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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그 날 보름달을 배경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던 크고 검은 부엉이의 실루엣을 보면서 나는 그 또렷한 실루엣처럼 나의 미래가 더없이 명료할 것이며, 또한 동시에 그녀가 그 순간의 인간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마저도 그처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 명징한 세계 안에서 나는 그녀에게 죽을 때까지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엉이가 숲으로 사라지고 나고 몇 분이 지날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감동에 겨워 얼마 전부터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결혼하자."
초반, 운명과도 같은 우연을 떠올리게 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했던 이 소설.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는데, 막상 별다른 이유 없이 헤어지고 나니 왜 지구는 자전 따위를 해서 밤이라는 걸 만들어내 나를 뜬눈으로 누워 있게 만드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초반, 이 작품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건가, 하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렇게 두 눈을 질끈 감고 걷다가 나는 그만 가로수에 이마를 세게 부딪쳤다. 그것도 그냥 부딪쳤으면 됐는데, 술에 취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별이 보일 정도였지만, 눈을 뜨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세상은 왜 이다지도 내게 까칠하게 구는 것일까?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암튼 붙으면 고통이 없고 떨어지면 고통이 생기고, 그런 거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거야. 곁에 없으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야.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처지가 되는 거지. 걔는 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한 애잖아? 이해할 수가 없어. 한 때 나 자신보다 더 친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의문 자체가 고통이라구. 여기 봐. 이렇게 바람이 불잖아. 여기 나무들 사이로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 왜 바람이 부는 거지? 이해가 안돼.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고통스러워. 손뼉을 치잖아. 짝짝짝- 그러면 소리가 나잖아. 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소리 자체가 고통이었어. 세상 모든 게 고통이었어.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노래한 거라는 걸,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간극과 목소리의 결과 우리가 이해하는 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을 그려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에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 열기와 서늘함, 고독과 슬픔마저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아, 이 사람은 지금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만은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있구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가 있어. 편집하면서 내가 제일 안타까웠던 순간은 목소리가 끊어질 때였어. 더 말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말을 멈춰.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릴 테이프는 혼자서 돌아가지. 침묵과 암흑. 내 귀에는 잡음만이 들려. 몇 번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이 내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일지도 몰라. 거기에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1초, 2초, 3초, 4초, 5초. 나는 목소리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없어진 그 목소리의 감정을 읽어.
결국엔 그렇다는 걸.
나는 덤덤한 그녀의 목소리 사이에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를,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를, 창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를, 그녀의 기침 소리를 들었다. 나는 쭉 뻗은 길의 좌우로 펼쳐진 사막을, 꿈결처럼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도시의 굴곡을,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서늘함을 들었다. ... "아 이건 만월이군요. 맞지요?" 이번에는 눈을 감지도 않은 채, 내가 중얼거렸다. 이 관장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더없이 밝고 환한 보름달을 마주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 Hyang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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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연수'라는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수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한다.
'퍼즐 같은 그의 글 쓰는 방식이 좋아서...' 라고
그의 글은 지나치는 장면 하나 하나가 큰 퍼즐의 조각들이다.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 조각들을 손에 지니고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1982년 라스베거스에서 시합중 쓰러진 권투선수 이야기를 계기로 '나'의 연인이 된 배추머리의 라디오 피디 그녀는, '우리 인생의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편집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우리 인생의 이야기'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 데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녀가 잘라내 버린 릴테이프 속의 기침이나 한숨처럼 자신의 기억속에서 잘라 내어버린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고 자료들을 모은다.
'나'는 떠나간 그녀에게 나의 아픔을 전하고 싶지만, 소설전체의 분위기처럼 그러한 소통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볼수 없는 도서관장 이인용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를 말 해준다.
그녀가 달로 간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것은, 그녀가 편집해버린 릴테이프에서 기침, 한숨소리를 되찾는 것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맹인이 청각만으로 정상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과정과 일치한다고 봐야할 듯 싶다. 하나의 큰 그림이 되기 위해 각각의 조각들은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달을 찾아 이국 땅 사막의 밤에, 전복사고로 안경마저 잃어버렸지만 달을 찾아 떠날 수 있었던 그 코미디언처럼,
우리도 눈을 감고 진정한 어둠속에서 귀를 기울이는 순간....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보고있다고 믿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