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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연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라는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 길상호, 「모르는 척, 아프다」 술에 취해 전봇대에 오줌을 내갈기는 사람이 있다. 입에서는 연방 씨팔씨팔 욕이 나온다. 무엇이 그를 이리 힘들게 할까? 제정신으로 살아도 만만치 않은 삶이다. 술에 취해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이 사람은 전봇대를 향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하소연을 한다.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전깃줄은 전봇대에서 전봇대로 이어져 있다. 사람들이 사는 집마다 어김없이 이어진 전깃줄로 시인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사내가 내갈긴 오줌이 전봇대를 타고 전깃줄로 올라간다. 전깃줄 입장에서 보면 한두 번 당한 일이 아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어김없이 전봇대 앞에서 끊임없이 푸념을 한다. 숱한 사람들을 보아온 전깃줄이 술 취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다. 알면서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한다. 아는 척한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마음만 더 아플 뿐이다.
꼬리 잘린 뱀처럼 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전봇대 앞을 떠돌 때마다 전깃줄은 모르는 척 그 사람들의 아픔 속으로 기꺼이 스며든다. 집과 집을 잇는 사이마다 전깃줄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전깃줄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부자라고 해도 전깃줄을 타고 흐르는 전기를 쓰고, 가난한 이라고 해도 전깃줄을 타고 오는 전기를 쓴다. 시인은 전깃줄을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라는 시구로 표현한다. 전깃줄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인연이므로 긴장을 풀기 힘들다. 긴장을 푸는 순간 감전될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사랑치고 감전 위험성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감전당할 걸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으로 뻗은 길을 간다.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끝나는 곳에 죽음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간다. “감전된 사랑”이라는 시구가 지니는 의미는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전깃줄은 묵묵히 전봇대에서 올라오는 감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또 전한다. 전봇대에 오줌을 싸는 사람만이 서러운 건 아니다. 전깃줄로부터 오는 “저린 고통”을 사람들은 살아가는 순간순간 느낀다. 다만 누구는 전봇대를 향해 푸념을 하고, 누구는 집에서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힐 따름이다. 전깃줄은 전봇대 앞에 선 사람과 집에서 밥을 하는 사람을 “오늘도 모르는 척,” 이어준다. 어느 한 사람 마음이 쓰이지 않는 이가 없다. 이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이 불쌍하고, 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불쌍하다. 하여 전깃줄은 전봇대 앞에 선 사람이 하는 말을 그저 들어주고, 밥을 끓이는 사람이 전하는 마음 또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 어둔 방에 불을 켜다가 혹 우는 이가 있으면 환한 불빛으로 등을 쓰다듬어줄 줄도 안다. 시인은 전깃줄이 전해주는 이런 마음을 새벽녘 바람이 부는 날이면 들려오는 “우우웅…” 소리로 확인한다.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진 그때에도 전깃줄은 눈을 말똥이며 잠 못 들고 떠도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전깃줄을 타고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이 새벽녘에 누가 잠을 못 자고 이리 울고 있는 것일까? 전깃줄은 작은 울음소리로 어느 집 누군가가 울고 있음을 새벽녘에 깨어있는 사람에게 알려준다. 우는 사람의 저린 고통이 전깃줄을 타고 새벽녘에 깬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든다. 두 마음이지만 사실은 한 마음이다. 우는 사람도 아프고, 깬 사람도 아프다. 아프고 아픈 사람들이 전깃줄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다.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이라는 시구로 시인은 시를 맺는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아무도 모르는 사랑을 전깃줄은 실천하고 있다.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 서글프게 울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때면 당신을 향해 오는 전깃줄의 그 저린 고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의 아픈 가슴을 흐르는 그 마음이 느껴보라는 말이다.
