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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만 하고 써야만 하는 그 '무엇' 을 위하여
"읽어야만 하고 써야만 하는 그 '무엇' 을 위하여" 내용보기
The Golden Notebook 1 :: Doris Lessing 하루에 서너시간씩 책을 읽는다해도, 누군가 행여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라든가 한술 더떠 ["독서광" 이시군요] 라고 빈말로라도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만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 책을 많이 읽는 이가 지식인 이라는 공식이 당연시 되다못해 추앙받고 있는 현실이다보니 곧잘 자기 자신을 "독서광" "활자중독증" 이라
"읽어야만 하고 써야만 하는 그 '무엇' 을 위하여" 내용보기
The Golden Notebook 1 :: Doris Lessing

하루에 서너시간씩 책을 읽는다해도, 누군가 행여 [책을 많이 읽으시는군요] 라든가 한술 더떠 ["독서광" 이시군요] 라고 빈말로라도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만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 책을 많이 읽는 이가 지식인 이라는 공식이 당연시 되다못해 추앙받고 있는 현실이다보니 곧잘 자기 자신을 "독서광" "활자중독증" 이라 못내키는 마냥 추켜세우는 이들을 봤을 때의 위화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나 자신에게 그 허울이 덮어씌워질라치면 격렬히 손사레를 쳐서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책에 순기능만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는 것, 또한 그 많이 읽는 것을 "드러내는 것" 은 지식과 그것을 뒷받침 하는 경험이 불충분할 때 자기 오류라는 독이 될 때가 더 많다고 본다. 하루에, 한달에 책을 몇권이나 읽는다고 리스트와 권수를 갱신하며 과시하는 이의 생활은 지극히 폐쇄적이거나 사회와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의 지식은 오로지 책으로만, 책에서만 충당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책은 오로지 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활용하지 못하는 책읽기는 결국 자가당착일 따름인거다.

그러한 회의감 때문에 나는 설령 1년 365일 매일 한권씩 독파한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결코 "책읽기에 능한" "독서광" 따위의 수식어를 붙히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만한 시간을 "도피" 하고 "외면" 하고 "자기합리화" 를 하는데 썼다는 것이 들통날까 오히려 겁이 난다. 게다가 읽은 책이 너무나도 훌륭한 책일 경우 그것을 "읽었다" 고 으스대는 내 자신을 미래에 가서 경멸할까 두렵다. 어린 시절 "읽었다" 고 뻐기던 세계명작에서 지금 이 나이에 이르러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재발견할 때 도대체 "독파" 와 "권수 갱신" 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던걸까 하고 심한 자괴감에 빠져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독파" 라는 말 자체부터 이해하고 있었던걸까? 그저 자기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가식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뿐이 아니었을까? 타인에게 인정받고 추앙받고자 하는 욕구를 넘어 자기 만족에 중독되어 스스로마저 기만해왔던 것이 아닐까? 이 한권에서 모두 얻을 수 있는 삶의 진리를 나는 과연 실천하고 살았던가? 실천하지 않는 책읽기가 과연 "독파" 인가? 활자 따라가기에 의한 아드레날린 충족만으로 "독서" 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하는가?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남기는 글도 "독서감상문" 이라고 할지언정 결코 "리뷰" 라든가 "서평" 이라고 하지 않는데 그 형식을 거의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철저히 객관적으로 책을 분석하고 소개하는 타인의 리뷰나 서평 자체는 매우 좋아하고 도움도 많이 받고 있지만 나 자신은 도무지 그렇게 쓰지를 못한다. 그나마 최소한의 예의라면 책 타이틀을 올려놓고 쓰는 글이니만큼 간략한 내용 소개만 한단락 쓰려하는 편이지만 그외에는 순전히 내 자신의 경험이나 책을 읽는 동안 스쳐 지나갔던 잡스런 생각의 정리로만 채운다. 그래서 책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결코 객관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개인글이다 보니 항상 분량이 길어져서 책에 대한 흥미마저 반감시키는 경향도 없잖아 있는 것 같다. 때문에 "리뷰쓰기" 라고 공개적으로 마련된 공간에 글을 올릴 때 늘 일말의 미안함을 갖게된다. 책에 대한 카탈로그를 보려는 사람들 눈에 거치적거리는 민폐가 될까봐. 그럼에도 뻔뻔히 올려보는 것은 혹시라도, 이러한 글을 읽고 같은 생각을 했노라고 "소통" 할 사람을 어쩌면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랄까. 그것이 이 책의 역할 아니겠냐고 스스로 자조하면서.


