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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여지지 않은 말 속에서 진리를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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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lden Notebook 3 :: Doris Lessing자유로운 여자들 4 - 검은 노트 - 빨간 노트 모든 것의 허상을 깨닫고 무기력감에 빠진 안나는 리처드와 몰리의 강요와 부탁으로 떠밀리듯 매리언과 토미를 설득하는 자리에 나선다. 그들이 좌파 운동을 체포될 지경으로 하는 것을 말리려고 하지만, 그것은 사상이 잘못 되어서라기보다 단지 그 사상이 자기가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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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lden Notebook 3 :: Doris Lessing

자유로운 여자들 4 - 검은 노트 - 빨간 노트


모든 것의 허상을 깨닫고 무기력감에 빠진 안나는 리처드와 몰리의 강요와 부탁으로 떠밀리듯 매리언과 토미를 설득하는 자리에 나선다. 그들이 좌파 운동을 체포될 지경으로 하는 것을 말리려고 하지만, 그것은 사상이 잘못 되어서라기보다 단지 그 사상이 자기가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알리기 위해서다. 매리언은 이미 리처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운동에 적극적이 되어있고, 시력을 잃은 뒤로 무언가를 터득한 듯한 토미만이 [사람들은 단지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주길, 자신에게 친절해주길 바라서 덧없는 행동들을 한다] 는 나름의 결론을 얘기한다. 안나는 그들에게 공감의 모습을 취하며 설득에 성공하지만 자신의 집에 거주하는 아이버와는 결국 소통에 실패한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필요충분적 상호 공감, 유대와 배려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통을 취하려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단면이다.

마지막 검은 노트에서 안나는 꾸었던 꿈을 짤막하게 기록한다. 자신의 소설 [전쟁의 변경지대] 의 배경이 되었던 마쇼피 호텔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화 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내용으로, 촬영이 진행될수록 영화 내용이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딴판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독에게 항의하자 감독은 [찍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찍은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안나는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자신만의 소통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은 경험이나 공감이 없는 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배제된 "이야기" 는 타인에게 건너가 또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인용의 수단으로서만 활용된다는 것을 절감한다.

마지막 빨간 노트에선 친구 지미가 들려준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지미의 동료였던 해리는 스탈린 정권 이후 새로이 부각된 사상에 심취한 열혈 사회주의자로 소련에 직접 갈 기회가 생기자 현지의 인민들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다. 그러나 정작 현지인은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었건 어쨌건 당장 살 문제에 급급해 그가 밤을 새워 열변을 토하는 이야기들에 시큰둥할 따름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해방시켜 주겠다] 는 자부심 자체가 오만한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해리는 평범한 자본주의사회의 일원으로 시무룩하게 돌아온다. 이런 이야기들로 노트들을 마무리 할 때마다 안나는 겉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상호 공감이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인 소통을 한들 무슨 소용일까? 아무리 세상을 비판하고 자신을 회의하고 누군가를 설득하려 한다한들 변하는 것이 없는데 "쓰는" 것조차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란 노트 - 파란 노트

노란 노트는 일견 안나의 소설 구상집으로 보이는데, 파란 노트를 먼저 읽고 다시 되돌아 와 읽으면 좀더 이해가 쉽다. 그녀는 닥치는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서, 그 문제를 바로 보기 위해서 계속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 하는 노력을 시도한다. 앞선 노트들의 중단과 함께, 무력감과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필사적인 저항감 사이에서 솔 그린이라는 운명적 존재를 만남으로 안나의 자기 분열은 절정을 맞는다. 안나는 [감정을 제한하는 것] 이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닫고 관계를 거부하고자 애를 쓰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고독감에 또 다시 솔 그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매우 지적이어서 안나의 지성을 자극한데다, 공감하는 요소도 많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제대로 이해해주고 있다는 기쁨에 쉽게 호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남성적 매력이 강한데다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부분도 있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그에게 마음을 품는다는 것도 안나를 더욱 안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자기중심적이었고 한 사람, 한 여자에게 종속되길 거부했으며 이기적인 요구에 비해 자기 감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않으려 고집하고, 매우 방어적이었으며 다정함도 없는 비교적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안나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며 그에게 빠져드는 당위성을 찾고 행복하다는 감정에 젖어들려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스스로에게 강요할수록 그에 대한 소유욕과 불안감은 깊어만간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려 하지만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거나 어느 한쪽의 의지부족으로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기고, 다만 서로 외롭지 않기 위해 수단으로서의 관계만이 지속된다. 안나는 솔에게 거부 당하고 상처 받아도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고통까지 자신의 것인 마냥 헤아리려고 애쓰지만 그런 자기소멸적 배려는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힌다.

