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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늘 반복된다. 인간의 야수성 역시도 늘 반복된다. 인간은 발전해 나가는 동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는 이를 비웃으며 부인한다. 그 증거로 오늘 이 책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터 마쓰는 우리나라가 올림픽후 흥청망청 거릴때,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질책하는 기사를 썼던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자였다. 그런 그가 유럽의 보스니아 사태에 파견되어 그가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 놓았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행위 중에서 전쟁처럼 참혹한 행위는 없다.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르고, 손발을 잘라대는 잔혹스러운 행위는 일부의 몰지각한 자들이 행하는 광적인 행위로 여겨지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전쟁이 있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발생해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량학살, 강간 등은 밝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전쟁이라는 이름하에서 너무도 태연스럽게 저질러지고 있는 만행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6.25전쟁을 통해서 들어난 수많은 만행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단지 50여년전의 일이라는 이유로 다시는 안일어날것 같은 착각속에서 살고 있는 이때, 불과 몇년전 유럽의 중심에 있던 보스니아에서는 역사의 한 장면을 다시금 재상영하는 만행이 당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십자군 전쟁과 세계대전, 독일의 유태인 학살, 한국전쟁 등을 거쳐오면서 인간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피터 마쓰의 말처럼 단지 우리의 속에 야수성이 있고 그것은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우리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상태로 잠재해 있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런 야수성을 가슴속에 품고 있을 것이라는 혐오감이 나를 괴롭혔다.
피터 마쓰는 책의 중간쯤에서 인간의 참상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작 내가 우려한 것은 머리 없는 시체를 보고 메스꺼워지는 것보다는 남은 여생 내내 그 기억을 안고 사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 마음속에 무언가 잔혹한 기억을 담고 살아가기 싫은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잔혹함의 기억을 더 이상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남은 여생 내내라도 인간의 야수성에서 기인한 그러한 만행의 흔적들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약, 또 다시 전쟁이나 분규의 와중에 서있어야 할 때, 우리의 인간임으로해서 지켜야 할, 작은 인간성들을 간진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또 하나, 강대국에 의한 보호라는 착각에서 하루라도 빨리 깨어나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논리속에서 늘 비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이익이 있지 아니한 곳에서는 늘 방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지킬 수 없을 때, 우리도 보스니아의 난민처럼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보스니아 사람들이 차라리 사람이 아니라 고래였다면, 전세계가 살육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슨 조처든 취하겠지요.."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밀로세비치. 그 이름들이 가지고 있는 슬프고도 잔혹한,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어찌보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 상관 없는 인물이라 여길 수 도 있겠지만, 그 나라의 슬픈 기억이 우리에게 악령으로 되살아 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밀로세비치 같은 야수성의 도화선이 이 땅에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피터 마쓰가 말하듯, 이제 인간의 야만성은 길들여 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엉청난 실수일 뿐일까? 저기 어딘가에, 우리의 어딘가에 야수가 숨어있다는 말은 진실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스스로가 인간이기를 바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책을 놓으며 생각해 본다. [인상깊은구절] 그들은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하나는 문명화된 유럽에서는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인간의 야만성이 길들여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본인은 자신의 종교를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것에 큰 의미를 둘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이 책에서 다루어진 보스니아 내전의 야수적인 만행은 이미 서양의 이성들에겐 골깊은 문제였습니다. 그 시작은 바로 유태인 학살(genocide)이었죠. 이 문제 때문에 하버마스(J. Habermas)와 바우만(Z. Bauman)은 대립했죠. 즉, 하버마스가 그런 학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이성의 기획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고 보았죠. 다만, 분리된 '생활세계'와 '체계'를 '소통'으로 다시 복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우만은 근대적 이성은 실패했다고 보았죠. 