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님의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1986 ~ 1989)"편에서 이미 장정일씨의 이런 행위를 지적한 부분이 있기에 여기에 적습니다. 1987년 3월27일 읽기에 " 그가 섹스 과잉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아마 성공하는 순간에 무너지기 쉬울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김현님은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같다는 예지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평론가로 이름 석자를 남길 수있겠지만, 또한, 김현님은 미완성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것 같습니다. 그가 이인성,박인홍이 그것을 뛰어넘듯이, 그것을 뚸어 넘어 역사와 삶의 깊이를 이루 수 있을까? |
| 고등학교 시절,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는 때. 동네 서점에 둘러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평소에 무관심하던 시집 코너에 나도 모르게 서있게 되었다. 잠시 후, 내 손에 들린 시집은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었다. 장정일이란 문제아적인 인간도 알고 있었고, 이 시집 이름도 알고 있었지만, 그 알맹이를 직접 맛본 적은 없었다. 그 알맹이의 맛은, 신선!했다. 그리고 나서 몇 년 후, 지금. 나는 급히 훑어보고 급한 감동을 속이 체한 듯 받은, 그 시집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천천히, 즐기면서, 처음부터 해설부분까지 전부 맛보았다. 예전의 그ㅡ신선한ㅡ맛이 아니었다. 물론 장정일의 시들이 바뀐 것은 아니다. 나란 불량독자가 바뀐 것이다. 이 시집을 서점에서 빠르게 훑어 보았을 때 받았던 작은 충격 같은 감동을 느끼게 했던 시들(<햄버거에 대한="" 명상="">, <아파트 묘지=""> 등)은 오히려 감동에서 멀어져 있었다. 오히려 그 이외의 시들에게서 약간의 운율을 느끼게 하는 시들을 발견했을 뿐.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단서를 발견했다. “시란 노래인 것이다.” 이 시집을 처음 봤을 때는, 기발한 발상이 담긴, 그래서 너무도 신선한 시들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 봤을 때 그 발상은 이제 반은 죽어버린 것이 돼버렸던 것이다. “낯설은 것”이 시라고 할 때, 이 시들은 좋은 시임에 틀림없지만, “노래”가 시라고 할 때 이 시들이 (일반 독자, 즉 시를 읊조릴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좋은 시라고 남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인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노래를 접하게 될 때 낯선 노랫말들과 가락에 의해 신선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계속 듣게 된다면 그 노래의 신선함은 어느 정도 퇴색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노래는 자꾸 들어도 그 새로움이 지겹지 않고 오히려 귀에 익어질수록 좋아지는 노래가 좋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음악성이다. 시에도 발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성이 있는 것이다. 좋은 운율감은 곧, 중독성이고, 그 중독성은 좋은 시의 가장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 비교해보자. 이 시는 두 번째 읽었을 때 가장 뛰어난 시라고 생각했던 것.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어쨌든, 지금껏 읽은 시집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입니다.사철나무>아파트>햄버거에> |
|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
이 책은 고등학교때 헌책방에서 찾은 보물 중 하나다. 당시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 중 하나였고, 더 오래 전에는 출간이 금지되기도 했던 한 시대의 어두운 모습을 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장정일, 그 이름만 불러도 울렁거린다.
지하인간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 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이네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 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16p <지하인간>
내 열아홉 살과 스물 두 살을 장식했던 작품이다.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죽고 싶은 순간마다 꺼내 읽었고, 생각했고, 위로받았다. 무엇보다 멋지지 않으면 참을 수 없고, 아름답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허세 없이는 살 수 없는 내 찌질한 인생에 가장 '멋진 위로'를 해준 시인이기도 하다.
나는 올 때보다 천천히 걷는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 24p <석유를 사러> 본문 중에서
'가난'은 낭만으로 무장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붙잡을 것은 낭만 밖에 없다고 또 생각한다. 장정일은 가난을 이토록 아름답고 끈질기게 표현하는 시인이었다. 이 시를 다시 읽으니 겨울이 기다려진다.
'도망가서 살고 싶다'
나는 어떤 물고기가 되어야 여기서 도망 칠 수 있을까?
사랑이여 나는 그만 아득해질 것이다 충남 당진 여자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 62p <충남 당진 여자> 본문 중에서
시가 위대한 것은 별 것 아닌 지명까지 아름답게 읽히기 때문이고 시인이 위대한 것은 첫사랑의 추억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여 나는 그만 아득해질 것이다'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하여도 명상하련다
- 137p <햄버거에 대한 명상> 본문 중에서
옛날에 나는 꿈이나 사랑에 대해 명상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랑이나 아름다움에 대해 명상한다. 꿈은 어디로 갔나, 더듬더듬 이 시를 읽으며 다시 그 빈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으, 역시 시를 읽으면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아진다. 가슴이 너무 뜨겁다.
