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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에만 두번째로 접하는 김인숙 작가님의 작품.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닌데 저번 「꽃의 기억」에 이어 이번에도 여주인공의 설정이 '이혼녀' 다. 김인숙 작가님은 이혼녀에 대한 남다른 느낌이 있으신 걸까..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의 배경을 지레짐작하는 짓이나, 겨우 두권을 읽고 작가의 경향을 논하는 것은, 말을 바로 배우기 시작한 아기가 세상을 이렇다 판단해버리는 것만큼이나 경솔한 행동일 듯. 그러니 이혼녀를 두번이나 만난게 아직까지는 내게 닥친 '우연'이라 생각하는게 좋겠다. 이 책 제목도 우연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 매우 야한 에로비디오라도 몰래 보는 것처럼 남들의 눈치도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서는 등뒤에서 누가 행여 넘겨볼까 싶어 구석에 기대어서야 편한 마음으로 책장을 펼칠 정도로 이지적인 여류작가의 작품이라 하기에는 다소 노골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성적 묘사가 난무.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성적 묘사에 대한 야릇한 느낌보다는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분명 재미있고 지루하지도 않은, 그래서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이 책은 첫 사랑의 애틋함은 잊었으되 그 상처에서 벋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다른 남자와의 결혼에 실패한 이혼녀 여주인공과 여자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못견뎌하는, 그래서 여자를 돈으로 필요할 때 사는 것이 훨씬 현명한 짓이라 생각하는 삼십대 중반의 미혼인 남주인공이 만나 만들어가는 다소 엽기적인 사랑의 이야기다.
'엽기적'이라는 말이 최근 들어 여러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변질되어 재기발랄함이나 독특함, 또는 코메디스러운 뉘앙스를 많이 풍기는데, 여기서 말하는 '엽기'란 그런 뉘앙스가 보편화되기 이전의 원래 개념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징그럽거나 혐오스러운 느낌은 아니다. 인생을 매우 도덕적이고 예쁘게만 살아온 사람들의 눈에는 다소 거부감이 드는 소재일 수도 있겠으나, 더 이상 '공주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보편적 어른들에게는 얼마든지 허용이 되는 수준이다.
두권을 읽어오면서 김인숙이라는 작가가 더욱 궁금해졌다. 기회가 닿는대로 조만간 더 많은 작품들을 경험해보고 싶다. 철저히 개인적인 느낌에 근거하기는 하지만 김인숙 작가님의 매력은 작품 속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능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렇다면 작품 속 주인공들이 매력적인 것 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그녀도 매력적인 분일거란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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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작가를 처음 만난 건 대학1학년 독문학강좌였습니다. 전공보다 교양과목에서 지적 허기를 채우고 있던 시절, 독일어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면서 신청을 하게 되었고.. 당시 강사는 독일어를 처음 접하 는 사람들은 별도로 독서리포트를 내 주셨습니다. 그 때 리포트가 김인숙의 '불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김인숙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꾸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관심을 갖고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우연인지 몰라도 책의 제목은 제 큰아이의 이름을 거꾸로 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더 끌렸을려나? 그리고, 여주인공의 이름도 '기연'입니다.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 같은 걸 말하고 싶었을까요?
남자주인공인 승인이 우연하게도 기연을 만나게 된 데에는 수 많은 우연이 겹쳐져 있습니다. 지도판매소에서 지도를 판매하던 여자의 핸드폰 장식, 공사를 맡게 된 전원주택, 날씨, 술자리 등등 어느 것 하나라도 우연을 벗어나게 되었다면 만남은 없었거나 어긋났을 수도 있었을 테고, 어쩌면 그런 또 다른 우연스런 사건이 다른 길로 운명을 이끌게 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우연히 이 책을 보고 펼쳐보게 되었던 것처럼 세상 모든 일들이 어쩌면 수 많은 우연의 결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달라지고 있을 수도.. 매번 그 우연함이 이끄는대로 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든 내가 원인이 되어 발생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들의 행동이 내게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모든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강하고 굵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족, 친구와 같은 존재들이 있을 수 있고 저 멀리 먼 우주에 있는 별하고도 연결된 아주 가느다란 줄을 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들과는 아주 조그마한 흔들림만으로도 내 삶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을테고, 아주 미세한 연결관계에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만큼의 변화만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연결로 인해 변화가 발생한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긴 제 동생을 떠올렸습니다. 몇 번의 인연을 모두 지나치고 아직도 홀로 살아가고 있는 녀석에게도 우연처럼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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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인 승인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럼 우리는 당연히 승인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승인이 아니라 여자주인공인 기연이가 주인공이고 승인은 단지 서브역활인 것 같다. 기연를 전면으로 내세웠다면 이 책은 지금보다 더 충격적이고 야한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승인이 주인공이깐 이 정도로 끝났다고 할까? 이 책을 읽은 분들은 하나같이 이 책이 야하다고 이야기 한다. 승인의 이야기는 그리 야하지 않다. 야한 이야기는 여주인공인 기연의 이야기다.