즉, 그는 유태인 집단학살 문제를 천착하면서 탈근대적인 윤리학을 주장합니다. 즉, 죽음의 '범속화(Banalisierung)', '아디아포라이제이션(adiaphorization)', '무언의 요구(unspoken demand)', '무조건의 책임성(unconditional responsibility)'이 그런 개념들이죠. 우선, 범속화는 우리가 점차 일상 속에서 실존적으로 유의미하지도 않고 치명적이지도 않은 죽음의 경험에 노출되어서 그것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범죄와 살인이 그것을 유도하며, 더 나아가 전쟁과 같은 것은 그런 것을 극대화하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지난 걸프전이나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장면은 CNN을 통해서 마치 게임처럼 전세계에 방송되었죠. 그 곳 현지의 사람들은 정말 지옥같은 상황에 있었는데도 전세계의 지성들은 그것을 지켜봤죠.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그들이 규정한 '적'을 타도한다는 미명하에 눈감아졌습니다. 다음으로, 아디아포라이제이션은 모던적 윤리 규제 방식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도덕적 무관심입니다. 즉, 특정 행동이나 행동의 대상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거나 또는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서, 그 행동이 마치 도덕적 가치 평가로부터 면책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들죠. 마지막으로,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은 이런 두 상황에 대한 바우만의 최소한의 해법입니다. 즉 이 둘은 늘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여 왔고,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도덕적 상황에 던져져 있음을 생각한다면,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은 그 상황의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있어야할 도덕적 기본전제입니다. 근대적인 보편적 도덕모델은 이제 적용하기가 곤란해졌지만, 도덕적으로 판별하기 애매한 수많은 상황 속에서 이성의 탈을 쓰고 야만적 행위를 저질러서는 안되기 때문에 이것은 최소한의 전제입니다. 저는 바우만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피터 마쓰가 보여준 상황과 같은 것은 여전히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역사가 진보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보편적인 도덕을 서로 약속할 수 있는지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약속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인류와 세계 속에 굳건히 실현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힘의 논리를 도덕적인 것으로 미화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도덕도 아니며, 올바른 평화의 유지방법도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평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무언의 요구와 무조건의 책임성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계사에 광기와 폭력이 아닌, 이성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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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Love Thy Neighbor: A Story of War, 지은이: Peter Maass.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없다고 봅니다. 다른 분들이 너무 잘 설명을 해 주셨으니까요. 제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책의 내용보다도 책의 번역의 약간의 어색한 부분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매끄럽게 흘러갑니다.
1.p15. 야기의 첫부분(1.야수)입니다. <그러나 그런 버스를 아무리 많이 탄다고 해도 이곳 난민들의 냄새에 대한 대비책이 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난민들의 냄새는 참기힘들다는 이야기인데, 어색한 건 어쩔 수 없군요. 왜 '대비책'이라는 어색한 단어를 사용했는지. 원문에 너무 충실했다고 하나요? 원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 솔직하게 말하자면 보스니아라는 이름이 나라 이름인지 어느 곳의 도시인지조차 개념이 없었다. 그 곳이 유럽에 있다고도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의 대립으로 인해 한 민족의 50년의 분단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른 체 편안히 살아왔던 시간 동안에도 세계 각국에서는 종족간, 인종간, 민족간의 대립이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니아'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이탈리아 등이 인접한 유럽에 위치하고 있다. 어떻게 유럽이라는 인류문명의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지고, 산업혁명이 발생했던 대륙에서 난민이 발생할 수 있는지 그 사실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나라 안에서 이웃하며 정답게 살았던 국민끼리 정치적 세력의 의도로 순간에 적으로 변해 서로 총부리를 겨눠 사망자 27만명과 2백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이 보스니아 땅에서는 불과 10여년 전에 일어났던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이 밀로셰비치라는 인물의 세 치 혀라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한 정치인의 계획적이고 조작된 거짓말이 엄청난 사상자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보스니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나는 우리 나라의 사례에서도 발견하였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영호남의 지역갈등의 문제도 보스니아 내전과 그 양상이 다를 것이 없다. 