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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속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을 점차 잊어갈 수 있었고, 또 이것이 그에게는 자기 혐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
제 2부 3편에 나오는 화자의 이 설명은 주인공 프레데릭의 청춘 전반을 압축해내는 문장이라 생각된다. 그는 청춘의 시간 대부분을 주변 환경에 휘말리며 혹은 휘둘리며 충분한 유산과 재능, 착한 성품을 소진시켜간다. 그의 의지로 결정해 열렬히 추구하는 것은 아르누 부인과의 사랑뿐이다. 이것을 제외하면 프렉데릭은 의지박약에 우유부단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강해져야할 순간마다 나약해지고, 타인에 의해 이용당하는지 제대로 의식도 못한 채, 혹은 의식해도 무기력한 일상만 되풀이하는 인물을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만났다면, 이런 비슷한 행동을 절대 하면 안되겠다는 교훈을 일깨워준 인물로만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정교육 L'Education Sentimentale 이라는 작품의 제목 때문이어선지는 몰라도,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로 결정하였을 때, 독서를 통해 교훈적인 무언가를 얻게 되리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관능과 열정을 주체못해 결국 파멸하고 마는 보봐리 부인을 어느 바람난 유부녀의 비가로만 여기지않게 했던 것처럼, 감정교육 역시 나약하고 어리석은 프레데릭을 통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청춘의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함께 연민하고 공감할 수 밖에 없도록 하였다.
플로베르는 작품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프레데릭을 교훈적 타산지석이 아닌, 모든 청춘운용의 실패자들에게 거울로서 제시한다. 프레데릭을 비난하며 답답한 녀석이라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혐오가 되도록 말이다. 프레데릭은 사랑에 눈이 멀어 어느 것도 옳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고, 상황에 휘둘려가며 정작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다. 분열되고 어지러운 사회를 걱정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막연히 고민하지만, 언제나 두려움과 의지부족으로 걱정만 할뿐 변화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먼 나라 먼 옛날 사람이야말로, 어리석은 내 청춘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독서를 해가는 내내, '프레데릭, 이 못난 자식아.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헤맬거냐?' 라는 질문이 일어나는 빈도가 하나의 장을 넘어 한 페이지, 종국엔 한 문단과 문장마다 일어났다. 그러나 넘겨지는 책장 수가 늘어날수록 그 질문은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문학을 읽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자기혐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소설 속 타인에게 몰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 속 타인의 모습으로 자아를 덮어두려 하기엔, 이 작품은 자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주어 종국엔 자신이 얼마나 프레데릭의 모습과 닮았는지, 비슷하게 혹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지를 일깨워준다.
발표 초기에 이어지던 혹평에 맞서, 플로베르는 이 작품에 대해 스스로 "이것은 연애의 책, 정열의 책이다. 정열이라 해도 당시 존재하듯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정열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주제를 깊이 파고 들어, 그 때문에 흥미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라 말하였다. 플로베르가 밝힌대로 이 작품의 주제는 프레데릭의 유일한 순수의지였던 사랑이 라기보다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정열', 즉 소모적인 감정일 것이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다른 작품들과 아울러 집필하며 아주 오랜 시간을 공들여 완성해내었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집념과 수고가 무색할 정도로, 부질없이 소모해가는 감정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한 청춘의 지리멸렬한 일대기는 읽는 내내 소설적 재미는 커녕 수없이 인내를 시험하는 듯 하였다. 당시의 혹평 중의 하나도 "이게 소설인가" 라고 직접 언급할 정도였다. 나 역시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한 개인의 모든 일상과 감정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상담하여 취재한 기록물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분명 문학소설임에도 문장들이 감성에 호소하기 보다는, 정보를 나열한 듯하여 르뽀를 읽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거의 모든 문장들과 인물들의 대화는 작가가 추구하려 했다는 그 주제 한가지를 위해서 나열되므로 아기자기한 문학적/극적 재미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와닿는 감성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 책을 읽으려 한다면 낭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책을 다 읽어갈 무렵이면, 그 낭패야말로 이 책이 주는 진정한 매력이자 작가의 진심임을 깨달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낸 많은 사람들이 낭패가 문득 매력이 되는 그 반전의 순간을 맞이 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을 위해 필생의 정력을 기울여낸 플로베르의 수고가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등장인물들의 일상과 감정의 묘사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플로베르는 그 일상과 감정의 밑바탕에 당시의 사회적/역사적인 배경을 촘촘히 깔아두었다. 소설 속의 배경이 되던 시대는 1800년대 중반, 아직 왕이 집정을 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프랑스라는 커다란 사회를 이루는 각 사회적 개별구조들이 어느때보다 첨예하게 대립을 하였었다. 구제도와 신흥세력, 파리와 지방, 귀족과 신흥 브루주아, 농민과 프롤레티리아, 더 나아가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 권력과 사상과 부의 쟁취를 둘러싼 구조들의 대립 속에 혼란스러운 2월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구제도가 붕괴하고, 신흥세력이 도래하는 이 초기 자본주의사회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개별인물들의 일상이나 감정의 모습을 더욱 설득력 있게 묘사해주는 배경 그 자체일 뿐이다. 개인의 '감정'이라는 주제에 충실하려했다는 작가의 의도대로, 사회역사적 배경은 그들의 무기력함, 이기적인 감정들과,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빈 일상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난후 책속 밑줄은 인물의 심리묘사와 관련된 부분보다는 대부분 사회역사적 배경과 관련된 부분에 더 많이 그어져 있었다. 아마도 내게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 소설 속의 무력하고 이기적인 인물들과 그들의 삶보다 더 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것이고, 19세기 유럽의 혼란스러운 과도기 사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사는 한국사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공감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사랑에 불타는 감정하나 빼고는 무기력 그 자체인 주인공의 모습에 질려 갈 무렵, 세월이 훌쩍 흘러 프레데릭도 어느덧 중년이 되고 말았다. 혼자 지내는 평화로운 어느 저녁무렵, 과거에 그를 애타게 했던 옛사랑 - 아르누 부인이 문득 그를 찾아와, 그가 그녀에게 여자로서의 마지막행복이었다고 말하고 떠난다. 그는 그제서야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짐한다. 절교했던 옛친구 데로리에도 찾아와 이렇게 저렇게 멀어진 지인들의 소식을 주고받으며 담소한다. 그와 데로리에는 모두 그때가 제일 좋았다라고 회상하며 소설이 끝난다. 소모적인 감정은 청춘을 탕진하게 하였지만, 세월은 그 어리석고 못나보이던 청춘을 축복한다. 추억은 퇴색하고 정열은 식어도, 지나간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 의미를 남긴다. 그 의미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 감정이 가르쳐주는 혹독하지만 값진 교육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이츠의 시처럼, 어쩌면 늙었을 때야 비로소.
그대 늙었을 때 When you are old - W.B. 예이츠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잠이 많을 때 난로가에 앉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다정하고 우아했던 시절을 사랑했고
그리고 빛나는 창살가에 고개 수그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