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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무슨 내용의 책일지? 읽고 나서는 과연 ‘어느 섬의 가능성’의 이야기의 실현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소설이 허구라지만, 인간의 상상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기에 가까운 미래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이룬 발전은 우리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능가하는 것이기에.이 책이 미셀 우엘벡의 소설 중 내가 읽은 3번째 책이다. 그의 책은 대부분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숨기고 싶은 부분을 들추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엘벡의 소설은 대부분 성으로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성적이야기가 반 이상, 심지어 80% 정도일 때도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진 포르노적 상상력을 만족시키는 책(?)이 아니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눈치를 받는다.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하지만, 인간에게 성적문제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기에 그의 성 이야기 속의 지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듯 배고프면 성적욕구보다는 더 시급한 것이 민생고 해결일 것이다. 내가 읽은 책에서 주인공들은 일단 경제적 상황이 좋다는 점이 공통점인 것 같다. 그러기에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삶의 문제, 즉 성적인 문제와 인간의 종적인 문제(생명체), 즉 영생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력의 욕이 부족하기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성적쾌락과 영생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기에 이 책을 성적인 욕망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고, 미래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유전에 관한 지식이 돋보이는 것 같다. 그의 생각, 복제와 우리의 기억과 마음 등 정신적인 것의 테이터화와 다운로드(?) 가능하게 만들어간다. 물론 기존 종교가 아닌 신종종교, 우주인이 지구문명을 창조했다는 교리(?)를 가진 집단에서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미래를 열려고 한다. 종교도 결코 인간의 힘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함하고, 아무리 발전한 형태의 인간이지만 인간의 숙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이야기는 아직도 뒷방의 이야기가 아닐까? 은밀한 부분을 파헤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우리들이 불편한 것 같다. 또 서양문명에서의 나이듦은 곧 퇴물이고, 버려짐이다. 한마디로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그러기에 젊어 보이기 위해 기를 쓴다. 화장을 한다. 운동을 한다 등등 하지만 점점 늙어가면서 많은 문제에서 특히 성적인 문제는 밀려난다. 이제 이런 경향이 세계적으로 만연하기에 우리의 이야기일 수 도 있다. 주인공의 과도한 성에 대한 집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늙음을 잊기 위해 더 젊은 여자에 집착하고, 성행위에 집착하는 것 같다. 우엘벡이 던지는 경고, 나이듦과 성 그리고 종교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감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가 영생을 이룬다고 해도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살아있는 기간을 늘인다고 해서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 인간이 영생을 포기하는 대신에 우리의 DNA를 이어가는 자손을 얻을 수 있는 유성생식을 택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우리의 DNA는 자손으로 이어질수록 사라져 간다. 인간, 존재의 회의에 가진 유일한(?) 동물이고, 번식기 이외에 성을 탐닉하는 종이기에,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사회적 제약(도덕, 제도 등)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기에 오늘도 일탈을 꿈꾸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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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그의 작품은『투쟁 영역의 확장』에 이어 두 번째인데 ─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소립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 그가 자신을 두고 절망의 전도사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책도 두 번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이야기 속의 다니엘이『신적인 환경』을 우연히 주워 읽고 절규를 토하고서 자전거 공기 주입 펌프를 던져 부숴 버린 것처럼 나도 이 빌어먹을 똥통 같은 텍스트의 지침을 들어가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어떤 하나의 가능성, 다니엘과 다니엘25의 가능성, 신경질적이고 쾌활한 개(폭스)의 가능성, <기존인류>의 증언이 일치할 가능성, (고작)그런 것들 때문에 아주 뻔뻔스럽고 밑도 끝도 없는 이 책을 모조리 읽어냈다. 기본적으로『어느 섬의 가능성』은 몇 개의 시퀀스로 무척이나 불편한 에너지들을 만들고 배설한다. 물론 헛되이 생각을 주물러 대거나 폭력으로 기쁨을 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소설 속 예언자가 삶은 근본적으로 보존 옵션이라고 한 걸 보면 나로서는 앞서 말한 이 작품의 특징이 이야기의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이를테면 영화《나쁜 남자》를 보라. 거기엔 인간의 얼굴을 한 고깃덩어리들이 등장한다. 거기서는 검은 옷을 입은 놈이 흰 옷을 입은 년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려 한다. 여기에는 계급의 논리, 밝음과 어둠의 논리, 착취와 피착취의 논리가 있다. 조금 곱상하게 말하자면 <나란히 서기>의 발로다. 타자와 다름이 없는 나란히 서기. 하나 생각해둘 것은 이것을 이 소설과 <나란히 놓고는> 볼 수 없다는 거다. 왜 굳이 접점이 없는 소설과 영화를 함께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의 한기란 인물은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데 소설의 다니엘은 사랑하지 않고도 섹스하기 때문이다. 내가『어느 섬의 가능성』을 앞의 영화의 <+알파>의 개념으로 보는 것도 그 이유다. 이 책의 앞날개에는 <삶의 고통에 눈감고 살아가려 하는 주인공이 치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을 통해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세계의 폐단이 바로 그것이며 현대인의 고통의 근원 또한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책에서 ─ 앞서 영화 이야기를 했으니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하면 ─ <인간은 결코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단 하나 가능한 그의 운명은 주변에 불행을 퍼뜨려 다른 이들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p.68)는 말을 발견한다.