그를 좀더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그의 개인 일기까지 훔쳐보지만 오히려 그의 노골적인 진심을 알게됨으로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배신감에 직면하게 된다. 안나는 솔에게 어딘가 원천적인 마음의 고통이 있다면 함께 나누자고 설득하려 하지만 솔은 개인의 일은 개인이 알아서 해야한다고 잘라 말하고, 안나는 감정을 주지 않을거면 떠나달라고 고통스럽게 부탁한다. 그러나 솔의 입장은 감정을 교환하면 관계가 종속되므로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잃는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안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러한 반목이 세상의 모든 대립을 낳는다는 걸 깨달으며 한명의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버티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를, 설령 그가 자신을 상처준다해도 그 행위 또한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된다. 안나는 그 깨달음으로 이윽고 [자기붕괴의 기쁨] 에 이른다. 이제는 모든 노트들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회복의 단계에 들어서야 될 때가 온 것이다.

바로 얼마전까지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특히 인터넷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사람을 만나면 나를 시시콜콜히 알리고 그를 시시콜콜히 알려 들었다. 내 나이가 몇이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일을 하고, 여태껏 어떤 식으로 살아왔고, 그래서 어떤 성격으로 이루어졌는지, 누굴 만나든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들부터 풀어 놓았다. 그리고 상대도 어느 정도 풀어놔주길 바랐다. 이름도 모르고 아이디나 닉네임만으로 소통하는 것을 질색했고 이야기가 지나치게 함축되는 "덧글" 을 기피했다. 그 덧글들의 나열로 1인 공간임에도 다수의 타인이 일대일의 대화를 관전하거나 아예 커뮤니티화 되는 빅브러더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오히려 더 벌려놓는다고 생각해, 더더욱 "상호 알리기" 에 집착했다. 오픈 방명록보다는 일대일이 가능한 비밀 방명록을, 그보다는 메일을, 그보다는 손글씨를 쓸 수 있는 편지를 선호했으며 기어이 그이를 "오프라인" 에서 만나려고 자리를 적극 주선했다. 그것이 진정된 "소통" 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건 결국 내 일방적인 소통의 방식이었다. 서로가 아무리 자신의 지나온 길에 대해 빠짐없이 얘기한다해도 그 "경험의 다름" 이 어찌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을 마련했다.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는 또한 강요가 되거나 부담이 되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의 교류는 신뢰를 쌓는데는 좋았지만, 그것도 상호간에 "소통의 방식" 이 비슷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단지 이것은 내가 선택한 소통의 방식일 따름인데, 세상이 나와 그 방식이 다르다 해서 소통이 거부당했다 생각해야 하는가? 소통에 절망해야 하는가? 소통의 개념조차 자기편의적이 된 것이 아닌가? 이러한 회의감에 부딪히면서 나는 한동안 "나에 관해 떠들기" 를 전면 중단했다. 중단하고나서 더 뼈저리게 느꼈다. 중단을 하나 안하나 내가 가질 수 있는 인간 관계의 형태는 큰 차이가 없었던거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피상적인 관계만 맺어도 되는 것일까? 어차피 사람이 갖는 본질적인 외로움, 적당한 위안은 거기서 거기이니까? 그런 생각에 빠져들며 나는 근 두어달 동안 거의 아무하고도 접촉하지 않게 되었다.

