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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누가 그렇게 말해주었던가, 내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던가, 마찬가지지만. 내가 아직 열여섯일 뿐이라서, 단지 그 이유다.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잃어 본 적이 없다고. 하루하루가 희망차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벽이 가로놓인 것과도 같을 것이다. 불현듯 무언가가 너무 읽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원치 않은 영어공부와, 집중해도 풀리지 않는 너무너무 어려운 수학문제에서, 잘못 고른 전문 용어 가득한 과학책에서 탈출하려고 그랬을 거다. 도서관에 가서 이걸 집어들게 되었다. 정말 별 1개짜리 표지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문장을 읽는 재미가 나에게는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형체를 느꼈다. 흠, 코끼리라는 동물이 주는 이미지가 바로 이렇다. 작품 전체에서 잘 애기하지는 못하겠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는 것, 그런 분위기에 며칠 동안 휩싸였다가, 그 기분이 사라지면 줄거리의 세세한 부분이 도저히 잘 떠오르지 않는 그런 책.
" 그렇게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는 땅콩을 구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라구." 조그만 접시에 담긴 땅콩을 먹으면서 내내 이 구절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스럽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갈라지는'이 마음에 걸렸다. '부서지는'이었던가? J가 '나'에게 했던 말. 어떤 종류의 착각이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가운데서도 수심이 변하지 않는 한 점이 있다, 는 정리定理는 기묘하다. 이 한 구절을 하기 위해 하루키가 소설을 쓴 것 같은, J와 '나'가 존재했던 것 같다. 모든 상황과 모든 교훈이 모든 대사가 이 한마디로 응축될 수 있다, 나는 일부러 그렇게 생각해도 보았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쥐'라 불리는 남자가 사람이 죽지 않고 여자와 자는 장면이 없는 소설을 쓴다, 이거지. 흠, 나도 친구들 사이에서 우스꽝스런 별명을 불린다. 아니, 그런데 그것 말고도, '쥐'란 인물이 견딜 수 없이 나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매미나 개구리, 거미나 바람, 모든 게 하나가 되어 우주를 흘러가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따위가.. 견딜 수 없었다. 나중에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슬프게 느낄지도 모르지, 핀볼 기계를 찾아나서는 나, 쌍둥이와 이별하는 나, 쥐와 그녀와의 이별, 지금은 그 가벼운 문장들을 순서대로 읽고 있을 뿐이 아닌가. 작가와 나만의 공감이 이루어졌다고 믿고 싶어서 하루키의 소설을 택하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완벽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이 소설이 하루키가 처음 발표한 소설이니까 이 구절로 그는 입을 뗀 셈인가, 작게 한숨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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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었는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가장 자주 손이 가는 건 그의 처녀작이다. 쥐와 처음 만나 보낸 시간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주인공들과 작품의 풋풋함이 맘에 들어 종종 읽곤한다. |
| 이책의 내용은 찌는 듯한 여름의 몇주 동안 벌어지는 작은 일상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 끝이다. 더 꾸밀 것도 없고 덧불일 말도 없다. 전공투를 겪어 상실감이 그의 존재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그 책에 서술된 상실감과 허무감 그리고 차가움은 왠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두번째 읽었을 때서야 비로소 나의 일상에 대한 불만과 결락감이 그가 서술한 내용과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음을 깨닫고, 그건 다만 지극히 일시적인 일회성 감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치부했다. 그러나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되풀이해서 읽을때마다, 하루키의 의식 바탕에, 자리한 모든 것을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써내려가는 것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하루키가 흔히 말하는 '그런 거지' 혹은 '그럴 수밖에.....' 이렇게 단순하고 허무한 명제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방황하고 상처를 입었던 것일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면 할 수록 그 존재의 근원에 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가 어쩌다 보면 그런 믿음이 전혀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허물어져버리고 상처입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 시점에서 허물어져버린 믿음과 상처받은 자신 모두에게 '그런거지'하고 가볍게 넘기려한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작품은 결코 가볍지도 그렇게 깊지도 않다. 다만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변수를 조율하는 방법을 자신만의 독특한 체험과 작은 생각들로 우리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