모든 청춘은 가난한가 보다. 어제 친구들을 만나고 왔는데, 하나 같이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무섭고 두렵다. 늘 사랑 때문에, 연애 때문에, 일 때문에, 돈 때문에 쓸쓸해지고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분명 내일이 더 무섭지만 오늘보다는 더 아름다울 테니까.
2012년 9월 15일 다 읽음 :D
|
|
장정일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중졸에서 수업을 마치고 독학으로 공부를 한 것도 그렇거니와 꽤 잘 나가는 시인에서 소설가로 전업을 한다거나(그의 고백에 의하면 시인이라는 타이틀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창시절 시인이면서 그 타이틀만으로 우리나라에서 살아 갈 수 있는 전업작가는 신경림과 고은 뿐이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 전업 후에는 소설을 내놓는 족족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그러하고... 여하튼 장정일은 천편일률적인 고등교육의 어설픈 세례를 피함으로써 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서울의 주류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훨씬 자유로운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이러한 엄격함과 자유로움이 시이소오 같은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다. 실은 삼사년 전인가 대구에 칩거 중이라는 장정일씨를 만나러 가려 한 적이 있었다. 그와 친분이 있다는 한 친구가 무료하여 죽겠다는 내게 동행을 요구했던 것... 하지만 당시 재판을 막 끝내고 난 참이었던 장정일이 만남을 회피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만약 그때 그를 만났더라면 좀더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서 한 마디 덧붙인 것...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가인 장정일보다는 시인인 장정일을 훨씬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소설도 빼놓지 않고 읽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웬걸 이번 일을 빌미로 책장을 열심히 뒤져보았으나 그의 시집은 민음사에서 나온 『햄버거에 대한 명상』한 권 뿐이다, 나는 분명 그의 시집을 빼놓지 않고 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나 독서일기를 콜렉터라도 되는 것처럼 어렵사리 구하여 구색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어이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애석함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내 사랑했던 이들의 책장 어느 한 켠에는 내가 사랑했던 장정일의(나로부터 사라져간) 시집들이 꽂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그러니까 나에게는 술 마시고 기분이 업 되면 좋아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구 나누어주었던 호기롭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이 시집에서 눈독을 들인 작품은 모두 네 개인데, 「지하인간」, 「샴푸의 요정」, 「물 속의 집」, 「낙인」이다. 지하인간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그 중에서도 아마 가장 날 잡아 끈 것은(이십대에 막 접어든 당시의 나를) 「지하인간」이었던 듯하다. 태어나 첫 외박을 했던 스물, 태어나 처음 필름이 끊겼던 스물, 태어나 처음 장정일의 시를 읽으며 개안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했던 스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정일의 놀라움은 그가 도통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시어들을 사용한다는 사실이었고, 엄혹했던 80년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그는 시집을 통해 자본주의와 그 총아로서의 미국, 미국의 총아로서의 다국적 브랜드들, 그리고 자본주의 유일의 예술이라고 불리운 대중문화의 꽃인 CF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엄단한다는 사실이었다. 낙인 티 브이를 켜니 서부극인 모양이다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카우보이가 밧줄 올가미를 휘휘 휘둘러 마구 뛰어달리던 야생마를 낚아채뜨린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뜨거운 부젓가락을 버둥대는 말엉덩이에 사정없이 눌러찍는다 양키들은 잔인하구나! 채널을 다른 방송으로 돌리자 광고가 흐르는데 말같이 튀어나온 한국 아가씨의 엉덩이에 리바이스 청바지 상표가 빨갛게 눌러찍힌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물론 그 자체로 의미있는 고전시와 근현대시들을 싣고는 있지만 다양성을 담보하지 문제였던) 국어책 속의 시들로부터 헤엄쳐 나와 첫 번째로 당도한 해변에서 만난 장정일은 그렇게 신통하기 짝이없는 자신만의 시로 날 인공 호흡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들이마신 그의 호흡은 아직까지도(잦은 마찰음이 섞인 프로필에도 불구하고 다시 떠들어보아도 고개 주억거리게 되는 많은 시들이라니) 날 지탱해주는 밑바닥의 거친 숨이 되어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ps1. 하지만 장정일의 시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인용했던 것은 이 시집이 아닌 다른 시집에 실렸던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은 여교사」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료 교사 중에 나를 무척 사랑했던 총각 선생님이 계셨지요.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구요. 어쩌면 우린 잘 될 수 있었고, 그가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린 부부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글쎄 그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다짜고짜 나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즈음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그가 사랑한다고 한 순간, 대체 그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어요. 그는 누구에게 대고 사랑을 고백한 것일까요?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뻔뻔스런 낯짝을 갈겨 주었지요. 라는 시였다. ps2. 좀더 필요하다면 members.tripod.lycos.co.kr/knurebirth 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와 관련한 정보들을 더 얻을 수 있을 듯하다. 그의 프로필과 출판물들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그러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러해야 할 것 같아(^^;;) 그만두고 사이트 소개로 대체하는 것... 생각하니 약았다, 이 게으름이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