독법은 단 하나입니다. 도서관과 서점을 뒤지며 흥미 있는 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책들을 읽다가 지겨우면 그만두고, 질질 끄는 부분은 넘어가되, 의무감에서 혹은 유행이나 일반적인 동향에 속한다고 해서 절대, 절대로 읽지 마십시오. 스물 혹은 서른에 지겹다고 느낀 책이 사십 혹은 오십 세에는 저절로 손이 갈 테니까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면 독서하지 마세요. 글로 쓰여진 것만 사고하도록 제약받아 온 이들은 눈앞에 있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열기만 하면 쓰여지지 않은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쇄된 지면을 당신의 주인으로 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공감을 느끼는 책에서 다른 책으로 옮겨가며 당신의 방식대로 읽도록 교육 받았어야 했어요. 자신의 요구에 대한 직관에 충실하도록 배워야 합니다. - 내가 쓴 글들을 읽고 당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자신의 삶과 경험에 견주어 보는 게 어떤가요?


'독서하기' 에 대한 의문과 나만의 자가당착에 사로잡혀 있는 와중에, 노벨문학상으로 재조명된 레싱의 [황금노트북] 작가 서문은 커다란 위안이 되는 동시에 믿음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글이었다. 그는 이 책이 출간된 뒤 의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독자 반응으로 느꼈던 당혹감을 솔직히 토로하고 독자와 작가 사이의 간극을 고민하며, 결국 그 간극이 소설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을 도출시킨다. 즉, 시대를 있는 그대로 저술할 사명을 갖되 그에 따른 다채로운 반응 역시 시대의 일부분 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좌파 정치 성향으로 읽히든 여성 운동 성향으로 읽히든 작가가 그것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읽는 이의 각자 해석으로 받아 들여지는 편이 그럴듯하게 한 방향으로 매겨지는 비평보다 낫다고 그는 강조한다. (작가 서문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키워드가 있음으로 반드시 읽고가야 하지만, 본문 완독 후에도 다시 한번 읽으면 좀더 열린 시선으로 읽히게 되는 효과가 있음으로 꼭 서문 재독을 추천한다)

레싱의 너그러움 덕에, 이 책은 기나긴 분량임에도 그 어떤 책보다 부담없이 여유로이 읽을 수가 있었다. 활자 취득에만 급급했던 기존의 독서 방식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느리게 읽고 오래 사고하는 기회를 가져다 준 책이기도 하다. 또한 '글쓰기' 에 대한 회의와 고통을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끝끝내 견뎌 그 가치를 터득하게 해주는 길을 모색해주었다. 주인공 안나가 솔 그린에게 전해준 황금노트북은 곧 작가 도리스 레싱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가. 무엇을 생각했는가. 일단은 그 메모를 안나와도 같이, 한 자 빠짐없이 이 아래에 적어보련다. 어쩌면 여태까지 적어왔던 "감상문" 중에 가장 긴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리뷰" 란에 버젓이 올라 읽게될 이의 눈살을 먼저 찌푸리게 할지 몰라도 작가가 안나와 솔을 통해 분열의 종말을 통한 무정형의 세계를 갈망했듯이 나 역시 누군가 공감해줄 이를 찾아 그의 내면에서 나를 재발견하고 싶다. 서로가 적어내린 "황금노트북" 을 교환하고 공유함으로써.

