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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평론이라고 하면 좀 불편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 몇 해 전부터 문학권력 운운하면서 불안하고 수상한 말들이 오가더니, 공공연히 중견 평론가의 평론집에 서로를 비방하는 느낌의 글들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뭐, 사실이야 어떻든 그런 것에는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는 독자로서 그리 난감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항시 가장 근본적인 자세로 들고 나오는 것은, 독자를 위하고, 작가를 올바르게 견인하겠다는 것 아닌가. 과연 그들이 얼마나 올바른 길을 가고 있기에, 독자를 운운하고 작가를 이끈단 말인가. 섭섭하고 우울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와중에, 황도경씨의 평론집을 읽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데, <문체로 읽는="" 소설="">이다. 문제론은 그리 만만한 방법론이 아니다. 작품을 꼼꼼히 읽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어 자체에 대한 지식도 그리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하긴, 평론집을 살펴보면 문체론을 본격적으로 들고 나서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황도경씨는 과감하게 문체를 앞으로 내어 걸고 평론을 쓴다. 문체는 다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이제는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어 있지만, 플로베르의 말처럼 영혼과 육체가 따로 있을 수 없듯, 문학에 있어 내용과 형식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 한쪽에 기울거나 치중하는 경우가 우리의 문학의 기억에는 오래된 일로 남아있다. "어떻게 쓰느냐?"는 "무엇을 쓰느냐?"와 늘 함께 있으며,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존립케 한다. 그는 이 사실을 두고 소설이란 결국 "말로 빚은 항아리"이며, 문체연구란 그 항아리의 표면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항아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울림에 대한 연구라고 이야기한다.
황도경씨는 이 평론집에서 윤대녕, 신경숙, 오정희, 박완서 등 우리 시대의 대표작에서, 이상, 김동인, 박태원 등에까지 폭넓은 연구의 범위를 보여준다. 매우 오랜 시간의 지난한 연구였을 것이 분명하다. 문체론이라는 것 자체가 작품에 대한 극히 면밀한 연구자세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을, 그의 진지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독자에게는 결코 쉽게만 다가올 수 없는 평론집이면서도, 읽으면서도 쉽게 지치지 않게 하는 배려가 느껴진다. 여러모로 그는 매우 치밀한 연구자임에 틀림없다. 그의 이 평론집은 단지 한 명의 평론가의 성과 발표를 넘어서, 우리 문학 연구 풍토의 한 획이 될 것으로 믿는다.문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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