안나와도 같은 관계 거부증을 몇개월간 앓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몰아 닥치곤 했다. 그러나 한가지 소통 방법밖에 몰랐던 나는 예전처럼 [모든 것을 시시콜콜히 말하기] 방식으로 사람을 사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적당히] 자신을 가리고 상대도 모른척 하며 관계를 할 수도 없었다. 자신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말이 짧은 사람은 아무래도 무심해 보였다.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왠지 손해보는 기분에, 그가 어떠한 직접적인 행동을 안한다해도 스스로 상처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화를 내고 요구하면 대립의 시작이다. 아예 관계하지 않든가, 그와 관계를 지속하려면 그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는 수 밖에는 없는거다. 내 방식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내 방식이 진리라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나는 그것밖에 할줄 모르므로, 그 방식만으로 내 가치를 지속시켜왔을 따름이다. 그러니 그런 나를 이해시키려면, 진정 "소통"하려면, 나부터가 상대의 방식을 납득하는 수 밖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와 결국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로소 [자기붕괴의 기쁨] 이 아닐런지.

 
황금 노트

솔과 같은 남자는, 혹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은 쫓아가고자, 정복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한 여자에게 다가가지만 그 여자가 자신에게 감정, 즉 사랑이나 결혼 등의 제도를 요구하면 곧바로 흥미를 잃거나 소속에 대한 공포감으로 그녀를 떠나거나 관계를 끝낸다. 모두가 동의하는 사상보다 홀로 주장하는 사상에 더 매료되어 있고, 그것이 그를 자신답게 만들어주는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이른바, 쫓아가던 것이 정복되거나 다수의 것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자존의 불안증을 앓고 있는 타입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녀가 그에게 실망하고 뒤돌아섰을 때 다시 강렬한 소유욕을 느끼며 그녀에게 기댄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은 무책임하다 해야할까? 지독한 에고이스트라고 이름 붙혀야 할까? 우리가 이러한 모습에서 어디까지 자유로울까? 이러한 사람을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게 정녕 있을까?

안나는 그가 불완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감언이설이 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한다. 결국 외로움 때문에 적당한 상대를 찾아 그에게 감정을 덮어 씌우는 행위로, 이것은 솔이 그녀를 "이용" 하고 있다면 안나도 그를 이용한다는 점에 있어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그녀는 "사랑" 을 볼모로, 상호간의 "책임" 이라는 도덕을 잣대로 그를 종속하고자 하며 그것이 정의라 믿는다. 지독한 에고는 여기에도 존재한다. 그가 여자에게 종속되고 싶지 않은 "자유로운 남자" 임을 원할 때,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선 여자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운 여자" 임을 포기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 스스로 "자유로운 여자" 임을 원한다면, "자유로운 남자" 의 모습도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가 아닌가? 이 고민에 있어, 서로가 진정한 "자유" 를 바랄 때, 그것을 실현코자 할 때 우리를 둘러싼 "제도" 가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지를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통 남녀가 마음을 나누고 육체 관계까지 진전시키면 서로 이외에 다른 존재에겐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계약을 맺게 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지는 도덕이다. 그러나 솔은 아무리 여러명과 관계해도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매우 이기적이고 비도덕 해 보이는 그를 이해하려 하는 안나의 모습은 일견 미련해보일 수도 있고, 작가 스스로도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타인의 방식] 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라는 메시지가 그 도덕의 잣대안에 묻혀지지 않기를 간곡히 바라는 듯 하다. 어차피 자신도, 타인도 서로를 "이용" 하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고, 또한 그것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며, 완전히 다른 종류의 타인과 타인이 반목하는 것도 어찌 보면 숙명일 것이라는, 그렇다면 그 반목 자체를 "있는 그대로 " 받아 들이는 수 밖에 없지 않냐는 메시지를.

그것은 용기에 대한 것이었는데, 내가 이해하고 있던 그런 종류의 용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삶의 근저에 있는 하찮고 고통스러운 그런 용기였다. 그리고 내가 영웅적이거나, 아름답거나, 또는 지적인 것들에만 주목해 왔던 이유는, 내가 그런 부당함과 잔인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큰 그 작은 인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p247)

안나는 과거를 받아들인다. 실패했고, 부끄럽고, 거부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그것이 또한 자신을 성숙시켰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니 그 기록들, 검은 노트, 빨간 노트, 노란 노트, 파란 노트들도, 결코 무가치 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황금노트가 있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니 앞으로의 기록도 설령 실패가 있을지언정 또 저 너머에는 성숙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지금 맺고 있는 관계도, 앞으로 맺을 관계도, 실패와 고통과 반목이 있을지언정, 그 뒤의 성숙이, 발전이, 더 나아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안나가 [나는 행복해야만 돼] 를 포기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 붙힐 필요가 없다. 사는 과정,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그 순간순간, 그 용기가 어쩌면 행복이다. 고통 속에 있는 것이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는 레싱의 힘찬 역설인 것이다.

