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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버제스의 충격적인 원작 소설은 예전에 읽었습니다. 몇 달 간격을 두고 두 차례나. 더군다나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것을 바탕으로 레포트를 써야 했지요. 아주 인상 깊은 소설이었기 때문에, 후에 어느 친구가 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스탠리 쿠브릭의 영화 DVD를 선물로 주었을 때 넙죽 받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편한 마음으로 볼 만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무려 3년 만에(농담 아닙니다;; 진짜 받아놓고 껍질도 안 벗긴 채로 3년도 넘었어요) 노트북 DVD 플레이어에 걸었습니다.
우악. 이런 영화를 선물로 주다니. 친구가 저의 영화 취향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심심할 때 영화관에 가서 "재밌는 영화" 를 찾아 보는 보통 관객의 수준으로는(저 말예요 저) 소화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루도비코 치료를 받은 후의 알렉스처럼 속이 거북해져서 자꾸 트림이 나오려고 합니다. 이미 원작을 읽어서 이야기 자체에 익숙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각 과잉인 미술과 청각 과잉인 음악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사이키델릭한 의상과 세트를 보면서 눈은 뱅뱅 돌 것 같고, 장엄한 음악이 쫙 깔리면서 귀는 압도당하지요. 전반부에는 역겨운 폭력 묘사가 적나라하게 이루어지는데 그 장면 장면이 너무 멋있게 찍혀서 더욱 역겹습니다. 루도비코 치료를 받는 알렉스마냥 눈도 못 돌리고 보면서 정신적으로는 계속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도, 캐릭터도, 미술도, 음악도 약간 미친 것 같으면서 매혹적입니다.
제가 미장센이니 뭐니 하는 걸 논할 만한 관람자는 전혀 아니지만, 정도가 지나치게 훌륭한 수준이면 까막눈이라도 이게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적재적소에서 속도를 달리하는 카메라와 강박적일 정도인 연출 솜씨에 홀려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 알렉스, 무서운 아이
알렉스는 정말 훌륭한 캐릭터입니다. 이 녀석을 사이코패스라고 하는 게 온당한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아무 죄책감 없고 갱생의 여지 전혀 없는 악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폭력과 섹스에 미쳐 있고 자기 외의 그 누구도 소중하지 않고 양심에는 털이 숭숭 난... 아니 털 날 양심조차 없으면서 또한 발군의 자기합리화 솜씨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밉지 않은 것은, 결국 알렉스도 자기보다 더한 괴물인 정치의 희생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긴 알렉스 본인은 스스로가 희생자라고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결국 그 더 큰 괴물과 흔쾌히 영합을 하지만요.
알렉스는 말하자면, 못됐긴 정말 못됐지만 '악인' 이라기보다 '자연재해' 과입니다. 정말 악질이고 많은 피해를 입히는데도 이상하게 미워하기 어려운 캐릭터라는 의미예요. 그냥 원래 그런 존재인 것 같아 보입니다. 태풍이 인명 피해를 내도 태풍 자체를 미워하기 힘든 것처럼. 자연재해 악당의 대표 인물로는 알렉스 외에도 '양들의 침묵' 의 한니발 렉터 박사나, '다크 나이트' 의 조커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유 의지로 택한 악이냐, 강제적으로 선택한 선이냐'의 철학적인 문제 제기이기도 하고, 빅 브라더에 대한 공포를 묘사한 것이기도 하고, '사회의 안전이냐 인권이냐'의 형사정책적 문제도 다룹니다. 그러나 사실 소설을 읽었을 때도 그렇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그렇고, 그 어떤 질문에도 시원한 결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남지요. 웬만한 공포 영화보다 훨씬 더 오싹하고요.
원작 특유의 어두우면서도 블랙 유머가 살아 있는 분위기를 영상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기우였군요.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소설보다 더 훌륭합니다. 비록 보고 있는 마음이 편치는 않더라도 매우 매력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없어요.
![]() 패션, 메이크업, 미모에 말발에 뻔뻔함까지,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고 폭풍매력인 알렉스.
책상에 하나 놓고 싶군요.
