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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5살 막내는 뭐든 자기가 하겠다고 한다. "내가, 내가 할 수 있어" 신발 신는 것도 물건 가져오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부모는 아이가 이런 의지를 보이기도 전에 여러 이유(시간, 참을성 부족, 돌봄이 당연해서)로 해주든지 해버리던지, 스스로 해보겠다는 아이의 ("엄마, 아빠가 도와줄게") 의지를 낮춰 버린다.
아이는 스스로 하고자 하는 자주성이 있다. 아니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스스로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타인에게 종속 받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지. 연약한 몸으로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으로 성장하고 한해 두 해 커 가며 오감과 육체가 주변을 배워나감에 따라 자주 의식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걷게 되고 인지능력이 갓 형성될 무렵, 아이는 집단(가정, 학교)의 학습제도에 맞춰 서서히 제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자주 의식은 조금씩 사라진다. 때 맞는 시간에, 때맞은 끼니를, 때맞은 사람이 차려주는 양식을 먹으며 부모와 집단이 싫어하는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도록 교육받으며 언제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각인되어 버린다. 아이가 그 집단(가정 학교 등)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하는 행동에서 가치 있고 쓸모있는 것은 돌보는 부모에 보답하는 이쁜 짓이나 집단의 교육자를 위한 착한 행동뿐이다. 그 집단이 필요로 하는 쓸모 있고 유의미가 되는 실체, 가치 창출에 기여하는 행위-어린이 노동-은 현대사회에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어린이노동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회의 비난의 대상이며 부모가 처벌받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다. 「 다른 세상의 아이들 」책 속에서 작가는 지금도 도처에 벌어지고 있는 남아시아 방글라데시 어린이노동과 150년 이전 모국인 영국의 어린이 노동을 비교해가며 위와 같은 어린이 노동은 복지 십자군이라 칭할만한 서구사회가 심어놓은 가치관이라고 꼬집고 있다. 방글라데시 어린이노동은 생존권이다. 그 아이들에게 노동하지 않는 다는 건 그 아이들의 벌이로 먹고사는 식구들의 굶주림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아이들의 노동이 착취와 차별 탄압이 아닌 노동이라면 필요한 것이며 밝은 사회제도권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얘기한다. 부모가 노동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그 수입이 턱없이 낮아 어린이들이 거리로 나간다. 이들에게 어린이 노동은 생존이다. 또한 의미 있는 것은 이러한 노동을 하는 어린이는 자신의 노동이 절대 나쁘지 않으며 가족에게 보탬이 되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다만 어린이를 학대하거나 차별 탄압 폭행으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이들에게 어린이노동은 기술을 배워 성인이 되어서도 안전한 직업을 가지는 훌륭한 도제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어린이 노동이 서구사회의 불매운동이 되고 인권단체의 비난과 근절의 대상이라면 아이들이 벌이하지 않도록 그 아이의 부모가 하는 노동의 대가를 가족이 생존이 가능할 만큼 주면 되는 문제다. 이 나라에서의 어린이노동은 부의 양극화, 보편화, 보편적 복지 문제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또한, 서구사회는 높은 인구 밀도를 불평하지만 이들에게 혈육의 재생과 노동 능력은 절대빈곤에 맞서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제대로 된 사회보장제도는 가족의 규모를 줄이는 대안이지만, 세계화 사전에는 사회보장이 시장간섭이라고 적혀 있다며 지금도 서구사회는 낮은 임금의 이들 나라의 노동력을 쥐어짜고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발전해 왔다. 수렵 채집의 노동을 하고 그 속에서 서서히 인간의 두뇌와 기술은 발전했다. 노동은 창조적이다. 인간의 경험에서 오는 노동이 없었다면 인간의 두뇌와 집단의 기술은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노동의 결과로 쓰인 역사라 할 수 있다. 불과 150년 전까지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가정과 사회에 가치 있는 노동을 하였다. 소를 몰러 갔고 젖을 짰다. 풀을 베러 갔고 농사를 도왔다. 19세기 영국도. 나의 어린시절도. 심지어 신문 배달을 하며 살림에 보탬을 주었다. 최상층을 제외하면 어린이의 일은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일하는 어린이'와 '공부하는 어린이'를 구분하는 시대를 산다. 최상층의 유년을 보내는 것이 최고인 양 어린이의 유년이 집단의 가치 있는 일과 동떨어진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어린이에게 노동의 직분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발전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발상이다. 발전이나 진보라는 이름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유년기는 여가를 즐겨야 하며 기계적인 학교 교육으로 치우친 정의로 꿰맞추고 있다. 농사를 지을 줄 알고, 뱀에 물렸을 때 치료를 할 줄 알고, 덫을 놓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식용 열매와 뿌리를 구분하고, 덩굴로 밧줄을 만들 수 있는 아이가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문맹인이라 구분 짓고 지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다. 여가만 즐기는 유년기를 보낸 어린이의 자손은 수 천세기로 이어지는 그 유전자 지능이 분명 점차 퇴화할 것이다. 이것은 진화론의 보편적 진리이다. 책을 읽은 후에 해야 할 원칙과 결심이 선다. 다시 농경시대로 돌아갈 수 없으니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가치 창출 노동. 10살 딸아이와 5살 아들 막내에게 자기들이 속한 집단(가정)에 가치 창출을 하는 노동, 고정된 직분을 줄 것이다. 화분에 물 주기, 신발장 정리, 정해진 청소 시간에 걸레질, 식사 시간 수저 놓기 등…. 생각하면 다양할 수 있다. 익숙지 않고 몸과 정신이 받아들이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이것이 바른 모습이다. 아이보다 부모의 결심과 행동이 더 중요함을 안다. 여가와 적절한 노동. 분명 그 균형이 있다. '일과 여가의 어린이'는 과로하지 않는 균형만 찾는다면 오히려 '공부와 여가의 어린이'가 보다 행복할 것이다.
