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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발 쇼크로 스타 작가와 거대 출판사에 집중된 문단 권력의 타락상이 민낯을 드러나면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논란이 된 작가가 사과를 하고 관행처럼 어물쩍 넘어가려던 출판사도 뒤늦게 사태 수습에 나서는 모양새지만 실망과 분노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문단 안팎에서 한국 문학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신경숙 논쟁의 핵심에는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내는 것이 과연 좋은 문학인가' 하는 물음이 자리하고 있다"며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표절이라는 현상의 심연에 놓인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비루한 세상에선 아름다운 언어는 언제나 거짓의 언어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경숙의 미문주의는 '표절'의 유혹자일 뿐만 아니라, '진실'의 적대자일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신경숙 논란에서 다시 드러난 한국문학의 위기는 미문주의의 위기이다. 문학이 현실의 심연을 도발의 언어로 천착하지 못하고, 단지 그 표면을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할 때, 문학은 이 성형의 시대에 감성의 화장술로 타락한다. (<문제는 표절이 아니다>, 김누리, 한겨레 6월 28일자)
'표절이냐, 아니냐'에서 '문학의 사명이란 무엇인가'로 생각의 틀이 바뀌는 순간, 비로소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만한 독자들이 개입할 공간이 생긴다. 문학 작품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작가의 '사유물'에서 '창조적 독법'으로 읽고 해석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공유물'로 재탄생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사명에 대한 숙고, 그것은 작가의 몫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문예는 결코 혼자 비약할 수 없다
나는 '신경숙 사태'를 보면서 루쉰을 떠올렸다. 예전에 읽었던 <루쉰전>(왕스징 지음/신영복,유세종 옮김)을 다시 펼쳤다. 군데군데 밑줄 그어 놓은 부분들에서 이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아주 절박한 시기이다. 작가는 해로운 사물에 대해 즉각 반응하거나 항의하고 투쟁하는, 느낌과 반응의 신경, 공격과 방어의 수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편 대작에 마음을 두고 앞으로 세워야 할 문화를 설계하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현재를 위해 항쟁하는 것 역시 현재와 미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현재를 잃는다면 미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개정 잡문, 414쪽)
루쉰은 신해혁명 실패로부터 내전, 국공합작과 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 바쳐 살았던 인물이다. '벗들이 죽어감을 차마 볼 수 없노니 칼 든 놈들 향해 분노하며 시를 짓는다'고 했던 그는 사상가, 혁명가이기 이전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현실주의 문학의 대가이다.
루쉰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경멸했다. 문학이 지금 처한 현실에 발딛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도피의 길'로 빠지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문예와 혁명>이라는 잡문에서 "사회가 정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문예는 결코 혼자 비약할 수 없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무명시인 윤동주가 그러했듯이, 격동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루쉰 또한 문학의 사명에 대해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윤동주가 일제의 부역자로 전락한 문단에 환멸을 느끼고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다면, 루쉰은 문학을 '혁명의 무기'로 삼아 현실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진보를 위한 싸움은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민중이 억압받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투쟁하지 않겠는가? 문학예술은 곧 이것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문학예술을 단지 투쟁의 표어나 구호로 전락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루쉰은 "모든 꽃이 다 빛깔을 지니고 있지만, 빛깔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꽃이라고 할 수는 없다"(344쪽)는 비유를 들어 "모든 선전이 결코 다 문학예술인 것은 아니다. 혁명이 문학예술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이 문학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루쉰은 '병적인 사회'에서 불행하는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글감을 구했다. 문학이란 마땅히 인생을 위해 힘써야 하고, 또 인생을 개량하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국 현대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자 세계 문학사에서도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아큐정전>은 이 믿음이 창조해낸 걸작이다. 루쉰은 신해혁명 실패 후 군벌과 관료, 지주들로부터 수탈당하는 농민들에게 비분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고통스러워했다. 비록 아큐를 위해 '정전'을 쓰는 것처럼 했지만, 진정 그가 그리고자 한 것은 '침묵하는 국민의 영혼'이었으며 자신의 눈으로 본 낡은 중국인의 삶이었다.
