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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중앙도서관 "앎과 삶" 강의(http://minihp.cyworld.com/20966544/283802193)에서 알게 된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작을 드디어 만났다. 과연 그의 교육관이 책 전체에서 묻어난다. 무엇보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갖는 '배움의 공동체'가 그의 교육철학과도 닿아있는듯 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역시 대화와 존중을 굉장히 중요한 교육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그가 말하는 '자유'는 어떤 성격의 것인지 궁금해서였다. 타자와 함께 사는 인간이 과연 완전한 자유를 영위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자유의 한계는 어디에서 그어지는 것인지가 요즘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 역시 방종에 가까운 자유는 경계하고 있었다.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할 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교사의 건전한 권위 역시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자유와 권위는 적절한 균형을 가지고 함께 가야한다. p. 127 자유와 권위 나는 자유와 권위에 관한 문제 그리고 이 둘에 내재된 한계(한계가 없으면 자유는 방종으로, 권위는 권위주의로 빠지게 된다)에 관한 문제를 다룬 수많은 논쟁에 참여해왔다... 한계가 없는 자유는 억압받는 자유나 계약된 자유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자유가 한계를 벗어난다면 나는 인간의 행위, 인간의 개입, 인간의 투쟁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무한한 자유는 존재의 미완성이라는 인간 조건을 부정하는 것이다.
프락시스를 이야기했던 그이기에 이 책에서도 역시 '지=행'이 일치하는 교육과 교사의 교육실천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과연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교육이 가능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교육이야말로 윤리적이고 미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임을 주장한다. 방향성 없는 교육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생각은 삶의 전 분야에 대해 교육운동을 하고자 하는 현대 교육자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p. 82 교육 중립X 상호 배움은 방법, 기술, 자료를 사용하는 실천이다. 또한 상호 배움은 그 지향적 특성으로 목표, 꿈, 유토피아, 이상을 함의한다. 따라서 교육은 정치적 성격을 가지며, 모든 교육실천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을 때 역량을 갖게 된다. 인간만이 독특하게 지닌 교육은 영지적이고 지향적이며, 그렇게 때문에 정치적이다. 교육은 가르치는 일을 촉진하기 위해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예술적이고 도덕적이다. 즉 교육은 좌절, 공포, 욕망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교육은 교사에게 자신의 전공 영역과 관련된 구체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지식의 본질에 관한 지식까지 파악할 수 있는 일반적 역량을 요구한다.
p. 118 교육 중립X 오늘날 진보적인 교사라면 이전과는 달리 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교묘하게 이용되는 것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육은 중립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확산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교활한 능력을 경계해야 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극단적인 반동적 철학으로서, 학생들에게 마치 세상에서 인간 존재로 살면서 동시에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듯한 정치적 태도와 관행들을 주입시키는 데 교실 수업을 이용한다. 학교에서 교사로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상 정치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하고, 학생들은 결코 이러한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사는 분석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그래서 세계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물려주어야 한다. 공정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정치적 입장을 택할 수 있는 능력도 물려주어야 한다.
미와 선의 관계성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관심 있게 읽을 수 있었다. 프레이리는 '인간은 미완성된 존재'임을 책 내내 이야기한다. 낭만주의자들이나 니체처럼 프레이리도 자기-창조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는 듯 하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스스로 창조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역사와 타자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창조되면서도 역사에 의해 형성되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움과 윤리는 맞닿아 있다. 미의 창조성과 타자와 함께하는 윤리는 자기-창조의 과정에서 공존해야만 한다. p. 60 뇌와 손의 협력 관계가 더욱 더 긴밀해짐에 따라 생명 유지 체제는 점차 ‘세계’, ‘삶’, ‘존재’가 되어간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몸이 ‘이해하고’, ‘배우고’, ‘변형하고’, ‘미를 창출하는 능력’을 때닫게 되자 그 몸은 더 이상 내용물이 채워진 의미 없는 텅 빈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윤리적 존재이기에 윤리의 규범을 어기는 일도 가능하다.
p. 156 창조+ 형성되는 존재 인간을 역사의 창조자인 동시에 역사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즉 인간을 결정내리고, 단절하며, 선택하는 존재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회-정치적 변혁 이론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윤리성으로 보자면 인간은 비윤리적일 수도 있는, 즉 인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윤리 규범들을 위반할 수도 있는 윤리적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해 나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해왔다. 비록 인간은 자신이 ‘조건화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 형성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에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확언하고 또 확언했다. 새로운 반란을 도모해야 할 곳은 진실한 인간성의 목소리에 매우 둔감한 시장 윤리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 열망의 윤리, 즉 인간 연대의 윤리이다.
