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운명적 구조가 우리들의 악몽 같은 현실에서 어떻게 변형, 변이되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 모더니즘과 안온한 서정에 빠져있는 한국 시단에,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암울하며 얼마나 더 관심가져야 하는 실체인가를 그로테스크한 악몽과 미학적 아름다움, 과감한 실험정신을 통해 보여주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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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들이 낯선듯 한데도 가슴을 후벼판다. 해설에서 이경수는 '의심과 불신의 시선을 철저히 감시당하며 이타심과 희생정신과 희망에 세뇌당한 채 링거줄이 연결된 꿈 기게가 되어 살아가는 산타공화국의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한다. 냉소 가득한 최금진의 시는 정신 머리를 쭈볏서게 한다. 팍팍한 현실을 삶이 칼날이다. "친구야 혼자서 가라"의 '살아서 지겨운 가난, 너 혼자, 너 혼자서, 다 끝내고 가라'는 내가 본 가난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죽어야 끝나는 가난이다. 시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는 경우는 참많다. 폐부를 찌르는 그의 말들이 달라붙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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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의 첫 시집이다. 기대했던 것만큼 역시 대단하다. 사고나서 하룻밤에 다 읽고 또 읽었다. 사랑에대한짤막한질문........ 그런 시들만 쓰는 줄 알앗는데 그게 아니었다 목이 콱 막혀서 읽기가 힘들었다. 읽어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 말고도 그 뒤에 숨어 있는 울림이 너무 크다 첫 시집을 샀는데 ㅓ 벌써 두번 째 시집이 기다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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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의지’
최금진의 『새들의 역사』(창비, 2007)에는 가난한 이들의 절절한 삶이 시집 곳곳에 산재되어 나타난다.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하고, 사회적 체험이기도 한 ‘가난의 체험’은 최금진의 시 세계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틀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의 세계에서는 웃음에도 “민주주의가 없다”(「웃는 사람들」)고 시인은 말한다. 가난한 이들의 삶에 드리워진 “살아서 지겨운 가난”(「친구야, 혼자서 가라」)의 이미지는 시집 전편에 묘사되는 끔찍한 시적 상황과 어울려 시인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산출해 낸다.
「조용한 가족」이란 시를 보자. 한 노파가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었다. 노파 하나 죽은 게 무슨 큰일이나 되는가? “호상이구만 호상, 닭뼈다귀 같은 노파의 몸을 꾹꾹 펼쳐 놓으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막았다”. 손아귀에 마지막으로 남은 힘으로 흙벽을 긁으며, 또 “허연 게거품을 물고 맞서”며 노파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증오에 찬 독설을 퍼부었을까. 노파가 어떤 생각을 했든, 중요한 것은 그녀는 ‘죽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랍장 곳곳에 몰래 먹다 남긴 / 사과며 과자부스러기들이 쏟아져나온 것 말고도 / 썩은 장판 밑에선 만원짜리 몇장이 더 나왔다 / 발가벗겨진 노파의 보랏빛 도는 입엔 / 서둘러 쌀 한줌이 콱 물려졌”을 뿐이다. “복날이었고 / 뽑힌 닭털처럼 노파의 살비듬이 / 안 보이게 날아다녔다”는 이 시의 결구에 나타나거니와 시인은 더 이상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의 끔찍한 형상을 담담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소재로 한 시가 유독 많은 이 시집에서 최금진은 가난한 아버지들의 슬픈 형상을 시적 세계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폭력을 일삼던 가난한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아 “그 아들도 커서 똑같이 아버지가 되”고 아내와 자식들은 “툭하면 술 먹고 손버릇 나쁜 남편”(「가난한 아버지들의 동화」)과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가난이 가난을 부르고, 가난한 아버지는 가난한 가족을 부른다. 「소년 가장」에서 그러한 모습은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 소년의 등에 올라타 “아비랑 가자, 아비랑 함께 가자”라는 비극적인 이미지로 나타나고, 「수레」에 이르면 그것은 “그의 아버지처럼 / 그도 나면서부터 하반신에 수레가 달려 있었다 / 당연히, / 커서 그는 수레 끄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표현처럼 아비에서 아들로 대물림되는 가난의 끔찍한 형상으로 다시 이어진다. “제일 싼 血 팝니다, / 자본주의 만세!”