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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는 진정한 천재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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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해 읽으면서 느낀 소감은, 우선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한국 번역문화의 후진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위대한 철학자들의 유명한 원전조차, 외국어에 능한 소수의 지적엘리티즘에 파묻혀, 일반에게 소개되어 있지 않은 현실은 참으로, 새로운 세기 지식민주화를 생각할때 안타깝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몇몇 뜻있는 분들의 과감한 시도가 더욱 귀하게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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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해 읽으면서 느낀 소감은, 우선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한국 번역문화의 후진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위대한 철학자들의 유명한 원전조차, 외국어에 능한 소수의 지적엘리티즘에 파묻혀, 일반에게 소개되어 있지 않은 현실은 참으로, 새로운 세기 지식민주화를 생각할때 안타깝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몇몇 뜻있는 분들의 과감한 시도가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얼마전에 나온 이 작은 책은 그 중 하나로서, 일본인들이 데칸쇼-즉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라고 부르는 서양 삼대 철학적 거성의 한 사람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간단한 입문서이다. 쇼펜하우어를 읽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비범한 철학자는 입문서나 연구서 등의 2차저작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직 그의 생생한 숨결이 담긴 원전을 통해서만 그 탁월한 통찰력과 천재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원전이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실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한국독자들은 그나마 찾을 수 있는 2차저작들에서 쇼펜하우어의 껍대기나마 맛보고 위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있다. 2차저작이란 불완전한 것이어서 읽는 이들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오해를 주는 일도 많이 있는데 그 예로는 쇼펜하우어가 비관주의자였다느니(사실 염세주의자나 리얼리스트로 번역되어야 한다), 자살을 권장했다느니 하는, 전혀 원전에 근거하지 않은 각종 거짓 루머들이다. 쇼펜하우어는 주저에서 분명히 자살이란 그가 말하는 해탈의 방법인 의지의 부정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의지를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강조하고 있거니와 많은 한국사람들이 잘못된 2차진술때문에 쇼펜하우어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이 말만 듣고 '감정적'으로 거부하는 염세주의는 불교나 기독교 등 고등종교라면 거의 가지고 있는 사상으로(불교-인생은 "고통의 바다" 기독교-이 세상은 "죄악으로 물든 세상, 유배지") 그러한 고등종교의 철학적, 과학적 해설격인 쇼펜하우어 철학이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종교가 초월적인 세계를 가정하여 해결책을 마련했다면, 철저히 칸트적인 합리성에 충실한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자기 철학에 종교성을 부여하지 않고, 과학적 철학자로서 자기가 보는 삶에 대해 솔직하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저서에는 수많은 고통에 대한 합리적 해결방안에 대한 모색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이 그를 니체나 톨스토이, 프루스트, 토마스만 등 수많은 예술가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주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는 영국이나 미국 실용주의 철학자들에게 인기있는 철학자로 만들었다. 특히 외국에서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영향을 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프로이트 사상을 예견한 천재로서 이름이 높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이 입문서를 권한다. 한가지 이 입문서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은 너무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과 책에서 종종 발견되는 오역이다. 쇼펜하우어의 본래 의도대로라면 "행복은 소극적이고 불행은 적극적이다" 다시말해 '행복의 감정은 나에게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소극적으로 다가오고 느껴지는데, 불행이란 감정은 나의 평온을 깨뜨리며 적극성을 가지고 격하게 다가와 충격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문장을 많은 번역자들이 "행복은 부정적이고 불행은 긍정적이다"라고 잘못 번역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일철학자 가운데 가장 명료한 문장을 구사한 사람으로 일찌기 문호 괴테가 극찬한바 있거니와 이렇게 애매한 문장은 오직 번역문에서만 발견된다. 참으로 번역의 어려움을 실감케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내에서 가장 훌륭한 쇼펜하우어 번역으로는 최민홍 선생의 <쇼펜하우어 인생론="">(집문당)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대중을 위한 말년저작 <수필과 이삭줍기="">의 일부편역이 있다. 많은 이후 번역자들이 이 번역을 참고했으면 싶다. 많은 철학자들이 학자로서 같은 학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난해한 저작을 남겼는가 하면 쇼펜하우어는 학자만이 아닌 모든 진리를 희구하고 고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저작을 남겼다. 그래서 다른 철학서만큼 읽기에 난해하지 않다. 그것이 극도로 난해한 저작을 해설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철학교수들의 구미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준은 그 난해한 저작들보다 높다. 그리고 이 책이 서양사람이 쓴 책인지 동양철학자가 쓴 책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말투가 동양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우리에게 거리감없이 다가온다.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삶의 고뇌에 의해 철학을 시작하게 되고 진리와 예술을 통해 구원의 길을 발견한다. 그 방법은 요컨데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세상이라는 큰 책을 읽는 일이다. 그래서 나의 철학은 현실적이다. 나는 뜬구름 잡는 소릴 제일 싫어한다. 특히 헤겔이나 셸링, 피히테같은 사기꾼들의 공 허한 언어, 텅빈개념을 제일 싫어한다. 그 말들은 건강한 뇌수를 파괴하고 한 사람에게서 건전 한 상식을 빼았아 백치로 만들 뿐이다. (--- 본문 중에서)