 

자유로운 여자들 1

소설은 주인공 안나 울프의 삶을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으로, 타성적이거나 비판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자유로운 여자들] 챕터는 안나의 절친한 친구 몰리와 그의 헤어진 남편 리처드, 그리고 그들 사이의 아들 토미를 중심으로 하여 3인칭 서술이지만 사실상 안나의 1인칭적 관점에 붙잡혀 이야기 된다. 성공한 기업가로서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리처드와 자유와 인권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자임을 자청하는 몰리 사이에서 진리를 혼돈스러워 하는 토미를 바라보며 안나는 안타까워하고, 몰리와 리처드가 각자 갖고 있는 모순을 비판하려 하다가도 자신도 그 범주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회의감을 갖는다. 정치와 사상의 원론적 갈등을 메타포한 극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주제에 도달하기에 앞서 몰리와 리처드의 갈등은 일반적인 남녀 갈등 혹은 이해利害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갈등으로 우선 읽힌다.

성인이 되어서도 백수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 토미에게 자신의 회사일을 맡겨 사회적 신분과 책임을 주고자 하는 리처드에 비해 아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게 하고자 하는 몰리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몰리는 그 '자유' 라는 명목으로 부모의 역할을 가볍게 떨구고 토미를 방임하다시피 해왔다. 토미가 자신과도 같은 생활을 하겠다는 선언이 그나마 그녀의 부모로서의 도덕심을 건드릴 따름이다. 리처드는 토미에게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가정을 배신하는 자신의 도덕적 이탈에 상관없이 토미에게 사회적 위치만 자리 매겨주면 부모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믿는다. 아버지의 가식적인 생활도, 어머니의 무책임한 생활도 거부하는 토미는 중재자인 안나에게 질문한다. 왜 어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책임감을 회피하며 아닌 척만 하냐고. 그 질문에 안나는 자기 회의, 비판, 붕괴의 경험을 떠올리며 묻어 두었던 그녀의 "노트들" 을 꺼내면서 노트의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몰리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피부 껍질이 한꺼풀 벗겨지는 듯한 쓰라림을 느꼈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리처드와 같은 천민 자본주의자들을 경멸하는 내 태도에서, 몰리의 캐릭터를 통해 일말의 열등감과 수치감이 느껴졌다. 제도권을 거부하며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내 삶의 태도나 교육 방침이 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설 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모순 역시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몰리처럼 제도권에 소속되길 거부하고 그것의 부조리함을 느꼈을 때 과감히 박차고 나오는 행동주의자적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태까지 진실을 인지하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해왔다. 가령, [아이의 인생을 부모가 제한해서는 안된다] 혹은 [아이 스스로 주체적 삶을 살도록 해야한다] 는 명제를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주변 환경 이탈로 인한 반작용과 그에 따른 두려움 등으로 선뜻 부조리의 주류를 거스르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 답답함을 느끼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자신의 자가당착이자 오만함이었다. 몰리는 토미에 관해 완전히 안심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모든 네가티브를 리처드에게 일임하려한다. 그러면서도 몰리는 계속 리처드의 행동 여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안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자유로운 여자" 로서 홀로 세운 사상을 신뢰하지 못하고 타인의 동의 혹은 배격되는 타인의 사상으로 오히려 자신의 사상을 굳건히 하는 모순만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자유" 는 전적으로 리처드가 존재함으로서 성립되고 비슷한 부류의 안나를 통해 증명받음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토미와 안나가 회의하는 사상의 허상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느끼는 순간, 내 자신이 주장하고 집착하는 것을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 의 대척점을, 나는 과연 비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내 반사적 "행동" 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그 근원을 외면하고 "행동" 이 옳다는 종교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몰리의 주류 거부에 깊게 동조한다해도 그 행위 자체가 그녀의 위치를 정해준다는 것, 혹은 스스로 안주할 위치를 매김하기 위해 그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을 직시 해야만 한다. 주류와 비주류는 이미 상생하는 하나의 존재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영원히 반목함으로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상대의 가치를 파괴시킴으로써 나를 존재시킨다는 착각이 바로 그 부조리의 원흉이 된다. 그러나 진리는 그 반대다. 내가 존재하려면 나 자신을 우선 파괴시켜야만 한다. [왜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이길 바랄까] 하고 안나는 자문한다. 작가는 그것이 결국 안나가, 우리가 가야할 길임을 명시하고 그 길 끝에 다다르려면 자기붕괴, 그리고 회복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이른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색색의 노트북은 그것을 위한 착실한 "퀘스트 수행" 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검은 노트

