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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가까이 두어 본 사람들은 아리라. 모순적이게도 그 찢어질 듯한 슬픔과 아픔을 통해 더욱 따뜻한 기쁨과 위안을 얻을 수 있음을. 또한 기쁨을 가까이 두어 본 사람들은 아리라. 그 행복과 충만함 속에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이 더욱 슬프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사진을 덜 찍게 된다. 흘러가는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내 육신의 흔적들을 작은 프레임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아서인지, '찰칵' 소리에 맞춰 인위적인 자세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은 여전히 어색한 일이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작업으로 어쩌면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것이 싫어서인지…. 사실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이유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인간의 삶 자체가 슬픈 일이라고. 그런데 왜 그동안에는 슬픔에도 따뜻함이 있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을까, 나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따뜻한 슬픔'. 표지를 장식하는 사진 속의 두 사람은 마치 '내 짝꿍 최영대'의 주인공 영대의 뒷모습을 닮아서, 그 빛깔은 어둠을 닮아서 자연스레 슬픔이 묻어났다. 그런데 그와 대비되는 흰색 궁서체의 '따뜻함'이라는 글자가 두 사람의 정적을 깨는 듯 싶다. 비록 슬퍼 보이지만 슬프게 바라보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따뜻한 구석이 있는 슬픔이라고 강변하는 것 같다. 어서 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표지 그림은 한동안 나를 붙들어 둔다. 저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더 주라는 듯이. 그래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어떻게 하면 그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 물었다. 내 알량한 관심이라는 온기를 더한 셈이다.
내게도 이처럼 따뜻한 슬픔이 필요한 때가 종종 있다. 누군가의 온기가 몸 전체로 전해졌으면 싶은 그런 날이, 내가 슬프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서 그 슬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함이. 하지만 내 슬픔은 그 울음이 이미 '반가움'과 '기쁨'의 상징으로 굳어 버린 까치의 그것처럼 달리 해석된다. 저이에게는 슬픔이 없다는 말로.
하지만 이제는 내게도 따뜻함을 나누어 줄 한 권이 책이 더 늘었다. 그동안 내 온 몸과 마음을 보듬어 준 책에 '따뜻한 슬픔'이라는 제목의 책을 추가했으니 말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슬픔을 치유하는 유일한 힘은 슬픔이다. 그리고 책이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슬픔'이라는 제목의 시를 옮겨 본다. 누군가에게 역시 위로가 될 수도 있는 이 시를!
따뜻한 슬픔
따뜻한 슬픔.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 그 알량한 온기로 서로 기대고 부빌 때, 슬픔도 따뜻해진다.
차가운, 아니다, 이 형용사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 따뜻한 슬픔의 반대편에서 서성이는 슬픔이 있다. 그 슬픔에 어떤 형용사를 붙여주어야 하는가. 시린 슬픔? 아니다, 여전히 부족하다.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한다.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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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아저씨의 글을 참 좋아한다. (시인이나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왠지 편안하게 아저씨라고 부르고 싶은 분..^^;) 글 속에서 따뜻한 마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이번 책은 사진과 시가 서로 감싸안은 책이다.
한장한장 느리게 넘기면서 시와 사진을 곱씹어본다. 쓸쓸한 풍경들이 마음을 머물러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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