저자의 마지막 글을 인용하고 읽은 후를 맺을까 한다. "인도 마하스탄가르 인근에 사는 나잠과 모즈누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잠은 열두 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가족은 6,000평 땅을 가지고 있다. 모즈누는 아홉 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고, 논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의 가족 역시 6,000평 땅을 가지고 있다. 두 소년은 맨발이고 다리는 진흙투성이다. 둘 다 체격이 억세고, 진흙 묻은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 쉴 때는 잡담을 나누거나 영화 TV를 보며, 논길을 거닐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부모들은 왜 그들에게 학교에 계속 다니라고 권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커다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린다. 그들은 땅과 재산이 있으며, 따라서 자녀들의 노동이 필요치 않다. 자녀들의 일은 그냥 그들이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땅을 생산적으로 유지할 줄 안다.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바를 가르쳐줄 교육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그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벵골의 흙을 밟고서, 마치 야생화처럼 마구잡이로 성장해간다." (P.267 작가의 맺음말)
'어린이 노동'은 근절의 대상이라고만 여겼던 내 생각을 깬다. '노동의 참가치' 책의 진가는 여기에 있었다. <벽돌을 깨는 아이의 노동은 내 생각도 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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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이란 부제가 아프게 합니다. 희망차게 시작해야 할 새해 벽두부터 왜 이리 우울한 책을 읽느냐 물으면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오래전 사 놓은 책이지만, 여태껏 고이 숨겨두기만 했던 것을 왜 이제야 읽었는지도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동 그 자체로도 사실 너무나 복잡하고 심오한 논쟁들이 이어집니다. 노동 자체에 대한 정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하물며 어린이의 노동은 어떨까요. 그동안 극히 일부분의 진실만을 가지고 분노해왔던 제게 책은 또 다른 눈을 심어 주었습니다. 저자는 성실함과 균형 잡힌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국제적 어린이 노동 착취를 연구해 왔습니다. 예전에 어린이 노동과 관련해 읽었던 책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낙타 경주를 위해 납치당하는 저개발 국가들의 4살~5살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무섭게 달리는 낙타에서 떨어져, 또 다른 낙타에게 밟혀 죽거나 영영 불구가 되어버리는 아이들. 단지 유흥과 도박을 위해 벌이는 어른들의 게임에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아이들. 그 믿을 수 없는 비참함에 치를 떨었던 기억. 저자는 세계 최빈국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를 심층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서구 세계, 국제사회의 건방지고도 무지한 주장을 깨뜨립니다. 즉 가난한 나라가 서구의 성장 개발 모델을 따라온다면 자연스럽게 어린이 착취나 노동, 성매매 등이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저자는 자국인 영국의 산업 혁명기를 현재의 방글라데시와 비교합니다. 놀라울 정도입니다. 당시 영국 빈민가의 아이들이 당해야 했던 착취와 폭압적 노동, 그리고 어이없는 죽음이 바로 지금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제3세계 아이들에게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선진국들의 오만방자한 논리와 충돌하고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 성장 욕구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정작 선진국이 이미 잊었거나 잊으려 애쓰는 바로 그들의 과거 아이들일 따름이라고. 지금의 서구 사회가 노예와 식민지와 어린이를 밟고 부를 축적한 것처럼, 오늘날 서구가 가진 풍요의 한쪽은 가난한 아이들의 어깨를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합니다. 하루에 미화 20센트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기아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와 그 눈부신 부의 창출능력과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시장기능이 가진 수치스런 모습이다. 세계무역기구는 그 어느 국가도 어린이 노동과 죄수 노동, 예속 노동을 비롯하여 현대 세계에 잔존하는 노예제도의 교묘한 변형들 일체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3세계 정부들은 그런 움직임에 격렬히 반발했다. 그 안에서 서구의 사악한 보호주의-서구가 부의 수단으로 삼았던 그 다양한 인간학대를 그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강대국들의 의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협상은 신랄한 언사들이 오가는 가운데 결렬되었다. 중산층은 ‘인구’가 많다고 불평이지만, 빈민층 가족들이 과로와 영양불량, 질병으로 얼마나 쉽사리 격감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혈육의 재생과 그들의 노동 능력은 절대 빈곤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책이다. 인구가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빈민층의 목숨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회보장이야말로 가족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그 자녀들의 생존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안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사전에는 사회보장이 시장 간섭이라고 적혀 있다. 러시아 농노들이 해방되고 미국 노예들이 자유를 얻었을 때보다 오늘날 오히려 세계적으로 더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의 창출이 온 인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은 확실히 비현실적이고 근거 없는 희망사항이다. 가난의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하루 종일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고, 늙고 병든 부모에게 얼마의 돈을 보낼 수 있습니다. 육체는 병들어가고 영혼은 침침해집니다. 