책 초반에서부터 결말에 덧붙여져 있는 다른 학자 두 명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이 책 전체에서는 신자유주의, 과학주의적 교육관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어떤 숙명론과 결정론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교육을 조장한다. 과학주의는 교육이 철저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러한 생각들은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하게 한다. 지금의 교육에서 볼 수 있는 무한경쟁체제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주의에 물들어있다.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가난한자든 부자이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그들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문제를 제기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알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뉴스에서는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만큼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요즘의 '반값등록금' 촛불집회를 보면서 그러한 사회구조와 싸워야할 필요성에 대해 또다시 생각한다. P. 20 신자유주의와 결정론 우리 주변에는 숙명론이 팽배해 있다. 변덕스런 포스트모던 실용주의를 비롯한 숙명론이라는 이 요지부동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역사적 현실과 문화적 현실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어쨌든 이런 것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냐고 억지를 쓴다. 그러한 숙명론 가운데 이 시대에 가장 지배적인 형태가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 규모로 만연되어 있는 대규모 실업이 세기말의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실천은 한 가지 길로 갈 수밖에 없는데, 교육은 학생을 불가피한 것, 즉 바뀔 수 없는 것에 적응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중요한 일은 기술 훈련이고, 그 훈련을 통해 학생은 적응하고 생존할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이 책은 인간성을 욕보이고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그밖에 책에서 메모해둔 내용: http://minihp.cyworld.com/20966544/284576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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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존재는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이미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역사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지만 존재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떤 근원적인 원형을 그 속에 품게 된다. 자신을 반성할 수 있고, 존재로서의 자신을 알고, 존재하는 일에 개입하고, 변혁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한편 조사하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결정하고, 단절하고 꿈꿀 수 있는 존재이다. 역사는 어찌해볼 도리 없이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가득 찬 시간이라는 것, 다시 말해 미래는 풀어나가야 할 어떤 것이지 숙명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적으로 그리고 끝없이 팽창하는 호기심으로 교육실천에 헌신하라. 교사와 학생이 똑같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면서 자신을 형성하거나 재형성하고 있으며, 배우는 사람 또한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형성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르침은 지식이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배움이 없는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배우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선행한다. 달리 말하면, 가르침은 바로 배움이라는 직물의 일부이다. 학습자는 은행저금식 체제라는 행동 정식에 종속되어 있더라도 자신의 호기심(인식론적 호기심)을 더욱 예리하게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할 수 있는 역량을 자극하는 저항의 불꽃을 생생하게 보존하여 은행저금식 체제에 대항할 면역력을 키운다는 점이다. 진정한 배움의 맥락에서는 학습자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는데, 이렇게 변화하는 내내 그들은 배우는 내용을 교사와 함께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진정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들과 함께하는 교사 역시 똑같은 주체이다. 올바르게 생각하는 교사는 세계에 개입해 들어가 세계를 느낄 줄 아는 역사적 존재로서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존재 방식이 지닌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역사적이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 또한 역사성을 가진다. 더불어 우리의 앎과 지식은 역사성의 산물이다. 묻고,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은 가르침이라는 실천의 본질적 부분이다. 교육활동을 계속해 나가면서 교사들은 스스로를 연구자로 여겨야 한다. 교사이기때문이다.
학생들 앞에서 교사만이 진리를 소유한 듯 행동하는 것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올바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피상적인 태도를 버리고 심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올바른 사고는 결론을 수정할 수 있는 개방성을 전제로 한다. 즉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선택이나 평가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권리 또한 인정하는 것이다.(38-39) 올바르게 사고하는 행위는 받아들이는 사람을 사실, 개념, 지성의 수동적 대상으로 가정하여 그 사람에게 전달하고, 예금하고, 베풀고, 기증하지 않는다.(43) 비판적 교육실천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학생들이 동료 및 교사와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고, 사려 깊고, 소통이 가능하고, 변화하고, 창의적인 사람으로, 다시 말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에 분노할 줄 아는, 있을 법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으로 가정하는 경험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48)
나는 인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우리가 처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이 늘 분열을 조장하여 변화와 변혁이라는 우리의 이상 실현을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 장애물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에 이들 장애물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그 장애물들과 장애물의 존재 이유에 대해 비판적으로 깨닫게 하려는 시도로 ‘의식화 운동’을 촉구했다. 그리고 지금 실용적, 수구적, 숙명론적 신자유주의 철학에 직면해서도 ‘이상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은 채 여전히 의식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교사로서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길은 이런 것이다. 확신을 갖고 살기, 앎의 과정에 열려 있으면서 가르침을 하나의 기술로 경험하는 일에 민감하기, 나의 교육 실천이 관료화되지 않도록 도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항상 의식하기, 한계를 숨긴다면 이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인 나 자신도 존중하지 않는 일 깨닫기 등이다. 미래는 냉혹하게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 앞에는 또 다른 과업이 존재한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개방되어 있음을 논의하고 그 개방성이 빈민 지역을 지배하는 비참함만큼이나 분명해지도록 드러내는 과업이다. 또한 각자가 경험해온 고통, 기아, 질병, 비위생적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물리적 저항뿐만 아니라 문화적 저항의 전략일 수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적응력은 가난한 이들이 극심한 자포자기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본질적으로 저항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억압받는 이들이 물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략이다. 문해서클은 정신분석이 개인의 무의식을 대상으로 행한 것과 같은 역할을 사회-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공동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잘못 투사된 자기 비난의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다. 억눌린 사람들은 자기 비난을 떨쳐버림으로써 자신의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억압자의 침략 흔적을 떨쳐낼 수 있다.