t*****k 2002.08.30.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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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다 쉽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다 쉽게!" 내용보기
쇼펜하우어의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쉬운 책은 아니다. 무척 흥미롭고 독창적이며 체계적인 이 책을 이해하는데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쉽게 읽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쇼펜하우어 관련 책은 수십권에 이르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쇼펜하우어의 독창적인 사상에 대한 해설이나 그의 여성편력, 독설, 또 쉽게 쓴 소품집들이다. 그 외에 유일한 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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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쉬운 책은 아니다. 무척 흥미롭고 독창적이며 체계적인 이 책을 이해하는데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 쉽게 읽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쇼펜하우어 관련 책은 수십권에 이르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쇼펜하우어의 독창적인 사상에 대한 해설이나 그의 여성편력, 독설, 또 쉽게 쓴 소품집들이다. 그 외에 유일한 쇼펜하우어 저서라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뿐이다. 이 책을 쉽게 이해하는데 필요한 책으로서 적합한 것으로 '쉽게 읽는 쇼펜하우어'는 적합하리라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쇼펜하우어 관련 책을 한 두어권은 읽어본 사람에게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t******l 2002.08.2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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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意志의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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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관심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지 않다. 그의 질문은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에 있다. 그에게 고통은 자아의 필연적 조건이다. 삶을 意志하는 한 고통은 따른다. 죽음의 길을 향한 이 처절한 여행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자아의 의지를 거부하는데 있다. 힌두적 사고방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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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관심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지 않다. 그의 질문은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에 있다. 그에게 고통은 자아의 필연적 조건이다. 삶을 意志하는 한 고통은 따른다. 죽음의 길을 향한 이 처절한 여행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자아의 의지를 거부하는데 있다. 힌두적 사고방식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힌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바가바트기타]에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난다. 아르주나의 존재론적 질문[크리슈나여, 도대체 삶이 무엇이길래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에 대한 대답으로 크리슈나는 [신과 일체가 되어 윤회의 쳇바퀴에서 탈출하기위해, 고통과 유혹의 시험대인 삶을 책임과 선행, 무위와 수행으로 살다 죽는] 길을 제시한다. 그 방법으로 아루주나에게 제시되는 것이 카르마 팔라 탸가(행위의 열매 포기)이다. 프라크리티(질료세상)의 삿트바 구나(고요한 氣), 라자스 구나(활동적 氣), 타마스 구나(어두운 氣)가 만들어내는 마야(환영)에 현혹 되지 말고 푸루샤(신성)를 좇아 아트만(참자아)에 이르러 브라흐만과 합일하여 머무르라고 한다. 이 책의 3,4권은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반향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충실히 서양 철학의 틀안에서 설명해낸다. 책의 순서는 칸트의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의 순서를 의식한 서술이기도 하다. 고통의 원인을 설명키 위한 근거율적 이해는, 결국 칸트적 틀위에 이성이 아닌 생명에너지인 의지를 관념적 일자로 하는 세계의 설명방식에 있다. 질문이 동일한 만큼 해답 또한 우파니샤드적 체계를 따라간다. 붓다의 질문이 바로 고통의 이유였고, [바가바드기타]의 아르주나가 크리슈나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 쇼펜하우어의 질문이 동일했듯, 대답 또한 닮아간다. 그래서, 3권에서의 플라톤의 재등장은 생뚱 맞아보이지만 당연한 귀결이다. 칸트[판단력 비판]의 대응으로 첨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의지가 어떻게 우리에게 인지되는지 여기에서 다리를 놓는다. 사물 배후의 의지의 발현은 힌두의 신이거나 혹은 가상적 이념처럼 표상으로 존재하되 개체의 표상이 아닌 [이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적이라는데서 이 체계가 힌두적이기보다 불교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 이념의 표현으로서 예술은 가치를 갖는다고 그는 말한다. 의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거다. 그리고 이렇게 인식된 의지앞에 두가지 길이 존재한다. 의지의 긍정과 부정. 긍정은 도덕에 의해서만 제어되는 삶의 모습이다. 구원은 부정에 있다. 고통을 벗기 위해 자기의지를 부인하는 자는 자기 안에 있는 세계를 부정하며, 현상인 세계가 사라지면 보편적 형식인 시간,공간,인과성 그리고 근거율인 주체와 객체도 사라져 버린다. 고통의 근원인 개별자의 죽음이다. 그는 평정의 상태에 들어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괴멸되었다. 자기의지의 부인, 과연 두통으로 인해 머리를 잘라버리는 행위인가 아니면 진정한 구원의 길인데 인간에겐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인가?
s***y 2005.03.16.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