 
자유로운 여자들 5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세상의 많은 것에 반발하고 있었다. 독서를 한다며 양서 읽기를 "클리어" 한 이들의 우쭐거림이나 읽은 책의 권수 갱신을 으스대는 이들을 우습게 봤고, "사고" 를 한다면서 "실천" 에 게으른 스노비들을 한심해 했으며, 공짜라는 물질에 현혹되어 책 배급에 줄서는 현상을 어처구니 없어하고, 그로 인한 작위적인 서평에 한탄했다. 아이에게 좋은 책을 읽힌다며 "추천도서" 에 연연해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위한 독서에는 소극적인 엄마들이 '아이 교육에 게으르면 안된다' 는 감옥에 갇혀 자신만의 공간에서조차 아이에게 "종속" 되어 있기만 하는 모습에 답답해 했고, "창의적인" "논술" 시험을 위해 책을 읽힌다는 제도에 순순히 수긍하는 모습에 분개했다. "행복한 노년" 을 위해 수단을 의심치말고 "재테크" 하라는 교리를 믿는 사람수에 경악하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불행" 하다 매도하는 이들을 천박하다 여겼다. 신자유주의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그것을 앞장 서서 설파하는 대권자를 경멸하다 못해 증오했다.

그리하여 결코 "아파트" 를 "내 집" 으로 만드는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고, 돈을 불려준다며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성공학" 저서든 무엇이든간에 관심 두지 않았으며, "양서" 만을 극찬하는 독서가들 사이에서 그들이 하대하는 "불량서" 의 가치를 보여주려고 기를 썼다. 남들이 안하는 곳에 자원봉사 하려하고, 그것을 내 가치로 만들지 않기 위해 기어이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아이에게 교육은 물론 독서도 강요, 혹은 권유하지도 않았고, 책을 읽고 제멋대로 천착하기보다 하나라도 더 스스로 경험하길 바랐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진보적인 대안 학교만 가능하다 여겼고, 사교육은 철저히 배격하고 날을 세워 비판했다. 아이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엄마 커뮤니티는 멀리 했고, 자기 자신을 우선하는 "엄마" 신분의 이만을 친구로 삼았다. 그렇게 모든 제도권을 하나둘씩 이탈하면서 나만의 정의에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오만" 에 의한 "오류" 였다. 배격적인 자세에서부터 나는 이미 "정의" 를 벗어나 있었던거다. 증오, 혐오, 경멸, 비난. 그리하여 등돌린 나에게 남았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고립" 이라는 자가당착뿐이지 않았던가? 정녕 그 "믿고자 하는 사상" 옳다고 여긴다면 세상에 드러냈어야함이 옳지 않은가? 부딪히고 부딪혀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받아 들이고 거기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세상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 아니었던가? 비주류를 자처하고 세상만 원망해봤자 무기력의 탈밖에 더 쓰는가? 무엇이라 변명하고 무엇이라 자기 가치를 만들어낸다한들 결국 나는 도망쳤을 따름이 아닌가.

토미를 사회주의자 아들로 키우고자 했던 몰리는 그가 결국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한탄하지만 그래도 그가 보다 나아진 자본가가 될거라는 것에 희망을 건다. 딸인 자넷이 대안학교에서 교육받길 원했던 안나는 자넷이 제도권의 학교를 택하자 당혹해하지만 그 인생의 자넷의 것이라고 받아 들인다. 부모만의 철학, 사상, 집착을 버림으로 비로소 그녀들은 진정한 "자유로운 여자들" 로 진일보 한 것이다. 안나는 이제 "작가" 로서의 소명, 혹은 각오를 되찾으려 한다. 신문 기사를 닥치는대로 스크랩하며 항상 "깨어 있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을 얼마나, 어디까지 "공감" 하여 "체득" 해서 이 세상에 돌려놓을지 방법을 몰라 괴로워한다. 그러다 어느 한 미국인 남성이 방문하여 그녀에게 "혼자 있지" 있지 말고 "관계하자" 고 권유한다. 세상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 그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던거다. 레싱이 서문에서 "쓰여지지 않은 말에서 진리를 찾으라" 의미는 결국 자기 작품의 모든 주제를 아우르는 한마디 아니었을까.