이 모든 것을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낙후, 무능력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오직 교육이 살 길이라는 위선적인 이야기를 또 다시 꺼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선 방글라데시의 한 어린이의 대답이 모든 것을 다 말해줍니다. “교육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지만 빈민층에게 미래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벌지 않고는 결코 그 미래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제3세계 아이들의 노동 착취를 근절하겠다고, 거대 다국적기업을 압박해, 결국 그들이 아이들에게 더 이상 일자리를 제공해주지 않게 되었을 때, 때문에 더 많은 아이들이 가난으로, 범죄로, 굶주림으로 내몰렸지만, 소위 진보적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이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불편함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저자는 말합니다.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인정해서도 안 되고, 서구적인 가치들을 보편화 하기위해 어린아이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근절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고. 물론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말이죠. 그 어떤 전쟁보다 무서운 시장 경제, 오직 돈만이 신이 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의 죽음 같은 노동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희미하게나마 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그 하찮은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루 종일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벽돌을 깨는 아이들. 그렇게 받는 돈 500원, 혹은 그 이하. 인간의 존엄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만약 그 인간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보다 많은 생명을, 어린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계층 간 격차, 빈부의 까마득한 차이를 줄여나갈 수 있는 방법. 더 이상 모른 척 할 순 없습니다. 182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와 가장 가난한 국가의 생활수준 비율은 대략 3대 1이었다. 그러다가 1913년에는 10대 1로 뛰었고, 1950년대에는 35대 1에 달했다. 1990년대 말에 가장 부유한 G-7 국가들은 가장 가난한 사헬 지역(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보다 70배 이상 부유했다. 과연 지금은 몇 배일까요? 두렵고 죄스러운 세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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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인류는 여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발전의 양상을 보고 있자면, 인류의 진보를 향한 강한 믿음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것도 같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누군가의 부가 증대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는 가난이 존재한다. 그들의 가난은 상대적일 따름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도 심각하여, 하루 세 끼의 기본적인 식사는 고사하고 생존에의 위협으로 작용할 때도 많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동남 아시아 국가들의 어린이 노동 실태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니, 지금까지의 내 삶이 참으로 사치스러웠다는 생각마저 든다.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시장에 진입해야만 했던 아이들. 그들에게 배움의 즐거움 따위를 언급하는 건 허황된 일일 따름이겠지? 이런 현실을 두고 사람들은 ‘부당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어린이의 노동을 규제하려는 세계의 움직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저자는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어린이 노동의 실태가, 알고 보면 19세기 영국 사회의 닮은 꼴임을 말하고 있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이 학교 아닌 일터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다. 일터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가정의 입장에서는 입을 하나 더는 것이었기에, 노동에 대한 급부를 전혀 받지 못할지라도 아이들의 노동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같다. 숙련공이 될 때까지 꽤 많은 아이들이 무임금 노동을 감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부터 숙련공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을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 서구 세계는 어린이 노동을 규제하기 위해 많은 대책을 내놓았다. 인도나 파키스탄 등 어린이 노동이 자행되는 곳의 물건 수입을 금지하는 방안은 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수입이 금지된 품목의 생산에 종사했던 아이들은 그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노동 시장으로 흘러 들어갈 따름이라고. 길거리 앵벌이나 성매매 업소 등 수치 상으로 잡히지 않는 곳에 속하게 된 아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몇몇 이들은 시장에 기반한 세계화 정책을 그 해결방안으로 내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IMF 의 처방을 충실히 이행한 우리 사회가 현재 처한 상황을 살펴 본다면 이 역시 문제의 옳은 해결책이라고 보긴 힘들 듯하다. 여성과 아동은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기 일쑤이며, 시장의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내쳐질 수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 각 국은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한 레이스를 펼쳐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으려 든다. 물론 어린이 노동의 실태는 문제가 많다. 퀭한 눈의 어린이들에게 유년기를 되찾아주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강요되는 기준이나 해결책은 지독히 서구중심적이다. 