'무쇠 방'에 갇혔어도 한 줄기 희망을 위해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소설 '고향' 중에서, 173쪽)
문학의 힘으로 절망에 빠진 중국의 혼과 희망을 일깨우고자 했던 루쉰은 창작에 혼신의 힘을 바쳤다. 1907년부터 1936년까지의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 잡문 16권(650편)을 남겼고 번역해 소개한 작품들도 중장편소설 9권, 단편소설 78권, 희곡이 2권, 문예이론 저서 8권, 단편논문 50편에 이른다.
"가령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그런 방 말이야. 만일 그 안에 많은 살마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면, 얼마 안가서 수밍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러나 잠을 자다가 죽은 것이니까 죽어가는 고통을 느낄수는 없을 걸세. 그런데 자네가 크게 소리쳐서 잠이 덜 든 몇 사람을 깨워놓는다면, 그 불행한 몇몇은 임종의 쓰라린 고통을 피할 수 업을 터인데, 그러고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쉰은 "먹으로 쓰인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을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오늘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문학의 진정성, 그것이야말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는 문학이 품어야 할 유일한 정체성이 아닐까.
'먹으로 쓰인 거짓말'이 횡행하던 중국 문단에 대해 날카로운 붓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루쉰은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고 했다. 이러한 루쉰의 생애에 대해 <루쉰전>을 번역한 신영복 선생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쉰에게 양심은 인간을 '더부살이'로 이해하는 것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흙과 더불어 살고 이웃과 더불어 살고 조국과 민중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루쉰이 지켜낸 양심의 내용이었다. 루쉰이 이룬 초인같은 업적도 이 양심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으며, 루쉰의 문학적 천재성도 이 양심의 승화였으며, 불굴의 전투성도 이러한 양심의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심은 이처럼 루쉰의 모든 고뇌와 달성의 원천이었다. (옮긴이의 말, 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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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스징(王士菁) 저, 신영복/유세종 역 <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를 읽고 / 2007. 09., 471쪽, 다섯수레
그렇게 다소 부풀려진 평가를 제외하더라도 루쉰의 삶은 전세계 위대한 혁명가나 사상가에 못지 않은 것 같다. 한국 현대사로 보면 함석헌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절망 같은 어둠 속에서도 늘 '희망'을 꿈꾸고 애기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루쉰은 중국 인민들이 이뤄낸 최초의 혁명인 신해혁명(1911~2년)이 고스란히 위안스카이 군벌정부에 넘어갔을 때, 좌절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무쇠로 지은 방’에 대해 말한다. ‘무쇠로 지은 방 안에서 잠을 자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굳이 깨워서 고통 속에 죽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혁명의 열매를 군벌의 손에 가볍게 넘겨준 민중들에 대한 절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루쉰은 결코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켜나간다. 앞날의 희망을 위해 루쉰은 자신의 무기, 붓을 들기로 결심하고,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루쉰은 낡은 예법과 도덕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어 ‘사람을 잡아먹는’ 봉건사회의 추악한 전통을 고발하면서, 민중들에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5·4운동의 대오에 적극 동참하기를 호소한다. 그 자신도 어둠 속에서 전투의 빛을 발하는 비수 같은 ‘잡문’들을 통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신문화운동에 참가한다.
당시에 소설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은 나에게도 깊이 기억된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루쉰이 잡문에 발표한 글 중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혁명이나 대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문장을 집단주의, 당위주의 문화가 강한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이나 진보진영, 시민사회운동 단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희생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권리도 없다. (중략) 희생을 선택하는 이 문제는 개인에 관련된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도둑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도둑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루쉰을 "평생을 전선의 앞이 아닌 뒤에서 하지만 전선의 맨 앞에서 전진하는 전사처럼 살다갔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루쉰에게 긴장을 풀어주는 벗은 ‘청년들’이었다. 루쉰이 수많은 잡문을 통해 연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들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와 닿는 한 단어는 ‘희망’이다. 루쉰은 그 희망을 청년들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희망이자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새겨놓았다. "아이가 밥을 헛되이 땅에 버렸다고 해서 농부가 그것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쉰의 잡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 (루쉰의 시 <자조(自嘲)>에서) 왕스징은 청년들에 대한 루쉰의 헌신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샤먼에서, 광저우에서 상하이에서, 베이징에서 루쉰이 청년들과 나눈 우애는 나이를 초월한 헌신적 만남이었다. 특히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루쉰이 살던 베이징 집은 당시 문학을 좋아하는 청년들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본래 가로등 하나 없이 적막하고 쓸쓸하던 골목이었는데, 루쉰이 이사 온 뒤로 날이 갈수록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 루쉰은 손수 남포등을 들고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 루쉰은 ‘호랑이 꼬리’라고 부르는 서재에서 현대평론파를 향해 날카로운 잡문을 쓰거나 청년들을 접대했는데, 몇 시간씩 계속되는 대화에도 청년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청년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것은 루쉰이 평생 동안 하고자 한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이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으면 루쉰은 그들에게 무슨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긴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왕스징은 초기에 진화론에 입각해 청년들을 바라보던 루쉰의 의식이 1927년에 광저우에서 벌어진 ‘피의 유희’로 인해 서서히 변화해간다고 설명한다. "다 같은 청년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투서로 밀고하고 관원을 도와 사람을 체포하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치열한 계급투쟁이 루쉰의 머릿속에 있던 소박한 진화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리하여 1927년 이후, 루쉰은 변화된 현실과 혁명 세력의 구국운동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진화론자로부터 혁명적 계급론자로 완만하게 옮겨갔다고...