| 상실의 시대로 대표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작품이 바로 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다. 그 후에 나오는 장편소설과 이 작품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에 이어지는 '1973년의 핀볼','양을 쫓는 모험'과 함께 쥐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노르웨이의 숲'까지 그 잔영을 남긴다. 따라서 하루키의 작품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처음 접하는 소설로 아주 적합하다고 하겠다. 여름방학때문에 도쿄에서 고향인 고베로 잠깐 돌아온 '나'와 고향에 있었던 '쥐'의 건조하고 허무하기만 한 10여일간의 일들이 이 책의 주내용이다.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보면 아주 재미가 없다. 다만 문장 하나하나 그 자체를 즐기며 공감한다면 이 소설은 반드시 베스트 목록에 오를 것이다. 하루키....언제 봐도 멋진 것이 그의 소설이다. |
| 넌 아직도 하루키냐.. 약속장소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꺼내놓고 읽고있는 내게 뒤에서 슬쩍 읽던 책을 뒤집어보고는 친구가 무심하게 했던 말이다. 하긴 질리지도 않고 하루키를 읽어대는 나로서는 가끔씩 들어왔던 말이다. 그럴 때 내 반응이란 대개, 뭐, 딱히 읽고 싶은 책도 없고.., 라든가..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집어들고 왔다.., 라든가.., 읽고 싶었던 새 단편집이 나와서 말야..,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만, 하루키의 소설을 한때 유행처럼 무턱대고 읽다가 나이가 들면 한켠으로 밀어버리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데에는 조금 서운한 감이 있다. 그리고, 요즘 한창 방송중인 광고중에 인터넷 지원도 가능하다는 모 휴대폰 광고도 있다. 그 광고의 대략적인 내용이라면, 혼자서 기차여행 중인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통로 건너 좌석에는 마찬가지로 혼자서 여행중인 것 같은 여자가 무언가 열심히 읽고 있다. 그 책이 바로 "상실의 시대"다. 그 여자의 관심을 끌기로 결심한 그 남자는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그녀에게 접근한다.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에는 가보셨나요?"라고 묻는다. 그 여자는 빙긋이 웃어 주고 뭔가 잘 이루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 광고는 끝나지만.. ...이래서야 그 여자와는 잘 될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몇 개인가의 하루키 관련 정보를 검색-상실의 시대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정보-하고 하루키 소설에 대해 아는 척 했다고 해서 하루키 소설을 읽고 있는 그녀와 얘기가 계속된다는 콘티라면, 그것은 하루키 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류의 소설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비교하기는 뭐 하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69"를 놓고 봐도 그렇고.. 내 생각엔 이런거 다,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해다. 적어도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아직도 하루키 신간이 나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초판 발행본을 사들고 뿌듯해하고, 작품 연대기별로 반복해서 그의 소설을 읽고는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읽었던 것이 어제 아침에 읽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다. 이로써 여섯 번째쯤 되는데 비교적 분량도 작고 쉽게 읽히는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기대를 갖고 읽게 되는 책이다. 여섯 번쯤 읽으면서 생긴 독서 습관이라면, "완벽한 문장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으로 시작되는 제일 첫 문장을 소리내어 따라 읽는 것이다. 그리고 한 두어 시간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제일 처음 이 소설 읽었을 때 내가 느꼈던 공감-아무래도 그때 내 나이가 주인공의 나이와 비슷했기 때문에 그렇겠지만-이라든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느꼈던 공감대가 아주 조금씩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뭐랄까, 예전에는 21살이 되는 나의 이야기에 집중했었다면,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21살 당시의 나를 회상하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런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여튼, 우주의 권태에 짓눌려 있는 것 같은 그 시절.., 바람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영혼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까.. 싶다. |
| 하루키가 쓴 다른 장편 소설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하루키는 또 다른 자신을 찾고자 하는 모험을 하고 있다. 어쩌면 전공투이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던 자신에 대한 연민어린 성찰이 아닐 수 없다. 노루웨이의 숲이나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하루키가 쓴 단편선들을 읽어보는 것도 그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책에 나오는 그의 섬세한 묘사 기법은 어쩌면 단편의 습작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노루웨이의 숲의 모티브가 되는 반딧불이라는 단편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루키가 한 때에 유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