(「팝니다, 연락주세요」)를 외치는 반어적인 상황으로 표출되는 시인의 냉소적인 태도는 자본주의의 힘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자의 자괴감을 드러낸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표제작 「새들의 역사」에서 시인은 “탯줄 없는 남자들”의 부유하는 삶을 노래한다. “서른일곱에 정착도 못하고 나는 지금도 어딜 싸돌아다닌다”는 시구에 표현되는 대로,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딘가를 끊임없이 싸돌아다니고 있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 유체 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는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나이 서른여섯에 처음으로”(「즐거운 나의 집」) 방 한 칸을 얻었다는 가짜 욕망에 만족하지 않으려면, 시인은 끊임없이 ‘싸돌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싸돌아다녀도 그가 발붙일 방 한 칸을 이 지상에서 얻기 힘들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의 유전자를 받았기 때문일까. ‘지렁이’를 시적 소재로 한 「끝없는 길」이라는 시를 보자.
꿈틀거리는 의지로 어둠 속 터널을 뚫는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으며 흙을 씹는다 눈 뜨지 않아도 몸을 거쳐가는 시간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 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 잘린 손목의 신경 같은 본능만 남아 벌겋게 어둠을 쥐었다 놓는다, 놓는다 돌아보면 캄캄하게 막장 무너져내리는 소리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누군가 파묻은 탯줄처럼 삭은 노끈 한 조각이 되어 다 동여매지 못한 어느 끝에 제 몸을 이어보려는 듯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 「끝없는 길-지렁이」 전문
시집의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하면 다소 이질적인 이 시에서, 시인은 “꿈틀거리는 의지”를 노래한다.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이라는 시구에 내포된 삶에 대한 의지마저 시인은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다시 말해 흙을 씹는 ‘온몸의 숨’이 쉬어지는 순간까지, 지렁이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 움직임이 아마도 생명 있는 존재로서 태어난 사물들이 세상에 되갚아야 할 몫일 것이다. 「새들의 역사」에 등장하는 배꼽이 없는 남자들의 방랑 역시 이렇게 보면 생명 있는 존재들이 거쳐가야 할 몸짓으로 봐야 하겠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을 살아야 한다는 말을, 가난을 제대로 겪지 않은 사람들의 관념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조금씩 움직이는 생명의 몸짓을 그래도 희망이라고 제시한다면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관념의 유희’라고 할 수 있을까.
시인은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의 세계와 다른 장소에 어머니-할머니의 설화적 세계를 배치하고 있다. 시집의 4부에 주로 실려 있는 어머니-할머니의 세계는 여우가 등장하고 배고픈 귀신들이 떠도는(「여자들의 이름」) 설화적 공간에 위치한다. 그곳은 죽음의 세계이지만, 「악의 꽃」에 표현되는 것처럼 여전히 또 다른 생명들이 존재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아버지-나로 이어지는 배꼽 없는 존재들은 그곳을 끊임없이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그 세상은 항상 그들의 주변에서 음화(陰畵)처럼 맴돌고 있다. “부처님이 할머니를 조금씩 파먹고 남겨둔 자리에 / 나는 참 아름답고 준수한 청년이 되어 자라났다 / 여러 겹의 밝은 눈들이 머리에 돋아 / 뜻도 모를 주문들이 적혀 있는 내 몸을 읽기 시작했다”(「거미의 눈」)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이 읽어내는 몸의 기호(의미)는 사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아버지의 세계와 설화적 공간이라는 어머니(할머니)의 세계의 경계에 최금진의 시는 자리잡고 있다. 그 경계에서 시인이 어떤 시의 세계를 펼쳐 보일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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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죽음
(최종규 . 2013 -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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