검은 노트는 안나의 안정적 수입원이자 동시에 자신을 옭아매는 저작 [전쟁의 변경지대] 에 관한 내용과 그것이 쓰여지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이 인정을 받아 금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과연 그 책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자신이 작가로서 그만한 소명을 다했는지 안나는 회의한다. 무엇보다도 "진실" 을 서술했는지 끊임없이 반문한다. 노스탤지어적 로망에만 사로잡혀 얼마나 자기변명적 서술만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세상은 제멋대로 깊이를 측정하며 입맛좋게 오독했는지를 자조한 안나는 소설과 현실의 괴리감을 통감하며 소설쓰기의 절필을 선언하고 오로지 사실만을 적을 것을 다짐한다. 세상이 격찬하는 [전쟁의 변경지대] 의 본바탕, 즉 진실은 얼마나 가식적이고 초라했으며, 무기력하고 부끄러웠는지를.

몇번인가, 내가 쓴 글이 "우수글" 로 뽑혀 공적인 자리에 오른다든가 어떤 매체에 활자화 된 적이 있었다. 의지를 갖고 응모한 것도 아닌, 그저 우연히 셀렉트 된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심한 자기모멸감을 느꼈다. "우수글" 만 특별히 모아 제본화 해줬다는 책자에서 내 글을 발견했을 때, 일반적으로 느껴야 될 자부심은 커녕 '이제 더이상 글을 쓰면 안되겠다' 는 위기감을 도리어 느꼈더랬다. 사실 그때까지 내심 [언젠가 소설 한편 정도 쓰게되면 좋겠다] 고 꿈꿔왔지만 그 감정의 체득 이후 나는 그럴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글쓰는 재능이라는 것은 단지 신선하고 창의적인 문장만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아니었던거다. 사실을 "적당히" 잘 조합하고, 그 사이의 위화감을 적절히 컨트롤 할 줄 알며, 세상에 드러내었을 때 어떤 피드백이든 감당할 수 있는 배짱, 그것이 진정한 글을 쓰는 재능이 아닐까.

그에 비해 나는 세상에 드러냈을 때 비로소 내 오류를 깨닫고, 그 오류가 "우수" 하다고 칭찬 받는 것에 안절부절 했다. 전문성을 가진 작가도 아니며 완벽주의자도 아닌데도 이렇게 내 자신을 견디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을 "업" 으로 할까. 차라리 호되게 지적받아 앞으로 정진할 여지라도 남겨두는 것이 너그러운 것을,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은 이미 지옥으로 분류된 낙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수" 의 기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쓴 글" 이 도대체 뭐란 말이냐. "진실" 을 있는 그대로 빠짐없이 나열한 것? 아니면 "진실" 을 솜씨좋게 축약한 것? 세상의 공감을 최대한 몰표할 수 있는 글? 아니면 세상을 불편하게 하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이게 하는 글? 자기 가치를 최대한 드높일 수 있는 글? 아니면 자기 붕괴를 서슴없이 감행한 글? 나의 "우수한 글" 은 어디에 해당되는 글인가. 모두 다 끌어내어 카테고리에 분류하고자 했을 때 수치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자기가치적"인 글 나부랭이들뿐인가 말이냐.

