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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한국미술관 시리즈'를 접할 때마다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쉽게 접하기 어렵거나, 아이들이 억지로 읽어야 하는 학습서의 느낌으로만 됐거나, 관심 많은 사람들이나 접할 수 있는 딱딱한 전문서로만 접할 수 있는 책을 이처럼 아름답고, 쉽고, 진지하게 다루어주는 책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비로소 우리 옛것의 아름다움이 사무쳐오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이나 반갑고 고맙다. 이 책 <삶과 꿈, 자연에 담다>를 읽는 동안은 TV에서 우리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는 걸 보고도 감회가 새로웠다. 재삼 확인한 것이지만 건축은 그야말로 사람살이를 100퍼센트 반영한다. 전쟁시기에는 전쟁을 반영하고, 살기 어려우면 그것이 반영되고, 태평성대에는 또 그것이 반영된다. 그런 의미로 우리 옛 건축에서 보이는 자연친화적 느낌과 절묘한 과학성은 그야말로 뿌듯함으로 다가온다. 우리 선조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순한 삶을 사셨으며, 그러면서도 현명하셨을까 하는. 얼마 전 전라도 여행을 다녀오면서 소쇄원에 들렀고, 그 얼마 전에는 아이들 손잡고 수원화성을 보러간 일이 있었다. 소쇄원에서는 그야말로 유교적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곧은 선비의 정신이 느껴졌고, 수원화성에서는 정조 임금의 웅지와 꿈, 효성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었다. 그렇듯이 건축은 삶과 정신의 구현이구나 하는 강한 느낌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안타까움도 있다. 우리 정신생활의 축을 이루어온 불교 건축물들, 사찰과 탑 등이 대부분 소실되었거나, 다시 지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9층 목탑의 높이가 81미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황룡사 추정 복원도'를 보며, 또 삼국시대의 절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는 미륵사의 추정복원도를 보면 누구라도 안타깝지 않을까. 그러나 불국토를 세우겠다는 삼국시대 사람들의 마음은 빈 터에 긴 여운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여기며 마음을 달랜다. 밑줄을 그어가며 찬찬히 읽었으나 많은 정보가 머리에 스며들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쌓인 정보가 너무 부족한 탓일 것이다. 틈나면, 자주 들추어 보리라 다짐한다. 윤중고택에 대한 글 중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책의 많은 느낌을 약하나마 소개한다.
우리의 집은 처마가 깊어 여름철에는 햇빛이 집 안으로 비치지 않으므로 시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겨울에는 햇빛이 집 안 깊숙이 들어옵니다. 집 스스로 실내의 환경을 조절할 수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깊은 처마로 직사광선이 비치지 않음에도 집의 내부는 매우 밝습니다. 마당을 비워 놓아 마당에서 반사된 빛이 집안 청장과 벽에 비치고, 천장과 벽을 밝은 색으로 마감하였기에 충분히 반사가 되어 집안 곳곳에 은은하고 고른 빛을 비춰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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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은 살아갈 공간이 필요하다. 식물들처럼 자연 그 자체에 뿌리를 딛고 살아가는 종들도 있고, 동물들처럼 자연을 활용해 살아가는 종들도 있다. 가장 지능이 발달한 동물인 사람들은 자연을 활용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한다. 즉,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물리적인 힘을 가해 이용을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특히 건축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도시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보다 편리한 삶을 위해 많은 건축물들을 만들었다. 살아가기 위한 집에서부터, 대중 모임을 위한 곳, 종교의식을 행할 수 있는 곳, 운동경기를 할 수 있는 곳, 공부를 할 수 있는 곳, 도로, 교량 등을.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용의 대상이 된 자연은 훼손 및 파괴라는 처우를 겪었다. 이는 사람들을 위한 결정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연을 위한, 자연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결정은 절대 아니다.
