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이 영향이 커서인지 아니면 문화권이 달라서인지 어느분의 말씀처럼 리얼리즘은 없어 보인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리얼리즘을 찾는게 애당초 무리가 아닌가 싶다. 그의 소설을 거의 읽어 보았지만 리얼리즘이 있다고 생각되는 소설은 상실의 시대뿐이었으니..하긴 우리의 문화로 상실의 시대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니.. 그의 소설 '양을 쫒는 모험'을 보며 이것이 하루키다운 소설이라 생각햇는데 그것보다는 좀 더 사실적이었지 않았나 싶다. 렉싱텅의 유령은 인간의 본원적 그리움을 형상화 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왠 유령타령인가하겠지만 그의 환상을 나타낸 것일수 있고 아니면 하루키식 반어적 표현...외로운 인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랄까..모든 것이 오래되었다는데 따른 또 다른 이미지가 이닐까.. 그의 단편중 '침묵'과 '토니 다키타니'는 그래도 리얼리즘이 엿보인다. 그의 학창시절을 써 놓은듯한 침묵은 어느 남자의 고교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말해준다.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을 안겨주는 듯 하다.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우리의 정서가 아닌 그들의 정서로 이해한다면 좀 더 그의 정신과 맞닿을 수 있는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
| 작년에 이맘때즘 읽고 꽂아두었던 책에 다시 손이 간건 왜일까, 한번 읽었던 책을 두번이상 읽는건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내가 이책은 왜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걸까. 매해 이맘때가 되면 반짝이는 전구들과 캐롤송이 흐르듯 흘러가는 사람들속에서 외로움이랄까 쓸쓸함을 이책으로 달래고 있다. 책속으로 들어가면 쓸쓸한 맘 한켠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밀려나온다. 아마도 작년에도 똑같은 경험을 했었던듯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전하고자 했던것도 바로 이런 조금씩찾아오는 따사로운 온기가 아니었을까. 소설속의 렉싱턴의 유령, 녹색짐승. 얼음사나이, 토니다키타니의 친구 K..모두가 내면의 나자신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파티를 벌이고, 누군가에게 사랑빋고 싶어하고, 현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때로는 파도와 휩쓸려 가소 싶어하는...바로..나 자신은 아닐까.... |
| 이제까지 보아 왔던 하루키의 단편집중 최고를 뽑으라면 난 여지없이 이 책을 꼽고 싶다. 하루키의 모든 단편을 섭렵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내가 보아왔던 단편집보다는 훨씬 강렬한 인상을 안겨 주었다. 이번 책의 주 테마는 `상실`이다. 이미 상실의 시대에서 `상실`에 관한 약간의 마름질은 보았지만 난 이책에서의 말못할 그리고 대안없는 오로지 상실감만을 크게 느꼈다. 정말이지 맘에 드는 책이다. 대안없는 상실을 안겨주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에게 절대적인 상실만을 남겨주진 않는다. 오히려 상대적, 추상적인 의미의 상실을 안겨줌을써 현생활에의 깊은 성찰과 활력을 안겨 주었다. 여러편의 단편이 실려 있지만 내가 가장 맘에 들었던 단편은 가장 짧기도 하였던 `녹색짐승`이다. 글이 짧은 만큼 하루키는 독자에게 아주 강렬한 무엇인가를 호소한다. 언제인가 `녹색짐승`만으로 나만의 글을 썼던적이 있는데 그 분량이 상당했다. 그만큼 녹색짐승은 많은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것에 대해 언급하려면 이런 텍스트로 전하는 매체로써는 시간이 부족함을 느낄 정도이니..... 가끔..아니 종종 하루키의 팬중에서는 이 `렉싱턴의 유령`을 졸작(졸작까지로 치부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과장과 더불어)으로 내모는 경우를 보았다. 하지만 난 하루키 팬으로써 오히려 이책이 다른 책들보다 더욱 많은 생각과 감상을 안겨준다고 여기며 최고의 단편집으로 꼽는데 일말의 주저가 없을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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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의 여러 장편들, 에세이 들도 좋지만 단편집인 렉싱턴의 유령을 뽑은 이유는 침묵과 일곱번째남자 때문이다.
정치,연예,사회적 이슈, 각종 사건사고,가십거리가 나올때마다 우매한 대중들이 주는 씁쓸함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침묵',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두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곱번째 남자'.