우리 사회의 지역감정은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는 달리 민족 내부의 문제이며 이러한 '지역감정'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악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1967년 제 6대 대통령 선거까지만 해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던 지역감정이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첨예화되기 시작하였다.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자신의 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야 우리 나라가 발전한다는 선거 전략으로 '지역감정'이라는 타이틀을 세운 것이다. 이로써 국민의 머리 속에 지역간의 감정을 세뇌시켜놓고, 이 무기를 가지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을 희롱한 것이다. 1960년대의 정치인들의 국민세뇌장난이 2002년 현재까지 계속되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언제 그 세뇌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질지는 두고 봐야겠다. 우리 한국도 보스니아와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같은 민족끼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5000년을 함께 살아온 자신의 이웃을 향해 총부리를 대었다. 현재는 50년 동안 휴전 중에 있지만 우리의 현실이 보스니아 내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약간 다른 점을 꼽는다면 미국과 소련이 6.25의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보스니아와 달리 전쟁에 간섭했을 때 얻는 이익 때문이었다. 우리 한반도는 미국에게는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으로 가는 길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경유지였고, 소련에게는 사회주의의 확산과 부동항의 확보 등 냉전체재의 양국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군침도는 먹이였었다. 이들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기 전부터 자신들의 야욕을 펼칠 기회만 노렸고, 일본에게 한반도에 대한 권리를 빼앗기 위해서 한국을 자주 독립 시켜준다는 달콤한 미끼로 신탁통치를 실시했다. 그 결과가 남과 북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다른 나라의 입김으로 50년 동안이나 각각 분리되어 살아왔던 것이다. 피터 마쓰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는 두 나라에 대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책을 통해 보스니아와 같은 지독한 비극을 한국 또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한 것 같다. 유럽에 있는 모든 나라가 스위스, 알프스 지방처럼 지중해성 기후로 살기 좋은 낙원과 같은 곳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의 내전에 대해 자세히 알고 나니 정말 인간으로서는 살기 힘든 지옥과 같은 곳이 20세기 유럽에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우리 한반도도 이렇게 내전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보스니아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평화통일의 방안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었다고 한들 그것은 50년이라는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세월의 틈이 존재하고 이 틈에서 같은 민족이라도 이질감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던 이웃 주민들끼리도 하루아침에 이웃사람에서 총알받이로 만들어 버리는 보스니아의 모습을 보아 우리도 서로의 융합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멀리까지 내다보는 통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서로 교류를 통해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 |
| 자극이 필요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에 매일 똑같은 일상에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친구와의 대화도 그저 귓속을 맴돌뿐 공허했고 낯선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광들도 그림엽서의 프린트마냥 건조해 보였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자극이 필요했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무엇이 돌파구가 되어줄까? 그 즈음의 내 하루 하루는 그렇게 가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 언제인가 신문지면에서 본 굵은 인쇄체의 제목 정도가 기억이 났다. 무료한 21세기의 평범한 직장인에게 영화가 아닌 가까운 어디에선가 벌어진 전쟁 이야기 정도면 어쩌면 쇼킹한 자극이 되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번 기대를 해 볼까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만으로도 수치스러웠고 죄스러웠다. 차라리 짐승이나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로 태어나고 싶었다. 내세가 있다면 진정 그러고 싶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감정으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이 책은 1992년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가 보스니아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의 이야기이다. 이 내전으로 27만명의 사망자와 2백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기독교계인 세르비아와 회교도계인 보스니아 주민들은 내전 전에는 민족이나 종교간의 별다른 갈등없이 서로 결혼까지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회교도인 무슬림들을 몰아낸다는 인종청소를 자행했고 부녀자들을 집단적으로 강간했으며 단지 즐기기 위해서 고문을 했으며 사람들을 사살했다. 