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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on My Mind :: Nancy Garden 숨기는 것을 못견디는 성격이라 결혼하기 전에 미리 남편에게 모든 연애 전적을 자진 고해했지만 우물거리듯이 한번 슬쩍 얘기하고 차마 두번은 이야기 하기 꺼려하는 과거가 하나 있다. 내 첫키스의 상대가 여자였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 친구와 장난 삼아 해본 것도 아닌 스무살 넘어 진지한 마음으로 해본 거였으니 받아 들이는 상대에 따라선 꽤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지금의 내가 이 이야기를 꺼려하는 건 당시 상대와의 관계가 순조롭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때의 내 치기 어렸던 자아를 견딜 수 없기에 지난 상처를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을 뿐이지 신체적으로 관계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없었던 일 마냥 부정하고자함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두고 타인이 현재의 나를 평가 내린다 한들 그건 내몫이 아니라 타인의 몫이므로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다만 최소한 지인중에 그런 속좁은 편견을 갖는 이가 있을까 조금은 우려한다. 관대한 모양새를 취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틀을 깨지 못하는 이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내 완고함 탓이다. 세상이 점점 비주류에 오픈마인드를 갖는 마냥 오히려 더 큰소리로 화두에 올리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들을 조명하지만 정작 자신의 일이 되면 저렇게 이해한다 이해한다 쇼에 동참하고 싶어질지 의문이다. 이해한다는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고 싶어서 일부러 더 크게 떠들어 대는 건 아닌가? 그들이 있음으로 자신의 주류적 위치를 확인하고 계급의 안위를 쟁취하고자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그저 철없는 자위용 페티시즘의 도구로 사용할 따름은 아닐런지. 게이들이 더럽다고 욕지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게이들의 인권을 보호해주라고 악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그 존재를 자기 자신과 구별하려는 기본 심사가 있다. 같은 처지라기보다 특별한 대상 삼아 유리 건너에서 그들을 본다. 그래서 정작 그들은 스스로를 [이반] 이라고 자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특별해지기 위해 부러 게이를 자처하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의 관용을 과시하기 위해 게이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항상 게이에 대한 소재, 퀴어물은 정체성 결핍자의 흥미를 자극하고 거기엔 언제나 몰이해 라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탐미적인 퀴어물에 열광하는 마음과 현실의 이반들에 대한 이해가 과연 일치하는가? 실은 게이의 고립을 스스로의 고립과 동일시 하려는 심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이반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일일텐데 외모 지상주의의 찬양이 그것을 때때로 짓뭉개 버리는 것은 아닌지. 넘쳐나는, 속칭 야오이물에서 단 한번도 뚱보 추남 게이의 고민을 보진 못했다. 20대의 철없던 나는 잠시나마 나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착각했었다. 단지 집에서, 어미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결핍감을 동성의 친절한 관심으로 채우고자 한 집착이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혼동케 했다. 그렇게 흔들린 정체성을 자기 세뇌로 자신을 특별한 소수자로 만듬으로서 확보하려 했지만 신기루로 만든 것을 손에 잡고자 한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나의 본질적인 문제, 고민, 결핍이 무엇인가를 고뇌하고 나서야 진정한 자아 정체성도, 성적 정체성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당시의 경험은 그러한 좌충우돌적인 시행착오로 다시 되돌아보기 참으로 민망하지만, 그나마 나를 바로 봄으로 소수자들도 바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들이 존재함으로 나의 성적 정체성이 온전하다고 안심하려는 확인 행위가 아닌, 사람이 각자 자기 처한 위치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 그 존중에 대해 생각한 기회였다고 할까. 어쩌면 유전자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살아온 배경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그 모든 선택은 한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마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마음, 이것이 아니면 안되는 마음. 상대를 이용해서, 세상의 잣대를 이용해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 짓고자 하는 이익적 판단이 아닌 오로지 상대 자체를 선택하는 마음에서 시작될 뿐인 것을, 단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개념] 이란 것이 동성애와 이성애로 구분만 짓고 있는 것이 아닌지. 구분의 비율이 이성애에 편중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세상은 동성애의 커밍아웃에 그렇게까지 관대하지 못하다. 동성애자를 친구로 두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어도 자신의 자식이 그런 선택을 한다 했을 때 곤란해 하는 이들이 더 많다. 그래서 이제서야 출간된 이 [청소년 동성애] 소설이 해당 대상인 청소년들에게보다 그 부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가 더 궁금하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로 차별의 금을 확실히 재확인하는 도구로서 활용할 것인지, 자신의 자식이 언제라도 이러한 선택을 했을 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참고서로 활용할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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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대하며 나의 보수성에 새삼 놀랐다. 