--------------- 저는 대부분의 감상문을 적을 때 줄거리를 언급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도 제 글을 보시고 이 책을 읽고 싶으셔서 기본 줄기가 궁금하시다면 출판사 홈페이지나 온라인서점의 책 소개란을 보시면 될 겁니다. 결국 이것은 서평이 아니라 그저 제 감상일 뿐이고 그 감상이 좀 <있어 보이도록> 가장한 두서없고 맥락 없이 쓴 것이며 대체 무슨 수작으로 이따위 글을 썼냐고 물으실 것 같은 자격지심 때문에 이렇게 부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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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일단 책을 구해야 한다. 절판된 책은 중고 가격이 3만 원에 육박했다. 최근 포스트휴먼에 꽂힌 나는 이 소설의 소재를 알게 되어 읽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당시 다른 소설을 읽는 중이었는데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빨리 <어느 섬의 가능성>을 읽고 싶었다. 책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타입이 아니기에 3만 원을 주고라도 구입할까 고민하다 그만두고 도서관을 두 군데 돌고 나서야 어렵게 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용이 꽤 현학적이다. 늙어 죽은 네덜란드인에 의해 야기된 피로는 주인이 돌아오기 훨씬 전에 증명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p.13) 알아먹질 못하겠다.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정말 어렵게 구한 책을 몇 장 넘기며 처음 든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 22가 보낸 다음 메시지는 반대로 적나라해 좋았다. 나는 멍청한 년처럼 외롭다. 내 보지와 함께.(p.16) 글로 <보지>라는 단어를 접한 건 참 오랜만이었는데 아마 책으로는 처음인 것 같다. 신선했다. 이런 정도의 적나라함이 소설 내내 이어진다. 소설에서 성을 이렇게 직접적인 단어와 방식으로 논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란 이처럼 쉽다. 다니엘 1의 이야기부터 이해의 영역으로 접어든다. 광대의 사명을 가진 그의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힌다. 그의 유머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띠게 하는데 다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정치적, 철학적 논의는 역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고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소설이 길고 집요하다. 나는 긴 글을 잘 읽지 못한다. 그래서 장편보다는 중편을 중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한다. 높은 밀도의 단편이 주는 즐거움을 좋아한다. 장황함이 주는 피로감이 싫다. 긴 소설을 만나면 나는 읽는 내내 이 내용은 빠져도 되고 이 내용은 꼭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책을 읽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읽는 내내 고통스러우면서도 신기하게도 나는 이 소설에서 <완벽히> 빼야 할 만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 장황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더 이상 뺄 부분은 없는. 다니엘 1이 파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요소요소가 그와 공진화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빼야 하나? 아니야. 그렇다면 이건 어때? 이것도 있어야 해. 천천히. 진득하게. 인물들은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데굴데굴 앞으로 전진한다. 작가로서의 그의 끈질김은 읽는 내내 배울 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이토록 집요할 수 있을까? 다니엘 1은 '늙음'에 봉착하고 그것은 에로티시즘으로 집요하게 드러난다. 그는 늙음으로써 창작의 열망을 잃어버리고 늙음으로써 사랑할 가능성도 잃게 된다. 그와 대립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에스더는 사랑을 거부한다. <쿨>한 그녀와 그들에겐 섹스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니엘 1은 이를 괴로워하고 점진적으로 영원을 갈구하며 죽음을 원한다. 이 과정이 커다란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지난한 과정으로 나타난다. 소설에선 다니엘 24,25의 시점에서 인간들의 모순과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것이 작가가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다니엘의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와는 영원히 함께 갈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까지 소설이 주는 인간에 관한 통찰에 개인적으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다음 장면만큼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오직 '나'만이 남은, 요람으로 돌아간 그 안식의 순간이. 늪 사이의 모래톱에 작은 무덤처럼 생긴 그리 깊지 않은 구덩이들이 파여 있었다. 나는 그것들 중 하나에 들어가 누웠다. 모래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그곳에서 살게 되리라는 걸, 숱한 나날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p.464) 미리 구입해둔 <소립자>를 꺼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 끝으로 마지막 장면보다도 어쩌면 더 뇌리에 오래 남을 그의 <일기>다. 더는 못 견디겠다. 너무 고통스럽다. 이제 그만. 끝이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지쳐 버렸다. 나도 정말이지 지쳐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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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을 찐하게 느끼기 전에 전초전을 겪어야할 것 같아 '몇 번의 눈물과 슬픔이 예고 없이 다가와 힘들었다'는 감수성 많은 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선택한 책이다.