2. 파장 어두운 저수지에 가보면 안다 모든 물고기 물과 대기의 중간에 꽃 피워놓고 잠든다는 것을, 몸 덮고 있던 비늘 한 장씩 엮어 아가미 빨개지도록 생기 불어넣고 부레의 공기 한 줌씩 묶어 한 송이 꽃 물 위에 띄어올릴 때 둥근 파장이 인다 둥글게 소리 없는 폭주처럼 수면을 채우는 꽃들, 어둠은 그 향기를 맡고 날아들어 동심원의 중심에 배꼽을 맞춘다 수천 년 동안 물고기가 보낸 꽃의 신호를 들은 사람 몇 없다 안테나 같은 낚싯대 드리우고 꽃을 따고 있는 저 사내들도 부레 속에 녹여 채워둔 물의 노래와 그 빛깔을, 더 멀리 퍼뜨리고 싶어서 오늘도 물고기는 꽃을 피운다 - 길상호, 「물고기는 모두 꽃을 피운다」 물고기는 어떤 꽃을 피울까? 시인은 “어두운 저수지에 가보면 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잠속으로 빠져들 때 모든 물고기는 물과 대기의 중간에 꽃을 피워놓고 잠이 든다. “안테나 같은 낚싯대 드리우고/ 꽃을 따는 저 사내들도” 보지 못하는 그 꽃을 시인은 어둠이 짙어가는 저수지에서 보고 있다. 물고기는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꽃을 피우는 것일까? 우선 몸을 덮고 있던 비늘 한 장씩 엮는단다. 아가미가 빨개지도록 비늘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는 “부레의 공기 한 줌씩 묶어/ 한 송이 꽃 물 위에 띄어올”린다. 둥글게 파장이 인다. 물 위에 이는 파장은 소리 없이 수면을 폭주하고, 바로 그 순간에 수면 위로 물고기들이 피운 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낚싯대를 드리운 꾼들조차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저 개화의 과정을 시인은 섬세한 눈으로 묘사한다.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만이 물고기가 한밤중에 고요히 피우는 꽃과 대면할 수 있다. 물고기가 수면 위에 피운 꽃이 아련한 향기를 풍기면 그때서야 어둠이 눈치를 챈다. 어둠 속에서 풍기는 향기는 얼마나 짙을까? 후각 기능을 잃은 사람들이야 그 향기를 맡을 수 없겠지만, 자연과 다르지 않은 어둠이야 어디 그런가? 어둠은 곧바로 “동심원의 중심에 배꼽을 맞춘다”. 배꼽을 맞추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은 탄생할 수 없다. 배꼽을 맞춘다는 건 서로를 응시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수천 년 동안 물고기들은 이렇게 꽃을 피우며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어둠은 금방 알아차리는 이 신호를 사람들은 어째서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꽃의 신호를 들은 사람 몇 없다”라는 진술로 시인은 자연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머나먼 거리를 이야기한다. 물고기가 피운 꽃이 인간을 외면한 게 아니다. 인간 스스로 그 꽃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문명이라는 거대한 벽을 세우고 물고기가 피운 꽃을 어둠 속으로 내몰아버렸다. 안테나 같은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도 정작 “물고기의 주파수”를 낚지 못한다. 한밤에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늘 침묵을 이야기한다. 침묵이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만큼 자기 내면과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때가 있을까? 어둠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이 아니라 귀에 집중하게 한다. 눈으로는 어둠 너머를 볼 수 없다. 어둠 너머를 보려면 눈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 다른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귀가 밝아지고, 몸 또한 한없이 예민해진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풍기는 냄새를 코로 맡을 수 있다. 이런데도 왜 저 사내들은 물고기들이 꽃을 피워 내보내는 주파수를 낚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마음에 너무 깊어 들어가서일까? 그럴 리가 없다.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온몸이 바깥으로 열리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왜 자기 수양을 자연과 하나 되는 마음으로 표현했겠는가? 마음이 깊어지면 보이지 않던 사물들의 세계가 비로소 보이는 법이다. 시인은 지금 어두운 저수지에서 물고기와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주파수를 맞추는 일은 예민한 작업이다. ‘대충’이란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사물들이 내보이는 파장 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을까? 물고기는 “물의 노래와 그 빛깔을,” 더 멀리 퍼뜨리고 싶어 한다. 물고기가 일부러 소통을 거부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다. 물고기와 인간의 소통은 오로지 인간이 “물고기의 주파수”를 받아들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이라면 인간은 물고기와 주파수를 맞추기가 지금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 웬만한 자극으로는 제 감각을 깨우기 힘들다. 밝음에 익숙해진 문명인은 어둠에 빠져들면 공포감을 먼저 느낀다.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물고기는 오늘도 꽃을 피우지만,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문명인은 어두운 저수지에서도 그 “꽃의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 길상호는 물고기가 보내는 꽃의 신호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시인(詩人)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꽃의 신호를 알아챌 수 있는 건 아니다. 돌려 말하면, 물고기가 보내는 신호는 물고기가 ‘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물고기가 된다고? 물고기가 되는 일은 물론 상상 속에서만 펼쳐진다. 시인에게 상상이란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아닌가? 상상하지 않고 시를 쓰는 건 불가능하다. 시인은 언제나 상상과 더불어 사물들이 사는 세계로 기꺼이 들어간다. 물고기가 꽃을 피우는 “어두운 저수지”는 이리 보면 시가 탄생하는 상상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에서 시인은 물고기들이 내보내는 파장에 자기 몸을 흐르는 파장을 맞춘다. 물고기가 된 사람은 바로 이 순간에 탄생한다. 파장이 맞으면 물고기가 피운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문명이 갈라놓은 세계로 나아가려면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시인은 경계를 넘어서는 그 일을 시 쓰기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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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만난 건 "대전 문학관 시 창작수업"에서였다. 왜소한 몸집에 왠지 우수가 서린 듯 한 인상은 나만의 편견일까?.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인. 평범을 거부하는, 이미 있었던 것은 결코 다시 쓰지 않는 시인. 그것이 내가 본 길상호 시인이다.
