율법이 말할수 없이 선하고 소중한 것이며, 그 안에 사는 삶이 영원한 삶이라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율법은 의의 근원은 아니나 영원히 의의 경로다"
"율법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밖에 없는 사람,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잔을 안은 닦지 않고 겉만 닦기는 쉽지만 안을 깨끗이 닦으면서 겉만 더럽게 놓아두기는 어렵다. 안을 닦으면 자연히 그 과정에서 겉도 깨끗해지게 마련이다. 손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미세할 뿐이다."
-> 참 '행함'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고, '믿음과 행함'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멋지게 서술하고 있다.
[5] 분노 (진보가 외치는 거룩한 정의로서의 분노를 포함)
"오늘날 영향력을 쥔 자들은, 우리는 반드시 분노해야 하며 사회악에 항거하려면 분노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이런 개념은 우리의 사고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언젠가 나는 가정 문제로 어느 그리스도인 부부를 상담하면서 아이를 홧김에 훈육하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들은 놀라며 물었다. "감정 없이 벌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자신들의 분노에 자기 의가 섞여 있다는 것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느 유명한 사회 인사는 절망과 분노야말로 정의를 위한 싸움의 필수 요소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결국 섣부른 말한 마디에 몇 배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사실, 시민 상호 간의 분노와 원한으로 갈수록 병들어가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이미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게다가 분노와 원한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옹호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분노로 되는 일도 없고 분노가 없어 악화되는 일도 없다. 오히려 분노에 깔려 있는 자기 의가, 상대의 분노와 자기 의만 더욱 유발시킬 뿐이다. 물론 가정이든 국가이든 잘못된 일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당연히 분노가 쌓여 결국 행동으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밖에서는 심지어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해답은 분노를 품는 것이 아니라 인내의 사랑으로 잘못 바로잡는 것, 더 이상 실제 혹은 가상의 잘못을 더하지 않으면서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반면, 분노를 품고 키우는 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것이다 (엡 4:26~27). 마귀는 그 틈을 살릴 것이고 그 대가는 지옥이 될 것이다. 의지적 분노에 매번 담겨 있는 한 조각 달콤한 자기 의는, 상대방의 자기 의의 반응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몰고 온다. 그리고 분노가 지배하는 한, 그 악순환은 끝이 없다."
-> 진보의 행보를 일견 지지하면서도 가장 우려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와 같이 그의 저서는 훌륭한 통찰력의 보고와 같다.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지만 나머지는 이 책을 직접 읽으며 얻어가면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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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09.07.02 02:55
"내가 평생 찾던 책이다" 누군가의 평대로, 만약 한 줄 서평을 쓰라고 한다면 의심없이 저렇게 말할 수 있다. 요즘 이런 위대한 책들과 매일매일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2만원에 이르는 책값도 전혀 아깝지 않고, 600 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많다는 생각이 들기는 커녕, 읽어나가는 동안 남아있는 분량이 줄어들어감에 안타까워했었던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준 책이다.
사실, 책을 읽기 전 그것과는 별개로 최근에 들었던 이런저런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상반기동안 요한형과 제자훈련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품었던 의문들, 문득문득 나 혼자만의 생각,논리라 느껴졌던 여러 가설들과 주장들. 매일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는 그 수많은 side적인 생각들.
대체 2000년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자들이 늘었으면 늘었을진대, 왜 경제, 문화, 과학, 예술 그 모든 분야는 2천년 전보다 이토록 놀랍게 발전을 이루었는데, 유독 윤리와 도덕, 인간의 양심과 선악의 가치에 대한 부분은 전혀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세상에 크리스찬 인구가 가톨릭 다 합쳐도 족히 30%는 넘을텐데, 어째서 사랑의 종교가 세상에서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않고 세상은 더 악해져만 가는가. 설마 전체의 선의 총합이 늘어난 만큼 악도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어이없는 반론을 펼칠텐가.
대체 크리스찬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나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내 생활이 거룩한 성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과는 또 어떤 관계인가. 우리 대부분은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기특하게도 구원의 확신은 있되 삶은 별개로 엉망진창인 크리스찬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기독교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어때야 하는가.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적극적으로 투쟁하며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는 해방신학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더 집중하도록 하는 영성의 공동체여야 하는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더 많은 부담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예수님의 수많은 도덕률들, 왼쪽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까지 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 하시는 성인군자들이나 겨우 지킬 수 있을까하는 그런 말씀들이 과연 내 삶속에서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행해질 수 있을 것인지. 만약 그렇게 자연스럽게 행해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양심과 도덕이 나한테는 왜그렇게 고매해보이고, 교과서에나 나올법하고, 나와는 동떨어지도록 느꼈는지. 대체 예수님의 의도가 뭐였기에 내가 이토록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그동안 씨름했던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비슷하게나마, 답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는 힌트라도 얻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
사실, 내가 책에 줄을 잘 안치는 스타일인데, 이 책에는 도저히 눈으로만 읽고 넘기기 아까워서 줄을 치기 시작하니 한 page가 멀다하고 연필 범벅이 되더라. 책을 읽다 가슴이 마구 벅차올라 나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르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가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그냥 이제 정말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수십번도 더하기도 하고, 부흥회 온 것 마냥 가슴이 마구 뜨거워지고 열정이 충만해지기도 했다.