그럼 남자 주인공인 승인과 기인은 어떤 인물일까? 승인은 우선 여자와 얽매이는 관계를 싫어한다. 조건적인 만남도 싫어하고 그냥 여자와의 하룻밤을 아무 부담없이 즐기기를 원하는 남자다. 그런 승인이 기인이란 여자를 소개 받게 된다. 다른 여자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 승인 하지만 기인이란 여자는 조금 독특하다. 그녀 또한 승인처럼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가벼운 만남과 섹스를 즐길 뿐이다. 승인의 아파트에서 만남을 계속 갖지만, 다른 여자처럼 승인의 공간을 바꿀려고 하지도 않고 승인의 일에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를 구속하려고도 하지 않은다 승인은 처음에 그런 그녀를 반기지만 차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시작한다.
왜 그럼 두 남녀는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책을 읽어보면 승인이 왜 그랬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여주인공인 기연의 이야기는 자세히 나와 있다. 기인은 첫사랑의 상처로 인해 사랑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상처로 인해 기연이는 여자로서 겪지 말아야 할 일도 겪게 된다. 사실 이 장면이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책은 승인과 기연이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승인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기연이가 이야기하는 부분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그 짧은 이야기가 큰 충격을 주지만 말이다. 만약 이 책을 인기 일본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처럼 두권으로 나뉘어 승인의 이야기와 기연이의 이야기를 썼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김인숙 작가는 인물의 심리묘사도 훌륭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와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소재로 책을 재미있게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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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책제목이 눈에 확뛰어서 사게 되었다. (한마디로 충동구매..;;)
승인과 기연은 우연처럼 만나.. 서로 사랑했다.
자신의 받은 마음속 깊은 상처를 가주고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해가면서..
비록 둘사이의 사랑이 확인조차 되지 못하고.. 기연이 죽었지만..
나중에 승인이 기연에게준 설계도의 깨알같은 글씨를 보면서 사랑을 확인한다.
그부분을 세번씩이나 읽었는데...읽을때마다 가슴한 구석이 시렸다. 왜일까? 사랑이 이루워 지지 않아서 일까? 마치 승인의 마음처럼 가슴한 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말처럼 사랑은 실은 가장 익숙한 것에서부터 온다는데, 그 익숙함의 어느 한부분이 잘려 나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였다.
책을 보면서 우연 , 추억 그리고 사랑이 다 삶의 한 부분처럼 들려온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삶의 한 부분이 평범함 처럼 다가와 익숙해지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인상깊은구절]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추억이고, 자기 안의 결핍이고, 혹은 상처거나, 홀로 꿈꾸었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내안에 있었고, 또한 그의 안에 있었다.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혹은 모욕이든 찬사든, 그와 내가 치어야 할 생의 순간들은 언제나. 갑짝스럽게 내 앞에 있다. 그러나 그 느닷없는 순간을 위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것은 항상 낯설지만 실은 가장 익숙한 것에서부터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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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처럼... 들어올리는 책들이 한결같이 연애를,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김인숙의 것이 가장 못견디게 끈적거린다. 연애는 거짓말 탐지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백프로 믿을 수 없지만 거기에 기대어 근근히 범인을 추궁할 수 있을 뿐인...