제목을 한참이나 잘못 읽었던 것이다. '소녀'라는 단어가 반복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ㄴ'하나를 붙여 읽었다. 게다가 다짜고짜 본문부터 읽기 시작한 터라 십여 페이지를 읽고나서야 제목을 다시 쳐다보며, 내용을 이해했다. 나는 논술강사를 겸하므로, 간혹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청소년 아이들과 나눈다. 그러면 더러 같은 반 친구 중에도 있다고 하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도 하여, 성적 소수자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해주는 내가 더 경직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책을 대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녀와 소녀의 사랑이라. 중고등학생 시절엔 동성 친구와의 우정이 이성과의 애정까지 대체할 정도로 특별하다. 그건 동성애와는 다르지만, 그 경계는 자못 아슬아슬하다. 많은 어른들은 이 시기의 특별한 우정과 동성애가 혼동되었다고 여겨, 아이들에게 일어난 감정을 그저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기를 종용한다. 물론 어떤 경우엔 그것이 처방이 될 수 있을 테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별무소용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알듯이 사랑만큼 불가해한 것이 없다. 마치 정치에 대해 그러듯 사랑에 대해서는 수만 가지의 본질과 모습과 방법이 존재해 누구나 사랑을 아는 듯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무엇도 확실치 않은 것이 사랑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사랑을 미리 옷맞추듯이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혼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랑은 그럴 수 없다. 사랑은 이를테면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와도 같다. 그러니, 사랑이란 걸 처음 경험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미리 예방주사 맞히듯 사랑에 대해 주입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일일 것이다. 사랑을 어찌 하겠는가. 그럼에도, 사랑이라 여김에도 동성애에 대해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기란 사실 어렵다. 공리주의의 깊은 뿌리가 흔들리고 모든 소수자들에게 숫적 열세로 인한 부당함을 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이 빠르게 확산되고는 있으나, 그 모든 것은 남의 일일 때이다. 리즈와 애니의 사랑은 불결해 보이거나 온당치 않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애들에게 경직된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소녀끼리의 사랑도 다른 사랑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내 자식의 일일 때도 같이 여길 것인가. 부디 내 자식이 이성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며, 동성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아이의 삶이 무너지는 것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잘 모르겠다. 자식을 키우면서 '절대로'라는 말을 하지 말라 한다.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이 책에 나오는 리즈의 부모처럼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해주며, 닥쳐오는 모든 상황에서 최선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다. 노력하고 있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청소년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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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버킷리스트는 책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이다. 이 책을 우연히 동네 서점에서 보게 되었고, 몇 주 후 yes24에서 구입해서 읽게 됐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소녀들의 사랑이야기, 즉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이 책을 학교에서 읽다가 반 애들한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 둘의 사랑이야기는 너무나 내 이야기 같았다. 나도 좋아하는 한 여자애가 있고 그래서 너무나 힘든적이 많았고 꼭 내 이야기 같아서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이 울었다. 다른 동성애자들 또한 많이 힘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고통이 있다. 정말 내 이야기같은 동성애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어서 죽기전에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은 책으로 이 책을 선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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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제목을 보고 동성애 문제를 다룬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청소년 문학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조금은 조심스럽게 우려를 하며 책을 펼쳤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나의 감정 자체가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성끼리의 사랑이든, 동성끼리의 사랑이든 사랑의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이성 간의 사랑은 당연하며 아름다운 것으로 보지만, 동성 간의 사랑은 아직 그리 당당하게 인정받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많이 관대해졌지만. 