"사람들이 나에게 동의할 때 나는 내가 잘못되어 있음을 느낀다" 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나 다자이 오사무가 생전에 남긴 자기모멸적 글귀들이 그나마의 내 도피처다. 그리고 안나가 토미에게 비난받는, [어째서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며 경멸의 태도만을 유지하느냐] 는 그녀의 노트들이 또한 내 자기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다. 무능력하고 여피스러운 젊은이들이 그럴듯한 사상만을 앞세우며 불평등이니 공평이니를 떠들어대도 정작 "일어난" 사건에 한없이 무책임하고 무기력했다. 그것을 소재하여 글을 써서 "인정" 받은 안나는 스스로에 대한 애증에 괴로워한다. 사실 이 "진실" 은 비난받아야 마땅할텐데, 오히려 칭찬을 받는 것은 결국 "진실" 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결국은 그녀의 소설은 향수에 젖은, 그저 "자기가치적" 이 된 글에 불구하지 않은가.

 

빨간 노트

 
그러한 관점에서, "사상" 이라는 것도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본주의가 되든 사회주의가 되든 모두 '자기가치의 성립' 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공산당에 입당하고나서도 안나는 부조리한 현실과 스스로의 무기력에 자조한다. 사회주의를 앞세워 "평등" 을 주장하는 이들도 하나같이 자기만의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거나 스스로에게 불리할 때만 "운동" 한다. 영국내에서 간첩최로 처형당한 이들을 위한 구명운동을 하면서 정작 소련내에서 고통받는 인민들에게 무심한 현상에 안나가 의문했을 때 몰리는 "바쁘니까" 라며 자기합리적인 대답을 한다. 어쩌면 그 한마디가 우리의 기만적 태도를 전부 아우르는 말인지도 모른다. 대관절 도덕의 기준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자기 안위를 발판삼아 스스로를 변명하고자 할 때 쓰는 잣대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정의] 를 입에 올리며 [부도덕한] 누군가를 비난하는 내 심리 저변에 근본적인 불안은 과연 없는가. "사상" 은 그것을 돕기 위한 몰핀일 따름 아닌가.

TV 프로그램에서 가끔 불우한 이웃의 생활을 인권에 상관없이 낱낱히 보이며 ARS를 통해 모금을 할 때, 나는 서슴없이 전화기를 들면서도 그것에 한정 금액이 정해져있다는 것에 안심하는 마음을 느끼고 소스라치곤 했다. (최근에는 그나마 한도를 정하지 않는 ARS 모금도 생긴 것 같다) [도움을 준다] 는 행위는 언제나 긴장감을 준다. 아니, 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선의를 베풀었다는 뿌듯한 마음 저편에 느끼는 [안도] 의 마음 때문에 그렇다. [여기까지] 라고 한도를 정해놓고 그 다음 자유로워지려 할 때 그렇다. [돈] 으로 베풀고 만족감에 빠져 [인권] 을 도외시할 때 그렇다. 누군가 불우한 이를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며 그를 호되게 질책하는 나 자신을 [정의롭다] 생각하는 그 착각 때문에 그렇다. 내가 그 경솔한 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어쩌면 발각당한 내 무의식적 "어두움" 에 대한 수치감 때문일지도 모르지 않나. 도덕과 정의와 그것을 아우르는 사상은, 나의 불안정한 상태를 그럴듯하게 설명해내는 "도구" 일지도 모르지 않나.