저자의 집필 능력, 탁월한 비유와 예증, 명징한 논리에도 감탄했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모략", 우리를 위한 놀라운 "비밀"스런 계획들, 그 아주 작은 한 부분의 그림자에도 우리를 향한 "선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예정이 엿보임에 더 크게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김회권 교수님의 추천으로 선택한 하나님의 모략. 정말 최고의 책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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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라는 제목이 참 매력적입니다. 하나님의 음모? 하나님은 과연 어떤 음모를 가지고 계실까 궁금해집니다. 머리말에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는 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희망대로 이 책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놀랍게 풀어놨습니다. 오역과 잘못된 해석으로 왜곡된 메시지들이 제대로 펼쳐질 때 얼마나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줍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 특히 팔복을 이렇게 현대버젼으로 바꾸었습니다.
외모가 눈에 거슬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양호합니다. 더 심각한 자들의 리스트도 있습니다.
"하늘이 치유할 수 없는 땅의 슬픔은 없다" 이것이 천국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통해 강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현재,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저자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말합니다. 우리 안이라고 하는 것은 늘상 변주되는 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공간을 이야기합니다.
창문을 열어봅니다. 그리고 바람을 느낍니다. 크게 호흡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바람과 공기, 그리고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하나님 나라. 심호흡과 함께 그 나라를 느껴봅니다. 매일 이렇게 그 나라를 누리는 삶, 그런 사람들을 저자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나는 그 분을 더이상 믿지 않는다. 그냥 뵈올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많이 공감했습니다. 어떤 교육과정들은 그 방법론이 내적인 변화보다는 외적인 행동에 맞추어져 있는데 그러다보면 오히려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행위를 안했다는 것이 정죄감을 주기도하며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훈련의 무효성이 아닌 하나님 방식으로의 훈련 제시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순종의 태도가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책은 다루는 영역이 방대하며 또한 실제적입니다.철학과 윤리, 결혼과 이혼,성적인 문제, 분노와 정죄, 기도의 방법 등, 성경을 통해 우리의 실제 생활들을 어떻게 다룰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책 전체를 통해 흐르는 저자의 태도는 예리하고 분석적이지만 따뜻합니다.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슬로건으로 독자를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뭔가 해야한다는 부담감도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강렬합니다. 선한 모략으로 세워진 나라. 그 나라를 보며 하나님의 거룩한 실존을 보게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의 한 자락을 만지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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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작 죽을 때 “천당 가게” 하는 것뿐인가?
사회 투쟁의 제목과 선거니 운동이니 하는 것들의 조직 방법을 알게 하는 것뿐인가? 죽어서 모든 것이 자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도 좋지만, 살아있는 시간을 위한 기쁜 소식은 과연 없는 것인가?
1. 요약 。。。。。。。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는 구원과 천국에 관해 크게 오해되고 있는 두 가지 견해 - 구원이란 개인 영혼에 해당하는 것뿐이라는 주장과 구원이란 정치, 사회, 경제 등의 분야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소위 ‘사회복음’을 주장하는 계열 -가 있다. 이런 두 가지 입장 모두 기독교 복음의 ‘총체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매우 제한되고 단편적인 시각이다. 한편은 구원과 신자의 삶을 완전히 분리시켰고, 또 다른 한편은 구원과 사회계량을 동일시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가를 차근차근 설명한다.(1-2장) 책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지를 설명한다.(3장) 특별히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팔복(4장)과 산상수훈(5-6장)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7-9장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자세인 ‘제자도’에 관한 설명으로, 단지 추상적인 목표의 제시만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방법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10장)은 ‘만물의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의 전 영역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2. 감상평 。。。。。。。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책이었다.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설명과 강조이다. 사실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천국을 단지 죽은 후에만 가는 ‘먼 나라’ 쯤으로 생각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이나,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 쯤으로 생각하는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이 책은 매우 적절한 균형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근거한 팔복과 산상수훈에 대한 해석은 매우 신선했다. 이런 접근방식에 관해 이미 배운 적이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 관해 잘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가 어느 순간부터 사회 전반에 시작되면서, 이미 우리 사회는 삶의 기준이나 준거의 틀을 상실해버렸다.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반율주의(反律主義)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다. 쉽게 말해 ‘누구나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권장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전에는 금지되고 꺼려지던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이럴 경우 사회는 급격히 무질서해지고 힘의 원리만 통하는 곳으로 변하게 된다. 돈 많고, 권력과 가깝고, 그래서 지배적 의견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용서를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역차별과 그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 써야 하는 사회 말이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그대로 젖어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상황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마도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그들의 삶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력증을 치료해 줄 매우 유효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인내심을 갖고 책을 읽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