'미셀 우엘백'이란 작가는 그 이름의 독특함 때문인지 귀에 낯 익는데,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농업 경제학과 정보학을 공부했고 컴퓨터 관련 업종에서 일을 하다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 평론집과 장편소설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펼친 작가, 그러면서 '소립자'와 '어느 섬의 가능성'으로 문단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프로필 사진 속에 정갈한 이미지에서 풍기는 소심하고 재미없는 스탈같은 상상관 달리, 그의 작품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솔직히는 주인공의 '우울한 여정'이 흥미진진이란 단어완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싸고 별거 아닌 것처럼 일어나는 사건들은 놀라울 정도로 흥미롭다. 그 흥미유발엔 우선 독특한 글의 구성방식이 한 몫을 한다. 처음엔 징검다리를 몇 개 건너 뛴 것처럼 연결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점차적으로 그 연결성을 찾게 되는, 이해 안되는 단계를 인내한 후 찾아오는 달콤한 단서들처럼 현재에서 미래 즉 죽음으로 나아가는 다니엘과 미래의 복제인간 다니엘이 선조를 추적하는 과정이 만나는 방식이다. 층계 꼭대기에서 아래로 한 칸씩 내려오는 다니엘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다니엘의 이야기랄까. 그 절묘한 방식이 컴퓨터가 지지직 끊겼다 켜지는 장치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기도 혹은 연결시키기도 하며 진행된다.
그리고 미셀 우엘백의 문체! 프랑스 사람들의 끝도 없이 빠르게 지껄이는 대화들처럼 쉼표와 쉼표 사이를 무한연결 시키는 문체가 여태까지 프랑스 작가들의 단문으로 다 함축되어 나타나는 회색 슬픔과 묘하게 다르다. 따발총 같은 수다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이랄까? 단어들의 외로움을 위로하는 듯이 설명에 설명으로 덧붙이고, 쉼표에서 쉼표로 연결되는 깊은 한숨 같은 느낌이다. 그 문체와 움직임과 의미가 아름답고 멋지고 푹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다.
이런 두 가지의 특징만으로도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지만, 자연현상을 거스르지 못하고 늙어가는 주인공과 그의 주변인물들의 외롭고도 다양한 삶들이 각각마다 안타깝고 놀랍고 슬펐다. 특히나 주인공이 남자이기 때문에 늙어갈수록 집착하게 되는 남자들의 성적 욕망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시시때때로 많이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늙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죄가 될 수 있는 고독한 현대사회의 문제, 그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벌써 한쪽 발을 푹 담근 나의 현재가 있기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ㅠㅠ
몇 번의 먹먹함이 예고 없이 다가와 슬픔을 쏟아낸 감수성 많은 지인처럼은 아니지만, 미셀 우엘백이 쉼표와 쉼표 사이에 흩어진 그 탄식들이 때때로 나의 가슴을 후볐으니 어쩌면 인간의 그리고 한 남자의 외로운 감성을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 아~ 가을이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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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의 영원한 바람은 영원한 삶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죽하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노인의 말이 3대 거짓말이라고 하겠습니까? 프랑스의 주목받는 작가 미셸 우엘백의 작품 <어느 섬의 가능성>은 요즘 관심을 끌고 있는 체세포복제기술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 신인류의 허상을 꿰뚫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엘백은 첫 장편소설 <투쟁영역의 확장>에서 경제적인 영역뿐 아니라 성(性)의 영역에서도 자유 경쟁상태에 내몰린 서구인의 지옥 같은 삶을 묘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 번째 소설 <소립자>에 이은 세 번재 소설 <어느 섬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성(性)의 경쟁에서 탈락한 남성의 무기력함을 비웃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투쟁영역의 확장>에서는 성과 사랑도 하나의 권력도구에 의해 작용하는 현대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굴복하는 남자 주인공의 욕망이 꺽여가는 과정을 그렸다고 한다면, <소립자>에서는 고통에 찬 삶, 포르노가 지천으로 널려있으나 사랑은 없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 안에는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과 성적인 해방에 대한 냉소 그리고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참담한 절망이 한데 섞여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내 삶은 행복하지 않다. 내 나이 올해 마흔일곱이다.”라고 일기에 적은 작가가 자신의 정신적 갈등을 작품으로 펼쳐 내보인 작품으로 이해됩니다. 작가의 전편 소설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작가는 전편 소설들에 이어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마약과 성으로 혼란스러운 세계가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섬뜻한 예언을 내놓고 있습니다. 