짧은 단편이지만 장편만큼이나 길고 강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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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적으로 좀 방황기(?)에 있을 때 아는 분이 이 소설집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추천해주셨다. 나는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루키라는 작가를 몰랐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하루키의 광팬이 되었다. 지금 집에는 하루키의 책이 몇 권이나 있다. 하루키는 뭔가 문장에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잔재미라고 하기엔 뭔가 무거운 소재들.. 하지만 그의 소설들은 멋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침묵, 얼음인간이였던가 (꽤 충격적인;) 이게 괜찮았고 3번째 남자라고 하는 작품도 괜찮았다. 하루키의 작품의 매력은 역시 어디론가 신비로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 하루키의 소설은 중독성이다. 그의 소설에 한번이라도 빠져 본 사람은 계속 그의 글을 찾게 된다. 그의 글을 원어로 읽어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까지 다녀온 나는, 거의 말기 증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난주씨의 깔끔한 번역체 문장도 마음에 들고, 편집도 그리 나쁘지 않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용도, 그의 사소설적인 가벼움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 작가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할 정도일 것이다. 사실, 이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아픔의 공유' 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외로움이나 상실감. 나 혼자만이 아프고 외롭다고 느끼는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인간은 누구나가 다 외롭고 아프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각각의 단편이 모두 개성있고 재미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단편은, '침묵'과 '토니 다키타니'이다. 나도 어쩌면 경험할 수도 있었을, 혹은 경험할지도 모르는 아픔을, 경험자에게서 담담히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팬이 아닌 분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은 단편집이다. |
| 하루키는 쉽게 말을 건다. 물론 그것이 내용의 가벼움까지를 포장한다는 말은 아니고, 이 시대 '가벼움'이란 무엇일까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종류의 '묵직한 가벼움'이다. 하루키가 대중적인 작가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왜(!) 대중적인가라는 질문을 한번쯤 던져볼만하다. 여럿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동시대성'의 진실에 기대고 있는 바가 커보인다. '진지함'과 '무거움'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는 '포스트모더니즘'(물론 이 개념이 정확하게 이해된 하에 사용되어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 하루키의 소설이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렉싱턴의 유령="">은 하루키의 그 화법을 적나라하게 구현하고 있는 단편집이다. 섬세함과 (세련된) 낯설음, 다소의 비현실성을 뒤섞은 그의 소재들은 이번에도 그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내도록 했다. 이러한 '가벼움'이 '진지함'을 완연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나, 또한 이 가벼움이 시대의 진실, 하이브리드(잡종)의 자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일만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냄에 있어 요체는 하루키식의 가벼움을 무엇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넘어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이기에) 당연히도 하루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하루키의 말하기는 '여성적 말하기'의 방법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조르주 알마니풍의 작은 안경"으로 대표되는 '여.성.적' 섬세함은 그것에 정당함의 강변 혹은 윽박지름이 아닌, 조용한 훑어보기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직유가 아닌 은유'의 방법을 적확하게 채택하고 있는 작가가 바로 하루키인 것이다. 신비스러운 소재를 다루면서, 그 속에서 나름의 결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의 말하기 방식 역시도, 합리성을 벗어난 '여성의 말하기'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가장 대중적인 말하기 방식으로 사회의 구조를 깨뜨리는, 아주 조그마한, 하지만 소중한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물론 여기엔 나의 아주 많은 희망과, 아주 적은 과장까지를 포함해서.렉싱턴의> |
| <렉싱턴의 유령="">의 경우, 어떤 종류의 아픔이나 상실감을 생생하게 느끼며 공유하는 것에서 그 소설의 유효성이 성립되는 것도 있어, 뭐 이런 것도 괜찮구나 싶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종종 그런 이야기를 몹시 쓰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요즈음 저는 '깊이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책 서문에서 한 말이다. 누군가와 뭔가를 깊이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깊이 공유한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 인지 모르겠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을 해 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런건. 하루키가 말하는 '깊이 공유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친구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공유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에서의 공유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와.. 말 그대로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뭔가를 깊이 공유할 수 있는가 하는 걸 말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렉싱턴의 유령은 그런 과정을 누군가와 뭔가를 깊이 공유하는 과정을 친근한 분위기로 그려낸다. 몽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찌됐든 소재는 '유령'이니까!! ^^;렉싱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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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끝이 없다.. 무어라 명명된 작품이 마지막장을 털고 일어나도 눈으로 보이는 책이 끝났을 뿐.. 하루키의 무어라 명명된 작품은 책과는 상관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만이 또 다시 하루키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만나고 또 시도하고 만나기를 반복하게 된다.. 하루키의 작품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과도 비슷하다..
책 안에는 "침묵"이라는 단편이 있다. 그 단편은 나에게 커다란 공포감을 주었다. 나 또한 나도 모르는 새 어느 누군가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그 막연한 사실이 공포영화를 볼때보다 어두운 방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무서웠다.. 난 침묵하지 않을테다..다짐하지만 누군가에게서 따돌림 당하기엔 내 존재가 너무 약하다는 사실 또한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침묵..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루키는 또 다시 나에게 궁금증을 던져주고 난 또 다시 하루키를 만나기를 시도한다. [인상깊은구절]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말주변이 좋고 받아들이기 쉬운 타인의 의견에 좌지우지되면서 집단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손톱만큼도 품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의미하게 또 결정적으로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런 족속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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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단편은 간결하면서도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기막힌 상상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읽었던 단편집에서도 그걸 느꼈었는데 렉싱턴의 유령에서도 역시 보다 업그레이드된 기발함과 전달력 그리고 여운으로 나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군대 다녀온 이후론 분석력이 떨어져 대상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하지만 글쎄........그보다도 무언가 좋은 느낌을 얻고 나의 일상에서도 그 의미를 발견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지극히 일상적이거나 제삼자가 들으면 황당하거나 별거 아닌 일이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남의 말 하나쯤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보기 역겨운 녹색짐승의 사랑을 모진 말로 짓밟는 한 여자에게서 난 진정한 사랑이 제법 용인되지 않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느꼈다. 그런 상황을 녹색 짐승이라는 극단적인 캐릭터로 그리는 하루키의 직설적인 표현이 오히려 아름답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루키의 작품을 하나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놓쳐선 안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나쁜 마음은 어없어요. 나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당신을 줄곧 사모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런 짐승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녹색짐승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