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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창기 선생님의 전통과 민속과 문화를 다룬 글들로 엮은 것으로 실명 거론이 많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남의 것을 더 높이 치는 못마땅한 풍토를 비판하는 글이 많다 보니 그럴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이를 칭찬하거나 존경을 나타내는 글도 드물다. 시골 오일장을 함께 돌거나 한산 모시를 찾아가거나 하는 일정에 동행하는 강운구 사진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글이 잠깐 들어 있을 뿐이다. ‘내가 ‘노인’ 하면 마음이 여려지는 것하고는 달리, 운구 씨는 ‘아이’ 하면 넋을 판다. 발걸음 더딘 운구 씨를 어디로 꼬이고 싶으면, 거기에 ‘아이’, 특히 ‘코흘리개’ 있다고 하여라.’
이 책에 강운구 사진가 정도가 실명 거론되며 애정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아주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의 앞과 중간에 실명이 거론되다가 마지막 글 한 편은 오로지 그이에 관한 추모의 글이 있으니 바로 예종해 님이다. (그러고 보면 『뿌리깊은나무의 생각』에도 그이는 등장한다.) 예종해 님은 ‘인간 문화재’라는 말을 보편화한 분으로, 예종해 님 덕분에 우리 나라 전통 문화 정책이 비로소 길을 달리하여 문형 문화재도 지정하게 되었다. 맥이 끊길 뻔했던 여러 전통 기능과 예능이 국가의 보조와 보호를 받고 맥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종해 님에 관한 평가를 읽으면 한창기 선생님이 왜 그이를 높게 평가하는지 이해할 수 있거니와 어쩌면 예종해 님에 관한 평가는 고스란히 한창기 선생님에게 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땅에 포장된 길보다 흙길이 더 많던 시절, 자동차가 못 가는 외딴 마을이 훨씬 더 많던 시절, 온 나라에 신식 숭배 바람이 드세게 불기 시작하던 시절에, 그이는 더러 걷고 더러는 트럭 짐칸에 몸을 맡기고 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을 찾아가 사라져 가는 전통 공예의 마지막 일꾼들을 만나 그 삶과 재주를 글로, 그림으로 기록했다. 아울러 그이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를 찾는 것에도 정성을 쏟아 천구백구십사년에 몸져눕기 전까지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미국과 유렵, 일본의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고 그 결과들을 도록 세 권으로 묶어 내는 데에 공헌했다. 그이의 말을 보거나 그이가 쓴 글을 읽어 본 이는, 그이의 한국말 구사력에 감탄을 했다. 그이는 또한 조선 선비가 지녔다 할 여러 가지 유교의 좋은 덕목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사람으로 기억이 된다. (319 - 321쪽 발췌)
이쯤 되면 한창기 선생님은 우리 문화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전통 계승에만 관심을 두고 전통 재창조에는 소홀하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창기 선생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 문화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본이나 미국 문화를 따라가려고 안달하는 문화 사대주의를 비판한 만큼 우리 문화의 무조건 계승도 비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 한국 문화의 주체성 확립은 우리가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주춧돌로 하고, 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의식주 및 교육을 끊임없이 개발함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새 세대가 우리보다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희생을 감수하고, 그들에게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베풀 극기와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창기 선생님이 귀한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