※극중에서 알렉스는 커다란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며 우쭈쭈 예뻐하는데, 원작 소설에 없는 이 설정을 넣게 된 이유는... 스탠리 쿠브릭이 말콤 맥도웰(알렉스 역)에게 파충류 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탠리 쿠브릭이야말로 진정한 악인이 아닐까요. 덜덜덜. 난 그런 상사 만나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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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는 위험한 십대이다. 세명의 똘마니를 거느린 악당리더로 죄책감이란 개념이 없다. 그러면서 음악을 사랑하는 지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폭력장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걸 매우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단지 작곡을 했을 뿐 아무 죄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그는 불량배인지만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걸 좋아한다. 그들과 대립적인 빌리보이가 지저분한 것과 달리. 거리에서 만난 노숙자 할아버지의 지저분한 행색을 참을 수 없어한다. 그야말로 세련되고 향락적이라고 할까...
그들은 코로나 밀크바에 가서 약을 탄 우유를 마시고 에너지가 넘쳐서 폭력을 일삼는데 그것은 장난감 태엽을 감아놓으면 다 풀어질때까지 작동하는 것과 같다. 노숙자 할아버지를 폭행하고 아직 남은 에너지로 스피드를 즐기며 교외로 나가 HOME이라 쓰여진 집으로 들어가 작가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를 강간한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singing in the rain.
혼자사는 여자집에 절도하러 갔다가 우발적으로 그녀를 성기모양 조각으로 죽이고 똘마니들의 배신으로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간다. 그곳에서 그는 신부를 도와주며 그의 환심을 사는데 당시에 새로 도입된 루도비코 치료를 자청해서 빨리 감옥을 나오려고한다.
그 치료법은 폭력적인 영화를 보게하고 신경계를 자극하고 몸에 고통을 일으켜서 나중에는 그런 생각만 해도 극심한 고통을 느껴 다시는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신부는 그 치료를 말리려하는데 자신의 의지로 행한 '악'이 강요된 '선'보다 낫다는 취지이다.
아뭏튼 알렉스는 치유되어 세상으로 다시 나온다. 집으로 찾아갔으나 그의 자리는 '조'라는 사내아이가 차지하고있다. 그의 자리를 빼앗기고 부모에게서도 버림받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거리에서 처음 폭행했던 노숙자 할아버지를 만나서 떼거지로 달려드는 노숙자들에게 폭행당하고, 경찰들이 와서 도움을 청하지만 다름아닌 그를 배신했던 똘마니가 아닌가. 그들은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알렉스를 끌고가 실컷 두들겨주고 버린다.
알렉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도 모르게 찾아간 곳은 HOME이라고 쓰여져있는 작가의 집. 처음에는 잘 대접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목욕하며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는데 그때, 작가는 그가 누구인지 알게된다.
알렉스가 베토벤 9번 교향곡에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잠든사이 가두어두고 그 곡을 틀어놓자 알렉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자살을 기도한다. 병원에 있는 알렉스, 반대당의 공격에 반격을 하기 위해 내무장관은 알렉스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친구가 된다.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며.
알렉스가 치료를 선택한 것은 자유의지가 아닐까?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행하는 폭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폭력의 피해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어서 당하고만다.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자유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심한 두통을 느꼈다. 넘쳐나는 노골적인 성적 이미지들. 코로나 밀크바는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의 이미지로 꽉 차있다. 빌리보이일당이 한 여인을 폭행하려는 장면은 너무나 적나라하고 작가의 부인이 입고 있는 빨간 옷을 처음엔 가슴 부분을 도려내고 나중엔 아래로부터 위로 반으로 나눠 벗겨버린다. 그런 장면들에서 배경음악은 '너무나' 경쾌하게 나온다.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비밀스런 성애집회와 단조롭고 음산한 음악이 매우 충격적이었었는데...
이 영화에서 바람직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처음 폭력의 희생자였던 노숙자 할아버지가 나중에는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고 부모조차 이기심에서 자식을 외면하고, 폭행당했던 작가가 알렉스를 알아보고도 신고하지 않는 것은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에서이다. 내무장관 또한 정치적 목적에서 그를 친구라고 부르며 호의를 베푼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이 영화는 마치 연극을 보고있는 것같다. 대사들도 연극에서처럼 과장되고, 정중앙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씬이 많다. 빌리보이일당이 여자를 폭행하려는 장면이 그렇고, 내무장관이 감옥을 방문했을 때, 양쪽이 자로 잰듯 대칭적이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죄수들이 돌아가는 장면도 그런 느낌이다. 폭력적인 장면에서도 경쾌한 음악이 나와 몰입을 방해하며 거리를 두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적이고 노골적인 성묘사가 덜 메스꺼운 것은 아니었다. 태엽달린 장난감이 아니라, 인간적인,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