| 처음 하루끼를 알게 된 건 군대간 친구에게 "노르웨이의 숲"을 선물하면서 부터였다. 정작 나 자신은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던 책을 보낸 것이었다. 주변에서 하루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가며, 도대체 어떤 글을 쓰기에 그렇게 주목을 받는 것일까 하고 서점에서 집어 들었던 책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다. 하루끼를 처음 읽게 된게 공교롭게도 그의 첫 소설이었다. 별 생각없이 한장 한장 읽어가다가 문득 그 깊이에 경도되고 말았다. 나의 첫 느낌은 '대단하다' 그 자체였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중편소설은 '존재의 이유' 라는 심각한 화두를 던져 주었다. 문장 하나 하나에 스며있는 깊이를 음미해 가며 하루끼에게 빠져든다. 오늘처럼 뜨거운 늦여름이면 다시금 읽어보는 소설. 하루끼를 제대로 알려면, "노르웨이의 숲"보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봐야된다.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댄스 댄스 댄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차례로 읽은 다음에야 읽을 책이 "노르웨이의 숲"이다. 언젠가 영화와 관련된 글에서, 왕가위 감독도 하루끼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은적이 있다. 그 대표작이 "중경삼림"이다. 중경삼림을 볼때 주의깊게 보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나왔던 표현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
| '나'는 1970년에 '쥐'와 만나 18일 동안 지내는 이야기가 축을 이룬다. 그들이 항상 가는 'J'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고, 핀볼 게임을 하면서 시간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서 살아간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는 미묘한 감정에서 그렇게 이별을 하게 된다. 특별히 느껴지지도 않는 애착에서 삶을 그저 관조하는 듯한 '나'의 허무함과 상실감을 그저 담담히 지니고 있을 뿐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이어 '1973년의 핀볼'은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이다. '1973년의 핀볼'은 번역 작업을 하며 208, 209라는 쌍둥이와 함께 사는 '나'와 현실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자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쥐'의 이야기가 나란히 전개된다. 늘상 느끼는 것이지만 하루키의 글들은 깔끔하고 상쾌하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책을 읽고자 하는 가장 큰(?)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전반에 흐르는 극적이지도 않고 잔잔히 흐르면서 세세히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 받을 수가 있다. 상실감들을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들으며, 크게 극복하려는 의지보다는 그저 현실에 몸을 의지하는 모습들에 감정이입이 되는 느낌이다. 굳이 두 소설의 앞뒤를 가리자면 그저 느낌과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
|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더 이상의 말도 필요 없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그 뿐. 내가 읽은 건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9년의 핀볼] 합본이다. 책의 설명에 따르자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하루키의 처녀작이고, [1979년의 핀볼]은 그것의 속편 혹은 2탄으로 여겨지는 두 번째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내가 자주 쓰는 글투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이 정도의 문장 구사와 느낌은 나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믿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중학생 시절에 국문학과 가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으니까. 그 때 썼던 몇 작품들이나 글들도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이 사람은 역시 프로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확실히 세심하고 쿨-한 묘사들이 이어졌고 색다른 비유와 허무한 (느낌의) 대사들이 이어졌기에. 아마추어로서는 범접하기 힘든 수준이다. 그 후엔 하루키는 멋지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죽였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기억에 남는 대사는 - 표지에도 소개되어 있어서일진 몰라도- 다음과 같다. '사람은 내버려둬도 죽고, 여자와 잔다. 그런 법이다.' 이 대사가 작품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면 약간 무리가 따르겠지만, 단지 이미지, 혹은 느낌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렇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책을 죽이면서 내내 허무함과 공허함, 그리고 상실감이 찾아왔다. 그게 매력이 아닐까? 내 앞에 죽어있는 책은 ... 그런 것 같다.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는 내 페니스를 보고 "당신의 레종 데트르(존재 이유)"라고 불렀다' 난 책의 위와 같은 구절을 보고 과연 이 책의 '레종 데트르'는 뭘까 고심해봤다. 결론은 다음 번엔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보자는 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