교육을 지배이데올로기의 정체를 폭로하는 도구로만 여기는 것, 그것도 마치 어떤 장애물이나 지난한 투쟁없이 지극히 간단하게 성취될 수 있는 일인 양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교육이 단순히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또한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역사와 의식을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에서는 의식을 물질의 단순한 반사로 환원시켜버리는 기계론적 역사관을,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의 역할을 역사상의 사실들에 끼워 맞추려고 시도하는 주관적 관념론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사실과 사건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이간은 자신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치면서 참조의 구심점이 되는 유전적, 문화적, 사회적, 계급적, 성적, 역사적 조건들에 함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의사 소통의 맥락에서 침묵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한편에서 침묵은 다른 사람의 언어에 귀기울일 수 있 있는 공간을 내게 제공함으로써, 화자의 사고에 깃든 내적 리듬 속으로 내가 들어가 그 리듬을 언어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침묵은 단순한 정보전달보다는 의사소통 경험에 진실하게 몰입하는 화자가 청자의 질문과 의문, 창의성에 귀 기울일 수 잇게 해 준다. 침묵이 없으면 의사소통은 지속될 수 없다.
비록 인간은 자신이 조건화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 형성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에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확언하고 또 확언했다. 새로운 반란을 도모해야 할 곳은 진실한 인간성의 목소리에 매우 둔감한 시장 윤리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 열망의 윤리, 즉 인간 연대의 윤리이다.
자신을 세상과 타인들에게 개방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활동성과 호기심, 미완성이 현재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계기로 인정받는 그런 대화적 관계의 막을 올리는 셈이다.
불가능한 꿈을 너무 쉽게 고무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러한 꿈을 꾸는 사람들의 꿈꿀 권리마저 부정해서도 안된다. 나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다룬다.
교육은 세계 속에 개입해 들어가는 인간의 구체적 행위이다. 나에게 개입이란 경제, 인간 관계, 소유권 그리고 고용과 토지와 교육과 건강에 대한 권리와 같은 영역에서의 사회의 급진적 변하에 대한 갈망뿐만아니라 역사를 마비시키고 불공정한 사회-경제적, 문화적 질서의 온존을 목적으로 하는 반동적인 입장 둘 다를 말한다. 비판적 호기심으로 세계에 개입해야 한다.
모든 사회적, 경제적 체제의 역사성을 파악하고 자식 생산자를 비롯한 모든 생산자들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선언했던 마르크스가 지적 출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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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비록 가끔씩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기는 해도, ‘올바른’ 생각하기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1. 줄거리 。。。。。。。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인 프레이리의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교육의 본질을 ‘자유’라는 주제로 엮어 내고 있다.
프레이리는 인간을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형성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실제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교육에 관한 정의가 등장한다. 교육이란 단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
자연히 이런 의미의 교육에는 ‘대화’가 중요해진다. 특히 교사는 단순히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학생에게 입력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가르치는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학생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학생이 처한 상황을 연결시켜 가르쳐야 한다.(프레이리는 이를 ‘정치적’이여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특히 프레이리는 세계의 억악 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이 받는 억압은 소위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억압적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며 참 교육은 그런 억압적 질서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의 교육학’이라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페다고지』를 워낙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 책 또한 기대감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단순한 교사나 교육학자라기보다는 교육사상가에 가까운 저자였기에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읽기에 쉽지만은 않았지만,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니 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교육에 관한 저자의 정의이다. 단지 체제에 순응하는 군중을 만들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로운 시민을 길러내는 하나의 정치적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익히 통하는 ‘막무가내 식의 아집’이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 참여적’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자유의 교육학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나라의 교육 상황은 프레이리가 지적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단지 학생에게 지식만을 쌓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지향하고 있고, 교육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라 단순한 훈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훈련’의 결과인지 최근 일부에서는 ‘좌편향 교육에 대한 시정’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자기들은 꽤나 중립적이라는 착각에 빠져 실은 우편향으로 치닫는)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런 교육의 붕괴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결국 현재의 왜곡된 사회구조는 시간이 갈수록 고착화되어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악한 상황으로 전락해갈지도 모른다. 학대와 억압을 받는 사람들은 점점 그 정도를 더해갈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상상하기 싫은) 폭력과 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는 교육에 있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서 그 ‘가능성’의 현실화를 위한 중요한 양분이 교육인데, 그 가능성의 실현으로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잃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교육 정책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은 다 했지 뭐.
가르침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지, 교육과 그것의 실현, 그것이 지향하는 바, 현실 참여적인 교육의 개념, 그리고 억눌리고 약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까지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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