주인공 리자와 애니는 동성 간의 사랑을 나누는데, 그들의 사랑은 아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리자와 애니는 자기 할 일도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아름다운 아이들이었다. 그런 만큼 그 아이들의 행동도 긍정적으로 봐주어야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아이들이 나의 자식들이라면 이렇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힘들 것 같다. 타인의 문제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애써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이 관련된 것일 때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상당히 달라질 때가 많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리자와 애니가 서로 이성 간이었다고 상상하고 이 책을 읽었다면 또 다른 느낌으로 이 아이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동성 간의 사랑에는 뭔가 비정상적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잠재해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러한 비논리적인 나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보고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낸시 가든은 리자와 애니의 사랑에 대해 어떤 기울어진 시선을 가지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의 행동과 사랑과 사고방식을 담담하게 보여주기만 한다. 작가의 이런 편견 없는 시선은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움, 자유, 사랑, 가식 없는 순수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정의 물결을 일으켰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들대로의 삶의 철학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비난이나 칭찬을 전혀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마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절대선이라는 것을 누가 규정하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만 스스로 옳다고 믿거나, 좋아하는 길로 걸어갈 뿐이다. 삶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유한의 삶에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타인이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방할 수는 없다. 그건 그 사람 자신의 삶이고, 아무도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거나 책임져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있듯이, 상대방에게도 그런 자유가 있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는 다양한 삶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선진사회라고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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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발견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학교 도서관에서였다. 샛노란 표지에 제목도 너무 분명해서 내가 남자라면 이 책을 읽어도 의심받을 일이 없을 텐데 마침 여고생이어서 동성애자로 오해받으면 어쩌지? 라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걱정을 하면서 남들 공부하는 야자 시간에 정독실에서 몰래 읽었다. 그때는 결국 읽다 말았는데, 지금 끝까지 읽어보니 담담한 목소리의 퀴어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퀴어 문학이 새삼스럽게 소중하다.
이 소설은 1982년에 발표되었지만, 한국에서 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퀴어에게도 유효했다. 첫사랑에 빠진 여자애가 남의 집에서 처음으로 섹스하려다 들켜서 학교 이사회 회의에 소집되고, 그 집의 주인인 레즈비언 커플 선생님은 퇴직을 당하고 주인공 남매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만, 그래도 리자와 애니의 연애는 계속되는 이야기.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은 2009년이었고, 남녀공학인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키스하다가 불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공학이었어도 남녀분반이었는데, 부반장과 반장은 썸을 타고 있었고, 나는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성욕의 유무에서 찾으며 단짝에게 엄청난 집착을 하면서도 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던 중이었다.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서, 다니는 학교에서 학생회장을 맡은 리자는 친한 친구 샐리가 학교에서 귀 뚫기 시술을 하다가 사고를 내기 전 보고를 하지 않은 벌로 1주일간 정학을 당한다. 이후에 있을 사건의 복선처럼 "괜찮다, 리자.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하지. 이번엔 그저 조금 큰 실수를 했을 뿐이야. 그게 다야. 네가 다시는 그런 실수를 안 할 거라 믿는다."(92)라는 훈계를 듣는데, 이는 실수 혹은 잘못으로 여겨지는 청소년기의 퀴어성 발현에 대한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소설은 청소년인 리자의 첫사랑 외에도 스티븐슨 선생님과 위드머 선생님의 오래된 연인 관계가 제시함으로써 이른바 ‘청소년기의 동성애적 성향’으로 불리는 것이 그 시기의 특성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인식과 정체화임을 분명히 한다.