전해진 기록에 따르면, 루쉰은 평생에 걸쳐 청년들 500여 명을 친히 접대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2,200여 명의 청년들이 보내온 편지를 손수 읽어보고 3,500여 통의 답장을 썼다. 소설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의 합계가 약 35만 글자에 이르고, 잡문 16권이 650편에 135만 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이외에 중국 고전문학 작품 연구저작, 외국 작품 번역, 희곡 2권, 문예이론서 9권, 단편 논문 50편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구체적인 작품의 권 수와 글자 수까지 따지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루쉰이 평생에 걸쳐 청년 5백 명을 만나 이야기하고 2천2백 명의 청년과 편지를 교류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 수치와 작품의 양이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과 중국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후 중국 현대 문학계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이 없다.
따라서 나는 저자 왕스징이 중국 현대문학과 혁명운동에 대한 루쉰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부풀리기 위해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에는 문학작품들과 더불어 논적의 심장부를 향하는 비수와도 같은 잡문들이 등장한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면, 1925년에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이 계속 확대되고 전국 각지에서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제국주의자들은 총칼로 시위에 나선 군중들을 쓰러뜨렸으며 제국주의와 봉건군벌 편에 선 부르주아 문인들은 그들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이때 루쉰은 몹시 격분해 그들을 규탄한다.
"상하이의 영국 경찰이 시민들을 학살하는데도, 중국의 총을 가진 계급 중에 이를 항의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거의 없다. ……감히 말하건대 중국 사람 가운데 다른 나라 사람보다 더 음흉한 눈길로 성실한 청년들을 노려보는 자들이 있다. ……중국을 좋게 만들려면 다른 일도 해야 할 것이다!"
베이징여사대의 치열한 투쟁이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마침내 학생들의 승리로 끝나자, ‘온화’하고 ‘공정’한 얼굴로 교육 당국이 이미 패배한 마당에 ‘물에 빠진 개를 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문인들이 있었다. 루쉰은 이에 대해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릴’ 것을 완강하게 주장했다.
"혁명당에도 온통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는데, ……우리더러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고 그것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오도록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놈들은 기어 올라왔고, 민국 2년 하반기까지 숨어 있다가 2차 혁명시기에 갑자기 뛰어나와 위안스카이를 도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날로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 때문에 그 뒤 각성한 청년들이 암흑에 반항하기 위해 더 많은 기력과 생명을 허비하게 되었다."
1924년 2차 내전 뒤에 우위를 차지한 돤치루이 군벌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펑위샹의 국민군을 공격하면서 통치기반을 유지하고자 한다. 1926년 3월 18일 제국주의에 무력하게 대처하는 행정부에 맨손으로 청원하러 간 군중과 청년 학생들에게 돤치루이는 사격을 명령한다. 순식간에 국무원 문 앞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 자리에서 4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국 이래 가장 캄캄한’ 이 날에 루쉰은 더없는 분노를 느끼며 붓을 들었다.
"범과 이리가 중국을 제멋대로 뜯어먹어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상관하는 사람은 몇몇 나이 어린 학생들뿐이다. 만약 당국자들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끝내 그들을 학살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진 일은 한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건의 시작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어버리지 못한다. 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 빚이란 오래 미룰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 2013년 3월 5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