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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구조는 다중적이다. 다만 정치적 참여와 동일한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불평등이 해결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 어려운 부분은 도리어 경제와 고용환경에 있으며, 뿌리 깊게는 문화적, 도덕의식적 통념에 놓여있다. 이들 부분이 좀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도 바뀌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인종차별, 종교차별, 빈부차별과 함께 성차별과 연령차별은 여전히 그 뿌리가 깊다.
길리건은 성차별의 뿌리에 학문적 이론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심리발달상 여성이 미숙하다는...이것은 생태적 열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이론의 근거에 어떤 가정들이 놓여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남성의 잣대로 여성을 측정하는 것이다. 근육이 많은 양으로 발달을 측정하고 성기가 돌출된 것으로 우월을 측정하는 것만큼이나 엉뚱한, 남성발달 이론에 근거한 여성발달 평가의 허위를 드러낸다.
남성의 발달이 권리와 독립의 과정이라면 여성의 발달은 책임과 보살핌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여성 도덕의 발단단계는 1) 자기 생존 확보에서 2) 모성과 연결된 보살핌-순응과 불평등 수납을 거쳐 3) 타아와 자아의 모두에 유익-인간관계 상호성, 이기심과 책임 대립 해소로 이행한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1)에서 2) 전이기는 타인의 판단을 의식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려하지 않음이고, 2)에서 3) 전이기는 "이기적" 인 것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는 자기자신의 주관적 시선을 획득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 발달을 통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이며 소중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길리건의 이런 이론의 장점은 이것이 여성발달 설명에 그치지 않고 양성의 발달의 균형잡힌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독립적인 전사형의 남성들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이유가 여성발달에서는 전단계에 속하는 보살핌과 책임의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독립에서 인간연결의 문제, 여성에게는 애착에서 진실대면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며 이런 두 도덕관의 상호보완으로 좀더 행복한 양성의 발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남성은 교류하는 인간관계가 여성에게는 자기주장과 공정성의 경험이 비로소 둘을 조화있게 같이 살게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자기이해와 사회적 권리에 대한 하나의 고고학적 고찰이 필요한 사건이 20세기 전체에 걸쳐 일어났다. 그것은 인종의 문제, 히피문화, 베트남전쟁과 맞물려 있었으며 아직 진행형의 한 가운데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기득권 남성의 페미니즘 비하와 여성 자신의 패배주의적 사회순응의 와중에도 이 흐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길리건이 이야기한 이런 인간이해는 우리 양성에게 서로에 대한 화해와 발전을 가능하게하는 이론적 근거를 보여준다. 도덕범주가 율법이 아닌, 인간관계에 권리와 함께 책임과 보살핌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 인식론에서 지식은 정신 대 형식의 그리스적이원론 아닌,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획득된다는 성서적 관점으로의 변화는 이런 시각이 발전시킬 양성전체의 지구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p.s 딸을 가진 아빠들이 진보적 성향을 갖게 되는 이유를 알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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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버그의 도덕성 발달이론에 의해 구분된 6단계론을 실제에 적용해보면 대개 도덕적 최고 단계인 6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대개 남성들이었고 여성들은 3단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분석틀을 따른다면 다수의 여성들이 그들이 속한 사회와 집단의 기존가치에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여성은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해명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사회가 여성들을 그 수준에 묶어놓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수준이란 것이 수준이란 용어를 쓸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은 열등한 단계가 아니라 단지 다른 목소리이며 다른 가치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길리언의 태도는 바로 후자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 3단계란 어떤 특성을 가진 것일까? 그 특성들은 주로 남에게 인정받고 만족을 주기 위해 행위하는 성향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약간 시각을 달리해서 본다면 길리건의 표현대로 보살핌의 입장care perspective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퍼스펙티브에서 여성에게 주된 도덕적 문제는 정의의 문제나 권리와 의의무의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의 충돌'의 문제가 된다. 이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은 스스로 채택한 보편적 도덕 원리를 적용하기 보다는 당사자 상호간의 타협과 조화를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소릴 들은 적이 있다. 남자들의 결정방식은 하나, 둘, 셋, 빵!하는삼단논법식의 쾌속결정 방식으로 가는데 반해 여성들은 구체들 하나 하나를 대하면서 천천히 결정을 내려간다고 말이다. 남자들은 어떤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위고하, 인종성별을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정의롭다고 보는 반면, 여성들은 섯불리 보편적인 원칙을 세우고 구체들을 범주화하기 보다는 차이들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차이들과 무리없이 공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 시각이 곧 길리언의 시각과 유사한 듯 하다.
길리언은 여성성의 관계지향성과 남성성의 보편적도덕지향성을 나란히 놓치만 그렇다고 그것들을 생래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터득된 어떤 것들이며 각각 장점만큼 단점도 있다. 이 여성성의 측면이란 어쩌면 남성성의 극단화가 다다를 때 부딪히는 자율과 정의가 주는 딜레마에 대처하는 능력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인상깊은구절] 어째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인간본성에 대해 말하면서 그 본성이 여성과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여성들이 그들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말을 할까? 나는 또 물었다. 어째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이타적인 것 처럼, 자기 목소리가 없는 것처럼 또는 욕구를 갖지 않는 것처럼 말할까? 인간관계에서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관계를 맺지 않은 거이나 마찬가지라는 여성들의 깨달음은 가히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부장제와 문명을 유지하고 동시에 그것에 대해 유지되는 여성으로부터의 분리 및 여성의 내적 단절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나 인간관계라는 미명 아래 합리화되었던 폭력이나 권리 침해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에 저항하기 시작한 다른 목소리는 바로 관계적인 목소리이다. 그 목소리는 연결, 특히 여성과의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율이나 자아selfhood 또는 자유라는 미명으로 합리화되어 온 심리적 분과가 더 이상 인간 발달의 불가피한 귀결이 아니라 오히려 해결되어야 하는 인간의 숙제임을 암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