상대방을 가늠할 수 없다면 체념할 수 있기라도 해야 한다.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는 힘도 없고 체념과 포기의 경지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게 되면, 집착이란 불순물이 서서히 마각을 드러낸다. 물론 그 가늠의 근사치가 잘못된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거짓말 탐지기와 같은 사랑은 그나마 명목이라도 유지할 수 있지만, 잘못된 가늠으로 인한 유격은 치유할 수 없는 집착의 근거가 되는 것. 아, 무슨 흰소리인지... 그저 날은 덥고, 소설 속 사랑타령은 끈적거리고, 바람한점 통하지 않는 골방의 컴퓨터 앞은 못견디게 쑴벅거린다는 소리다. 소설은 승인과 기연의 사랑 이야기이다. 건축 설계를 하는 승인은 혼인빙자간음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는(하지만 그건 승인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에 기인한 것이지 범죄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던)반면, 백화점에서 카드발급업무를 맡고 있는 기연은 삼년전인 스물여섯에 이미 한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두 사람은 만난 바로 그날 모텔에 들어가 몸을 섞고(이즈음의 섹스는 보통 만난 당일 모텔 내지는 호텔에서 치러진다. 돌아보아 이러한 행각의 경험이 없다면 자신의 삶이 너무 비문학적인 것은 아닌지 한번 골똘히 생각해 볼 일이다.), 서로를 띄엄띄엄 파악해간다. "거짓말과 참말의 경계, 사실과 진실의 경계……. 기연에 대한 것은 알아 갈수록 그 경계가 자꾸만 모호해지는 기분이었다..." 특히 이러한 사실은 남자 쪽이 심하여 승인은 첫번째 만남과 두번째 만남에서 밝힌 기연의 나이가 어째서 서로 달랐는지, 후쿠오카에 간다고 했던 날 실제로는 어디에서 무얼 하였는지 등 의문부호를("넌 도대체 누구니?") 액세서리처럼 달고서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승인의 의문들이 실은 금새 허물어질 것 같았던 기연의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실제 기연은 승인을 새로운 사랑으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아니어서 기연은 그녀의 첫남자에게 무언가 확인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게다가 장례식 이후 승인은 사고 며칠전 술에 취해 기연을 찾아가 청혼을 하며 건넸던 설계도를 돌려 받는데, 거기에는 기연이 적어 놓은 필요한 살림도구들의 목록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승인도 기연도 서로를 향해 허심탄회 하려는 찰나에 사랑은 스톱 선언을 받은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는 카피가 난무하는 시대적 정서를 고스란히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에 대한 탐지기 작동을 일순 멈추고, 이제 비로소 싹텄다고 기대되는 신뢰의 순간에 무너진 사랑 이야기가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은 상황에서 감정으로의 전이가 아닌 감정에서 감정으로의 전이를 주무기로 삼고 있어 안타깝다. 설정은 간혹 작위적이어서 마른 개울의 튀어나온 바위마냥 들쭉날쭉하고, 인물들의 변화는 유속이 너무 빠른 강의 상류마냥 혼돈스럽다. 선회가 필요하다. |
| 행복한 책읽기를 소망하는 나는 '훌륭한 독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책을 읽고 나서 책만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저자와 함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주제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느낌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다양한 방법으로 나는 책에 살아있는 이름을 붙여 준다. 쓰기보다는 읽기에 적합하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후에는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마음을 단정히 하고, 표정을 부드럽게 하고,기대에 차서 첫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펼쳐지는 세계 속으로 온 몸과 마음을 넣는다. 이러한 책읽기를 소망하는 나에게, 훌륭한 독자가 되기를 꿈꾸는 나에게 이번의 김인숙은 많이 실망스럽다. '개교기념일'같은 소설을 써 낼 수 있는 그녀가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갸우뚱해지는 건 당연하다. 갑자기 썼을까? 돈이 벌고 싶었나? 특별할 건 없지만 한 번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인가? 등등의 쓸데없는 생각이 그녀의 소설만큼 쓸데없이 떠오른다. 시간때우기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독자를 평생의 꿈으로 삼으며 책읽기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저자가 한번만 해준다면 이런 소설을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말해주고 싶다. 내 여름의 첫 독서가 이 지경이 되어서 불만스럽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그녀는 '개교기념일'과 같은 작품을 슬 수도 있으니까. 저자의 독자에 배한 배려를 구한다. |
| 승인, 34살의 건축설계사. 아직은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꽤 능력있는 건축가라고 생각하는 미혼남. 기연. 29살의 백화점 카드 담당 직원. 대학 신입생 때 만난 선배로 인해 지독한 첫사랑을 경험하고 소개로 만난 남자와의 짧은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여자. 승인과 기연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둘을 소개시켜 준 현중은 알았겠지만, 그 둘은 단지 하룻밤 짧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으로 서로를 이용한다. 하지만, 승인이 기연을 백화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둘 사이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승인은 기연에게 자꾸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을 결코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기연 역시 짧은 삶 동안 많은 상처를 안게 되면서 더이상은 누군가에게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승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게된 승인의 배반으로 인해 기연은 상처를 입고 둘 사이는 멀어진다. 하지만 그 헤어짐의 시간 속에서 결국 승인은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되고, 같이 살고 싶은 집의 설계도를 건네는 것으로 프로포즈를 대신하다. 구혼을 받은 기연은 우연히 걸려온 첫사랑의 남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지만,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승인은 그녀의 감정을 확인하지 못한 체, 그녀를 떠나보내게 되지만, 현중이 건네준 설계도면에 적힌 깨알같은 그녀의 글씨를 보고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 속에서 승인과 기연의 온전한 이름은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익명성을 보장한다고나 할까. 이름이라는 건 가장 개인적이고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온전한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마지막에 기연의 죽음으로 끝이 나기는 했지만, 승인은 그녀를 만나기 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물론 사랑이 지나간 후에 그게 사랑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가 불행할 수도 있지만, 그녀를 만나기 전보다 그는 더 행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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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은 [상실의 계절]이라는 작품으로 학생 시절에 등단하여 꽤 오랜 기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 온 이른바 386세대 작가이다. 그러나 5.18과 학생운동, 이념에 치중해온 동료 작가들에 비해 그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고, 사회보다는 개인의 아픔을 중점적으로 다뤄왔다.