서구 사회는 제국주의적 침략과 착취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현 발전의 기반이 되어주었을 지난 19세기의 어린이 노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남반구의 국가들은 서구 사회가 이야기하는 해결책을 이행할 수 있는 어떠한 시스템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무엇이 현 상황의 올바른 해결책인지 나는 확신을 못하겠다. 허나 지난 날 서구 사회가 어린이 노동을 규제할 의지나 제도를 전혀 갖추지 못했었음을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보다 명확해진다. (서구의 입장에서 판단할 때) 저개발국가의 상황을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신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떠올리며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볼까 한다. 시장이 보다 효율적인 자원의 분배를 가능케 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시장은 외면할 때가 많다. 한 번 가난의 늪에 빠진 이들이 시장의 질서에 순응한다 하여도 좀처럼 부유해지진 않듯, 시장이 어린이 노동 문제를 해결해줄 특효약은 아닐 수도 있음을…… 세계화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서구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19세기 영국에서 이용되었던 어린이 노동 관련 찬반 논증들이 이제 세계무대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을 노동에서 탈출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논증은 대부분 19세기 영국에서도 익숙할 법한 용어들로 표현되는데, 이는 돌이켜보건대 최초의 거대 산업권력에 대해 추구했던 바와 같은 상당히 단순한 경로로 ‘개혁’과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반영한다.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의호 조사들이 부의 증대에 따라 인도주의도 성장한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E. 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그런 공식 조사들은 종종 널리 알려진 악폐들에 대한 조처를 지체시키는 수단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부 창출의 긍정적인 장기 효과를 믿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끊임없이 경계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고통을 겪으면서 부의 재료가 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기는 어렵다. (P45-46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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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의 아이들 (Children of Other Worlds)
내가 생각하는 가장 커다란 부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약탈하며 폭력을 가하는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 말이다. 사실 나 자신 조차 어쩌면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런 부조리한 세상에 순응하면서 말로만 떠들고 다닐 지도 모른다. 혹은 비겁하게 무관심을 가장하여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갈 지도 모른다.
사실 착취와 폭력은 시간이 지나가고 소위 문명이 더욱 발전할 수록 교활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친근한 모습으로 혹은 정신없이 우리의 오감을 건드리는 광고미디어에 의해서 순식간에 중독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실제로 지금 그렇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쨌든.
착취와 폭력이 가장 야만적인 행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마도 저개발국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어린이 노동'일 것이다. 본서는 주로 남아시아, 그중에서도 최빈국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의 사례를 산업혁명기 영국의 '어린이 노동'과 대비하여 비교하고, 또한 서구에서 논의되는 어린이 노동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허무하고 가식적인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즉, 그것은 지금의 저개발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어린이 노동'이 1세기 반 전의 영국에서의 '어린이 노동'와 같은 양상을 띄고 있는데, 노예 그리고 '어린이 노동'과 같은 약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서구의 자본축척과 발전을 지금의 저개발국가들이 그대로 모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편으로 서구에서 주장되는 '어린이 노동'의 금지와 반대가, 그리고 서구에서 정립된 유년기의 문화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저개발국가에 기계적으로 이식된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느냐는 의문, 또한, 즉 세계화를 통한 부의 끊임없는 증대와 저개발국가의 발전이 과연 지금의 저개발국가의 비참한 '어린이 노동'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는 의심이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지금 우리가 눈여겨 봐야 될 것은 착취수준의 임금을 받고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가족의 생존문제와 직결된 '어린이 노동'을 서구적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더욱 비참한 상황을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적절한 일거리가 주어지고, 또한 적정한 임금이 주어져야 되며, 고용주들의 의식전환을 통해 아이들에게 일하는 가운데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 말한다.
가장 부끄러웠던 것은 물론 나에게 감염된 사회적 무관심과 무의식이었다 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일련의 이식되고 규정화된 서구적 이미지에 대한 환상과 오해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또 나에게는 지금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책 제목처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편견없이 동등하게 우리가 바라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강렬해져갔다.
그리고 나는 책에서 이야기한 질문에 대해서 깊게 오래동안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풍요는 무엇을 밟고 서 있나' |