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도 이번 여름에는 몸과 마음이 바빠 휴가를 떠나지 못했을 것 같다. 남의 여행기라도 읽으며 대리만족하고 싶어서,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장소로 여행을 떠난 이동진의 에세이를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비우지 않은 채로 다른 이의 감정을 넘겨 받을 수는 없었다. 이번 만큼은 이동진의 섬세한 감정들이 특별히 와닿지 않고 미끄러졌다. 영화 촬영지를 좇는 에세이인 만큼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는 것은 ‘장소의 이동’이었는데, 장소를 옮겨갈 때마다 한 숟갈 뜨기도 전에 밥상을 치우는 기분이 들었다. 한 장소에 충분히 머무르며 긴 호흡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면 좀더 작가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쉬웠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영화’ -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 - ‘그 장소를 여행하며 느낀 것’ 이 세 가지를 제대로 엮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엮어낸 결과물이 오롯이 나만의 것이기에 타인에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일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보고서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장소를 마음에 품게 될 때가 있다. 케빈이 휘젓고 다니던 뉴욕, 어딘가에서 호빗이 극진히 반겨줄 것만 같은 뉴질랜드, 왕페이가 샐러드를 팔던 홍콩, 호그와트행 열차가 출발하던 런던, 환상 속의 연인이 space oddity를 불러 주던 그린란드 등. 낭만을 잔뜩 품고 여행지에 당도하면 그때부터 내 여행은 1영화처럼, 혹은 2영화와는 반대로, 아니면 3전혀 생뚱맞은 방식으로도 펼쳐지기도 한다. 세 가지 전개 모두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지만, 특히 본의 아니게 세 번째 전개 방식을 취하게 된 여행은 더 오래 살아 남아 나의 한 부분으로 흡수된다. 그래서 예상과 다른 어떤 여행의 돌발은 ‘낭만의 구현’이라는 애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나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행을 떠나면 자아를 찾을 수 있다’ 따위의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행의 길 위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들까지 언젠가 웃으며 품게 된다는 것을, 심지어 때로는 그런 일들이 내 여행을 낭만이 아닌 진짜로 만든다는 사실을,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서 여자(장만옥)를 떠나 보내고 혼자 남은 남자(양조위)가 오래된 유적지의 구멍 하나에 입을 대고 사랑을 속삭여 영원히 봉인하려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남자가 걸어 들어가 사랑을 묻고 다시 걸어 나오는 그 장면을 통째로 품은 채 나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찾았다. 정작 앙코르와트에서 내가 새롭게 느낀 것들이 모두 <화양연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무엇보다도 그곳에는 양조위가 없고...). 어디를 가든지 유명한 관광지는 자본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해 있는데 어쩌면 그 자본의 힘이, 일개 관광객일 뿐인 내게 소정의 돈만 내면 힘들이지 않고도 위대한 유산들에 다가서는 일을 허락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여행자는 영화(낭만)와 현실의 괴리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사람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마음 속에 앙코르와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남을 것이다. <화양연화> 덕분에 내게는 아주 오래된 유적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 영원 같은 무수한 시간의 퇴적, 그와 함께 켜켜이 쌓인 그곳 사람들의 생에 대한 경외감, 그런 것들이 무의식 중에 생겨난 듯하다. 그래서 앙코르와트를 마주하여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했다. 여행은 꿈꾸던 영화와 다르게 전개되었지만, 영화 덕분에 나는 관광객 아닌 여행자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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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평론계의 스타, 이동진씨가 영화를 테마로 해 여행을 다녀온 기행문이다. 필름 속을 걷다, 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그는 영화 촬영의 현장에서 영화 중 내용을 떠올리며 드는 상념등을 저술했다. 책의 전체 분위기는 굉장히 처연하고 우울하고 쓸쓸하다. 빛나는 영화의 그림자를 밟은 여행이기도 하겠지만, 저자의 필체 자체가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우울과 처연함은 청승 맞지 않다. 차분히 그리고 긴 여운을 안긴다. 저자의 윤리적인 고뇌도 인상적이다. 화양연화 편이 그렇다. 실패한 여행에 대한 고백도 실려 있고, 형식적으로 여운을 안기는 여행기도 있다. 이동진 평론가가 저술한 책들 중에서 현재까지 오래오래 두고 읽힐 책. 더이상 영화 여행기는 안쓰신다고 하지만, 이런 책을 읽으면 그의 단언이 아쉽게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