"지친 삶을 달래고 정화 해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충실 한 것이 시에 대한 모법답안이라면 길상호 시인은 그 모법답안에 가까운 시들은 많지 않다"고 문혜원 평론가는 말한다. 오히려 불편하고 까칠하고 섬뜩 할 정도로 솔직하고 우울한 시(도무지 59p. 서울이여 안녕 80p)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한다. 실제로 그의 삶은 불안으로 삐걱거리고(계단이 없다 69p)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물의 집을 허물 때13p. 양파야 싹을 올리지 마라.50p. 배관속을 헤엄치던 한 무리의 시인들 48p)과 아버지의 부재는‘빈집'으로 그려지고 '무정란'으로 그려지는 안타까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놓았던 뜨거운 생"(버려진 손 58p)을 반성하며 세상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살벌하고 날선 것들을 향한 지적에 칼을 들이대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수상한 냄새 69p). 이것들은 어릴 적 내면아이의 가슴 아픈 고통들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통과 고뇌를 통하여 비로소 알아낸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탁족은 뜨거워라 21p"에서는, 푸른 비늘 하나씩 뜯으며 부딪쳐야 할 세월을 배우고 "풍경소리 25p"에서는 난간에 목을 매고서야 내 몸에서 풍경소리를 울릴 수 있음을 배운다. 물의 집을 허물 때(13 p) 몇 개 상처를 정강이에 새기며
모르는 척, 아프다 (34p)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개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이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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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아래 죽은 비둘기를 바라본 것이 언제였더라. 최초 발견자의 외침을 따라 다다른 그곳의 침묵, 규명의 의지도 규명의 방도도 없는 사인을 종이에 곱게 싼 것이 언제였더라. 홍제천에 다다른 연희동의 마지막 동네, 동생네 작은 화단은 이미 동물의 묘역, 그 한 켠에 비둘기를 묻고 ‘모르는 척’ 돌아선 것이 언제였더라. 죽은 식물 하나 덤으로 그 죽음 위에다 거꾸로 심는 광경을 지켜본 것이 언제였더라.
길상호 / 모르는 척 / 천년의시작 / 100쪽 / 2016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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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책시렁 32 《모르는 척》 길상호 천년의시작 2007.1.30. 하루를 그릴 수 있는 마음이라면, 하루를 즐길 수 있는 몸짓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루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라면, 하루를 노래하는 걸음걸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 한 줄은 어떻게 쓸 적에 즐거울까요? 글멋을 부리거나 글치레를 할 적에 즐거울까요? 오늘 하루를 새롭게 그리려는 마음으로 찬찬히 이야기를 써 내려갈 적에 즐거울까요? 《모르는 척》을 읽습니다. 시 한 줄이 그냥 태어나는 일이란 없고, 시 한 줄을 그냥 쓰지 않으리라 봅니다. 아무렇게나 흐르는 삶이란 없으며, 아무 뜻이 없는 살림이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하루를 얼마나 새롭게 마주할까요? 스스로 새롭고자 하는 몸짓으로 살면서 글을 쓸까요? 다른 사람이 받아들여 줄 만큼 살피면서 몸을 꾸미고 옷을 입고 말씨를 가다듬으면서 글을 쓸까요? 새나 풀벌레는 사람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구름이나 바람은 사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해나 별은 사람 눈치를 안 살핍니다. 아기는 어머니가 졸립다고 하더라도 제 배가 고프면 으앙 울면서 어머니를 부릅니다. 우리가 쓰거나 읽는 시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어쩌면 사랑스레 내딛을 걸음걸이는 모르는 척하면서 글멋을 키우기만 하는 시만 넘치지 않을까요? ㅅㄴㄹ 바람이 나를 노래하네 / 속을 다 비우고서도 / 땅에 발 대고 있던 날들 / 얻을 수 없던 / 그 소리, / 난간에 목을 매고서야 / 내 몸에서 울리네 (風磬소리/27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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