레싱이 안나를 통해 드러내는 영국 공산당의 실체는, 이타와 이기를 갈등하다 봉사라는 선행의 형태로 타협하는 이들과 고독과 권태에 내몰려 "소속" 을 바라는 이들의 오합지졸 모임과도 같다. 아마도 그것은 비단 공산당 뿐만이 아니라 "사상" 이라는 지성을 간판으로 내건 모든 "당" 의 실체와도 같지 않을까. 진정 그 "사상" 에 동의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상" 을 자신의 위치에 맞게 재조정하여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은 "사상" 은 아무래도 좋고,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하여 소속한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소속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으로 "사상" 을 타인에게 주장하며 역으로 자기 자신을 애써 설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란 노트

 
노란 노트는 안나가, 아마도 자신의 상태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의도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안나 그 자신인 소설 속 주인공 엘라는 관계에 대한 회의감으로 자기 천착에만 몰두하려 하지만 친구 줄리아(몰리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의 권유를 받고 어떤 파티에 참석했다가 폴 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폴은 유부남으로서 엘라를 애인으로만 두고 가족으로 복귀하곤 했기에 갈수록 그에게 소유욕을 느끼게 되는 엘라는 고통스러워 한다. 내용만으로 보면 매우 통속적인 연애 소설이지만, 안나는 남녀 관계에서 흔히 오는, 여자 스스로 만드는 속박과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만이 아니라 관계 자체에서 오는 대립의 원인에 대해 사고하고자 한다.

엘라는 폴의 바람을 용인해주는 그의 정숙하고 착한 아내를 자기 기준으로 이미지하며 시기하지만 그것이 곧 스스로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아슬아슬한 자기회의감의 널 위에서 폴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가 지시하고 통제하는 "정숙한 여인" 의 틀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키면서 그의 사랑을 포기하느냐의 갈등에 고뇌한다. 서로의 긍정적 자아와 부정적 자아를 받아 들이고 [온전한 사랑] 을 하고자 했던 엘라의 바람은 폴의 냉소와 배신으로 종지부를 찍고, 엘라는 이 모든 상황을 스스로 자초했다는 자기혐오와 미련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단 남녀 관계에서만이 아닌, 모든 관계의 구태의연한 진행과 종말이다. 소통의 종말을 피하려면 모든 관계를 기계적으로 제한해야 된다는 딜레마에 빠지고 만다. 대체, 이것을 벗어날 "창의적" 관계란 무엇인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든 안맺든 우리는, 나는 타인을 본다. 첫인상부터 싫은 사람도 있겠고,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인지가 진행된 사람도 있다. 그를 좋아하고 가까이 두고자 하는 마음도, 그를 싫어하고 기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모두 자기 투영을 거쳐서 발현된다. 좋아하는 이는 자기애에 밀접한 이이며, 싫어하는 이는 자기혐오에 밀접한 이다.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소유하고자 하고, 그에게서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은 자기 가치를 완성 시키려는 욕구이며, 싫어하고, 비판하고, 시기하고, 깎아내리려 하는 마음은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지우려는 발버둥, 혹은 자기 소멸에 대한 히스테리적 두려움이다. 자기 가치에 대한 욕구와 자기 소멸에 대한 공포을 양손의 무기로 소통하고자 할 때 구태의연한 관계가 설정된다. 그리하여 엘라는, 안나는, [자살] 에 관한 소설을 꿈꾼다. 오로지 "자기 붕괴" 만이 그러한 관계를 극복하지 않겠냐는 자조와 희망을 번갈아 타면서.

 

파란 노트

 
안나는 글을 쓴다. 일상의 나열이든 생각의 나열이든 닥치는 대로 쓰려고 한다. 하지만 쓰면 쓸수록 자기혐오, 회의, 무의미, 무기력이라는 글귀에 치이고 만다. 글이 의미가 있을까. 소설이 의미가 있을까.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에 대해 비판적 글을 쓰는 것 따위, 세상에, 나 자신에 무슨 이득이 될까. 아무리 회의하고 아무리 반성해도 변하는 것은 미미하고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을. 조금 "잘된" 글이란 그저 일시적인 돈과 명예를 가져다 주는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것이 오히려 고통스럽다. 쓰고자 하는 목적이 변질된다. 어느덧 진실을 비켜나가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심각한 혐오감에 사로잡힌다. 고통이 반복되고 글쓰기는 독이 된다.