실제로 작가가 그리고 있는 현세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한 인생을 살아도 단조로운 일상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 심지어는 가족관계까지도 부정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의 나이라면 요즘 같아서는 한창 꽃을 피우는 나이이지만, 무력감에 빠져 희망을 잃어가는 일상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사에서 “늙어가는 남자들이 경험하는 분노와 치욕을 사랑의 유토피아로 포장한 소설이다. 남자들이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를 견딜 수 없어 우엘벡은 젊음·아름다움·새로움만을 숭배하는 성적 파시즘의 세계로 끊임없이 도피하는지도 모른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늙지 않는 세상에서의 성적 판타지”라는 기사제목을 보고 집어든 책이었습니다만 읽어가면서 감정적인 저항을 많이 느끼고, 읽고 난 다음에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독후감 쓰는 일이 힘에 겹다는 생각에 책상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책입니다. 주인공 다니엘은 무료한 일상에서 만난 젊은 여인과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동안 허무한 느낌을 잊고 관계에 몰두하다가 그 사랑의 공고함에 회의를 느껴 매달리다가 파국을 맞게 됩니다. 엘로힘이라고 하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신흥종교와의 우연한 접촉을 통하여 그들의 음모에 동참하게 되는 다니엘이 얻은 영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체세포복제기술을 이용하여 죽음을 맞은 다음에 다시 어른으로 환생하고, 특수하게 설비가 되어있는 기지에서 살아가는 신인류와 기지 밖에서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몰락한 구인류가 지금가지 누려왔던 문명의 혜택을 깡그리 잃고 석기시대 인류처럼 살아간다는 설정은 왠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결국은 다니엘25가 기지를 탈출하여 신인류가 처음 태어난 곳을 찾아가서 느끼는 아늑함은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사건 자체가 공허함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요즈음 인간의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추적해온 과학자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기억은 금새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단기기억과 중요한 단기기억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꺼낼 수 있도록 저장되는 장기기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저장하는 과정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전에 본 영화 가운데 <다크시티>라는 영화에서 인간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뇌안에서 기억을 담고 있는 물질을 꺼내면 그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입받은 새로운 기억물질에 따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신경세포에게 전달되는 외부자극이 신경세포를 흥분시키는 시냅스흥분과 그 결과 만들어지는 단백질에 대한 정보가 신경세포의 염색체에 기록되는 것이 기억형성의 기본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원본 다이엘(복제를 통하여 태어난 인간들의 조상이지만 수정과 수태라는 전통적인 과정을 통하여 유전자가 이어지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선조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의문입니다.)과 2000여년이 지난 24대 다니엘의 생활과 생각을 교차시키면서 기록하는 형태의 소설이라서 전체의 맥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체세포복제를 통하여 만든 배수체 난자를 어떻게 어른까지 만드는가는 기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복제작업이 끝난 배아를 인공태반장치에 넣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장면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기억은 개체가 경험한 사실들을 유전자에 기록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기억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복제 다니엘들은 원본 다니엘의 삶의 기록을 읽어서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든 인간복제가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인간복제가 영생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작품으로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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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못 견디겠다. 너무 고통스럽다. 이제 그만. 끝이다. 이번에는 정말이지 지쳐 버렸다...... 나는 매듭을 지으려고,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흔적, 자기 자신에게조차 당혹스러운 거추장스러운 존재, 요컨대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을 존재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시도한다. 