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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놔, 이런 황당한 책을 봤나. 이렇게 리뷰를 시작해보자.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했으니까. 이 작품은 그야말로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부류, 평론가들이나, 혹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작품이 아닌 자신의 지식을 치장하기에 바쁜 부류들이 딱 좋아할 타입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황당하니까. 책 소개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레싱의 소설들 중에 가장 술술 읽히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짧은 장편. 한편으로는 과학소설.>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나는 레싱의 소설을 세 번째 읽는 것인데, 이 작품은 그중 가장 안 술술 읽힌다. 레싱의 작품 중에서만 안 읽히는 게 아니라, 내가 리뷰를 쓴 이후 540편에 달하는 작품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과학소설? 나는 그 소개를 한 사람에게 묻고 싶다. 과연 어떤 부분이 과학 소설이라고 느껴졌는지. 내가 보기엔 과학과 관련된 문장은 한 줄도 없었는데?
오에 겐자부로의 [체인지링]을 읽을 때의 악몽, 그게 재현되었다. 278쪽의 많지 않은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작가가 무엇을 얘기하고자 한 것인지. 전체의 내용은 물론이요, 어떤 경우는 하나의 문장조차 이해가 안될 경우가 많았다. 아, 이런 황당할 때가 있나. 뭐? 그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어느 시점.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끊임없이 생각하는 화자 '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소녀 에밀리, 개도 고양이도 아닌 휴고, 그리고 제럴드와 준. 물질 문명 시대가 '쫑'나고 그 시대에 쓰이던 단어조차 사라진 세상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현실 세계는 아이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무정부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삶을 살고 화자 '나'는 주야장천 관찰만 한다. 그러다가 어떤 환상과 현실을 혼돈하고, 또 그러다가 폭력에 대한 고찰, 계급에 관한 고찰. 아 짜증나. 이게 스토리이다. 이 표면으로 드러난 이야기를 눈으로 따라 읽었다고 그걸 이해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위에 내가 나열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내가 이런 이야기겠지, 라고 억지로 생각해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대체 이게 무슨 얘기야, 라고 할 법하다. 억지로 애써도 뭔 얘기인지 모르겠다.
일단 SF는 꿈도 꾸지 마시라. 이 책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그저 공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그걸 환타지 문학이라 한다면, 으흠. 그래. 그래서 이 작품이 환타지 문학이 된 거겠지. 이 작품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여졌다. 나는 많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딱히 싫어하는 건 없지만, 오로지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으로 쓰여진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이라든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 [토요일]에서 쓰여진 의식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차이는 간단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도 독자인 내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생각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전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 따라가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사용된 의식의 흐름은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다. 무엇에 대해 공상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읽으면서도 알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작품을 쓴 작가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린 아이가 펼치는 밑도 끝도 없는 공상의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한 단락은 이해가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전의 이야기와 무슨 연관이 있는 얘기인지 모르겠고 말이지. 아주 예전에 봉숭아 학당에서 맹구가 지껄이던 이야기, 선생님 눈이 와요, 눈이 와서 배가 고프니까 자전거가 망가졌어요. 뭐 이딴 식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도저히 화자 맹구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
문제는 또 있다. 번역이다. 나는 역자에게 또 한 번 묻고 싶다. 과연 이 작품을 확실히 이해하고 번역을 한 것인지. 문장이, 한마디로 어쩔줄 몰라하는 것 같다. 단지 문장이 길다는 이유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길고 호흡도 맞추지 못하고 정리를 하지 못해서 갈팡질팡하는 듯한 문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문장은 좋고, 어떤 문장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것이 과연 도리스 레싱 고유의 문체일까? 불행히도 이 작품이 내가 읽은 레싱의 유일한 작품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레싱의 다른 작품은 이런 식으로 난삽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다. 좋아, 레싱의 여느 작품과는 달리 실험적 문장이었다고 치자. 증거는 또 있다. 이 역자의 다른 작품을 내가 안 읽어봤을까? 물론 읽었다. 그 역시 그다지 번역이 깔끔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배경으로 해서 현실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면 이 작품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들도 많다. 사라마구의 작품들도 그렇지 않은가. 굳이 애써 난독증에 걸린게 아닐까 의심해가면서까지 이런 작품까지 읽을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레싱의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니 이 작품은 비추이다. 정작 해설이 필요한 작품에는 해설이 없고 말이지. 하긴, 해설이라고 있어봤자, 또 꿈보다 해몽이었을테니 있어봐야 없던 감동이 생길 리도 없다. 해설자의 끼워맞추기식 논리에 짜증이나 났겠지.