 

독서하는 동안 이만큼 괴로운 책이 또 없었다. 감정이입에 가깝겠지만 고립을 선택해 정신 분열되는 안나의 모습에서 나를 수차례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나의 생각에 동조해 그녀가 솔 그린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에게 반발하듯 멀쩡한 남편의 남성성을 억지로 끌어내어 원망하며 공격했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다툼이 잦았다. 종반에는 스스로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덜컥 하는 마음에 이 책이 나를 미치게 만들고 있다며 섬뜩해 했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남편에게도 의존하지 말아야하며, 자식에게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그 어떤 세상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씩 마음을 끊고 미련을 버리려 했더니만 삶의 목적, 이정표, 지팡이를 모두 상실한 홀몸으로 정신없이 휘청대며 어느덧 죽음을 신중히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세상을 수용할 수 없는 마음이 들면 나 자신을 비판하고 비판하고 또 비판했다. 자기혐오, 자기 파괴본능과 죽도록 싸우며 그것이 밑바닥을 치면 되돌아오는 자기연민에 몸을 떨었다.

공교롭게도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시국에 읽게 되어서, 사상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회의하고, 생각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러한 분열의 과정에 내 몸을 내던지고 깨부수어 다시 수습하는 일에 있어서 작가가 제시하는 길에서 엇나가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제어할 이성이 요구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야 한다고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 이제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으니 내가 해야할 일을 나열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가 무어라 했는가. 변할 수 없는 세상에 괴로워말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공존" 의 필요성을 깨닫고 온몸을 순순히 맡기며 다만 "종속" 되지 않는 자신이 되기 위해 늘 깨어 있으라는 것 아니었나.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부터 시작하여 진정한 자유의 길로 나아 가겠는가.

우선은 냉소적이고 자포자기적인 태도를 버리고 세상과 적극적인 대화를 할 것이다. 실패할 것을 두려워않고 관계의 손을 먼저 뻗을 것이며, 그 대상이 누구든 섣부른 편견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가령, 아이 교육에 열심인 엄마들 사이에서 배울 점을 찾고, 신자유주의의 바람 속에 자본주의의 순기능도 가늠하고, 독서가들의 다양한 태도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배우는 등 그들의 모습에서 내 오류를 바로 보도록 하겠다. 그와 동시에 내 목소리에 힘도 잃지 않겠다. '설득' 되도록 '주장' 하고자함이 아닌, 세상의 주류에 필요한 건전한 비주류로서 힘을 내어 세상을 조금이라도 진일보 시키는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설령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가 나라를 통치한다한들 어떠랴. 그 대척점이 있으므로 오히려 우리같은 이가 더 힘을 내어 무언가를 '함께' 이루어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어차피 '바위를 들어올리는 사람' 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희망이 있지 않은가. (p214, p232)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첫구절부터 끝구절까지 "글자" 들은 읽었을지언정 정녕 이 책을 '독파' 했다고 할 수가 없다. 내 멋대로, 내 가치대로, 나만의 경험대로 읽고 생각하고 풀이하여 또 한번 레싱을 오독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책이 분명히 드러내는 메시지, [거기에 있는 그대로 두고, 보이지 않은 것을 배우라] 라는 글귀를 이번 독서의 그나마의 수확으로 여기고 앞서 적은 바와 같이 [실천] 하려고 한다. 나의 반대되는 것을, 나를 괴롭히는 것을, 내가 부딪혀야 하는 것을,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진정 자유로워졌을 때 다시 한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그때는 작가의 진심을 보다 더 이해하며, 그제서야 [독파] 했다고 자랑스러워 하리라.

YES마니아 : 로얄 q****e 2007.12.23.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