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질 무렵 바다에 나갔다. 만조의 바다는 파도에 부딪히는 물결과는 또 다른 장관을 그려 내고 있었다. 바다를 찾았을 때 나는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나름대로 고정시켜 놓았던 내 마음이 무너져 버렸기에, 그 마음을 들쳐낼 수 없었기에 절망을 안고 바다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바다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다. 최근에 읽은 책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세상을 향한 절망감과 불신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쌩뚱맞게 바다에 나가 왜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내 안의 절망감으로 인해 코페르니쿠스의 고독을 이해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허구로 채워졌다 해도 저자가 만들어 내는 주인공의 내면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자신이 닥터 코페르니쿠스가 되어 세상을 바라볼 것이고, 닥터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동안 살아갈거라 생각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속으로의 공간이동에는 성공 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내면 속으로 온전히 들어갔다고는 생각되어 지지 않았다. 소설이기에 주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비춰줄 거라는 나의 생각은 철저히 외면 당했다. 저자 스스로가 이 글의 성격상 코페르니쿠스의 온전한 전기로 보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존 반빌이 그려내는 코페르니쿠스는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을 인물임에는 틀림 없었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의 삶이 차근차근 전개 되는 과정에서 그가 지동설을 주창하게 되는 시기로 들어가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역동적일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 에서는 그를 특별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청년 시절을 보냈던 로마와 피렌체의 음울함은 그의 인생 전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예감할 수 있었다. 평생을 가톨릭 수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면서 천문학자, 의사이기도 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생각이 이 세상에서 관철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동설을 주창함으로 인해 외부의 핍박이 도드라지게 나타날거라 예상했지만(외부의 핍박이 없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피폐한 내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실패작 이라 여겼던 그의 방어 때문이었다.
그의 평생의 결과물인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를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일한 제자 레티쿠스 때문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고 있었던 때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집기에는 그도 두려웠을 것이다. 레티쿠스의 설득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동설을 온 세상에 알리기에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가 숨을 거두던 날, 출간된 책을 보면서 파기를 요구했던 것 처럼 그는 평생을 지독한 고독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의 주창을 가설이라고 얕보던 사람들과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괴로움이 책의 출간을 미뤘는지도 모른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한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냉철함이 부족 하듯이 세상이 자신의 주창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바꿔갈지 그도 알 수 없었기에 내면의 혼란은 당연했다.
전기소설로 이 책의 장르를 나누기 전에 코페르니쿠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존 반빌의 섬세하게 펼쳐지는 언어의 유희를 따라가기에는 녹록치 않기에 흐름을 읽기 보다는 순간순간을 저자가 그려내는 고독에 맡겨버리는 것이 더 편하다. 그의 글을 다 읽고 났을 때 비로소 한 인간을 그려내는 방법이 독창적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자가 만들어 내는 혼란의 늪 속에서 이끌림을 받다 보면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추악하지만 아름다웠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내가 만조의 바다에서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던 것은 절망 그 자체를 보듬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코페르니쿠스의 고독을 알아 갔다는 사실이 내 안의 절망을 누른 것은 아니였을까. 그가 낱낱이 드러낸 절망과 두려움에서 용기를 얻었기에 바다는 내게 가만히 귀 기울이라고 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
|