백과사전을 보면 건축은 그 목적성에 적합해야 하며, 적절한 재료를 바탕으로 가장 합리적으로 안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구절이 나와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건축의 본질은 쾌적하고도 안전한 생활의 영위를 위한 기술적인 전개와 함께, 실용적인 대상이 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을 위한 목적성에만 적합할 뿐, 그 어느 부분에서도 ‘자연’을 위한 합리성 및 안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사람만을 위한 합리와 쾌적, 안전인 셈이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은 모든 생물이 발을 딛고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사람들도 그동안 자연에 발을 딛고, 활용하고 이용도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따라서 앞으로는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생할 수 있는 건축이 필요하다. 자연이 없으면 모든 생물 자체가 생존할 수 없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건축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에 대한 답을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과 옛 조상들의 생활 모습 속에서 찾고 싶다.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루소는 이성과 도덕이라는 틀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통해, 내면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가치를 찾으라는 뜻을 전해준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과 하나 된 삶의 모습을 추구해 나갈수록 행복과 가치를 찾기 쉽다는 의미인 셈이다. 평생을 은둔자의 신세로 살아온 루소도 말년에는 농원으로 이사해 살았고, 숨을 거둔 뒤에는 농원 근처의 평화로운 호숫가에 묻혔다고 하니, 결국 그도 자신의 말을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로 우리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 조상들은 거의 모든 건축의 재료를 자연에서 얻었다. 즉 흙, 돌, 짚, 나무 등을 건축 재료로 사용했는데, 이것들은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에도 알맞은 것들이다. 따라서 건강에도 무척 좋은 재료들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목재를 얻기 위해 나무를 자르는 등의 훼손을 하기는 했지만, 지어진 후에도, 건축물이 무너진 후에도 자연에게 해가 되지 않는 재료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곧 사람이 편하게 살기 위해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자연을 지켜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논제를 놓고 각각의 입장을 내세운다면, 필자는 후자를, 그들은 반대로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고층 빌딩이며, 많은 건축물들을 짓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근원적인 면을 먼저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결국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보다 건강하면서도 행복한 방향이 어느 쪽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도시 전체를 초가집이나 황토집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아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지금처럼 콘크리트로만 지어져 자연을 해치는 회색 건축물들 대신, 자연과 함께 숨 술 쉬 있는, 소통할 수 있는 건축물들을 이루어 나가자는 것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에게 참살이가 관심이라고 한다. 참살이는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문화를 통칭하는 말인데, 현대 사회처럼 바쁘기 때문에 ‘행복’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나아가 진정한 행복과 건강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사회적인 경향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서 난 재료로 지은 황토집 등에 관심을 갖고, 아예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제야 자연의 중요성을, 자연과 함께 숨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는 사방이 콘크리트 건축물로 둘러싸인 오피스텔에 살고 있지만, 필자도 어린 시절에는 시골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초가집이었고, 이후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꾼 그런 집에서 말이다. 그 때는 가끔 천장에서 쥐가 지나가기도 하고, 집 벌레라고 하는 것들이 많이 나와서 싫기만 했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그 때의 삶이 건강에 있어서는 최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생각인데, 아쉽게도 그 때 그 집은 우리 가족이 서울로 떠나온 이후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어르신들께서 사람의 기운이 없는 집은 쉽게 무너진다는 말씀을 하시던데, 정말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역시 사람과 자연, 사람과 건축물이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건축은 분명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에는 육체적인 편리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행복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연은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도 자연이어야 하고, 건축물도 자연이어야 한다. 즉, 사람과 자연, 사람과 건축, 자연과 건축이 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 자연, 건축 모두가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계승되어온 바로 이런 삶과 꿈, 자연과 함께 한 우리 건축이 담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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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역사를 주제로 잡아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물론 현재진행형이긴 하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무작정 가서 휘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책을 읽고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보았던 책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그것을 읽고 갔던 곳은 바로 수덕사였다. 거기서 수수하고 단아한 맞배지붕의 대웅전을 보고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저 조금 알고 있을 뿐 더 나아가질 못하는 것이다. 하긴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땅한 책을 찾을 수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이 책을 만났다. 내 손에 들어온 순간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 봤다. 처음부터 무작정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잡아준다. 당연하다. 알고 보는 것과 무작정 보는 것은 천양지차니까. '미리 알고 보면 좋은 용어들'을 찬찬히 보고 넘기면 이제부터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사실 건축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초익공식 짜임의 구조와 명칭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공포라는 단어와 도리, 대들보가 전부였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감상하는데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건물을 보며 단순히 건물의 외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조금 넘기다보면 황룡사 9층 목탑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탑 사진이 있다. 보는 순간 뭔가 다르다라는 느낌을 받고 설명을 보니 역시나... 일본의 목탑과 중국의 목탑을 비교해 놓은 사진이었다. 우리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 나는 탑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이것저것 보고 돌아다녔더니 이제 조금은 눈이 뜨였나보다. 뭐, 아직 멀었지만 말이다.
책을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가본 곳은 다시 한번 감격하며 보고 안 가본 곳은 언제 한번 가보리라 다짐하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이런... 그런데 간혹 여기에 소개된 지역 주변을 갔을 때 안내를 받아보거나 추천을 받지 못한 곳이 있다. 알지 못하면 결코 보이지 않는 곳일까. 일례로 강릉을 그렇게나 많이 다녔어도 강릉향교를 알지 못했다. 아마 이정표에 있었어도 들어오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또 책을 넘기다 빼어난 경치에 눈을 떼지 못하는 누각이 있기에 어딘가 봤더니 삼척이란다. 거기도 여러번 갔던 곳인데... 이러니 아무리 돌아다녀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알지 못하면 보이지도 않는 것을.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너무 아까운 책이라 들고 다니기조차 조심스럽지만 책이란 모셔 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