낸시 가든은 애니와 리자라는 소녀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끌림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애착 관계를 맺는 퀴어들이 경험하는 클로짓 상태[1], 탈반[2], 아웃팅[3], 신의 이름을 내세운 혐오[4], 방관하는 혐오[5], 전환치료 강요[6]까지 서사에 고스란히 담았다. 다소 교과서적으로도 느껴지는 이런 서사가 가능한 것은 이 연애를 낭만적으로 대상화하는 대신 보통의 연애로 그려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하고 도둑질하듯 섹스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이 들이닥쳤을 때 어린 연인이 느끼는 당혹감은 레즈비언뿐 아니라 헤테로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특히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장소설에서 순결은 지켜야 할 것으로, 지키지 못한 경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비난받기도 한다.[7]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에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애니와 리자의 고충에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리하여 애니와 리자는 이유 모를 병으로 앓지 않고 죽지 않고 헤어지지도 않고 계속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내가 나인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내가 나인 것을 선택이라고 하든 병이라고 하든,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이들[8]이 나를 처벌하려고 하든 치료하려고 하든,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나는 나여야 하고 내가 아닌 채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라고 '위로'받았고 '안심'할 수도 있다(252). 내가 아닌 외부의 어떤 것에 영향받은 결과라고 오해받거나 변명(286)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위로와 가짜 안심으로 나를 언제까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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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로하는 책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두 소녀, '리자'와 '애니'가 만나 서로 사랑하고, 갈등하고, 성장하는 이야기. 이 책은 아직 동성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 적합하다. 청소년 소설다운 분위기와 플롯, 내용을 가진 책이기 때문에 시야가 넓어진 독자에게는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청소년이 접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은 나오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게 언급되고 지나간다. 1982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2015년을 사는 청소년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한다. 1982년의 청소년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던 이야기였겠지만 말이다. 이 리뷰를 보는 당신이 청소년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당연한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사랑, 가족, 학교에 대해서. 책은 이야기를 통해 뻔하고, 흔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위로를 한다. 너는 괜찮아, 너는 이상하지 않아, 너는 모두와 똑같은 사람이야. 그게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어떤 위로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구원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성장한 사람에게는 지루한 담론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항상 당연하던 부모님의 사랑이 수련회만 갔다 하면 아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쭉쭉 뽑아내는 것이 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때때로 당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위로해줄지도 모른다. 사람은 힘들 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또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누구에게서든, 어느 상황에서든. 그래서 요즈음 인터넷의 익명 고민 게시판마다 그렇게들 고민 글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 당연한 그 말, 별것 아닌 그 말, 그 말들을 듣고 싶어서. 괜찮아, 상처받지 않아도 돼, (이것 역시) 사랑이야. 당신이 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흔한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끝자락, 멘토인 '위드머 선생님'과 '스티븐슨 선생님'의 대사를 첨부한다.
퀴어 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항상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원래 두 사람이 하나로 붙어 네 개의 손과 발을 가지고 있었다지'로 시작되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불만이다. 그 설화는 안 끼는 데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렇게나 똑같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현실의 퀴어 문학 중 일부는 지루하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하고, 지겹다. 새로운 문학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퀴어 문학은 때로 발전이 없는 것만 같이 보인다. 문학은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한다. 1982년의 퀴어와 2015년의 퀴어는, 아직도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생긴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조금 더 많은 퀴어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건 항상 '그리스 신화' 뿐이다. 1982년으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괜찮은 사람들이야. 정말, 정말로. 그렇게 오래 이야기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것일지, 아니면 자신이 알아낸 새로운 사실이라고 생각해서 꼭 집어넣는 것일지, 아니면 그 이야기를 빼놓고는 퀴어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쨌거나 1982년 발표작이 한국에서는 2007년에 초판 인쇄되었다. 그로부터 짐작해 보건대, 우리는 앞으로 20년은 '그리스 신화'를 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퀴어 문학이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나갈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리스 신화'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게끔 말이다.