닥터 코페르니쿠스/존 반빌/조성숙/뿔/ 2007 과학 서적을 읽다가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도피성?으로 읽게 된 전기 소설입니다.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연 인물로 회전이라는 뜻의 레볼루션을 혁명이라는 단어로 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죠. 폴란드 왕국 중 왕령 프로이센 지역 토룬에서 독일계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리를 가공하는 과거 집안이었다고. 코페르니쿠스의 주 직업은 사제였기 때문에 라틴어 식으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라고 알려져있습니다만 독일식 폴란드식 다양한 발음이 있는 인물입니다. 참고로 당시 프로이센은 과거 튜턴 기사단국의 영토(이것도 이야기하면 또 한 없이 길지만 십자군원정이 있었을 당시 이렇게 기사단이 세운 소국가들이 있었다는) 이며 전쟁 끝에 일부 할량 되어 폴란드 왕국 왕령 프로이센 지역이 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이른바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고. 코페르니쿠스는 예나 지금이나 골치 아픈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큰 누나 바바라, 작은 누나 카트리나, 형 안드레아스가 있었고 막내로 태어납니다. 큰 누나는 수녀가 되었고 작은 누나는 상인 집안에 시집을 갔고 형과는 함께 교육을 받았으나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처럼 사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기본 사제였지만 상당히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매독으로 인신이 망가졌으며 동생의 앞길을 여러번 막을 뻔 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부분 실존 인물이기 때문에 적어도 형이 있기는 했다 싶기도 합니다만... 1부는 코페르니쿠스의 교육 시대 어머니는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코페르니쿠스가 열살 되던 해 사망. 사제인 외삼촌이 조카 형제의 교육을 맡아 여기 저기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합니다. 그라쿠프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는데 브루제프스키 교수를 통해 지동설을 접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볼노냐에서 신학을 배웠으며 부르노 교수의 시험?에 넘어 갈 뻔한 일이 생기기도. 실제 볼로냐 대학에서 레기오몬타누스의 책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이었다는. 파도바에서 갈레노스 즉 갈렌의 저술을 바탕으로 하는 의학 공부를 했는데 소설 속에는 코페르니쿠스가 실제 의사로서 활동했지만 실은 자신이 돌팔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그려집니다. 재밌게도 학위는 패라라 대학에서 받게 되는데, 당대에는 어느 대학에서던 수업을 받고 나서 학위증을 받고 싶은 대학에 가서 따로 구술 시험에 통과하면 학위증을 내 주었나 보더라는.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젊은 남자 지롤라모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그려지나 곧 헤어집니다. 2부는 코페르니쿠스의 활약 시대 금의환향? 하게 된 코페르니쿠스는 주교가 된 외삼촌 바렌로테가 거하는 하일스베르크 성의 내과의로 임명되고 주교의 추치의이자 비서로 일하면서 성내의 갖은 일을 다 하게 되는데, 그 당시 사제라고 하는 직함은 지금과 같은 종교만 업으로 삼는 이들이 아니라 엘리트 지식인이자 관료이고 정치인이었으니 말이지요. 외삼촌이 죽은 뒤에는 프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주로 거하였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옥상에서 별을 관측하였다고. 하지만 이 시기는 종교 개혁이 시끄러울 때라 유럽이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서 한창 맞부딪칠 때였으니 이래저래 전쟁을 막으려 애쓰고 터지고 나면 조약을 맺고 전쟁 후를 수습하는 일도 해 내야 했는데 의외로 일을 상당히 잘 해 냈더라는. 이후에는 계속 푸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서 기거했으며 소설 속에는 성당 안의 쪽방과 옥탑방에 기거하는 조용하고 침울하고 자신의 책이 세상에 알려져 풍파를 일으킬까봐 두려워하는 노인으로 그려집니다. 3부는 코페르니쿠스를 설득하여 책을 출판하게 만든 루터파 사제 레티쿠스의 독백 자신이 젊은 시절 자신이 거하던 비텐베르크에서 음침하고 외진 푸라우엔부르크 대성당에 코페르니쿠스를 찾아가 설득하여 결국 출판을 해 내는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최종 출판에 자신의 이름이 배제되고 엉뚱한 모함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친구 기세 주교의 음모였다고 의심하면서 불평에 가득차 있지만 지구가 중심에 있지 않다고 해도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세상의 중심인 존재라고 말하는 낭만적 기질도 다분한 모습을 보입니다. 마지막 4부는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최후로 그의 말년과 뇌중풍, 그리고 안드레아스 오시안더와의 만남을 가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실제 죽기 직전 인쇄 출판된 자신이 책<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직접 받아보았다고. 레티쿠스 처럼 루터파 사제인 오시안더는 이 책이 원활하게 출판되게 하기 위해 코페르티쿠스의 허락없이 이런 저런 문구를 삽입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 십년 뒤 결국 이 책이 금서가 되고 그때 아니 그 사이 아니 그 이후로도 구교와 신교사이의 전쟁이 계속 된 걸 생각해 보면 이 구교 사제가 쓴 책을 루터파 사제들이 출판하려 애쓴 점이 참으로 가상하다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라고 해도 지구가 돈다는 그 자체만을 받아들입니다. 전체적인 틀은 사실 프톨레마이우스 시대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며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 바뀌었다고들 하지요. 타원 운동이나 가속 운동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기에 등속 원운동을 고집했고 그래서 주전원이나 대원, 이심원 같은 기존 이론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천구 개념도 그대로 있어서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성들의 배열과 주기, 당시에도 관찰되었던 행성들의 역행 문제가 잘 설명되는 체계였죠. 오시안더는 종교계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의 책 내용이 천체를 측정하고 계산해 내기 위해 도출한 것이다라고 덧붙여 연구 가치를 축소시켜 출판하였지만 (물론 위험방지용으로)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을 다르게 보는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어려운 천문학적 내용은 거의 없다 시피하며 그보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소설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당시 엘리트들의 생각, 엘리트들 곁에서 사는 보통 보통 사람의 욕망, 코페르니쿠스의 인간적 고뇌 등등... 이래저래 길게 썼습니다만, 그 당시로 잠시 돌아가 역사극을 본다 생각해도 좋고 적절하게 문학적인 요소가 가미된 제대로된 전기문학을 한 편 감상한다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독성이 상당히 좋은 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