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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연, 오로지 텍스트, 작가의 죽음, 음성 중심주의(?), 기타 등등으로 유명한 데리다.
인문학 전공생으로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졸업하기 전에 데리다의 저서 한 권은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바, 비싼 책값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과감하게 질렀다. 그 때가 벌써 2월. 이미 반년이나 지났지만, 여러 핑계를 대며 데리다와의 조우를 피했다. 바빴다 - 사실,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무엇보다 데리다의 글쓰기 방식이 생소하여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번에 다시 표지를 넘겼다. 되든 안 되든 끝까지 가 보자고 작정한다. 지난 번엔 주석에 함몰되느라 정작 본문을 놓쳤다. 이번엔 작자 주와 옮긴이 주를 과감히 건너 뛰기로 했다. 기를 쓰고 본문을 따라간 덕택에 아주 흐릿하게나마 데리다가 의미한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의미를 쥘 수 있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데리다는 흔히 해체주의자로 일컬어진다. 차연, 끊임없는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개념은 그의 해체전략을 대변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지식은 없다. 데리다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이 때 데리다가 택하는 해체전략은 텍스트에 나타난 개념을 꼼꼼히-때로는 치졸하리만큼- 분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학자에게 치밀한 사고와 정밀한 분석은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이겠지만, 데리다의 그것은 조금 기괴하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저작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의 핵심어는 당연히 '유령들'이다. 그 어떤 학자가 '유령'이라는 말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논했는가. 기존의 학자들은 사적 유물론, 변증법을 주제로 거대 서사를 다루거나, 자본론에 나타난 몇 가지 공리-이윤율 저하 경향, 가치 생성 법칙, 자본의 실질적 통제 등-를 다뤘다. 유령이라니! 유령과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마르크스가 문제삼는 구절은 '공산당 선언'에 등장한다.
전유럽에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 문장을 문학적 수사어가 아닌, 마르크스의 미래 - 이 책은 90년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의 미래에 관한 강연회 원고이기도 하다-와 관련해 서술한 점은 데리다 특유의 재치다. 더구나 '공산당 선언'은 일반인을 상대로 한 삐라 성격이 강하기에, 이를 진지하게 학술적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학자는 드물었다. 인문학자로서 마르크스를 독해하려는 시도는 '독일 이데올로기 비판', 과학자로서 그를 이해하면 '자본론'이 간택되었다. 데리다는 기존의 전통을 탈피함으로써 다시 해체작업 -그 해체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더라도-에 돌입한다.
'마르크스의 유령'은 한 문장과 몇 개의 단어에 대한 주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찌질하리만큼 데리다는 한 개의 문장과, 한 개의 단어에 집착한다. 그가 택한 문장은 햄릿에 등장하는 대사다.
시간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 (The time is out of joint : 지금 옆에 책이 없어서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저런 문장이었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는 근거로 10가지 재앙(166-171쪽)을 꼽는다. 1.실업 2.홈리스, 이주 노동자 배제 3.경제전쟁 4.시장의 무능 5.외채 누적 6.군수산업 7.핵무기 확산 8.종족 전쟁 9.지하경제(마피아) 10.국제법한계
작금의 상황에서 유령의 귀환은 필연적이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와 셰익스피어의 비동시대적인 동시대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공산당 선언'에서 첫 번째로 명백한 것은 유령이며, 아버지의 모습을 띤 강력하면서 비실재적인 이 첫 번째 등장인물은, 살아 있는 현존이라고 태평하게 불리는 것보다 잠재적으로 더 현실적인 환각 또는 허상이다.(39쪽)
그는 마르크스를 유령들로 인식한다.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처럼, 마르크스 역시 가시성의 출몰(201쪽)이다. 단수의 유령이 아닌, 복수의 유령들인 이유는, 지금까지 존재한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와 앞으로 도래할 마르크스주의의 존재 떄문이다. 유령, 환영, 귀신은 현실과 비현실을 중재하는 존재다. 인간은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푸닥거리(후꾸야마)하지만, 유령은 언제나 돌아온다. 다른 유령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이 유령(망령 - 저서에서 유령, 망령, 환영 등 다양한 기표가 사용되는데 옮긴이에 따르면 이들 간 의미차이는 없단다)을 퇴치하기 위해 귀환한다고 말한다. 그가 판단한 10가지 유령(278-284쪽)은 다음과 같다. 1.신 2.본질 3.세계의 공허함 4.선악 5.존재와 왕국 6.존재들 7.신-인간 8.인간 9.민족정신 10.전체
신을 비롯하여 민족정신과 선악 등 제가치를 비판한 사람은 마르크스 이전에도 있었다. 막스 슈티르너. 마르크스가 보기에, 슈티르너는 유일자에 함몰되면서 구조와 역사를 등한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유령을 퇴치하기 위한 둘 간의 동일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슈티르너를 그토록 비난한 이유는 슈티르너가 자아라는 또다른 환영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정치적인 학자는 아니다. 그가 시도한 일련의 저작들을 근대성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좌파가 선호하긴 했지만, 그 자신은 정치적인 사안에 침묵하거나 판단을 유보했다. 그랬던 그가 '역사의 종언'시대에 마르크스 옹호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시사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 없이는 없다, 마르크스 없이는 어떤 장래도 없다. 마르크스의 기억, 마르크스의 유산 없이는, 어쨌든 어떤 마르크스, 그의 천재(정령), 적어도 그의 정신들 중 하나에 대한 기억과 상속 없이는 어떠한 장래도 없다.(41쪽)
후꾸야마가 외치는 역사의 종언은 한계에 다다른 체제를 은폐하기 위한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물리치기 위한, 푸닥거리. 환경오염, 빈부격차, 전쟁, 공황 등 위기의 징후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감추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하든, 엄연히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다양한 유령들 중 일부가 현 체제보다도 못한 초라한 성적표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곳에 끔찍한 기아, 만연한 부폐, 발전지상주의가 횡행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의 동맹이 그나마 낫네. 데리다는 이에 답한다.
마르크스는 아직도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강연의 부제는 "마르크스-두렵고 낯선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335쪽)
마르크스 강령 의식의 핵심을 나에게 물으신다면, 난 이렇게 답하리라.
1. 욕망의 담지자로써 인간이라는 이념형의 폐기 2. 민족주의에 대한 패배의식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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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역시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