여기에 서유럽 국가와 미국 영국등의 강대국들과 유엔은 이 추악한 내전에 발 들여놓지 않으려고 오히려 진실을 왜곡하고 축소해서 발표하기에 급급했다. 더 나아가 세르비아에 일방적으로 고통받는 보스니아에 무기 금수 조처를 해제하지도 않았다. 몇몇 양심있는 외교관들은 고위층의 진실외면에 환멸을 느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저자의 말대로 문명화된 20세기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그들의 고문과 비인간적인 행태들에 대한 내용은 읽는 도중 역겨움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이 책은 단지 세계 어느 한 구석의 민족간 종교간의 갈등으로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내전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문명화된 인간의 내면에 여전히 숨어있는 잔혹한 야수성에 관한 적나라한 고발이다. 읽는내내 의문이 생겼었다. 전쟁 전에는 말끔하게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을 든 채 출근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하던 이웃 사람들을 단지 종교나 민족이 다른 적이라는 이유로 강간하고 고문할 수 있을까? 혹시 그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애초에 이상이 있던 사람들은 아니였을까? 과연 내가 그들이라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을까? 저자는 경고한다. 보스니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이 지구상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일어났으며 또 앞으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남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만큼 그 가능성이 많은 곳이 있을까?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해서 출근시간 전철에서 읽다가 눈물을 참아야만 했던 적도 많았다. 출근해서도 한참동안 진정되지 않아 피지도 못하는 담배로 마음을 억눌러야 할 때도 많았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슬픔에 앞서 단지 내 자신이 인간이라는, 그리고 그 안에 어쩌면 똑같이 잔혹한 야수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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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손에 잡게 된 것은 새로 나온 도서에 있는 책이 그냥 눈에 들어 와서 이다. 이 책을 보기로 한 것도 끌림이었다.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고등학교 때 시사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코소보 문제에 관해 조금 지식을 쌓았던 것이 배경이라면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다 보고나서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같았고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가 말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내 이웃들이 겪고 있는 이야기처럼 생생히 들려 오기 보다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담담히 읽어 내려 갔다. 나는 설마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믿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읽고 있었고그러기에 나는 소설처럼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은 하나의 주제로 말하고 있다. 야수의 본성 앞에서 정의란 있을 수 없다. 나아가 모든 것은 인간의 편견이고 편견에서 인간은 더욱 야수화되어 가고 있다. 아무도 그런 야수화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입으로만 외치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하고는 거리가 멀다.라고
유태인 학살이 우리 인류에게 준 교훈은 진정 무엇일까?? 나는 이성의 힘으로 정의를 구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한 발상이 얼마나 유치한 것이지도.야수와 같은 본성이 발휘된 인간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도덕, 책임의식, 심지어 양심까지도 우리는 속일 수 있고 야만에 충실할 수 있다. 정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 힘인가??
나는 시종일관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고 믿으면서도 내 스스로 가진 야만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구타를 당하는 때에도 때리는 사람 편에 서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는가를. 우리도 모두 똑같은 인간이기에 그런 위험성을항상 안고 있다. 그리고 그 위험성 속에서도 언제나 진실되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야수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뿐이다. 하지만 만약 어떠한 이유에서 이든지 우리가 진실되게 행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무자비하게 변해 버릴 것이다.
이 책에 말한 것처럼 진실되지 않다면, 즉 우리의 아픈 이웃을 보고 아프다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영영 정의란 이름만 외칠 뿐 정의란 있을 수 없다.냉혹한 역사 기록 속에서 죽은자의 이름으로만 남겨질 뿐이다. [인상깊은구절] 서방 지도자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 정의의 이름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음에도 안 하는 쪽을 선택했다. 밀로셰비치가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그들은 인종청소를 상주는 행위는 절대 안 하겠다던 약속을 포기했다. 그들은 유화 정책을 썼다. 그들은 역사의 중대한 교훈을 간과했다. 평화는 두꺼운 조약 문서나 군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의해 보장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뉴욕 타임스>에 특별한 부고 광고가 실렸다. 