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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글은 같은 주제를 다루어도 남성의 글에 비해 논리적 비약이 심하고 간결치 못한 맛을 풍긴다. 아마도 이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삶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보고 들은 것들 때문일 것이다. 뉴스 진행에 있어서 중요도가 있는 소식은 남성 앵커의 몫이고, 교사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여전히 교장, 교감 선생님은 남성인 것을 보면서 자라온 나인지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글을 읽을 땐 남성의 글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 역시 그러하다. 그녀의 문체가 어떠하다고 직접적으로 평을 할 순 없지만, 왠지 모르게 문장의 길이가 긴 것만 같고, 그 내용 역시 신변잡기적인 것 마냥 느껴질 때가 많다. 이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문구가 페미니즘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일상적이다. 대중들 앞에서 강연을 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을 만난 이야기까지,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은 어느 누구의 관심을 받을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두 가지의 이유에서 답답한 현실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해 보이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글들이 쓰여진 시기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오해가 존재한다. 못나고 콧대 높은 여자들이 털어놓는 말도 안 되는 자기 불만의 표출이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식의,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통하여 여성을 상위에 놓고자 하는 발칙한 움직임이라는 식의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론 아닌 현실이 먼저 존재했으며, 남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기존 학문적 토대 위에 성립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이런 모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이에 대한 평 역시 다채로웠다. 백인 중산층 여성들이 털어놓는 사회와는 유리된 불만으로 이를 해석한 이들은 기존의 가부장적 사회를 유지한 체, 다만 가사 노동을 도울 수 있는 가정부의 수를 늘리면 된다는 식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좌파도 되었다가 우파도 되었으며, 공산주의자도 되었다가 레즈비언도 되었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에서는 희망이 느껴진다. 이전까지는 전혀 주목을 받지 않던 여성들이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혼자 사는 여성의 많은 부분이 저소득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은 적지 않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혹은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이전에는 의사 남편을 만나기 위해 공부를 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한다는 점은 분명 희망적일 테니 말이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 이상의,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결혼 및 출산 후에도 가정 아닌 사회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여성들을 구속하려 드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많다. 낮은 출산율을 이야기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있다. 거기에, 명문대의 여성 비율이 높아질 때마다 뉴스를 장식하는 대학의 여성화 우려에 대한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왜 남성이 많을 땐 여성의 남성화를 우려하지 않던 자들이 남성의 여성화는 그토록 걱정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는 이는 거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일상은 반란을 필요로 하는 때가 많다. 그 반란이 단순히 몇몇 여성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참여가 가능한 열린 행위이길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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