그런데 글쓰기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에 대한 직무유기가 된다. 세상의 진실은 매일 쏟아지는데, 저너머의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고통의 현실이 있는데, 그저, 겨우, [글쓰기의 고통] 때문에 그것을 외면하고자 하는가? 고작, 쓴다는 목적이 자기만의 꿈으로의 도피, 자아과잉의 합리화를 위해서만인가? 기실 대다수의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은 세대인가. 문화를 소비하고 감성을 쥐어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핍을 호소하는 건 나약한 투정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행복할 때는 단 한문장으로 표현이 가능하지만, 괴로울 때는 열문장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 고통이 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체득하지 못하면 글쓰기는 단지 도피와 가식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자세, 갖춰야할 사명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고통을, 진실을 쓰는 이가 작가인 것이다.



((2권에서 계속))
YES마니아 : 로얄 q****e 2007.12.14. 신고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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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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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목보다는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먼저 눈이 가서 고른 책이다.뒷표지의 소개글을 보면 '여성의 삶을 체험을 통해 풀어낸 여성운동의 선구자적인 작품의 서사시라고해서 상당히 호감이 간 작품이었다.책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작가가 쓴 장대한 서문을 한번에 다 읽지 못하고 끊어서 읽었더니집중에 되지않아 다시한번 읽게 됐었다.그만큼 작가는 독자들에게 하
"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내용보기
아마 제목보다는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먼저 눈이 가서 고른 책이다.
뒷표지의 소개글을 보면 '여성의 삶을 체험을 통해 풀어낸 여성운동의 선구자적인 작품의 서사시라고
해서 상당히 호감이 간 작품이었다.


책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작가가 쓴 장대한 서문을 한번에 다 읽지 못하고 끊어서 읽었더니
집중에 되지않아 다시한번 읽게 됐었다.
그만큼 작가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나 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자유로운 여자들
이혼을 하고 자유로운 여자로 살아가는 안나와 몰리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이 글은 1편부터 5편까지 이어져 사소한 삶들을 이야기 한다.

검은노트
안나가 적은 노트중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호텔에서의 생활을 그렸다. 

빨강노트
공산주의자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빨강.
안나의 공산당으로 있었을 때의 체험을 이야기 한다.

노란노트
안나의 경험으로 만들어낸 노트속의 소설 줄리아(몰리)와 엘라(안나)의 이야기
사랑했던 폴과의 이별후 엘라가 겪는 방황을 그렸다.

파란노트
마이클과 헤어진 후 공산당을 탈당하고 일종의 일기 형식을 쓴 안나의 이야기

황금노트
사랑했던 사람인 솔 그린을 떠나 보내며 새로운 소설을 쓰게 되는 짧은 이야기



내가 생각했던 이 글은
자유로운 여자들에서만 안나의 이야기가 나오고
색깔의 노트들는 안나가 쓴 전혀 다른 소설들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다 안나가 경험했던 이야기들이다.


색깔의 노트들이 다 시간들이 다르겠지만
읽다보면 시기가 겹쳐져 시간의 앞뒤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뒤죽박죽의 상태가 되어버렸다고 해야겠다.


책을 다 읽고난 뒤의 내 느낌은 내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시대의 이야기여서인지
공감가는 부분이 적었다.
내가 책을 읽으며
공감가는 부분을 100의 수치로 쳤을때 적어도 60 정도의 수치를 넘어서야 
감정이 이입되고
공감가는 수치만큼 감동도 커져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 개인적인 공감이다.


그리고 내가 사회주의적인 걸 싫어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쪽을 아예 싫어하니
공산주의의 내용을 다룬 이 글이 내게는 그저그랬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감정이 틀리고
느낌이 다 다르니 순전히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안나라는 여성이 이런 삶을 살았구나
하는 정도랄까.

YES마니아 : 플래티넘 h*****9 2009.07.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