내 삶은 행복하지 않다. 내 나이 올해 마흔일곱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끝내고 자신의 홈피에 위와 같은 요지의 글을 올렸다고 한다. 조금은 곤혹스러운 소설 읽기를 모두 끝마치고 난 뒤, 소설의 옮긴이가 옮겨 놓은 저 글을 읽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나는 아직 글을 쓰는 일에서 거리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 나이 겨우 마흔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가의 마음 또한 조금은 차갑게 전달된다. 인간으로 사는 일의 힘겨움은 글을 쓰는 자와 글을 읽는 자를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조금 거칠게 훑어보자면 소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다니엘의 사랑 이야기 혹은 다니엘은 어떻게 신인류의 조상이 되어가는지를 따라가는 부분과 그러한 다니엘로부터 시작된 신인류 혹은 다니엘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다니엘24와 다니엘25의 끊임없는 논평의 부분, 그리고 안전한 기지를 떠나 세상을 향한 다니엘25의 여행인 에필로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코미디 쇼를 기획하고 직접 출연하여 큰 인기를 누리게 된 다니엘은 그러한 자신의 인기를 이용하여 여러 여자들과 무차별적인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고, 또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했지만 이자벨이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며 가정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돌연 다니엘은 이자벨과 자신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느끼게 되고, 이미 인생의 정점을 지난 시기에 홀로 남겨지게 된다.
“둘이 나누는 고독은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지옥이다. 대부분의 경우, 부부의 삶에는 사랑이 결국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광신적인 믿음 속에 당분간 덮어 두기로 마음먹는 몇몇 디테일, 몇몇 불협화음이 처음부터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문제들은 침묵 속에서 몇 년 동안 서서히 곪다가 기어이 불거져 공동생활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하고 만다...”
하지만 이렇게 꺼져버릴 것 같았던 사랑은 불씨는 에스더라는 스페인 아가씨의 입김을 통하여 다시금 화악 살아나게 된다. 첫눈에 에스더와의 미래까지를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다니엘이지만 그는 그 운명을 거부하지 못한다. 자신이 얼마나 처참하게 될지를 내다 볼 수 있는 나이이지만 그의, 인간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탄생 그리고 죽음의 운명 앞에 그는 고분고분해지고 만다.
“..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결국 사랑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사랑의 부재 때문에 죽게 된다. 요컨대 그것은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이다. 그렇다, 많은 것들이 첫 몇 분 만에 결정되고, 죽음의 과정은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된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다니엘의 사랑과 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과 동시에 다니엘의 또다른 행보는 신흥 종교를 따라 이루어진다. 엘로힘교라고 불리는 (아무래도 외계인 엘로힘을 믿고, DNA를 이용한 생명체의 창조에도 적극적인 ‘라엘리안 무브먼트’를 염두에 둔 것 같은) 이 단체에 저명인사의 자격으로 참가한 다니엘은 이후 예언자의 죽음과 뱅상이라는 새로운 예언자의 출현 (예수의 재림을 닮은), 학자와 형사와 익살꾼으로 이루어진 고위층들과의 비밀 공유 등을 거치며 새로운 다니엘 혹은 신인류의 창조에 기여하고 이러한 종교의 부흥을 기록하는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 미래의 인간은 성인의 몸으로, 열여덟 살의 몸으로 곧바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연구가 바라는 만큼 빨리 진행된다면, 그 모델은 계속 재생될 것이고, 그들은,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그 이상적인 형태로 영생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를 통하여 이제 엘로힘교를 통하여 신인류가 창조되고 그렇게 현존하는 마지막 인류 중 선택받은 자들의 DNA를 통하여 끊임없이 복제되어 출현하는 다니엘의 후손 다니엘24와 다니엘 25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다니엘로서의 삶의 한 챕터로 존재하며, 계속해서 그 첫 챕터에 대한 고찰을 제 삶의 숙제로 삼는 행보를 지속한다. 그러나...
“... 다니엘1은 내 안에서 다시 살고, 그의 몸은 나를 통해 다시 현현된다. 그의 생각들이 내 생각들이고, 그의 기억들이 내 기억들이다. 그의 존재는 실제로 나를 통해 연장된다. 인간이 자손을 통해 연장하고자 꿈꿨던 것 이상으로. 하지만 내 삶은 그가 살고자 했던 삶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리고 이제 다니엘25는 다니엘1으로부터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140억이던 지구의 인구가 7억으로 줄어드는 인위적인 재해를 겪고, 바깥 세계의 야만인류와 구분되는 보호받는 신인류로서의 삶의 공간을 벗어난다. 인류와 신인류, 그리고 <지고한 누이>에 의해 예언된 또다른 미래인이라는 잘 짜여진 틀로부터 벗어난 다니엘25는 이제 힘겹게 세상 속을 향한다.