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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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moirs of a Survivor :: Doris Lessing 타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자신과 엇비슷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극렬히 혐오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경험과 그로 인해 자기 내부에 만들어진 체계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그 구분에 당위성을 얻기 위해 이미 세뇌 되어진 사회 규범에 기대거나 타인의 동의를 편파적으로 수집한다. 자신의 이해 한계를 넘어서는 도무지 불가해한 것을 맞닥뜨렸을 때는 전적으로 그 공동의 규범으로 잣대를 대어 오로지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정도만의 판단을 내린 뒤 안도하며 그너머의 진실은 기어이 외면하고자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자기 희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신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타인이 한다 했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려함은 곧 자기 부정이 되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 긍정을 지키기 위해선 자신이 건널수 없는 영역은 모조리 타인 부정으로 갈라야 하는가? 때때로 [존중] 이라는 말이 무섭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네가 그러는 것은 이해할게] 라는 말에는 뚜렷한 선긋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해] 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이해] 라는 말은 그저 의미를 알다, 뜻을 해석하다는 사전적 의미에 그칠 뿐인가? 내 자신이 할 수 없어도, 받아 들일 수 없어도 그 의미는 알겠다는 말은 분명히 모순된 말이다. 그 말에는 자기 부정도, 고뇌도, 희생도 전혀 없이 오로지 자기 가치와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기적 오만함만이 있을 뿐이다. 타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존중] 함으로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에도 타당성을 얻겠다는 계산이 깔려있기조차 하다. 자기 행위가 부정 당하거나 비난 받았을 때 곧잘 [당신도 저지르는 무언가] 로 반발하고 되공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자기긍정을 위해 타인부정을 한다거나 타인긍정을 위해 자기부정을 해야한다는 그 사이에서 [존중] 이라는 말로 선을 그어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숙명이 지독히도 고독하다. 영원한 반목, 그 반목의 확장, 세포분열. 우리는 이미 스산한 디스토피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쟁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타인을 짓눌러 나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이 시대를 어떻게 풍요로운 시대라고 할 수 있을까. [존중] 이라는 말로 경계하며 멀리 떨어져 냉소하거나 경멸하며 끝내 단절하고자 하는 그 비겁함과 남루함에 있어 [고독] 은 사실상 사치가 아닐까? 스스로 선택한 자기위안, 자기만족을 때때로 무료하고 권태롭다며 고통으로 미화하는 행위에 보상까지 바라고 있지 않은가. 레싱은 자신의 모든 전작에 있어 [관찰] 을 테마로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모든 것" 을 면밀히 공들여 바라보면서 이해하고 받아 들이려 애쓰며 결코 판단 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그의 자기가치적이 아닌, 뼈를 깎는 듯한 자기 회의, 자기 부정의 고뇌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그 어떤 작품보다 이 작품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자기만의 아파트, 자기만의 공간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벽과 벽 사이의 수많은 방들은 화자인 "나" 의 정신분열적 환상이자 모든 대인 관계에 대한 한 사람의 체계이기도 하다. 맨 처음 비어있는 방들에 대한 "나"의 기대는 타인에 대한 기대,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도 같다. 그러다기 "나"의 인생에 에밀리 라는 어린 소녀가 개입 되면서 "나" 의 방들도 보다 분명한 생김새를 갖게 된다. "나" 는 자신의 방들, 자신의 체계에 의해서 에밀리를 해석하고 납득하며 때때로 그 할애에 심란해하고 부담스러워 하면서 또한 스스로의 통찰의 평수를 넓혀나간다. 에밀리와 [세대차] 를 갖고 있는 "나" 는 에밀리를 보며 자기 회의를 거듭한다. 그녀의 치기어림, 순수한 오만함, 자기만의 세계의 성립과 붕괴 그 모든 과정을 "나" 도 이미 경험으로 체득했기에 앞으로 닥칠 에밀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게 되지만 그 예측이란 것이 실은 자기 기만이 아닐까 반문하고 반성한다. 사람의 행위가 같은 양상을 보인다 해서 그것의 폐해를 선대가 미리 바로잡아야 하나? 규범을 정해 후대에게 세뇌시켜 대물림 해야 하나? 인류가 정하고 관습적으로 따르고 있는 모든 규범이 과연 진실인가? 그 모든 것이 실은 자기 납득을 위한 타인 부정에서 기초된 것은 아닌가? 부모가 이것이 옳다 하여 아이에게 강요하는 그 무엇이 과연 늘 옳은가? 