작성자: 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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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축복 이다 그 축복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자기가 행복하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항상 편견속에서 바라보고 반대 했었던 주제를 깊이있게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책. 안 좋은 편견을 아름답게 꾸며낸 이 책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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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어려운 주제다. 세상이 많이 개방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편안하지 않는 주제다. 그것도 청소년 책 주제로 채택하기는 더욱 더 그렇다. 내가 비록 이 책 내용에 대한 관심이 컸지만 편하게 읽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두 소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소녀끼리 사랑을 나누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문제가 되는 일인가 보다. 리자와 애니 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게 되고 사랑을 나눈다. 책을 읽으며 쉽게 동화되지 않으려는 마음과 그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려는 마음 간의 갈등을 느꼈다. 사실, 여러 매체로 조금씩 그들의 얘기를 들어왔지만 동성애자들의 심정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두 여선생님과 두 여학생의 동성애를 보는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의 반응과 그들 나름의 해결방법에 놀랐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을 예상했었는데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교육자의 신분으로 동성애를 한 두 여선생님은 해임되어 시골로 낙향하지만 동성애가 발각되고 학교를 쫒겨 날 줄 알았던 리자는 학교로 복귀하고, 문제를 확대시켜 이사회 결의까지 몰고 갔던 교장은 해임된다. 의외의 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리자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고 자신의 꿈을 계속 펼칠 수 있게 한 마무리는 마음에 든다. 하지만 리자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찾아간다는 결말이 옳았는지는 확신이 없다. 결과를 두고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보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모순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각자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 가는 것이고 서로 다른 삶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진 않지만, 아직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사랑을 편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도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에 이 책을 청소년에게 어떻게 권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
동성애를 다룬 책을 읽어 본 적이 없기에 책 속에 언급되는 동성애 책이 실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이 불분명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이 책을 조심스럽게 권해 볼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책 속의 리자와 애니처럼 자신들과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얘기로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것도 같고, 아니면 누군가 가까운 사람의 동성애를 이해 못해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확신은 약하다. 아마 앞으로 이런 책들을 더 접해야만 내 안의 다 허물지 못한 편견들을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아직도 멀었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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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잡은 두 소녀의 손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나도 레즈비언 기질이 있어 그런걸까? 그건 아닐거다. 아마 이 책을 읽고나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르지만 아름다울 수 있다고. 그러나 고백하건데 처음부터 맏잡은 두 손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아니었다. 처음엔 호기심 그 다음엔 뭔가 막힌듯한 껄끄럼움, 그리고 책을 덮고서야 곧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저 단단하게 쥔 두 손이 아름답다는 걸.
줄곧 동성애를 보는 나의 시선은 뚫려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니었나보다. 책을 반쯤 읽어나갈 무렵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에 잠시 책에서 손을 놓았었다. 그리고 다시 집어든 책은 순식간에 끝을 향해 달려갔다.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책이지만 산뜻하고 교육적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일까.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 책. 너무 식상하다고 하겠지만 동성애를 다룬 청소년 소설이다. 그러나 동성애코드를 다루기 앞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17살 삶의 단편들을 적절히 버무려놓았다. 구지 예쁘게 단장시켜놓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그러나 희망적으로 저자는 리자와 애니의 매일을 뒤쫓는다.
과제를 위해 미술관을 찾은 리자. 노래를 부르는 애니를 발견하고 한 눈에 매료된다. 그렇게 친구가 된 리자와 애니. 그러나 계절을 보내며 두 사람의 관계는 우정을 넘고,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학교에서의 여러 일을 겪으면서 애니와의 사랑을 키워가는 리자. 여름방학, 집을 비우는 스티븐슨과 위드머 선생님네 고양이를 맡게 되고, 둘은 이 곳을 자신들의 새로운 장소로 만들어간다. 방학이 끝나는 날 그들에겐 어떤 일이 생긴걸까.
이 책이 청소년을 위해 쓰여진 책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풀어낼 수 있던 점이 한가지 이득이었다면, 리자와 애니를 통해 좀 더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던 건 이 책 최고의 장점이 아닐까. 물론 자기가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선뜻 권하기 어려운 책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게 결코 잘못된 게 아니란 것. 그 또한 아름답다는 걸 알려주기에 이보다 좋은 책이 또 어디 있을까.
진실은 때론 아플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 꿋꿋이 지켜낸 진실이라면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비단 동성애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럴테고,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라도 그럴것이다. 자신이 믿는 바를, 소중히 하는 바를 지키고 키워가는 그 모습은, 남이 뭐라해도 당사자들에게 그리고 그 것을 따스히 쳐다봐 주는 누군가에게는 분명 아름다운 빛이 될거다.
그러니 주위의 눈 때문에 진실을 내려놓진 말자. 이 책은 나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이렇게 오랜 시간을 끌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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