“... 그리고 사랑을, 모든 것이 쉬운, / 모든 것이 순간에 주어지는; / 시간 한가운데 존재한다 / 어느 섬의 가능성이.”
종교와 과학이, 성과 속이, 사랑과 섹스가, 동물과 식물이, 남자와 여자가, 노인과 젊은이가, 경배와 질투가 마구 뒤섞인 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니엘25가 위험천만함을 무릎쓰고 세상을 향하는 호기심의 마음을 접을 수 없듯 소설을 중간에서 놓는 것도 쉽지 않다. 그 어떤 메시지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에도 관심이 없는, 그저 무심하게 인간 행위의 모든 어리석음을 향하여 염세적으로 질타하는 듯한 작가의 눈빛에 만족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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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복제를 통해 신인류가 탄생한다. 그들은 광합성을 한다. 밥을 먹을 필요도 없다. 자신의 선조때부터 이어진 자신만의 기지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없이 오로지 네트워크상에서 제한적으로 대화로만 교통한다. 마치 도 닦는 것처럼.
이런 끔찍한-내가 보기엔- 세상이 2000년간 지속되는 가운데, 다이엘24와 다니엘25가 다니엘1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냉소, 불신, 회의, 우울, 좌절, 실망, 고통....
읽고있자니 주로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소립자]에 이어 또 한번 제시된 새로운 미래 인간형을 볼 수 있기는 한데...
읽는 동안 떨떨름함을 감출 수 없었다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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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채울 수 없는 욕망과 좌절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조금은 외떨어진, 그러나 전혀 동떨어지지는 않은 타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본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삶이 낯설어지고 객관화되면서 우리가 열망하면서도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었인지 적어도 반성은 해볼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에는 3명의 다니엘이 등장한다. 인간이라는 종으로 살면서 엔터테이너로서의 사회적 명성과 물질적 풍요를 얻었음에도 절망과 냉소, 늙어 추해지는 육신과 꺼지지 않는 육욕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고통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원인간 다니엘1, 그리고 인류라는 종을 넘어 복제된 신인종인 다니엘 24와 25. 다니엘 24와 25는 자신의 선조인 다니엘1이 남긴 기록을 읽으면서 복제인간으로서 자신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원인간들이 고통스럽게 뱉어놓은 감정의 질곡들을 이해하거나 혹은 재단하는 존재들이다. 복제인간인 다니엘들은 자신들의 DNA속에 살아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인간이 그토록 바라는 사랑을 읽지만, 정작 진화된 이들은 그러한 정서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사소한 매개변수"에 지나지 않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진화가 계속되리라는 가능성, 무수한 잠재성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 그러기에 알고 싶어한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을". 인간이라는 종족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작가가 구하고자 하는 의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삶이 가진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 존재의 결합과 사랑의 성취가 가능한 것인지 말이다. 이에 작가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 욕망으로 끊임없이 성욕을 거론한다. 승화되지 못하는, 그래서 늘 제자리를 맴도는 그 반복적인 욕망을 문제 삼으면서도 인간과 인간은 결코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냥 홀로 남겨진 제각각의 고독한 단자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전망을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작가의 말대로, 행복은 가능한 지평이 아니고, 미래는 텅 비어 있는 것이라면, 대체 희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러나 또 작가는 말한다. 삶은 실제적인 것이라고. 결국 지상을 꽉 채운 실제적인 것들의 사멸 직전의 "떨림"과 "망설임"만이 희망으로 존재한다. 죽기 직전의 떨림과 망설임, 그것은 곧 다니엘1의 자신의 삶에 관한 장대한 기록으로 남게 되고, 그 기록이 다시 <어느 섬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즉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 그 기록만이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문명이고 가능성이다. 번역에 관해 덧붙이자면, 중견 역자의 번역치고는 성의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다. 역주없이 낯선 외국어를 그대로 두거나, 우리말에는 잘 쓰지않는 사물주어 문장이 너무 많다거나, 의미전달이 어려운, 말을 위한 말들이 나열되거나, 서술어가 생락된 문장이 많아 매끄럽게 읽기 어려웠다는 점 밝히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