가령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먹는다하여 식사예절을 어긴다함은 그저 국지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일뿐, 그것을 [진실]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원론적 의문에 레싱은 과감히 아나키즘을 제시해본다. 기초없이, 규범없이, 아무런 세뇌없이 자란 아이들을 묘사해 그것의 한계와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 아이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에밀리와 제럴드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결국 규범을 제정할 수 밖에 없는 선택에 좌절한다. 규범없이, 또한 그것을 정하고 강요하는 계급없이 만인 평등적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그를 실현하기 위해 [통제] 가 불가피하다는 딜레마는 무력감의 벽이 되고만다. 소통하지 않고 창 뒤에서 바라만 봤던 늙은 방관자들도, 소통하기 위해 인도의 무리에 어울렸던 젊은이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 와 에밀리, 제럴드, 그리고 그들의 동물(책임이자 희망인) 휴고는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 마침내 그들은 벽 뒤의 공간, 진정한 화합의 유토피아, 합일된 소통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곳이야말로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는 곳이었기에.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체계로 판단 내리거나 나의 규범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가장 진정된 것이 아닐까. 이해한다는 말로서만, 존중한다는 선긋기로서만 자기 영역, 자기 가치 확보를 위함이 아니라 진정 자신을 회의하고 반성하며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디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런지. 규범과 질서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러나 그 규범이 각자가 다른 것이라면 오로지 반목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을까? 자기 희생과 인내에 조금만 더 힘을 기울인다면 세상은 좀더 유토피아에 근접해가지 않을까? 그것이 꼭 자기 부정만은 아닌 것을, 어째서 인간은, 나는, 편협한 시각으로 고독을 사치하며 안이함만을 추구하고 있을까. 자기 긍정을 아득바득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진실한 소통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한계가 고통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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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이 SF에 속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다.
내가 알고있는 SF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 느낌만으로 SF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건방진 발언이지만.. 어쨌든 난 SF의 향기를 전혀 맡지 못했다.
도리스 레싱 여사님 책 중에 가장 술술 읽히는 작품이래서 술술 읽어보았지만
읽고난 다음 남는것이 단 하나두 없었다.
어려워서 그런지 아니면 술술 읽히는 이야기를 내가 이해를 못해서인진 모르겠다.
다 읽고나서 내가 멀 읽었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아이들의 집단 폭력과 권력을 그려내지만
나에겐 와닿는게 전혀 없었다.
주위에 이 책을 감명깊게 읽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에 대해서 들려달락고 하구 싶다.
다. 내가 놓친 한권의 책을 .. 자세히 듣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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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해체되어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어느새 이야기는 핵심을 향해 빠르게 달려나가고 있다. 암울하고 섬뜩한 이 시대의 기억은, 그녀가 이야기를 끌어내며 언급하는 첫머리의 말처럼 개별적으로 파편화된 것이 아닌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다.
에밀리와 휴고, 그리고 제럴드와 아이들은 화자의 현실과 환상을 뒤흔들며 끊임없이 자맥질한다. 벽을 넘나드는 내면의 여행과 길을 건너며 벌어지는 수많은 과정, 단지 창밖을 바라봄으로써 경험하는 소극적인 부침은 그곳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의 이유가 된다. 목격자가 되던지 피해자가 되던지, 혹은 울거나 웃던지.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도시와 속속 떠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자리를 계속 지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비극이다. 익숙해지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이 시대를 살아내고 난 그녀에게는 이것이 끔찍한 진실이 된다. 화자가 풀어내는 이 시대의 단면에서 가장 용인하기 어려운 불편함의 대상은 역시 어린이들이다. 단지 어린이일 뿐이지만, 아니 단지 어린이일 뿐이라서 마음이 서늘해 지는 장면들. 그리고 이 소설이 전달하는 메세지가 더욱 명징해지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단지 어린이일 뿐이라서.