대개 그렇듯이 검은 테로 둘러싸인 부고에는 서방세계 정계 및 문화계 지도자 70명 이상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추모 - 우리의 책임, 원칙, 도덕적 가치 1994년 보스니아에서 사망함. 사라예보 포위 1000번째 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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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났다,,, 몇 번의 폭발로 30분만에 전기, 통신, 수도, 가스등은 모두 끊어지고 밤은 완전 깜깜하다,,,간혹 포탄의 섬광만 하늘을 밝힐 뿐,,, 누구와 연락도 안되고 심지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도 모른다,,, 난 빨리 힘 있는 곳의 편이 된다,,, 일단 어느 편이 되어야 밥을 먹을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총을 가질 수 있다,,, 다행히 총을 가질 수 있는 편에 섰다,,, 난 죽여야 할 적군과 죽이지 말아야 할 적군을 판단 하고 죽일까 그렇게 살려준 적이 날 죽일 수 있는데,,, 일단 죽인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나의 생명을 유지 하기 위해서 방해 되는 것들은 일단 죽인다,,, 적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 할꺼다,,, 가끔 고문이나 강간을 할 수 있는 여흥이 벌어 지기도 하겠지 죄책감 죄책감은 그 행동이 죄로 인정 될 때 느끼는 감정이겠지,,, 지금 인간이 발명해 놓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많은 도구들,,, 그 도구들에게 스치기만 해도 팔이 잘려 나가고 위장이 터져 나온다,,, 수술 걍 죽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고 죽일 수 있을 때 죽이고 즐길 수 있을 때 죽인다,,, 당신은 아닐까 인류가 그 동안 만들어 논 종교, 문화, 문명, 윤리 등은 전쟁 시작 30분만에 다 없어진다,,, 그런 전쟁이 지금 이순간 지구 어디인가에 계속 벌어지고 있다,,, 죽을 때 까지 그런 곳에 휘말리지 않음이 감사 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지구가 생긴지 40억년,,, 그곳에서 DNA를 통한 생명체가 이어 온지 몇 십 억년,,, 그 중에 순간이나 마찬가지인 2만년 전에 인간이란 종이 생겨 났고 그 인간들이 이루었다고 믿고 있는 그 얇은 막은 순식간에 걷어 질꺼고 몇 십 억 년 동안 이어져 온 DNA의 본능만 남아서 죽여야 사는 세상이 될꺼다,,, 이 책은 몇 년 전에 유럽에서 일어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간의 전쟁을 취재한 미국의 기자가 쓴 책이다,,, 서로 다는 종교, 다른 인종, 다른 문화,,, 이런 것들이 전쟁시에는 얼마나 나와 적을 자극하는 것들인지,,, 우리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죽여야 善인 세상,,, 그런 전쟁 포르노를 넘 잘 묘사 해 주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유태인을 학살하던 나치들,,, 그들이 왜 나 일꺼란 생각은 못했는지,,, 전쟁은 오래 전의 역사인 줄로만 알고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엄청 떨어진 곳에서만 벌어지는 일인 줄 알았는데 전쟁 포로로 고문당해서 얼굴이 다 깨져 죽은 보스니아인들도 보스니아인이 살고 있는 집에 몰려가 10대 소녀를 몇 십명이 강간하던 세르비아인들도 전쟁이 나기 1년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서로 이웃으로 살았었는데,,, 그들이 나이고
그곳이 이곳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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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전쟁포르노가 펼쳐지는 것이, 순간적으로 한 편의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불행하게도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배경인 1990년대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로 막 이성의 눈을 떠서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훔쳐보던 행복한 시절이 아닌가. 그렇게 행복한 시간과 공간을 누리던 이들의 몸과 마음, 시간과 공간을 유린한 그 악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1. 고지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을 현대에 적용하니,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의 높은 고지에 올라 영향력을 발산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어야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말을 하더니 기어코 장로 대통령을 만들어 냈다. 김영삼 장로와 달리 이명박 장로는 세상이 바라는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한 때 한국 교회를 휩쓸고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휩쓸 고지론은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그 결과가 신통치가 않다. 오히려 개독교라 욕먹는 시대가 왔고, 땅투기와 돈놀이를 즐기는 기독교인들이 청와대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란 말인가.
2. 고지에 있는 사람들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서는 고지에 있는 사람들의 실체가 묘사된다. 윤리와 도덕, 인격적인 고민은 필요 없는 사람들. 아니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단순히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과 수단만을 고민하여,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도달한 유능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보스니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상부의 명령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수행할지가 그들이 배운 전부이기 때문이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그들은 정의와 사랑을 버리고 가는 것이 빨리 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면 고지에 이르를 수 없다.