그러나 '우연'이라는 이번 작품은 그 제목처럼 그녀의 다른 작품보다 미흡한 점이 눈에 많이 띈다. 상처투성이 두 주인공, 마치 영화,'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상시키는 음울함만이 작품 전체를 회색빛으로 휘감고 있다. 기연이라는 인물의 상처가 가슴깊이 다가 오지 않고 윤승인의 성격 묘사도 여성작가라는 생태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감한 성묘사와 미스테리 수법을 사용했지만 세련되기 보다는 지나간 청춘의 상처처럼 희미하고 낡아 버린 듯 하다. 그러나 다른 이의 눈에 사소해 보이는 것이 한 인생에게는 전부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필연을 믿는 것처럼 우연 역시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그것은 그들이 선택하기 전에 그쪽에서 그들을 먼저 선택해 버린, 스무 살의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니 모두들, 전장에 나가기 직전의 병사들처럼 그 일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녀의 친구들 중 누구는 한 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미팅을 스무 번도 넘게 했고, 누구는 어느새 커플링을 끼고 다녔고, 또 누군가는 어느새 실연의 상처 때문에 자살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중의 어느 누구도 완전히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거리에서 흘러 나오는 유행가들만이 그들을 잠깐씩 위로할 뿐이었다. 그들은 스무 살에 이미 유행가 가사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
| 승인은 스스로 노가다 십장이라 일컫는, 아직 자리가 덜 잡힌 건축 설계사이다. 여자를 만나지만 연애를 하지 않으려 하는(혹은 연애를 하면서도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연애에서 상처를 받은 만큼 사랑이라는 것에 냉소적인 면도 없지 않다.기연은 이십대의 이혼녀로 백화점 고객 상담실에서 하루종일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집에 가선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조차 보지 않는다. 웃음을 낭비하면 다음날 직장에서 고객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그만큼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두 지나간 사랑에서 받은 상처를 갖고 있다. 이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관계를 엮어나가고 불화를 겪는 과정이 소설의 내용이다. 승인은 기연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기억에 담아두지 않고 자기가 식욕이 없으면 기연이 애써 만든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기연은 퇴근 후에는 전화 통화로 말하는 것도 싫어해서 승인이 밤에 거는 전화는 받으려 하지 않고 다른 여자들처럼 승인의 집을 청소하거나 빨래를 해주지 않는다. 승인이 먹지 않겠다고 하면 다 만들어서 식탁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 음식도 개수대에 부어버린다. 사랑을 순간의 환상이라고도 말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함께 사람을 하면서도 다른 곳을 보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는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순간의 환상도 없다. 승인과 기연 모두 사랑의 환상을 믿을만큼 어리지도 않고 이미 사랑에서 비롯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어서 대책없이 착각에 빠져 만족하고 행복해할 수 없다. 그들의 관계 사이에 끼어든 사소하고도 특별한 우연들은 소통보다는 불통으로, 화해보다는 불화로 그들을 끌고간다. 함께 살고 싶은 집을 직접 설계해서 기연을 찾아간 승인은 기연에게 청혼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얻은 대답은 기연의 교통사고 소식이다. 대학시절 첫 사랑의 남자를 보고 돌아오면서였다. 눈 속에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잊혀지지 않고 있던 아픈 기억과 상처를 다독이며 돌아서는 길이었다. 기연은 우연히 닥친 불행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승인이 전해받은 자신의 설계도엔 분홍빛 펜으로 적은 기연의 낙서만 남았다. 승인이 설계한 집 구석구석에 가구와 살림살이를 이리저리 배치해본 내용이었다. 또 한번 상처로 남게 된 승인의 사랑은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연은 승인을 다시 새로운 사랑에게로 안내한다. 작가가 참 공들여 쓴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단숨에 읽기보다는 찬찬히 정성들여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소설의 중반부 이후부터는 저절로 독서의 속도가 떨어졌다. 기연의 대학 시절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안타까웠지만 소설의 통일성이 흔들리는 듯 했다. '기연'이란 인물을 너무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학시절 첫사랑 이야기는 애틋하면서도 왠지 '누구나 한번쯤 그런 일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니까 좀더 새롭고 특별한 사건을 보여주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폭식증에 시달릴 정도로 음식에 집착하는 여자, 연애에 냉소적인 남자,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첫사랑의 남자, 그 남자의 우수에 젖은 눈빛이라든가 느닷없는 전화 같은 설정도 그다지 산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연'이 낯선 관계였던 사람과 사람을 어떻게 사랑으로 이끄는지 확인시켜준다. 사랑이 상처를 낳고, 그 상처를 다시 사랑이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우연과 필연, 기이한 인연이 뒤섞인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있는 사랑의 흔적을 담담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