1975년에 이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것은 이런 설정에 더욱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디스토피아와는 또 다른 무저갱의 미래상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다. 덧붙여 집단과 개인에 대한 레싱의 면밀한 통찰력이 번쩍거리며 빛을 발하고 있다. 읽기 자체는 사실 그리 쉽지 않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 환하게 책장을 관통할 수 있는 혜안을 길러주는 멋진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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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된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SF판타지, <생존자의 회고록>! 이 작품은 지난 2002년에 '황금가지'에서 양장본으로 출간했었던 '환상문학전집' 1기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그동안 절판 상태에 있었는데 이번에 '도리스 레싱'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되었다. 반짝반짝!!~('클라크'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오디세이'시리즈도 재간되려나?...;) 읽은지는 몇 년 되는 작품으로 당시의 기억을 어렴풋이나마 되살려보자면, '절망의 시대에 소외받은 두 영혼을 통해 바라보는 미래 사회의 희망'이라는 작품 소개와 같이 전체적인 분위기가 암울함과 우울함에 침울함까지 풍기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물질문명이 종말된 상태의 혼란의 시대를 맞이해 현실 세계와 가상의 공간 사이를 넘나들며 방황하던 한 여인이 어느 날, 어린 나이에 깊은 상처를 지닌 '에밀리 메리 카트라이트'라는 꼬마 여자애를 일방적으로 맡게 된 뒤부터 현실과 환상이 마구 교차하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두 사람이 거칠고 폭력적인 현실에 맞서며 낯설지만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과정이 다소 신비롭기까지 한 내용인데 '감동적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이다'라는 평에 비해 꽤나 어렵게 읽은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에 언제 한 번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마음만 먹고 있던 터에 마치 재촉이나 하듯 이렇게 재간되었다.('도리스 레싱'의 작품중에서 그나마 '가장 잘 읽히는 작품'이라니 내가 아무래도 뭔가 잘못 읽은 듯도 싶고...^^;) 동일한 출판사에서 동일한 번역자에 의해 재간된 책이다보니 혹시 '표지와 판형만 바꿔서 부랴부랴 출간한 것은 아닐까?'싶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싶어 몇 군데 살펴봤는데 초판양장본에 있던 오자가 여전히 수정되지 않은 것이 보여 처음엔 다소 실망감을 금치 못했으나 다른 부분을 보니 오자는 아니지만 수정(교정?)된 것도 눈에 띄이는 것으로 보아 본문 한 번 재검토 안하고 표지만 딸랑 바꿔 재간하며 값은 값대로 올려먹는 비양심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리고 싶다~(선물로 받은 책인데 뭘 따지고살피고투덜대고 하느냐!싶겠지만 돈주고 구입하는 독자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그것이 결국 출판사를 생각하는 길이기도 하니 따져 볼 것은 일단 따져 봐야지...^^;) 하지만 번역자의 해설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는~ 덧, '황금가지'의 '환상문학전집'은 지난 2005년 9월경에 출간된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이후 '무려 2년만에' 출간되었는데 많은(제발 많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기다리고기다리며기다리는 <아메리칸 가즈_American Gods>나 <달은 무정한 여왕>,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 꿈을 꾸는가>가 아닌 것은 다소 아쉽지만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환상문학전집'시리즈가 다시 한 번 분발해 멀리멀리저멀리 팔딱팔딱 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혹시 알아? 다음주부터라도 덜컥!덜컥!하고 출간될런지?...^^;) 덧덧, '도리스 레싱'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미출간된 작품들과 더불어 절판된 작품들도 출간되겠구나 싶었는데 대표작이라 할만한 <황금 노트북_The Golden Notebook>도 1997년에 '평민사'에서 두 권짜리로 출간된데 이어 이 달 말경 '웅진'의 임프린트 브랜드인 '웅진문학에디션 뿔'에서 세 권짜리로 재간된다고 하니 이 기회에 아직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식민행성 5, 시카스타에 대하여_Re:Colonized Planet 5, Shikasta>와 네 편의 속편으로 이루어진 '아르고스의 캐너퍼스'시리즈가 출간되기를 다시 한 번/ 다시다시 두 번/ 다시다시다시 세 번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