3. 고지에 오르려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고지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많다. 산꼭대기에 올라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우리들이다. 무엇이 정의이고, 사랑인지 고민하기도 전에 토익, 토플책을 들고 도서관에 처박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제법 짓밟고 올라가는 방법이 효율적이라는 소문이 나서, 너나 할 것 없이 ‘상대평가제도’가 상아탑을 무색케 하고 있다. 고지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구질구질 가난하게 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비전’과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우리의 욕심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에 대한 관심. 사회 정의와 사랑. 좀 올라가고 나서 기억하고 싶어진다. 불쌍하지만 내가 토익 900점이 넘을 때까지는 잠시 잊고 싶다. 안정된 직장, 인정받는 위치에 오르기까지만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집도 사야하고 자동차는 너무 낡았다. 이렇게 잠시 잊고 지내는 짧은 시간 사이에,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서 가슴 설레여한 보스니아의 소년 이범진들은 하나 둘 죽어갔다. 악의 실체. 그것은 우리들 안에 있다고 피터 마쓰는 이야기 한다. 고지에 올라 빛과 소금인 사람들이 그 악을 수행하는 집행자의 자리에 있음을 말해준다.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리는 산꼭대기가 아니다. |
| 내전의 이유가 늘 그렇듯, 보스니아 내전 역시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단지 신문에서 본것과 신문기자가 본것을 자세히 서술한 글을 보는 것에는 참 많은 차이가 있었다. 권력에의 탐욕으로 정치가들과 군인들은 대중을 선동하고, 결국은 '인종청소'라는 이유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사람들 간의 적의를 만들어내버렸다. 광기에 사로잡혀 서로를 유린하는 그 동물들을-아니, 이것은 동물에 대한 모욕이 될지니- 인간이라고 불러야할까. 그래, 인간이기에 그렇겠지 이 괴롭고 비참한 현실 속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조차 없었다. 단 한글자만으로도 섬뜩한 기분이 드는 장면들. 내전의 참사가 너무도 끔찍해서 어느 페이지는 그냥 넘겼다. 고문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나와같이 숨쉬고 먹는 동족이라니 차라리 그냥 죽여버리라구! 세상의 불합리하고 악한 일들에 나는 대항하며 살수 있을까? 저자의 말처럼 읽는 다고해서 그들의 비참한 삶이 바뀌진 않는다. 전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읽는 것은 무뎌진 내 인간으로서의 이성과 판단력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기 위해서다. 죄없이 죽어가는 이들을 보면서 말리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아까워 모른척 조용히 있는 기자처럼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치치하의 선한 독일인(직접적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지 않았으나 삶을 위해 그 정책에 동조한 이들)은 되지 않고 싶다. 제발 그리되지 않길 바라고 있다. 책은...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다-라고 매몰차게 내밷는다. 그저 다른 민족, 종교라는 이유를 서로를 죽이지 못해 찟어버리는 잔인함. 21세기에 인종청소라니 믿을 수 있는가? 구토를 일으키는 쾌락에 빠져든 악몽같은 무리들-그들은 처음부터 야수가 아니었다. 서로의 이웃이자 친척이었고...자기 자신이었다. 하루아침에...그들은 야수로 변하여 함께 저녁을 먹고 축제를 즐기던 이웃을 죽였다. 그들의 가족을 유린하였다. 그들의 딸들을 무너뜨렸다. 전쟁, 그 자체가 악이고 독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방어는 해야하지 않느냐고? 전쟁에서의 방어는 살인의 동의어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 상황에 마주쳤을 때, 우리는 모멸차게 복수를 다짐할지 모른다. 깨끗한 전쟁따윈 없다. 정치인들과 상인들의 더럽고 추악한 전쟁비즈니스에 놀아날 뿐이다. 읽으면서 한동안 내전의 참상에 울분을 참지 못했다. 아직도 이 전쟁포르노는 내 뇌리에 남아있다. 처음보다는 덜 괴로워진다해도 여전히 심장 깊숙히 이 야수들의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겠지 |
| 인터넷상에서 이 책을 추천받고 처음엔 망설였다. 제목만 듣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교화서같은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추천도서 코너에 이 책이 나와있길래 봤더니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책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이게 뭐지? 보스니아 내전과 내가 무슨관계가 있지? 라는 마음에 또 한번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곳의 독자 서평을 보고 읽게 되었다. 작가는 미국의 신문기자이다. 그렇다고 이 글은 보고서나 기사글이 아니다. 작가가 보스니아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하면서 겪은 일들을 일기식으로 쓴 글이다. 일단 번역서 답지 않게 글이 매끄럽고 읽기 편한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가면서는 국적과 나이를 불문한 인간의 공통적인 정서들을 기반으로한 작가의 생각에 공감했다. 또 비록 휴전상황이지만 그 나라내에서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도 느껴졌고 취재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 동료 기자들에게 엄숙한 마음으로 애도하기도 했다.그리고 내기억엔 작가가 직접적으로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왜 전쟁을 하면 안되는지 깨닫게 만들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반전을 외쳐왔는데 이제는 정말 마음속 깊은 곳으로 부터 전쟁을 두려워하고 반대하게 되었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알수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피터마쓰라는 사람이 인간적으로 좋아졌다. 밑에 이미 서평을 쓰신 분들이 좋은 말을 많이 써놯으니 이만 써도 될것같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꼭 읽어보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께 느껴봤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